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전주교구에서의 교육생활, 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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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맏딸 영민의 첫 영성체 기념 가족 사진. |
김구정은 자신의 이력을 쓸 때 교육 경력을 매우 자세히 썼다. 그러나 그는 평생에 학교 6곳에서 근무했는데 학교마다 대부분 1~2년 정도의 짧은 기간이었다. 전문적인 교육자 생활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큰딸이 교사인 걸 보면 그는 사회에서 교육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음이 틀림없다. 김구정의 정규 교육 활동은 군산에서 시작됐다.
김구정은 만주에서 해방을 맞았다. 그리고 그해 11월 세 번에 걸친 만주 생활을 정리하고 전북 군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군산은 전주교구에 속한다.
전주교구는 독특한 교구다. 한국 교회 첫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이 전주에서 순교했다. 또 1937년 한국 교회에서 최초로 조선인 교구장이 임명된 곳이다.
김구정은 「가톨릭조선」 6월호에 조선인 교구장이 관할하는 전주교구의 설립을 ‘세계적 가톨릭 포교사에 대서특필할 신기록이며 포교의 교황 금상 성하의 위대한 의도적 대영단’이라고 썼다.
그는 이 사실은 한반도를 우리의 손으로 성화하고 동포의 구령사업을 같은 민족의 열정으로 하라는 언약이라고 보았다. 물론 그는 또 향후 비용을 16만 신자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주지시켰다.
김구정은 개인적으로도 전주교구와 인연이 있었다. 1937년 전주교구 설정 당시 김영구 신부는 김구정에게 재단 설립을 위한 사전 조사를 부탁했다. 김영구 신부는 이 무렵 「가톨릭조선」에 평양교구 10년사 개괄을 썼다.
그때 김 신부는 군산에서 새 성전 건축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 건축 사업에는 김구정 부인의 친척 채씨 일가가 주도적 역할을 했다. 김구정은 1937년 대구 신암동에서 둘째 딸을 낳았다.
이후 그는 전주에 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다시 동생 김은정이 있는 만주로 떠났다. 그리고 해방을 맞아 군산으로 내려와 둥지를 틀었다.
평양 출신인 김구정의 부인 채경석은 전주여고를 나왔다. 그러므로 채경석 집안의 친척들 가운데 일부는 일찍부터 군산에 있었던 것 같다. 당시는 배로 남북한을 오갈 수 있어 평양과 군산은 바다로 쉽게 이어졌다.
채씨 가문과 관련된 기록은 군산본당 초기 기록에 나타난다. 군산본당은 1915년경 김 마리아와 만동리 옹기점의 교우들이 시내 영동에서 공소를 시작한 데서 출발했다.
또 김 마리아는 당시 개신교도였던 동생 김용진(초대 본당 회장)을 설득, 개종시키고, 채용수 등 몇 사람과 함께 본당 설립을 위해 노력했다. 이들은 1928년 14칸 기와집을 사서 강당으로 개조했다.
1929년에는 드디어 김영구 신부가 군산본당 설립 임무를 지게 됐다.
그는 나바위본당 보좌 신부로 지내면서 다음 해에 신자들과 함께 둔율동 군산보통학교 옆에 있는 대성원(옥구군청 구 관사)을 매입해 성당으로 개수하고, 부속 건물을 사제관과 기타 필요한 시설로 사용했다.
1931년 군산공소가 본당으로 승격하면서 김영구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했다. 새 성전 건축에 적극 활약한 채용수 등이 김구정 부인의 일가였다.
김구정이 이곳으로 이사 온 것은 1944년 4대 주임으로 부임한 김후상 신부 때였다. 김후상 신부는 김구정보다 한 반 아래로 1914년 대구 성유스티노신학교 소학과에 입학해 1926년 수품했다.
1947년부터는 박성운 신부가 군산 둔율동본당에 새로 부임했고, 김구정은 그를 도왔다. 이때 김구정이 전교한 김용규(전주교구 원로사목자 김진소 신부의 부친)의 활약이 컸다.
김구정과 그의 동생 김윤정도 군산으로 이사와 본당 기관지인 「샛별」을 발간했다.
김진소 신부와의 인연
김구정은 ‘입이 푸짐하고 그가 100명에게 말을 하면 101명이 다 빨려 들어간다’는 평을 들었다. 이 시절 김구정의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사례가 김진소 신부 집안을 개종시킨 일이다. 김진소 신부 집안은 원래 가톨릭이 아니었다.
충청도의 부유한 양반 집안이었고, 김 신부의 할아버지는 유학자였다. 그런데 김 신부의 아버지 김용규는 1920년 경성제일고보를 졸업하면서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은 독실한 개신교 장로였다.
김용규는 개신교 교회를 세우거나 목사를 양성하는 일에 적극적이었고 시골 교회의 가난한 목사나 전도사들의 생활비를 대줬다. 또 서천 서면 등 여러 곳에 교회를 세우기도 했다.
김진소 가족은 해방 후 군산으로 내려와 둔율동에 정착했다. 그들은 군산성당 앞을 지나 개복동 교회를 다녔다. 1946년 김구정은 일제 초기 군산 부윤이 살던 집으로 이사 왔는데 수도 사정이 좋지 않아 김진소네 집으로 물을 길러 다녔다.
그러면서 자연히 집주인 김용규와 교류하게 됐다. 김구정은 설득력이 있었다. 개신교 장로 김용규는 그의 말을 듣고 바로 개종을 결심했다.
1947년 9월 25일 김용규는 온 가족과 함께 개종했다. 김진소 가족은 당시 주임인 김후상 신부에게서 교리를 배웠으나 영세는 1947년에 새로 부임한 박성운 신부에게 받았다. 온 집안이 한꺼번에 영세해 김구정의 가족이 대부대모가 됐다.
김구정은 김용규의 대부가 되고, 김구정의 부인 채 요안나는 김 신부 모친 한영수의 대모가, 김구정의 아들 김영일은 김진소의 대부가 되는 등 서로 대부대모 관계로 엮였다.
김용규 장로가 개종한 후 몇 달 동안은 개신교 신자들이 김진소 집에 와서 통성기도를 했다. ‘마귀 들린’ 장로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김용규는 개신교에 열성이던 그 신앙을 그대로 실행했다.
이러한 부모의 신앙과 순교자의 일화가 결국 김진소를 신부의 길로 이끌고 또 살게 했다. 김진소는 1972년 7월 5일 중앙주교좌성당에서 한공렬 대주교 주례로 사제품을 받았다.
부친 김용규는 김 신부가 사제품을 받기 열 달 전 하느님 품에 안겼다. 김구정은 김 신부 서품 때 자신이 아버지 노릇을 대신하겠다고 했다. 김 신부는 평생 교회사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이렇게 설득력을 갖춘 김구정이지만 교육자로서의 이력은 그리 두드러지지 않는다. 1946년 군산여자고등학교 교감, 1948년부터 1951년까지 군산대학 교수를 역임했다.
구한말에 시작한 군산여고는 1945년에 4년제 국립군산여학교로 1947년 6년제(2학급) 군산공립여자중학교로 개편됐다. 이 변화의 시기에 김구정이 교감으로 취임했다.
1년여의 짧은 기간이었다. 김구정은 이어 군산대학(1951년 전북대학교로 통폐합됨)으로 옮겼다. 군산대학은 1947년 개교했다. 김구정은 신설 학교에 들어가 학교의 연합 발전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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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산 둔율동성당 전경. |
6ㆍ25 전쟁이 일어나자 김구정은 대구로 귀향을 계획했다. 당시 남한 6개 교구 중 대구교구는 한국 가톨릭 교회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그러나 김구정은 생애 최대의 혹독한 귀향 신고식을 치렀다.
1ㆍ4 후퇴가 단행되자 군산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했던 맏딸 영민과 막내딸 영진이 대구로 먼저 들어가기로 했다. 1951년 5월 두 자매는 큰딸의 약혼자인 국군 장교의 차에 이삿짐을 싣고 대구로 향했다.
이리 부근에 이르렀을 때 공비의 습격을 받아 두 딸이 다 죽었다. 운전병하고 약혼자만 살아 할머니에게 사실을 알려 주었다. 할머니가 손녀들을 화장했으나 김구정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김구정은 끊임없이 떠돌며 자식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기에 그의 자녀들은 할머니가 길렀다. 김구정은 두 딸의 사망 신고를 굉장히 나중에서야 했다.
또한 김구정의 형 김하정은 반공 학생운동 간부였던 둘째 아들 김영한이 공산주의자들에게 피살되자, 충격으로 이듬해 세상을 떴다.
대구에 돌아온 김구정에게는 특별한 일이 없었다. 전쟁의 여파가 어느 정도 자리 잡을 때쯤인 1956년 그는 대건고등학교 윤리 과목 강사로 나가게 됐다. 대건학교는 바로 자신이 다니던 유스티노신학교 건물에 있었다.
대구 유스티노신학교는 1945년 3월 폐교당하고 건물은 일본군에게 징발됐다. 일본군은 광복 후 한 달이나 뒤에 건물에서 물러갔다.
그리고 학교 건물은 다시 경찰학교가 사용했고 이듬해에는 미군이 사용했다. 6ㆍ25 전쟁 때에는 육군병원으로도 사용됐다.
대구교구의 첫 중등교육기관인 대건중학교는 유스티노신학교가 있던 건물에서 1946년 9월 16일 개교했다. 김구정은 윤리를 가르쳤다.
그가 남겨 놓은 교재를 보면 성모무염시태 축일(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 대축일)이나 루르드 이야기 등의 원고가 있다. 김구정은 그곳에서 자신의 사회 경력을 마무리했다.
주님께서는 20여 년의 타향 생활에서 온갖 사회 변화를 겪은 김구정에게 소년 시대의 꿈을 돌아보고 생의 의미를 느낄 기회를 주셨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