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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군 여행] 옥 같은 깨끗함이 묻어있는 옥류암...........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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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군 여행] 옥 같은 깨끗함이 묻어있는 옥류암...........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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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는 이제 태백5현(太白五賢)중의 한사람인 두곡(杜谷) 홍우정(洪宇定)이 기거하며 유유자적(悠悠自適)했
던 정자 옥류암을 찾아가는 길이다. 홍우정의 정자는 경북 봉화군 문수산(文殊山) 아래 산수유 마을 인근에 있
다. 봄에는 노랗게 산수유가 물들고 가을에는 마을 전체가 발갛게 불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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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일까 마을이 산수유를 품고 있는지 아니면 산수유가 마을을 안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자연과 하나가 된
자연 마을로 평화스러운 마을이다. 또한 마을의 생김새도 좀 특이하다. 앞뒤가 산으로 꽉 막혀 있다. 이름 때문
인지도 모르겠지만 암튼 마을 이름에 막힐 두(杜)자가 들어 있다. 말대로라면 ‘막힌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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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 전 이곳에 터를 잡은 이가 절의를 상징하는 숭정처사(崇禎處士)로 이름 높은 개절공(介節公) 두곡(杜谷) 홍우정(洪宇定)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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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류암은 건축적 특성과 아울러 전면에 조성한 3개의 연못이 조성되어 있으며 시문(詩文)에 연과 구기자, 국화, 소나무, 매화, 대나
무를 심은 기록 등은 조선시대 조원연구에 좋은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태백오현으로 추앙받은 당대의 학자들과 함께 교류하였던 역
사적 장소성 으로서의 가치가 있어 文化財資料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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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 기와집이며 정자의 주위에는 방형의 토석담장을 둘렀는데 전면 우측에는 사주문을 세워
정자로 출입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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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앞이 트여 있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방인에게 신기한 것은
마을 전체가 광주리 처럼 생긴 모양임에도 불구하고 그 막힘으로 인한 답답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
다. 오히려 편안함이 가슴 속에 스며들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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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 부터 400년 전 이곳에 터를 잡은 이가 절의를 상징하는 숭정처사(崇禎處士)로 본관은 남양(南陽). 개
절공(介節公) 두곡 홍우정이다. 그는 1636년 봄에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어머니를 모시고 영남으로 피난하였다
가 1637년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평소 오랑캐라 칭했던 청나라 황제에게 무릎을 꿇고 절하는 삼전도의 치욕을
당했다. 이는 조선의 지성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굴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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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 앞에는 3개의 연못이 조성되어 있으며, 시문에 연과 구기자, 국화, 소나무, 매화, 대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이있다. '옥류(玉溜)'의
의미는 '바위 틈서리에 졸졸거리며 흐르는 샘물'을 뜻하는 것으로, 물의 근원을 가리킨다. 이 우물에서 흘러 나오는 맑은물이 사시사
철 흘러 나와 연못 3개를 채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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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류암은 홍우성 선생이 두곡마을 맑은 샘물이 흘러내리던 문수산 기슭에 은거하며 지었던 정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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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가의 왼편로는 작은 정자 옥류암이 종가가 올라앉은 대좌의 높이만큼 낮은 지점에 자리 잡고 있고, 두 건물 사이,샘이 하나 숨겨져
있다. 일 년 내내 마르지 않는 샘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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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곡은 이 항복 소식을 듣고는 북쪽으로 돌아갈 뜻을 접어 버리고 앉을 때에도 북쪽을 향하지 않았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하는 인간들의 내로남불은 똑 같은 모양이다. 나가 싸울 생각은 하지않고 도망쳤다가 전쟁
이 끝나면 슬며시 돌아가 다리하나 걸치놓고 논공행상(論功行賞)만 따지는 요즘 국개들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당시 사대부들의 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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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들은 나라가 없으면 나도 없다라며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하겠다는 구국의 일념으로 온 몸을 불살으며
죽어나가는 마당에 나만 살겠다는 그 고집과 집년은 도대체 어디에서 연유 하는것인지 유랑자는 알다가도 모
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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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류암玉溜庵 현판 :옥류(玉溜)는 옥같이 맑은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흐른다는 뜻이다. 옥류암 현판은 미수 허목의 글씨다.
미수 허목(眉叟 許穆 1596~1682)은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 및 유학자, 역사가이자 교육자, 정치인이며, 화가,작가,서예가,사상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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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류암은 대산 이상정(大山 李象靖)의 기문(記文)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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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곡의 평생 지기(知己)였던 조선후기 우의정 좌의정을 지낸 원두표(元斗杓, 자 子建.1593~1664)의 멋스러운 시 한 편도 걸려있다.
친구 두곡이 살고 있는 옥류암을 노래한 시이다.
*제홍처사옥류암(題洪處士玉溜菴) 삼가 옥류암에 차운함
玉溜川邊處士菴(옥류천변처사암) 옥류천 가의 처사의 암자는
淸幽獨擅嶺之南(청유독전영지남) 속세와 떨어진 조촐하고 고요함은 영남에서 으뜸일세.
種蓮植菊松梅竹(종련식국송매죽) 연꽃, 국화, 소나무, 매화, 대나무를 심으니
全勝淵明逕有三(금승연명경유삼) 도연명(陶淵明)이 은거했던 삼경(三逕)보다 더 좋다네.
원성 원자건(原城 元子建) 원주 원씨 원자건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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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해헌고택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올려본다.
*謹次玉澑菴韻(근차옥류암운)삼가 옥류암 운에 차운함
百世清風一流菴(백세청풍일류암) 백세토록 맑은 바람이 이 한 옥류암에 불어
先生高卧白山南(선생고와백산남) 선생은 태백산 아래에 은거하여 세상을 초월했네.
至今傳誦崇禎字(지금전송숭정자) 지금도 숭정(명나라 의종의 년호)처라라고 전송되어 오고
顂是東方綱有三(뢰시동방강유삼) 지금도 동방의 삼강오륜에 힘입네.
*숭정오정미중려월상완족후손 전덕릉령화유재배근고(1667년(정미)4월 상순에 일가 후손인 전 덕릉참봉 홍화
유는 절을 두번하고 삼가 원고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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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두곡은 누구인가? 연산군 무오사화 때 화를 입은 참의공 한(瀚)의 5대손이요 할아버지는 선조 때의
명신 영원부원군 홍가신(洪可臣)의 손자이기도 하다. 명신의 자손에 명절(名節)이 난 경우이다. 두곡의 아버지
는 한성서윤 홍영(洪榮), 어머니는 양천허씨로 이조판서 악록 허성(許筬)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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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우정은 1614년(광해군 6) 진사가 되었으나 1616년 장인 해주목사 최기(崔沂)가 해주옥사의 역적 괴수로 몰려
처형되자 이에 연루되어 죽을 위기에 처해졌으나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원두표(元斗杓)와 이해(李澥)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져 8년 동안 천안에 부처되었다가 중병으로 석방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모든 것이 무고로 드러
났다. 1636년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자 문수산 아래 두곡천(杜谷泉) 가에 작은 집을 짓고 ‘옥류(玉溜)’라 편액
하고 스스로를 두곡기인(杜谷畸人)이라 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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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말 ;결속, 기쁜 소식, 덧없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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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그리는 화공의 영혼 나팔꽃의 설화
어떤 화공이 아름다운 아내와 함께 살고 있었다. 화공의 아내는 얼굴도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마음씨도 고와서 그 소문이 이웃 마을 까지
나 있었다. 그런데 그 마을을 다스리는 원님은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못된 사람이 있었다. 화공의 아
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원님은 탐도 나고 심술도 났다. “그래? 화공의 아내가 그렇게 예쁘단 말이지.”
원님은 다짜고짜로 화공의 아내를 잡아들였다. 영문도 모르고 잡혀 온 화공의 아내는 눈물을 흘리며 원님 앞에 하소연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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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 전 세금도 꼬박꼬박 냈고 나랏님 흉도 본 적 없사옵니다. 무슨 죄로 이렇게 애매한 사람을 들볶으시는지요?” 하지만 꿍꿍이가
따로 있었던 원님은 화공의 아내의 말을 들은 척도 않고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화공의 아내는 사랑하는 남편과 떨어져 감옥에 갇힌
채 밤새 눈물로 지새우게 되었다. 이튿날, 원님은 감옥에 갇힌 화공의 아내를 달콤한 말로 꾀었습니다.
“네가 나한테 시집오겠다고만 하면 네 죄를 용서해 주마. 평생 보석으로 치장하고 우유로 목욕하고 금 그릇에 담긴 밥을 먹고 비단옷
만 입게 해 주겠다.”
하지만 화공의 아내는 원님의 말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남편을 배신하느니, 죄가 없더라도 계속 갇혀 지내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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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의 속셈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남의 집 부녀자를 첩으로 얻으시려고 없는 죄를 씌우십니까? 그러나 제 한 몸 편하자고 사랑하
는 서방님을 배신할 수는 없습니다.” 화가 난 원님은 화공의 아내를 다시 감옥에 가두라고 명령했다.
아내를 빼앗긴 화공은 먹지도 자지도 않고 멍하지 하늘만 바라보며 지내개 되었다. 그러다가 집 안에 틀어박혀 그림만 그리며 세월을
보냈다. 한편 마을 사람들은 화공이 미쳐 버리는 것이 당연하다며 혀를 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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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원님에게 붙들려 간 지 한참 지난 어느 날, 화공은 밤새 그린 그림을 가지고 아내가 갇혀 있는 감옥으로 갔다. 감옥 창살 바로
밑에 그림을 묻은 화공은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지요. 화공이 죽던 날 밤, 아내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남편이 꿈에 나타나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 것이었다. “여보. 나는 당신에게 이렇게 밤새도록 달려가고 있다오. 아마 내일 아침 해가 뜰 무렵이면 당신 손에 닿
을 수 있을 만큼 갈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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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난 화공의 아내는 이상한 느낌이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습니다. 이게 웬일인가요. 아내가 갇혀 있는 감옥 창살 바로 아래에
가느다란 한 줄기 덩굴이 올라와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내는 그 꽃이 자기 남편의 혼이라는 것을 알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꽃이 바로 나팔꽃이랍니다. 그래서 남자의 영혼에서 피어난 나팔꽃에는 향기가 없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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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대명의리를 내세우면서 태백산으로 숨어든 심장세(沈長世), 강흡(姜恰), 정양(鄭瀁), 홍석(洪錫) 등과 함께
태백오현(太白五賢)으로 불렸다. 숭정 연호를 썼던 명나라 의종의 시대가 이자성의 반란으로 의종이 자결하여
끝나는 것이 1644년이니, 이 때 이후 홍우정의 만년은 숭정처사로서의 의리를 담은 은거의 세월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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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훗날 절의가 조정에 알려져 1648년 공조좌랑, 태인현감 등이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55년(효종
6) 사재주부(司宰主簿)에 제수되었으며, 1656년 황간 현감에 제수되었으나 명이 내려오기 전에 이미 세상을 떠
난 뒤였다. 이렇듯 두곡의 가문은 뼈대 있는 명문가 사대부 집안으로 두곡마을을 지켜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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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선정기에 실린 두곡 홍우정(杜谷 洪宇定)의 시를 소개해 본다. '도중음(道中吟)'
地負山河萬里雪(지부산하만리설)대지는 산하 만리 눈내려 덮였는데
天噓西北一箕風(천허서북일체풍)하늘은 서북풍 한바탕 휘몰아 치네
行人已盡斜陽外(행인이진사양외)행인들마저 끊긴 이 석양 길을
獨策玄黃猶向東(독책현황유향동)홀로 지친 나귈 몰아 동으로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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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는 곧장 옥류암으로 차를 돌려 좁은 농로길 을 따라 오른다. 숲속 깊은 골짜기 아래 한옥 한 채와 작은
정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이 옥류암은 홍우성 선생이 두곡마을 맑은 샘물이 흘러내리던 문수산 기슭에 은거
하며 지었던 정자로 안으로 들어가 보면 옥류암(玉溜庵)이란 현판이 커다랗게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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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는 그런대로 관리는 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옥류암 현판은 미수 허목이 특유의 유려한 필치로 쓴 가
로120cm, 세로 60cm나 되는 대작이다. 옥류(玉溜)는 옥 같은 깨끗함이 머물러 사는 초당이라는 의미로, 벼슬을
버리고 산속에 들어가 숨어 사는 정신의 고결함을 자찬하고 있는 이름이다. 그러나 옥류암 현판은 도난당했다
가 회수한 후, 지금은 안동의 국학진흥원에 보관되어 있으며 지금의 현판은 복제 본을 걸어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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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두곡 선생은 이곳에 은거 하면서 지인들과 학문을 교류하고 시류를 논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태백오현(太
白五賢)이라 불리는 이들은 20~30리 안에 터들을 잡고 자연을 벗 삼아 빈번하게 교류했는데 그 주된 만남의 장
소가 사덕암과 그 위에 있는 와선대(臥仙臺)다. 학산리(鶴山里) 골띠마을의 와선대 아래로 폭포는 그들의 충절
을 아는지 모르는지 예처럼 정겹게 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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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 떠나버린 옛 친구들의 이야기는 쓸쓸함만 묻어둔채 지금은 적막감만 흐른다. 옥류암(玉溜庵)은 너무나
도 조용하다, 아름다운 신록의 숲속에는 이따금씩 들려오는 뻐꾸기 울음소리와 바람소리, 물소리에 귀 기울이
며 사라진 옛 영광과 떠나버린 옛 주인을 애타게 기다리는 정자가 한없이 처량(凄凉)하게 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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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 영역은 정자와 종가만 있는 빈 골짜기이다. 폭이 좁기는 하지만 낮은 산 속에 파묻힌 정자로 조용하고 아늑한 유토피아(Utopia) 세상이 여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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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우정 선생이 자신의 처지에 대해 읊은 시가 있어 소개해 본다.
大明天下無家客(대명천하무가객) 대명 천하에 집 없는 나그네요
太白山中有髮僧(태백산중유발승) 태백 산중에 머리 기른 중이로다
潺湲溪下水(잔원계하수) 또한 잔잔한 시냇물 아래로 흘러
朝海爾能知(조해이능지) 바다로 가는 걸 너는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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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곡 은 ,손우당 홍석(洪錫,1604~1680),포옹 정양(鄭瀁,1600~1668), 잠은 강흡(姜恰,1602~1671),각금당 심장세(沈長世, 1594~1660)
와 더불어 태백오현(太白五賢)으로 추앙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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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의 陳中吟(진중음)
天步西門遠 (천보서문원) 임금의 행차는 서쪽에서 멀어지고,
東宮北地危 (동궁북지위) 왕자는 북쪽 땅에서 위태롭다.
孤臣憂國日 (고신우국일) 외로운 신하는 나라를 걱정할 때이고
壯士樹勳時 (장사수훈시) 사나이는 공훈을 세워야 할 시기로다.
誓海魚龍動 (서해어룡동) 바다에 맹세하니 물고기와 용도 감동하고
盟山草木知 (맹산초목지) 산이 맹세하니 초목도 알아준다.
讐夷如盡滅 (수이여진멸) 원수를 모두 멸할 수 있다면
雖死不爲辭 (수사불위사) 비록 죽음일지라도 사양하지 않겠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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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대목에서 뜸금없이 이순신 장군의 '陳中吟진중음'이 나오는지에 대해서는 각자의 판단에 맏겨본다. 누구는 나라를 구하겠다
고 발벗고 나서고 누구는 살고자 三十六計삼십육계 로 좋게는 은거하는 당시 사대부들의 상가지구喪家之狗 같은 초라한 모습들
을 판단해 보시라는........어짜피 인생이란 生者必滅생자필멸의 운명인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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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의 우측에는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남양홍문 종택은 2006년에 중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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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cafe.daum.net/b2345/9toB/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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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경북 봉화군 봉성면 산수유길 202-80
(지번)봉성면 동양리 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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