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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은 1595년(선조 29년) 이래 도성 수호의 주요 전략지로 파악되어 행정 구역상 도호부였으며, 1635년(인조 13년) 여주에 세웠던 진영이 죽산으로 옮겨져 죽산 도호부사(竹山都護府使, 종3품)는 수어후영장(守禦後營將)과 토포사(討捕使)를 겸하게 되었다. 그래서 병인박해 당시 죽산 도호부사는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천주교인들을 대거 체포할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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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에는 병인박해가 시작되자 작은 고을이었던 죽산에서는 22명이나 되는 신자들이 순교하였는데, 죽산에서 확실히 순교한 신자는 18명이며, 죽산 포교에게 체포되어 죽산에서 순교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신자들은 4명이다. 이곳의 원래 이름은 ‘이진(夷陳)터’이다. 고려 때 몽고군이 쳐들어와 송문주 장군이 지키고 있는 죽주산성을 공략하기 위해 진을 쳤던 자리이다. 그래서 ‘오랑캐가 진을 친 곳’이라 하여 이런 이름으로 불려왔던 것이다. 하지만 병인박해를 지나면서 이진터는 “거기로 끌려가면 죽은 사람이니 잊으라” 하여 ‘잊은 터’로 불리게 됐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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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 옥터만이 현 죽산면 사무소 위치라는 것이 알려졌을 뿐 진영 동헌은 위치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현재 죽산 성지로 개발된 곳은 당시 신자들의 처형지로 알려진 곳으로, 오늘날 ‘잊은 터’라고 불리는 장소이다. 죽산에서의 천주교 신자에 대한 처형은, 1866년에서 1869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1866년에 처형된 신자들로는 여기중, 이희서(1818~1866), 홍천여, 한치수(1820~1866, 프란치스코) 등이 있다. 1867년에는 문 막달레나(1866년 처형 기록도 있음), 여정문 일가(부인, 아들), 정덕구(일명 정덕오, 1845~1867, 야고보)가 처형되었으며, 1868년에는 방 데레사(1849~1868), 김 우보로시나(1842~1868, 우르시치나?), 조치경(치명, 1839~1868, 타대오), 최 안드레아(1848~1868), 오 마르가리타, 박 프란치스코(1835~1868), 최성첨과 그 아들(29세), 이진오(1841~1868) 등 9명이 처형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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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에는 증언록 《병인치명사적》에 의하면, 유 베드로, 김 도미니코, 김인권, 홍치수 4명은 죽산 포교에게 잡혔거나 죽산에 끌려 왔으며, 어디에서 치명했는지 정확하게 언급되어 있지 않다. 한편 이곳에서는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한 가족이 처형된 경우가 많다. 1867년 처형된 여정문 일가, 1868년의 조치경, 김 우보로시나(우르시치나) 부부와 최성첨과 그의 장남이 그러한 예이다. 본래 이 같은 일은 조선의 국법상으로 금지 사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차례 자행되었던 것으로 보아, 병인박해 당시 천주교 신자들이 얼마나 참혹하게 죽음을 맞이해야 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 아직도 고통이 모자라(죽산 이진터에서) <김영수> ▒
땅 기우는 고문도
시원한 바람일 수 있는 것입니까
하늘은 맑고 햇살은 곱습니다
나는 침묵 투명한 땅에서
캄캄히 나의 삶 들여다봅니다
캄캄히 나의 죽음 들여다봅니다
나는 아직도 고통이 모자라
피 맑지 못한 기도는
여전히 구름 뚫지 못하는데
진정 나의 사랑은 어느 높이에서
잠을 깨고 있는 것입니까
멀리 지평선 이루는 숨결
아득히 약속 밝히는 기억
부질없이 떠돌았던 나의 젊음도
이제는 밝은 파문 일으키는
작은 죽음 하나 꿈꿀 때 되었습니라
■ 순교자
◆ 김 도미니코
순교자 "김 도미니코"는 박해를 피해 깊은 산속에 숨어 평온히 주님께 의존하며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천주교 신자인 것을 안 마을 사람 10여명이 찾아와 열일곱 살 난 그의 딸을 겁탈하려고 딸을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이에 힘이 센 김 도미니코의 둘째 아들이 누이동생을 데리고 산으로 피하며 따라오는 사람은 돌로 쳐 죽이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순교자 김 도미니코에게 딸을 내놓지 않으면 포졸을 데리고 와서 너희 가족을 몰살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래서 순교자 김 도미니코는 여러 가족을 생각하여 할 수 없이 피눈물을 흘리면서 딸을 그들 앞에 내어 주었다. 이렇게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갖은 모욕과 고난을 당하면서도 신앙을 고수하다가 마침내는 순교의 길을 걸어간 것이다.
◆ 여기중 / 여정문
순교자 여기중은 한 가족 3대가 한 자리에서, 순교자 여정문은 아내와 어린 아들과 함께 한날 한 자리에서 순교하기도 하였다. 당시 국법으로도 부자를 한 날 한 시에 한 장소에서 처형되는 것을 금하고 있었다. 하지만 죽산 순교 성지에서는 부자가, 부부가 한 날 한 장소에서 처절하게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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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가족들이 화목하고 어떠한 시련에서도 주님을 외면하지 않는 신앙정신을 갖도록 빌어 주소서.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교우 가정의 부부들이 서로 희생 봉사하면서 살도록 필요한 은총을 빌어 주소서.
■ 찾아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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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례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