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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 13 - 조선 사신이 3차례 묵었던 대덕사 료겐인 (龍源院) 을 구경하다!
어제 2024년 11월 20일에는 비와 호수 남쪽에 이시야마데라 (石山寺 ) 절과 히에이잔 엔랴쿠지
(比叡山 延歷寺) 에 루리코인 (瑠璃光院) 을 보고는 교토 북쪽 오하라(大原) 마을에 가서
산젠인(三千院) 절을 찾아 단풍을 보고 돌아와 시조 가라스마 거리에서 이자카야에 들렀습니다.
교토 여행 3일째인 2024년 11월 21일 단풍이 좋다는 타카미네 겐코안 (鷹峯源光庵) 은 잠시 미루고
다이도쿠지(大德寺 대덕사) 부터 보기로 하는데, 일본 선종 임제종의 절로 오다 노부나가를
안장한 곳이며 센노 리큐등 일본 다도 탄생지이자 황윤길등 조선통신사가 3차례나 묵었던 절입니다.
다이도쿠지 절은 교토역에서 101번이나 205번 또는 206번 버스를 타고 다이도쿠지마에 정류소
에서 내리면 되는데, 206번 버스는 시계방향으로 북상해 17번째 센본기타오지
(天本北大路) 정류소를 지나 3정거장을 더 가서 다이도쿠지마에(大德寺前) 정류소에서 내립니다.
다이도쿠지 (だいとくじ, 大徳寺, 대덕사, Daitoku-ji ) 절은 크기에서 엄청난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데,
가마쿠라 막부 1315년에 세워졌으며, 20개 탑두사찰 (부속사찰) 을 거느리고 있는 큰 절 입니다.
센고쿠(戰國, 전국) 시대 다이묘들이 가문 사람의 사후 안녕을 빌기위해 세운 사찰들이 많으니
오다 노부나가가 죽자 히데요시가 그를 이 절에 안장한후 오토모, 미요시,
호소카와, 마에다, 아사노, 구로다 등 가문들도 자기 선조를 모시기 위해 부속 사찰을 세웠습니다.
탑두마다 아름답고 아기자기한 정원이 있어 구경할 만하니.... 20여개 부속 사찰 중에 4개는 항시 개방하며 또
4개는 봄 벚꽃철이나 가을 단풍철에 개방한다는데.... 우리는 먼저 료겐인(龍源院 용원원) 을 찾아 갑니다!
400엔 입장료를 내고 신발을 벗고는 료겐인(龍源院 용원원) 안으로 들어가니 서원이고
마루인데.... 여기 마루는 소나무, 즉 통나무를 사용했으니 엄청 큰 나무를
이용해 지었고 방들이 아주 많으며 규모가 적긴 하지만 "가레산스이식 정원" 이 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면 방장 (方丈) 정원이 보이는데.... 가레산스이 (枯山水, 고산수, かれさんすい)
는 일본의 전통적인 정원 양식으로, 만물이 모두 흙으로 돌아간다는 불교의
선종 교리가 일본에서 재해석된 것이니... 이를 '선(禅, 젠) 양식 (zen style)' 이라고도 부릅니다.
물을 일절 사용하지 않고 돌과 모래 등으로 산수 풍경을 표현하는 일본의 정원 양식이니, 흰 모래와
작은 돌을 깔고 수면에 비유하는 경우가 많고, 다리가 놓여 있으면 그 아래 깔린 자갈층은 물로
간주하는데.... 잔모래나 자갈을 쓰지 않고 돌 표면의 문양으로 물의 흐름을 표현한 정원도 있습니다.
특히 무로마치 시대의 선종 사원에서 만들어지고 발달했는데, 종래의 정원에서도 일부는 기법
으로서 만들어지는 경우가 있었으나, 차차 독립된 정원으로서 만들어지게 되었는데.....
가레산스이 양식이 등장한 후에는 꼭 물을 쓰지 않더라도 정원을 조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유명한 가레산스이 정원으로 사이호지(西芳寺, 아래쪽은 치센카이유시키 정원 池泉回遊式庭園 이고, 윗쪽은
가레산스이 정원) 와 긴카쿠지에 고야산의 여러 절과 다이토쿠지 (大徳寺) 의 여러 정원들이 있습니다.
특히 교토 료안지(竜安寺) 의 돌 정원은 나무나 풀 없이, 담으로 둘러싸인 정원에 흰 모래와
15개의 돌만으로 표현한 특이한 것이라 해석을 둘러싸고 다양한 설이 오가는데......
돌 정원을 기본으로 하는 가레산스이이지만.... 타이산지(太山寺) 의 안요인정원 (安養院庭園) 같이
모래를 쓰지 않고 돌로만 풍경을 표현하는 가레이케시키 (枯池式) 가레산스이도 존재 합니다.
가레산스이(枯山水, 고산수) 는 헤이안 시대(794년~1185년)에 만들어졌으니, 정원은 다치바나노 도시쓰
가 쓴 일본 정원에 대한 지침서인 “사쿠테이키(作庭記)” 에 설명돼있는데..... 초창기 정원은 중국
송나라의 정원을 모방했으며, 정원 바위는 호라이라고 알려진 봉래산의 팔선 신화와 연관이 있었습니다.
‘가레산스이(枯山水)’ 라는 표기는 헤이안 시대 후기에 쓰였다는 “사쿠테이키
(作庭記)” 에 나오는데.... 무로마치 시대에 유행했던 의미 (물을 쓰지 않고
물을 표현하는 기법) 와는 달리, 물이 없는 곳에 돌을 세우는 것을 가리켰습니다.
“사쿠테이키”의 편저자는 ‘군쇼루이주(群書類従)’ 의 안쪽 표기에 의하면 구조 요시쓰네(九条良経,
교고쿠 요시쓰네(京極良経)) 이지만, 다치바나 도시쓰나(橘俊綱) 라는 설 등, 다른 설도
많은데 무로마치 시대에 명나라의 산수화· 파묵산수화의 영향을 받아 완성을 이룬 것으로 보입니다.
나라마다 정원의 양식은 다양하지만..... 일반적으로는 3가지로 빛과 흙과
물을 사용해 정원 속에 자연을 구성하는데 비해, 가레산스이
양식은 물을 사용하지 않고 바위와 모래, 이끼를 통해서 정원을 표현합니다.
물이 들어갈 만한 공간은 자갈을 깔고 나란히 홈을 그어 물결을 표현한느데 이렇게
극단적으로 간결화한 양식은 일종의 미니멀리즘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자연물을 정원이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 가두어 일본식으로 재해석 했다는 점에서
롤랑 바르트의 '기호의 제국' 이나 이어령의 '축소지향의 일본인' 등
일본 관련 서적에서 일본의 문화적 지향성을 보여주는 소재로 인용되고 있습니다.
특히 한국식 정원은 차경(借景) 이 일반적이니 풍경을 시야(프레임) 안에 들어오게끔
조성한데 비해 가레산스이는 인공물을 통해 공간 안에 가두어 재조성
했다는 점에서 자연을 즐기는 방법의 문화적 차이가 드러나는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레산스이식 정원은 비나 바람에 취약한데..... 바람이 세게 불거나 비가 오기라도 하면 모래에 낸 무늬가
흩어지면서 엉망이 되며 설사 비바람이 안 불더라도 며칠~몇주일이 지나면 조금씩 흐트러지게 됩니다.
원칙적으로는 꾸준히 새로 그려줘야 하지만 제대로 하려면 몇시간씩 걸리므로, 요즘은 무늬를 만든후
접착제나 응고 스프레이를 뿌려 모양을 유지하는데.... 료안지 같이 제대로 관리하는 곳이 아닌
일본 전통 식당 등에서 장식으로 작게 만들어둔 가레산스이는 대부분 응고시켜 손이 덜가게 만듭니다.
가레산스이 형식을 가장 잘 보여주는 정원이 바로 교토에 있는 긴카쿠지(은각사) 와 료안지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는데, 우리가 여기 료겐인을 찾은 첫 번째
이유는 정원 보다는 조선 통신사가 3차례나 이 절에서 묵었다는 사실에 관심을 가진 것입니다!
임진왜란 이전 1590년에 황윤길과 김성일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기 위해 이 절에 머물렀고 1607년에는
경섬(慶暹) 그리고 1624년에는 강홍중(姜弘重) 인데.... 원래 머문 곳은 덴즈이지 (天瑞寺) 였다고 합니다.
그러데 막부 말기에 저 덴즈이지(天瑞寺) 가 여기 료겐인(龍源院 용원원) 이 합쳐진 것인데.... 그외 조선
통신사들이 묵은 곳은 혼코쿠지(본국사) 와 혼노지(본능사) 및 쇼코쿠지(상국사) 가 있지만
모두 화재등으로 인해 훼손됐으니 옛날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잇는 곳은 여기 료겐인이라고 합니다.
여기 료겐인(龍源院 용원원) 앞에는 조선통신사에 대한 안내비가 서 있으니.... 임진왜란에서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왔던 사람들이 이 절에 찾아와 사신 일행에게 고향 소식을 들었다고 합니다.
1590년에 일본을 거의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중국을 침략하기 위해 고니시 유키나가와
대마도주 종의지에게 조선왕이 일본군의 선봉에 서서 길을 안내하라고 지시하니,
매년 세견선을 보내 쌀과 콩을 얻어가고 또 부산의 초량 왜관에 수백명의 일본 상인
들이 상주하며 무역으로 엄청난 이득을 얻고 있던 대마도주는 차마 저대로 전할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명나라 침공 선봉에 서라' 는 말 대신에 "조선에 길을 내달라" 고 좀 부드럽게 해서 전하며
그러면서 전쟁을 막기위해 조선이 사신을 보내줄 것을 간청하자 조선 조정은 황당한지라
즉각 거부하려고 했지만 유성룡등이 앞장서서 임금과 대신들을 설득해 간신히 사신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정작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을 95% 통일한 상태에서 남은 100년간 5대를 이어오며 간토
(관동, 도쿄) 를 통치하고 있는 오다와라의 호조씨를 치기 위해 전국에서 20만 대군을
동원해 전쟁에 나갔기 때문에 조선 사신들은 무료하게 기다려야 했으니 김성일은 크게 화를 냈습니다.
여기 절에는 화승총인 조총 2자루가 전시되어 있으니..... 울 마눌은 평화스라운 절에 왠 살상무기인
조총이냐고 의아해 하는데 이유가 있으니, 보통 조총이 아니고 소위 “다네가시마(種子島銃)” 라고
하는 화승총이니, 일본 규슈 남쪽 다네가시마나 또는 사카이에서 에서 생산된 초기의 총인가 봅니다?
포르투칼인들이 탄 배가 풍랑에 떠밀려 다네가시마 섬에 도착했을 때 섬의 도주는 이들을 절에 데려가
치료를 해주고 파손된 배를 수리해 주며...... 선원에게서 조총 2자루를 비싼 가격으로 구입했습니다.
그런데 도주의 명으로 이런걸 만들라는 지시와 화승총을 인수한 대장장이는 총신의 비밀을
도저히 풀수가 없자 16살 딸을 포르투칼인에게 바치고서야 사위(?) 의 도움
으로 총을 만들수 있었고 이 제작기술이 새어나가 오사카 남쪽 사카이에서 대량 생산됩니다.
그런데 조선에서도 규슈의 히라도로 가던 네델란드의 배가 심한 풍랑으로 파손되어 제주도 해안에
떠밀려왔고 이십여명이 죽었지만 나머지 30여명은 살았으나 조선은 저들을 체포해 구금
했고, 배에 실린 모피와 한약재등 비싼 상품은 무상으로 몰수했으며 일본과는 달리 고향
으로 돌려보내 달라는 요구를 거부하는데... 나라의 지리가 외국에 알려질까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전라도 각지에 분산시켜 종으로 부려먹었으며 이들에게서 서양문물을 배울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하멜 이전
에도 네델란드 배가 히라도에 가다가 식수가 떨어져 물을 구하려고 선원 3명이 물통을 들고 내렸는데
역시 고국으로 돌려보내지 않았으니 2명은 병자호란에 앞장을 세워 전사했고 남은 자는 박연(벨베드레) 입니다.
그러고는 참으로 오래된 옛날 바둑판을 구경하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대국을 했던 바둑판이니.... 내 취미는 나이가 들면서 등산과 독서는 멀어졌고 이제는
여행과 테니스에 바둑인데, 한국기원이 운영하는 인터넷 오로 바둑 5단인지라 눈에 확 들어옵니다.
바둑판은 물론이고 바둑알 통에도 도쿠가와 가문의 문장인 접시꽃 3잎이 세겨져 있으니...
무장(武將)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는 가문의 가몬(家紋) 인 문장을 꽃과 풀에서 따온 것으로 여겨집니다.
'식물도시 에도의 탄생' 을 펴낸 일본의 식물학자 이나가키 히데히로 (稻垣榮洋) 는 전국시대와 에도 (江戶)
막부 시대 무사들이 식물을 좋아했다고 말하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성 안에 전용 꽃밭을 마련
하고 식물을 수집했으니 다이묘(大名)들은 자기 번(藩) 의 진귀한 식물을 재배하고 쇼군에게 바쳤다고 합니다.
270개 번(藩) 들은 전쟁이 없어진 평화시대라 소속 무사들의 교양과 정신 수양을 위해 원예를 장려
했으니, 다이묘들 사이 저택에 아름다운 정원만들기가 유행이었고 유지· 관리하기 위해 식목·
조경 전문가가 에도로 모여들었고 평화가 찾아와 할 일이 없어진 무사들도 원예에 눈을 돌립니다.
무사들은 꽃을 키우고 부수입을 얻었으니 나팔꽃 재배가 유행해 변종 나팔꽃이 1천종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진귀한 변종 나팔꽃을 얻으려면 열성 유전자끼리 교배해야 한다는 점에서 에도의
하급 무사들이 멘델의 유전법칙이 나오기 이전에 이미 유전 법칙을 알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 됩니다.
무사의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게 작고 귀여운 앵초도 하급 무사들 사이에 유행했으니 렌(連) 이라는
동호회를 중심으로 경쟁적으로 품종 개량이 이뤄지며 2천여종에 달할 정도였는데,
그러나 기술의 외부 유출을 금한 탓에 메이지시대가 되면서 품종 개량 기술은 더는 전수되지 못합니다.
무사들의 식물 사랑은 문장(紋章) 에서도 나타나는데..... 서양의 귀족 가문들이 사자 등 동물을 문장으로
즐겨 썼던데 비해 에도 막부의 무사 가문은 문장으로 식물을 즐겨 썼으니, 도쿠가와 가문의 문장은
접시꽃을 모티브로 한 세 장의 꽃잎이었고 사카이 타다츠구 가문은 들꽃인 괭이밥을 문장으로 썼습니다.
괭이밥은 뽑아내도 끈질기게 씨를 퍼트려 살아남는 강인함에 끌린 것이라고 여겨지며, 그리고 혼다
타다카츠는 아오이라는 접시꽃인데, 에도 시대 하급 무사 가문 100여곳은 논에서 볼수 있는
잡초인 벗풀을 문장으로 썼으니..... 벗풀잎의 모양이 화살촉과 닮아 '승리의 풀' 로 불렸기 때문입니다.
이나가키씨는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전쟁과 권력 투쟁으로 날을 세우는 무장들이
섬세한 눈길로 식물을 보았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 이라면서, "무장들은
식물의 특징 뿐 아니라 그 매력까지도 잘 알고 있었던 위대한 '식물학자'" 라고 말합니다.
일본 황실은 국화 문장을 가몬(家紋) 으로 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동나무를 도쿠카와씨는 접시꽃을,
시마즈씨는 고삐(재갈, 열십자) 문장을, 호소카와씨는 떨어진 구요를, 다케다씨는 다케다 마름모,
아시카가씨는 아시카가 두 개 줄 또 미나모토씨는 조릿대와 용담, 타이라씨는 호랑나비를 사용했습니다.
저 왕실의 국화문장은 현재 일본 여권에서 볼수 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동나무는 일본 내각총리대신
과 총리관저의 문장으로 쓰이는데.... 이는 오동나무 가몬 중에서도 '고시치노키리' 가 당대 정권
담당자를 상징하기 때문이며 원래 오동나무 가몬은 왕실 전용의 문장으로 국화 문장의 버금이었다고 합니다.
무로마치 막부 성립 이후 당대의 집권자가 조정(왕실) 에게 고시치노기리 가몬(家紋) 을 수여받아
사용하면서 이후 점차 다른 무가로 퍼졌고 에도 막부 시기 즈음에는 일반 무가나 시중에서도
가지수를 줄이거나 모양을 바꾸는 식으로 파생된 오동나무 가몬을 사용하는 사례가 늘어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