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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학강독 |
한국현대시의 전개양상
-<현대시> 동인을 중심으로
국어국문학과 장 부 일
◈ 목 차 ◈ | ||
1. 1960년대의 시단과 <현대시> 동인의 전개 과정 2. ‘참여시’와의 대타의식과 언어와 서정에 대한 인식 3. 내면의 집중과 형상화 4. 결론 참고문헌 |
1. 1960년대의 시단과 <현대시>의 전개 과정
4.19이후 1960년대의 시단은 당시의 월평등1)을 살펴 보면, 현실 참여시가 대폭 증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김경린, 박인환 등과 함께 모더니즘을 내세운 ꡔ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ꡕ(1945)에 참여했던 김수영이 4.19직후 「푸른 하늘을」과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등의 시를 발표하며, 4.19혁명을 옹호하며 강력하고 직설적인 언어로 현실을 비판하기 시작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신동문의 ‘고리아테 아닌 / 거인 / 殺人 專制 바리케이트 / 그 간악한 조직의 橋頭堡 / 무차별 총구 앞에 / 빈 몸에 맨주먹 / 돌알로써 대결하는 / 아! 신화같이 / 기이한 다비데群들’「아!神話같이 다비데群들-4.19의 한낮에」2)과 같이 4.19에 참여한 젊은이들을 구약성격에 나오는 골리앗에 맞서 싸우는 다윗으로 형상화하여 그 싸움을 한 편의 영웅 신화와 같이 여기고 있음을 격정적으로 드러내는 시가 당대의 보편적인 분위기였다. 이와 같은 시의 ‘살인 전제 바리케이트’와 ‘간악한 조직의 교두보’나 ‘무차별 총구’ 등의 시구는 당시의 현장을 실감나게 형상화하는 한편, 시로서의 예술적 형상화와 대상과의 거리 조절에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현대시MODERN KOREAN POETRY> 동인은 1962년 《현대시》1집을 발행하고 1972년 26집을 마지막으로, 11년에 걸쳐 일년에 두 호 정도를 비정기적으로 발행하였다.4)본격적인 <현대시> 동인은 1964년에 발행된 6집부터라고 할 수 있다. 1집부터 5집까지는 6집 후기에 ‘이번 6輯부터 <現代詩>는 새로운 出帆을 하는 세옴이다. 이제까지의 <현대시>가 지녔던 半同人誌, 半詩誌的 性格에서 벗어나 正確한 位置에 定立해 보려는 作業을 시작한 것’5)이라고 밝혔듯이 본격적인 동인지로서의 출발은 6집부터이기 때문이다. 1집부터 5집까지 전봉건, 김종삼, 조지훈, 유치환, 장만영, 김수영, 박목월, 박두진, 박남수, 김춘수 등을 포함하여 한 유파로 묶기 어려운 30명의 시인들이 참여하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반동인지, 반시지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것은 적절한 지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 다루는 <현대시>동인은 6집 이후 참여한 시인들이며, 대상 작품은《현대시》6집부터 26집까지이다.6)
앞서 언급했던 신동문이나 그와 유사한 작품 세계를 지녔던 박봉우 등의 <신춘시> 동인들, 그리고 이와 정반대의 입장에서 언어의 실험적인 모색을 탐구했던 성찬경, 박희진 등의 시인들이 등단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절필을 하거나 작품 활동을 활발히 하지 않게 된 것과 달리, <현대시> 동인은 대부분 꾸준한 활동을 이어갔거나 이어가고 있다.
2. ‘참여시’와의 대타의식과 언어에 대한 인식
<현대시> 동인은 개별적으로 당대의 잡지에 시를 발표하기도 하고, 개인 시집을 내는 등 개별 활동을 하는 동시에 동인지 ꡔ현대시ꡕ를 통해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 선후 관계를 살펴보자면, 대개 동인지 ꡔ현대시ꡕ에 실린 작품을 고쳐서 다른 잡지에 발표하거나, 작품들을 묶어서 개인 시집으로 발행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동인에 있어 동인지 ꡔ현대시ꡕ는 작품을 발표하는 첫 번째 지면이 되는 셈이다.
지금까지 <현대시> 동인에 대한 연구는 모더니즘과의 상관성 아래에서 진행되었다. 심재휘는 우리나라의 모더니즘을 1930년대의 주지주의 문학을 계승하는 계열과 1940년대 말의 ‘신시론’동인과 1950년대의 ‘후반기’동인으로 나눈 다음, <현대시> 동인의 문학은 전자의 계열에 속하며, 기존 문학의 한계에 대한 진지한 각성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평하고 있다.7)허혜정은 <현대시> 동인이 1960년대 모더니즘 시운동을 주도한 그룹이며, 동시대 <신춘시> 동인들의 참여성에 대한 대립에서 정체성을 찾았으며, 한글세대로서의 시의 세련화를 갖춘 1960년대식 아방가르드 그룹이었다고 말한다.8)최라영은 <현대시> 동인이 정지용을 필두로 한 모더니즘 계보에 있으며, 동시에 초현실주의 계보에 드는 이상에게서 나타난 지식인의 자의식, 내면을 지향하는데 이런 지향점을 드러내기 위한 방식으로서 ‘에꼴 형성’을 주장했다고 말한 바 있다.9)권영민은 주지적 태도와 서정적인 감성을 조화시키고자 노력해 온 1960년대 시인들로 <현대시> 동인 주문돈, 허만하, 이유경, 이수익, 박의상, 마종하, 이건청, 오세영, 김종해 등을 꼽는다.10)이외의 동인인 김영태와 이승훈 등에 대해 권영민은 별도로 언어와 기법에 대한 새로운 모색을 통해 강한 개성을 드러낸 시인으로 평가한다.11)
이러한 연구들은 <현대시> 동인이 지닌 문학사적 의의를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춘 것으로 모더니즘 사조 안에서 <현대시> 동인이 차지하는 1960년대적 의미를 드러내는 성과를 지닌다. 본고는 이러한 연구의 연장선상에서 모더니즘 사조에 얽매이지 않고,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시인들이 다수인 <현대시> 동인의 초기 작품들을 살펴봄으로써 그들이 공통적으로 인식했던 당대 시의 문제점과 지향했던 시세계를 살펴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전후 모더니즘이 전통시에 대한 대타의식에서 시작된 것이라면, 1960년대 이후의 모더니즘은 현실 참여라는 사회적인 요구에 어떻게 대응하는가의 문제로 특징지워진다.12)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현대시> 동인은 4. 19이후 문학계 안팎에서 불거진 문학의 현실 참여에 대해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
순수냐 참여냐의 결단이 요즈음에 와서만 요구되었던 것은 아니고 세계의 역사를 통해 꾸준히 시인의 양심과 정렬을 괴롭혀 주었던 것이며 순수냐 참여라는 것도 인간의 자유의 내면적 추구 또는 외면적 추구가 되는 것이므로 한국시의 역사는 한국적 상황 또는 역사를 통해 한국인의 자유를 확장하고 심화하는 한국예술의 역사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이다.…중략… 시가 이처럼 자유의 문제와 직결되므로 이 문제를 회피하는 수단으로 시의 회피, 시인억압이 생기지만 이것이 결과적으로는 자기배반이 되고 마는 것이다. …중략… 정치가의 길은 새로운 세계의 창조의 길이며 이 창조에의 욕망은 시인이 자기 시 속에서 실현하려고 하는 자유의 확대라는 욕망과 다를 것이 없다.13)(밑줄, 인용자)
인용문은 박의상이 당시 정치가인 吉모씨가 신문에 기고한 글을 읽고 쓴 글으로, 吉씨가 시를 읽으면 마음이 약해지므로 시를 읽지 않는다고 언급한 부분에 대한 논박 형식의 글이다. 이 글에서 말하는 순수와 참여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순수와 참여의 의미와 조금 다르다. 보통 사회 현실에 대한 참여 여부로 순수와 참여를 나누는 것에 비해, 이 글에서의 참여는 시 장르의 특성 상 시는 곧바로 자유의 문제와 직결되므로 시를 쓰는 것 자체가 ‘창조에의 욕망’이며 이 욕망은 ‘자유의 확대라는 욕망’과 다를 것이 없기 때문에 시를 쓰는 것 자체가 정치가가 새로운 세계의 창조와 마찬가지로 곧 참여가 된다는 논지이기 때문이다. 물론 <현대시> 동인 전체가 참여를 이런 식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初期엔 詩의 현실참여에 대해 상당히 집착한 셈이었다. …중략… 나에게 있어서 詩的인 성공의 문제와 詩의 介入에 의한 현실상황의 再構成 문제는 언제나 永離되고 있었음을 차츰 自覺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 이럴 무렵 이미 나의 作品의 樣相도 변모속에 놓이게 되었다. / 이를테면 現實에 돌려진 눈과 自我追求에로 향한 눈이 相容되기 어려웠기 때문에 詩世界의 內紛이 조장되었던 것 같다. 나는 이 때부터 줄곧 自我, 純粹詩의 탐구란 데로 다서 이끌리고 있었다고나 할까.14)
인용문에서 김규태는 순수와 참여를 ‘현실에 돌려진 눈’과 ‘자아추구에로 향한 눈’으로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통상의 의미에서의 순수와 참여로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작품 세계가 변모했음을 언급하며 초기에는 현실참여에 집착했으나 ‘시적인 성공의 문제와 시의 개입에 의한 현실상황의 재구성 문제’가 양립하기 어려움을 자각하고 ‘자아, 순수시의 탐구란 데로 다시 이끌리고 있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다시’라는 부사에 주목해 보면, 원래 ‘자아, 순수시’의 세계에 이끌리고 있었는데, 사회의 분위기 상 현실참여에 휩쓸렸다가 다시 본래의 경향으로 되돌아왔음을 알 수 있다.
박의상과 같이 참여의 의미를 넓게 해석해서 시를 쓰는 것이 곧 개인의 자유 확장이며, 따라서 곧 참여라는 결론을 내든, 혹은 김규태와 같이 일반적 의미의 참여의 길을 지양하고 순수시를 지향하든, 결과적으로는 둘 모두 자아의 탐구, 내면의 탐구를 목적으로 한 일반적 의미의 순수시를 지향하였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이런 점은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 시의 현실 참여 문제가 참여를 적극적으로 운위하는 시인은 물론이거니와 개인적인 정서에 깊이 빠져있던 시인들까지도 거의 모든 시인들의 관심사가 된 상황15)을 고려해 볼 때 이례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현실 참여를 내세우는 시들이 이념으로 구호화되고 시의 언어가 일종의 수단이 될 위험이 있다는 것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현대시》9집에 실린 「동인 공동 연구 과제」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우리 <現代詩> 同人은 迷路에 든 韓國詩에 대한 第一次的 反省을 다음과 같은 原論的 課題에 의하여 作品으로 수행코자 한다. 그것은 요약하여 <포에지의 積極性>을 위한 第一次的 作業이라고도 할 것이다.
(1) 詩語
<詩는 言語다>. <詩는 神話다>. 이 두 개의 命題에서 <言語=神話>의 等價性을 우리는 詩로서 증명하고자 한다.
(2) 內包와 外延
詩의 엘렉트론이 形成되는 그 根據는 外的 經驗의 蓄積, 變形, 조화라는 과정에 있다. 그러나 그 表出은 이미쥐와 技巧의 克明한 方法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3)리리시즘
리리시즘은 모든 예술의 源泉이며 詩의 發生根據다. 現代詩에 우리는 그 變形的 造型을 實驗한다.16)
시가 구성되는 근거가 ‘외적 경험의 축적, 변형, 조화’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 표현은 이미지와 기교에 의해서만 가능하고, 따라서 이미지와 기교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이미지와 기교, 즉 외연을 구성하는 것은 바로 언어인데, <현대시> 동인은 시가 언어로 이루어졌다는 기본적인 사항에 주목하여 <언어=신화>의 등가성을 시로 증명하고자 한다고 밝히고 있다. 언어와 신화의 등가성은 언어가 훼손되지 않았을 때, 즉 타락되지 않았을 때 가능하므로 수단으로서의 언어 사용을 지양하고 언어 그 자체에 주목해야 함을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언어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여러 가지 방향으로 표출되는데, 김종해는 정부 각기관의 공문서마저 한글화하여 우리 문화의 주체 확립을 서두르려는 상황에서 한자어를 비롯한 외래어, 외국어를 詩作에 많이 사용하는 현실을 당대 발표된 시 목차와 실제 시를 구체적으로 거론하면서 ‘언어의 연금술사인 시인이 선천적인 그의 재질로 우리글을 갈고 다듬어 표현의 미흡점을 충당해야’17)한다고 말하여 시의 언어에 있어서 우리말의 중요성을 지적하고 있다. 우리말의 중요성을 지적한다는 데에서 이 말의 의의가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자어 등의 외래어와 난해성을 연결지어 불필요한 관념과 난해성을 지양해야한다고 주장한 것에 더 의의가 있다. 실제로 《현대시》는 후기로 갈수록 한자가 노출되는 빈도가 주는 것을 확인해 볼 수 있으며, 이와 비례하여 언어의 다듬어진 정도 역시 뒤로 갈수록 더 좋아진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언어에 대한 이러한 민감한 자각은 <현대시> 동인 대부분이 오랜 기간 비교적 성공적으로 시작을 하는 원동력이 된 것으로 보인다.
언어에 대한 자각과 더불어 <현대시> 동인이 의도적으로 지향한 것은 리리시즘, 즉 서정성이다. 서정성은 ‘예술의 원천이며 시의 발생근거’라는 전제 아래, <현대시> 동인은 ‘그 변형적 조형’을 추구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 때의 서정성이란 넓은 의미의 서정시가 내포하는 의미가 아니라 본래적 의미에 있어서 리리시즘(서정주의)으로 복귀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가리킨다. 좁은 의미의 서정성은 내적인 삶의 총체성을 표현하며, 1)일인칭 화자(‘나’)의 독백적 진술에 의해 2)서정적 자아의 주관적 ․ 내면적 정서나 의식을 3)압축된 형식과 음악적인 언어, 그리고 상징적이고 비유적인 언어를 활용하여 표현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18)따라서 <현대시> 동인이 주장한 리리시즘을 지향하며 그 변형적 조형을 추구함은 내적인 삶의 총체성, 즉 내면의 모습을 추구하는 양상으로 드러나게 된다. 이 때 추구되는 서정성은 필연적으로 문학의 자율성과 연결된다. 문학의 자율성이 서정성으로 연결되는 것은 한국문학의 역사적 상황으로부터 파생된 특수한 현상19)이라고 할 수 있는데, <현대시> 동인이 추구한 서정성 역시 <신춘시>를 비롯한 사회참여시에 대한 비판의 위치에서 문학의 자율성을 옹호하는 것과 관련된다고 여겨진다.
3. 내면의 집중과 형상화
<현대시> 동인의 시에 자주 나오는 시상 중의 하나는 ‘견자’로서의 의식이다. 랭보는 자신의 시학이라고 할 수 있는 「見者의 서한」을 통해 이성적인 것과는 다른 길을 통해 형이상학적 인식에 도달하려는 태도를 보였으며, 명상과 몽상을 통해 미지의 것에 대해 도달할 수 있는, 즉 미지의 것을 볼 수 있는 견자가 될 수 있음을 주장한 바 있다. 견자가 된다는 것은 곧 보이는 그대로의 세계와 자신을 초월하는 일이며, 자신 안에 감추어진 진실을 본다는 것이다.20)
등꽃이 떨어지는 등그늘 아래 / 內壁이 뚫어진 채 / 사나이는 앉아있다. / 아직 恢復되지 않은 小康 속의 감성들이 / 잔등을 밀고 / 그가 갖는 不治의 의식들은 / 기어나와서 / 그의 깊은 病棟에다 닻을 내리고 …중략… 사나이는 명상의 열쇠들을 쩔렁이며 / 幼年을 찾나, 자물쇠가 걸려있는 알 수 없는 거리에 / 등꽃은 떨어져서 바다를 이루고
김종해, 「放浪하는 사람(2)」, 부분(17집)
깊고 그윽한 저녁으로 빠진다. / 물의 근원 속엔 / 내가 빠져 있고, / 나는 몇 개의 / 돌로 되어 있다. / 보이지 않는 삽질을 한다. / 묻힌 나를 캐어낼 수록 / 어린날의 혼들은 뛰쳐나와 / 시름겨운 정열을 / 옛 사랑을, 보여준다
마종하, 「한 여름날」, 부분(17집)
「방랑하는 사람(2)」에서 화자는 ‘내벽이 뚫어진 구멍 사이로 / 세상’이 참혹하게 그에게 접근하는 와중에 감성의 회복을 위해 그 뚫어진 구멍을 막을 수 있는 ‘명상의 열쇠’를 찾으려 하나 등꽃으로 이루어진 바다에서 표류하고 만다. 여기서 ‘등그늘 아래’ 앉아있는 사나이는 고요히 명상을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와 유사한 상황, 즉 고요히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 과거를 회상하는 구절은 「한 여름날」에서도 나타난다. ‘깊고 그윽한 저녁으로 빠진다.’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시인은 저녁의 시간을 공간화하여 화자가 빠질 수 있는 깊고 그윽한 곳으로 형상화하고 있는데, 바로 내면을 응시하는 시간을 공간화한 것이다. 이 공간은 다시 화자가 빠져있는 ‘물의 근원’으로 변모하는데, 물은 흔히 거울과 마찬가지로 화자의 내면을 상징한다. 이 물 속에 화자는 ‘몇 개의 / 돌로 되어 있’는 자신을 ‘캐어’내는데, ‘캐어’내는 행위는 앞의 시에서 등꽃 아래 사나이가 유년을 찾아 명상의 열쇠를 쩔렁이며 앉아있는 모습과 같이 ‘어린날의 혼들’을 찾는 행위이다. 이 시의 화자는 앞의 시와 달리 ‘시름겨운 정열을 / 옛 사랑을’ 볼 수 있는 것으로 보아 자신의 근원인 어린날의 혼들과 마주친 것으로 보인다.
무엇 때문이었는진 몰라요 / 그날, 불꺼진 階段의 / 정확히는 여섯 번째의 階段과 / 일곱 번째의 階段 사이에서 / 떠올랐던 생각 / 그걸 / 나는 왜 그렇게 찾고 있었는지 / 알 수 없어요 나는 / 설합들을 다 뒤졌어요 / 내 의복들의 / 주머니란 주머니들도 / 모두 다 뒤졌어요 / 찾고 있었어요 / 그렇지만 마지막 속주머니 / 하나만은 / 용기가 없었어요 / 나도 確認못해본 나의 秘密 / 마지막 그것 하나만은 남겨두고 싶었던 거예요 / 나도 나의 이 俗物根性을 / 들여다보며 잠시 웃었지만 말얘요 / 대체로 비틀대인 / 그동안의 나의 行步들이 웅성대고 있었어요 / 놀란건 / 당신의 편지들, 뒤져본 당신의 편지들 / 行間마다를 / 열심히 기어다닌 내 意識의 / 착한 버러지들 이었어요 / 아직도 살아 기어다니고 있는 거예요 / 나는 그것 한마릴 잡아 먹어보았지만 / 먹히지 않았어요 튀어 달아났어요 / 그건 이미 내게서 獨立되어 있더군요 / 나는 다시 놀랐어요 / 發見의 快感에 잠시 떨었어요 / 그 살갗의 소름의 꼭지마다에선 / 그때, / 갑자기 精液이 흘렀어요 / 기뻤어요 / 기뻤던 거얘요 / 당신은 무어라 定義하시겠어요 / 찬란한 精液이라 생각했어요 / 여보세요 / 集中할 수 있었얘요 / 당신도 어지러울 땐 / 설합이란 설합들을 다 뒤져보아요 / 그렇지만 / 그렇지만 아니었어요 / 그날, / 불꺼진 階段의 / 정확히는 여섯 번째의 階段과 / 일곱 번째의 階段 사이에서 / 떠올랐던 생각 / 찾고 있는 그건 / 아니었어요 / 不感이었어요 / 不感이었어요.
정진규, 「精液」, 전문(12집)
이 시의 화자는 ‘여섯 번째의 계단과 / 일곱 번째의 계단 사이에서 / 떠올랐던 생각’을 찾기 위해 서랍을 뒤지고 의복을 뒤진다. 서랍은 흔히 방과 같이 내밀성의 공간으로 자주 상징되는 공간인데,21)여기서의 서랍과 의복(주머니)은 앞에서 살펴본 시의 ‘물’과 마찬가지로 역시 화자의 내면 공간을 상징하고 있다. 화자는 ‘왜 그렇게 찾고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모든 서랍과 모든 주머니를 다 뒤지며 열심히 그 생각을 찾고 있는데, ‘마지막 속주머니 하나만은 용기가 없’어 뒤지지 못한다. 마지막 속주머니까지 모두 뒤지는 데에는 자신의 내면 밑바닥에 있는 모든 악한 생각과 속물근성을 직접 확인하는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화자는 자신도 ‘확인못해본 비밀’을 남겨두는 그런 행위 역시 속물근성의 발로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한 ‘여섯 번째의 계단과 / 일곱 번째의 계단 사이에서 / 떠올랐던 생각’을 알고 싶음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마지막 속주머니는 남겨둔다.
대신 이 과정에서 화자가 발견한 것은 ‘대체로 비틀대인 / 그동안의 나의 행보들이 웅성대고’ 있는 모습이다. 화자는 그것을 ‘당신의 편지들 / 행간마다를 / 열심히 기어다닌 내 의식의 / 착한 버리지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당신이 ‘나’에게 보낸 편지이거나 ‘나’가 쓴 편지인 편지에 쓰여진 비틀대인 글씨들 속에서 ‘의식의 / 착한 버러지들’을 발견한 화자는 그 의식들이 ‘아직도 살아 기어다니고 있’음을 보고 놀라게 된다. 버러지가 지금도 살아 기어다닌다는 뜻은 과거에 편지를 썼던 그 때의 감정과 생각이 현재에도 유효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지금도 살아 기어다니는 버러지는 화자에게 편지를 썼던 그 때의 감정과 생각을 환기시킨다. 화자는 ‘그것 한마릴 잡아 먹어보았지만 / 먹히지 않았’다. 그것은 먹히는 듯 했지만 ‘튀어 달아났’고 화자는 이 때 이미 그것이 ‘내게서 독립되어 있’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깨달음은 일종의 ‘발견’으로서 화자에게 ‘쾌감’을 준다. ‘나’이지만 동시에 ‘나’가 아닌 것, 혹은 한때 ‘나’였지만 이제는 ‘나’가 아니게 된 것이 다시 ‘나’ 앞에 나타나고 그 나타남을 통해서 ‘나’는 그것의 상실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것이 화자에게는 ‘발견의 쾌감’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화자는 이 쾌감의 순간을 ‘그 살갗의 소름의 꼭지마다에선 / 그때, 갑자기 정액이 흘렀어요’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그 정액을 ‘찬란한 정액’이라고 정의하며, 그 순간을 ‘집중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집중’은 정진규의 다른 시(「木炭畵에」, 「集中1」, 「集中2」)에서도 자주 나오는 단어로 명상의 순간에 의식의 열려 화자가 일종의 견자로서 사물이나 자신에게 내재된 비밀을 보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이 시에서의 집중, ‘찬란한 정액’은 곧바로 부정되고 마는데, 화자가 찾고 있던 ‘여섯 번째의 계단과 / 일곱 번째의 계단 사이에서 / 떠올랐던 생각’이 발견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때의 ‘찬란한 정액’은 ‘불감’으로 재정의되며, 이 때의 불감은 화자가 자신의 서랍을 제대로 뒤지지 못했다는 것, 즉 화자 자신의 내면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화자가 자신의 내면을 제대로 확인하고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이 곧 내면 확보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대인의 내면에 대한 일종의 ‘불감증’을 성공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22)
4. 결론
<현대시> 동인은 1960년대 순수 문학과 참여 문학의 대결 구도 아래에서 등장하여 10여년간 총 26집의 동인지를 발간하였다. 본고에서 대상으로 한 ꡔ현대시ꡕ는 본격적인 동인지로서의 자각이 있었던 6집부터였으며, 동인 역시 6집부터 26집까지 참여했던 17명이었다. <현대시> 동인은 개별적으로 당대의 잡지와 개인 시집을 통해 활동을 함과 동시에 동인지 ꡔ현대시ꡕ에 꾸준히 작품을 발표해왔는데, 선후 관계상 동인지에 실린 작품을 다시 다른 잡지나 시집에 수록하는 형식을 취했다. 그러므로 <현대시> 동인의 작품의 출발점은 동인지 ꡔ현대시ꡕ라고 생각할 수 있다. <현대시> 동인들은 동시대의 적지 않은 시인들이 시작 활동을 오래 유지 못한 것과 달리 현재에 이르기까지 활발한 시작 활동을 하는 시인들이 많다.
<현대시> 동인은 언어에 대한 자각과 리리시즘, 즉 서정성에 대한 추구를 통해 엄밀한 의미의, 종으로서의 서정시를 지향하였다. 1960년대라는 시대적인 상황을 염두에 두면, 4.19와 5.16으로 인해 많은 시인들이 정치적인 현실에 대한 발언을 시로 형상화하려하한 것과 달리 <현대시> 동인은 시 장르의 특징을 인식하고 시 자체에 보다 주목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 구체적인 양상은 내면의 집중과 형상화를 통해 나타났다.
한국 대표 작가 및 작품 소개 Ⅱ
-신소설 편 -
국어국문학과 조 남 철
<일 러 두 기 > | ||
신소설은 근대소설로 진입하기 이전에 출현했던 소설 양식으로서 주로 고전소설과 근대소설의 과도기적인 단계로 이해되어 과도기 문학으로 설정되어 왔습니다. 특히 서구적 의미에서의 ‘소설’을 기준으로 ‘결여와 미달’의 문학으로 간주됨으로써 다소 소홀히 다루어진 경향 또한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소설 작가들과 텍스트들은 그들이 어떻게 이전의 구양식을 거부/극복하며 발전해 갔는지를 보여줌으로써 하나의 양식이 발생해서 사멸하기까지의 진행과정을 오롯이 드러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새로운 소설의 미학성을 추구해 나갔습니다. 그동안 접해 보지 못했던 작가들과 텍스트를 이번 기회를 통해서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구체적인 내용들을 숙지하셔서 문학의 기본적인 소양을 쌓으시기 바랍니다. |
1. 이인직(李人稙, 1862-1916)
호는 국초(菊初)이며 경기도 이천 출생으로 대표적인 신소설 작가이자 언론이이며 신극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국비유학생으로 일본 도쿄 정치학교에서 공부했고, 일본 체류 중 미야꼬 신문사에 잠시 머물면서 근대적 출판 인쇄 문화를 경험하였으며, 당시 일본에 파급되던 신파극에도 관심을 가졌다. 귀국 후 일본에서의 경험을 살려 다방면의 문화 사업에 투신한다. 1906년에 『국민일보』와 『만세보』 주필이 되면서 한국 최초의 신소설로 알려져 있는 「혈의 누」를 연재한다. 이인직은 근대 문학 사상 처음으로 산문성이 짙은 문장으로 신소설을 개척한 공로를 인정받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혈의 누」 이외에도 「은세계」, 「귀의 성」(1908), 「치악산」(1908), 「모란봉」(1903) 등의 신소설과 단편 「빈선랑의 일미인」(1921) 이 있다.
문학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인직은 전통적인 문학 양식이 외부로부터 유입된 서구 문학의 영향권 아래에서 근대적인 문학으로 변화하는 과정의 첫머리에 놓이는 작가이다. 물론 계몽주의 사상을 기저에 깔고 있으면서 제국주의적 국가관을 암암리에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의 여지는 많지만 갈등과 성격 묘사, 그리고 사실적 문장을 처음으로 구사하였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이인직의 소설은 크게 두 계열로 구분되는데, 첫째 정치소설적 경향을 띠고 있는 「혈의 누」, 「은세계」, 「모란봉」 등의 작품들은 친일적 시선과 개화계몽 이념의 담지자로서의 새로운 세대에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한편, 「귀의 성」과 「치악산」은 고전소설적 모티프의 변용과 재해석, 가정소설적 구성이라는 의장과 신풍속도에 대한 치밀한 묘사를 통해 독자들의 흥미를 유발하고 있다.
-「혈의 누」
이인직의 첫 작품인 「혈의 누」는 새로운 서사 문체와 서사 구조를 채용한 초기 신소설의 대표작으로 손꼽히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최초의 신소설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1906년 7월 22일부터 10월 10일까지 총 50회에 걸쳐 『만세보』에 연재되었다가 이듬해 광학서포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으며 이 작품의 속편은 1907년 5월 17일부터 6월 1일까지 11회에 걸쳐 『제국신문』에 연재한 「혈의 누」하편과 1913년 2월 5일부터 6월 3일까지 『매일신보』에 연재한 「모란봉」이 있다.
청일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부모와 생이별하고 일본군 군의의 도움으로 도일하여 학업을 수행하고 급기야 미국으로까지 가 신문명의 세례를 받게 되는 일곱 살 여자 아이 옥련의 기구한 삶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신소설의 정치소설적 속성과 가족 윤리의 회복을 지향하는 전통적 서사물과의 유사성, 그리고 근대적인 계몽 의식의 형성과정을 보여줌으로써 문명개화라는 시대사적 과제를 풀어간 선구적 역할을 담당했다.
줄거리를 간략하게 소개하면, 청일전쟁의 회오리바람이 막 지나가고 피비린내가 만연한 평양성 밖에서, 30세 가량의 여인이 옷도 풀어헤친 채 허둥거리며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아내를 잃고 찾아 헤매던 어느 외간 남자와 부딪혀 봉변을 당할뻔 한다. 이 부인은 난리통에 남편 김관일과 딸 옥련과 서로 헤어진 최씨 부인으로 남편을 기다리다 끝내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자살을 하기 위해 대동강 물에 뛰어들었다가 뱃사공에게 구출된다. 한편 김관일은 집으로 돌아갔으나 아내를 만나지 못하고 대신 장인을 만나 자신은 나라의 큰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옥련 역시 피난길에 총알을 맞아 부상을 당했으나 일본군 군의관 이노우에(井上)의 후의로 그의 양녀가 되어 일본으로 건너간다. 원래 총명하고 예쁜 옥련은 군의관의 부인으로부터 사랑을 받았으나 군의관이 전사하자, 살림이 어렵게 된 부인으로부터 냉대를 받게 된다.
결국 소학교를 졸업하던 무렵 자살을 결심하고 집을 나온 옥련은 기차 안에서 우연히 구완서라는 청년과 알게 되어 미국으로 건너간다. 구완서는 부국 강병의 뜻을 품고 조선을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처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유학길에 오른 청년이었다. 옥련은 그 곳에서 고등학교를 우등으로 마치고 이것이 신문에 실리자 이미 미국에서 살고 있는 아버지 김관일이 이를 보고 찾아와 부녀가 상봉하게 된다. 이 가운데 옥련과 구완서는 서로의 의사대로 약혼을 하게 되고 어머니가 아직 평양에 살아 있음을 확인한 옥련은 어머니에게 편지를 띄운다. 구완서는 우리나라를 문명한 강국으로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옥련은 조선 여자들의 지식을 넓혀서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게 하며 여자들도 사회에 유익하고 명예 있는 백성이 되도록 조선여자교육에 힘쓸 것을 다짐한다.
-『은세계』
이인직의 세 번째 소설로 1908년 동문사에서 발간되었다. 이 작품의 특이한 점은 ‘신연극’이라는 한자를 집자(集子)하여 ‘銀世界’라는 작품 표제를 만든 점이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출간되었던 문집 가운데 어떤 것에도 이런 방식의 표지 장정은 발견되지 않는다. 인쇄기술의 도움이 없고서는 가능하지 않은 방식인데, 이인직이 이러한 표지 장정을 시도한 것은 이 작품이 연극적으로 적극 공연되었음을 상기할 때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에서 1907년 융희 원년의 대개혁에 이르기까지의 부자 2대를 통한 문명개화의 야망을 그린 작품이다. 따라서 구성상 아버지인 최병도의 이야기가 전반부를, 그의 자식들인 옥순-옥남 남매의 이야기가 후반부를 구성하고 있는 이원 구조를 지니고 있다.
강릉 경금이라는 동리에 근면하고 성실한 최병도라는 젊은이가 있었는데 그는 개화파였던 김옥균에게 감화를 받아 구국의 일념을 품고 그 밑천을 마련하기 위해 열심히 재산을 모아 상당한 부자가 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당시 강원도 관찰사는 매관매직을 횡행하는 시국에서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아 돈을 모으는 데만 관심을 가져 사령들을 보내 아무 죄 없는 최병도를 감영으로 잡아 오도록 명한다. 이 과정에서 무고한 최병도의 체포에 항거하여 동네 젊은이들이 민요(民擾)를 일으키려고 했으나 최병도는 이를 만류하고 감영에 끌려가 곤장을 맞고 관찰사의 탐욕에 맞서다가 죽기 직전에 풀려나 집으로 돌아가던 중 죽음을 맞이한다. 이에 그 부인은 정신이 이상해지고 최병도와 뜻을 함께한 개화인 김정수가 최병도의 재산관리를 맡아 옥순과 옥남 형제를 미국으로 유학 보낸다.
그런데 최병도의 재산은 시세의 하락과 김정수 아들의 난봉으로 관료들에게 뺏기게 되면서 바닥이 나 이를 걱정하던 김정수는 결국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죽게된다. 한편 옥순과 옥남은 갖은 고생을 겪으면서 공부를 마치고 10여년 만에 돌아와 어머니와 재회하다. 거의 폐인인 된 어머니는 잃었던 정신을 되찾게 되고 이튿날 옥남 남매가 어머니와 함께 선친의 명복을 빌려고 절에 갔다가 의병들을 만나게 된다. 이에 옥남은 “학정을 고치기 위해서는 고종의 양위(讓位)가 지당하며 의병 또한 불가한 것”이라고 역설하나 의병에게 붙들려 가는 것으로 소설이 마무리 된다.
2. 이해조(李海朝, 1869-1927)
호는 열재(悅齋), 이열재(怡悅齋), 동농(東濃)이며 필명은 선음자(善飮子), 하관생(遐觀生), 석춘자(惜春子), 신안생(神眼生), 해관자(解觀子), 우산거사(牛山居士) 등이며 경기도 포천 출생으로 조선조 16대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4자 복평군의 10대손으로 알려져 있다. 어릴 때부터 한학을 수학하여 19세에는 과거 초시에 합격했으며 25세 무렵에는 대동사문회(大東斯文會)를 주관하면서 글을 모아 편집 발간하기도 했다. 1903년 『제국신문』 기자로 근무했으며, 『황성신문』과 『매일신보』의 편집과 문화부 관계의 일을 하면서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이해조는 1906년 미완의 한문소설 「잠상태」를 쓰면서 소설 창작을 시작한 후 1925년 「강명화실기(康明花實記)를 발표할 때까지 20여 년 동안 「고목화」(1907), 「구마검」(1908), 「빈상설」(1908), 「홍도화」(1908~1910), 「자유종」(1910), 「화세계」(1911), 「월하가인」(1911), 「모란병」(1911), 「구의산」(1912), 「춘외춘」(1912), 「비파성」(1913), 「홍장군전」(1918) 등 약 40여편의 작품을 발표하여 신소설 작가 가운데 가장 많은 작품을 발표한 인물로 꼽힌다.
그는 초기에는 자유결혼이나 과부재가, 계급타파 등의 개화의지를 보여주거나 미신타파, 봉건제도 비판 등의 계몽적 성향이 강한 작품을 발표하다가 일제강점 이후 점차 대중적인 흥미를 강조하는 쪽으로 옮겨간다. 그가 다른 신소설 작가들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가장 많은 신소설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이인직 다음으로 평가받아 왔던 것 또한 이 같은 흥미 위주의 성격이 “문학성의 결여”로 받아들여진 데 기인한다.
-『자유종』
1910년 7월 30일 광학서포에서 출간된 이 작품은 전체 40여 쪽 정도로 이해조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비교적 짧은 작품이지만 당시의 사회상과 작가의 개화 의식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작품이다.
작품의 표제에 ‘토론소설’이라는 명칭이 붙어 있는 이 소설은 이매경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 네 명의 부인이 시국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는 대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작품에 등장하고 있는 인물은 신설헌, 이매경, 홍국란, 강금운으로 신설헌이 사회자 역할을 맡아 토론회를 제의하면서 각자의 시국에 대한 비판과 건의가 이루어진다. 그런데 실제로 이들 네 사람은 상대방의 주장을 논박하기 보다는 네 명이 서로 역할을 분담하여 작가의 의식을 대변하고 있어 토론이라기보다는 연설에 가까운 형식을 띤다. 이 네 사람의 토론자가 다루고 있는 토론의 내용은 사회 현실 전반에 대한 비판으로 주로 여성들의 권리와 관련된 문제, 자주정신을 고양하기 위한 교육 관련 문제, 사회 제도의 개선과 민중 계몽을 위한 문제 등이 주를 이룬다. 이들 여성들은 자유의 개념을 설파함으로써 남성 중심사회에서 예속적이며 억압적인 삶을 살아온 여성들이 자유를 찾기 위해 남녀평등이 이루어져야 하며 이를 위해서 근대적 학문과 교육 개혁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그런데 이 같은 계몽을 위해서는 전통적인 한문 중심 체제가 폐지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맹목적인 한자폐지론의 폐단 역시 함께 지적함으로써 이들은 혁명적인 방법을 통해 전통으로부터 단절되기보다는 단계적으로 과거의 폐습을 개혁하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낸다.
그리고 이러한 다양한 현실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국권 상실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으로 모아진다는 데 의의가 있다. 네 명의 부인이 각자의 꿈을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드러나고 있듯 자유를 쟁취하고 자주적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이상적인 상태로 제시된다. 이 같은 이상적인 설정은 “차라리 제 나라 민족에 노예가 세세로 될지언정 타국 정부의 보호는 아니 받는다”라는 강렬한 민족의 자주 의식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안국선(安國善, 1878~1926)
호는 천강(天江)이며 『공진회』에서 양계초의 음빙실주인(飮氷室主人)을 본따 농구실주인(弄球室主人)이라고 쓰기도 했으며, 경기도 안성 출생이다. 16세(1894)에 일본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동경에 건너가 게이오의숙(慶應義塾) 보통과와 동경전문학교에서 수학하며 정치학을 공부하였다. 귀국 후 정치운동을 모색하다 탄로나 참형을 선고받고 전라남도 진도에 유배되기도 했다. 이후 1907년 사면되어 다시 사회활동을 시작하면서 대한협회, 기호흥학회 등의 사회단체에 가입하였으며 이들 기관지에 많은 논설을 발표하였다.
안국선은 1908년 「금수회의록」을 통해 신소설 작가로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이 외에 개화계몽기 당시 사회운동단체들이 민지계몽을 위한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였던 연설회와 관련된 수사법 및 정치담론 관련 서적을 편역한 『연설법방』(日韓印刷株式會社, 1907)과 일본을 통해 습득한 서구 정치학을 개설적으로 소개한 『정치원론』(황성신문사, 1907)을 저술하기도 했으나 일제 강점 후 발표한 『공진회』에서는 식민지지배질서의 수동적 수용과 내적 합리화를 수수할 수밖에 없는 노년의 패배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금수회의록』
1908년 황성서적조합에서 출간된 토론체 우화소설로 동물들이 연사로 등장하여 인간세태를 비판하고 올바른 윤리관의 정립을 주장하는 것이 주된 내용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특히 이 작품은 개화기에 발간된 소설 중 이해조의 『자유종』과 함께 정치소설적 요소가 가장 강하게 표현되었다는 이유로 1909년 5월 언론출판규제법에 의해 금서조치를 당한 바 있다.
몽유록의 전통적인 서사방식인 기(起)-서(敍)-결(結)의 구성을 띠고 있는 이 소설은 액자 내부의 이야기를 이루는 8개의 동물 삽화들이 병렬적으로 배치되면서도 총체적인 주제의식이나 작가의 지향점을 집중시키고 있다.
「금수회의록」은 일인칭 관찰자인 ‘나’가 꿈속에서 인간의 비리와 인간의 간사한 현실 사회를 성토하는 동물들의 회의장으로 들어가 동물들의 회의 내용을 기술하여 전달하는 방식을 취함으로써 우화형식을 통해 현실비판적인 성격을 뚜렷하게 드러낸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동물들은 효(孝), 신(信), 겸(謙), 정(正), 절(節), 의(義,) 자(慈,) 애(愛) 등을 내세우며 인간의 타락상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까마귀는 反哺之孝를 들어 이간의 불효를 규탄하고, 여우는 매국노와 제국주의를 狐仮虎威라고 비판하며, 개구리는 井蛙語海를 들어 천하의 대세를 알지 못하면서 아는 척하는 지배세력을 비판하고, 벌은 口蜜腹劍이라는 말로 사람의 표리부동함을 지적한다. 그리고 게는 無腸公子라는 예로써 온갖 압제를 받아도 자유를 찾을 생각을 않는 인간의 태도를 비난하고 파리는 營營止極이라는 말로 인간의 물욕을 비판하고 호랑이는 苛政猛於虎로써 탐관오리와 이간의 잔인성을 비난한다. 마지막으로 원왕은 雙來雙去로써 축첩제도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한편 절개 잃은 여인들의 부도덕한 행위도 비판한다.
4. 최찬식(崔瓚植, 1881~1951)
자는 찬옥, 호는 해동초인 혹은 동초, 필명은 동초생이며 경기도 광주 출생이다. 아버지 최영년은 동학농민운동(1894) 당시 전주 감영 군사마(軍司馬)로 재직했고 이인직과도 가까운 사이이기도 해서 1907년 10월 『귀의 성』을 발간할 때 「증서」를 쓰기도 했다.
최찬식은 유년 시절 광주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1897년 부친이 설립한 시흥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공부하였고 서울로 올라와 한성중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07년 문학에 뜻을 두고 중국의 소설집 『설부총서(設部叢書)』를 번역하기도 하였다. 1912년 「추월색」을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해안」(1914), 「금강문」(1914), 「안의성」(1914), 「도화원」(1916), 「삼강문」(1918), 「능라도」(1918), 「춘몽」(1924), 「자작부인」(1926), 「용정촌」(1926) 등 다수의 신소설과 단편 「종소리」, 「동정의 눈물」과 「부랑자 경고자」와 같은 장시를 쓴 바 있다. 그리고 1910년대 일본인이 경영하던 잡지 『신문계』와 『반도시론』의 기자를 지내면서 다수의 논설과 기행문을 발표하였다.
최찬식은 이인직, 이해조와 달리 1920년대까지도 창작활동을 지속했던 작가였다. 그가 활발하게 창작활동을 전개하였던 1910년대는 신소설을 개척했던 이인직이 물러나고 이해조마저 통속적인 경향을 보여주던 시기였다. 뿐만 아니라 1913년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연재되었던 「장한몽」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신파적인 경향이 문학 전반을 지배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따라서 최찬식의 작품은 이러한 신소설의 변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일제강점 이후 일본의 무단통치라는 정론성이 사라지고 대신 남녀간의 애정이라는 흥미성이 배가되는 과정을 가장 잘 보여준 작가로 평가받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추월색』
1912년 3월 13일 회동서관에서 발행되었으며 조선을 비롯한 일본, 중국, 영국 등의 광범위한 지역을 무대로 하여 정치적으로 혼란했던 과도기적 시대상황 속에서 펼쳐진 청춘남녀의 기구한 애정 이야기를 그린 소설로 당시의 신소설 중에서 가장 애독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줄거리를 간략하게 소개하면, 이시종(李侍從)의 외동딸 정임(貞姙)과 김승지의 외동아들 영창(永昌)은 어릴 때 정혼한 사이인데 평안도 초산 군수로 부임한 김승지가 뜻밖에 민요(民擾)를 만나, 일가가 모두 행방불명이 되고 만다. 정임의 나이 열다섯이 되자 정임의 부모는 다른 혼처를 정해 그녀를 결혼시키려 하고 이에 정임은 몰래 집을 떠나 일본으로 건너가 음악을 전공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하기에 이른다. 평소 정임을 짝사랑해 오던 강한영(姜漢永)이란 청년은 우에노 공원(上野公園)에서 정임에게 접근하나 정임이 그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정임을 칼로 찌르고 도주한다.
한편 영국에서 공부하고 일본에 왔던 영창은 공교롭게 그곳을 지나다가 범인으로 지목되어 재판을 받게 되나 곧 무죄로 석방된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극적으로 재회하여 마침내 신식 결혼을 올리고 만주로 신혼여행을 떠나게 된다. 신혼여행 중 두사람은 마적단에 체포되나 오히려 거기서 영창의 부모를 만나 함께 귀국하게 된다.
이 같은 내용으로 전개되고 있는『추월색』은 구성적인 면에서 현재의 사건들을 먼저 묘사한 후에 사건이 발생하게 된 과거의 과정을 서술하는 역전적 시간배치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서사의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추월색』의 인물들은 전통적인 유교적 윤리규범에 기대고 있어 신학문과 신교육에 대한 작가의 언급에도 불구하고 등장인물은 여전히 근대적인 개성을 자각하지 못한 채, 형식적이고 외면적인 개화 의식에 머물고 있는 한계를 드러낸다.
5. 김교제(김교제, ?)
아호는 아속(啞俗)이며 생장지와 생몰연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김교제에 대한 학계의 최초의 언급은 김태준의 『증보 조선소설사』에 나오는데, 김태준은 “「난봉기합」과 「경중화」는 아즉도 퍽 떨어진다. 고대소설과 거리가 멀지 않다”고 하여 김교제의 작품이 지니고 있는 전근대소설과의 유사성을 지적한다. 이후 신소설 작가에 관한 다수의 연구들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김교제에 대해서는 최근까지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 한국문학계의 실정이다.
김교제의 신소설은 총 9편으로 「목단화」 (광학서포, 1911.5.17), 「치악산(하)」 (동양서원, 1911.12.30), 「비행선」 (번안, 동양서원, 1912.5.15), 「현미경」 (동양서원, 1912.6.15), 「지장보살」 (동양서원, 1912.12.25), 「일만구천방」 (동양서원, 1913.4.25), 「난봉기합」 (동양서원, 1913.5.25), 「경중화」 (보문사, 1924.1.30), 「강상촌」 이며 이 외에도 「마상루」 (下一작, 1913), 「삼촌설(상)」 (閔濬鎬작, 1913) 두 편을 교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앞서 언급한 이인직이나 이해조, 최찬식 등의 신소설 작가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김교제는 신소설이 근대소설로 전이되기 위해 요구되는 서사의 완결성과 ‘재미’로서의 문학작품의 위상을 보여준 작가로 이해할 수 있다. 김교제의 작품으로 알려진 「치악산」하편과 이인직의 「치악산」 상편을 비교한다면 이같은 김교제의 신소설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들이 더욱 부각될 것이다.
이인직이 보여준 정론성이 합방 후 그 가치를 상실하게 되면서 이해조나 최찬식과 같은 대중적 흥미를 보여주는 작가들이 등장하여 신소설의 중흥기를 열였다면, 김교제는 신소설이 보여줄 수 있는 최대치를 마감한 작가라 할 수 있다. 문학작품이 정치담론의 전파 매개체로서만 이해되지 않고 오히려 대중의 욕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대리해소하고 있는 것이다.
-『목단화』
1911년 5월 17일자로 광학서포에서 발간된 김교제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여성수난사의 기구한 도정과 신문물을 공부한 여주인공이 자신의 경륜을 펼쳐하는 모습이 서울과 의주라는 공간을 아우르며 역동적으로 펼쳐진다. 특히 문명개화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학업을 계속하며 자신의 능력을 펼쳐 보이는 여주인공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작품이다.
개략적인 줄거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 참판의 외동딸 정숙(貞淑)은 여학교에 다니며 신학문을 배우던 중 출가한다. ‘찰완고’로 알려진 박 승지가 며느리가 학업을 계속하겠다는 말에 분노하여 친정으로 쫓아 보내자 정숙은 친가에서 여학교를 계속해서 다니게 된다. 한편 그녀의 아버지 이 참판은 과부를 후취로 맞아들일 만큼 사상이 개명한 사람이기도 했으나, 후취 부인 서씨는 마음이 편협하고 악독하여 정숙을 미워한다.
이 참판이 수구파에 몰려 제주로 유배당함을 기회로 서씨는 종 섬월과 짜고 정숙을 음해한다. 우선 작은돌이와 서병신으로 하여금 정숙이의 종 금년이를 꾀어 내어 결박한 채로 양화진에다 던져 버린다. 이어 정숙이도 그들의 간계에 넘어가 겁탈을 당할 뻔하다가 황동지에게 구조되어 의주에 머물게 된다. 우연히 그 고장 학교 교육에도 참여하게 되어 신학문을 널리 펴서 계몽에 힘쓴 결과 그곳 주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게 된다. 그러다가 뜻밖에 죽은 줄 알았던 금년이를 다시 만나게 된다.
한편 황동지의 딸 금순도 서울에서 사창에 팔린 신세가 되었으나 마침 적소(謫所)에서 풀려나 서울에 돌아와 있던 정숙의 아버지 이 참판에게 구출된다. 그러는 동안 서씨 부인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섬월이와 작은돌이의 흉계가 드러나게 되어 그들은 감옥으로 가게 되고 그동안 뿔뿔이 흩어져 고생을 겪던 이 참판 일가는 오랜만에 웃음을 찾게된다.
1)홍사중, 「새로움의 의미」, ꡔ현대문학ꡕ 1960. 8. ; 백철, 「젊은 세대의 노한 작품세계」, ꡔ현대문학ꡕ 1960. 10. ; 김춘수, 「무위ꡕ, ꡔ현대시학ꡕ 1961. 1.
2)신동문, 「아!神話같이 다비데 群」, ꡔ사상ꡕ 1960, 6.
3)정한모에 따르면 동인지로서 이만큼 오래 장수한 일은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정한모, 「<현대시> 동인의 시」, ꡔ한국 현대시의 현장ꡕ, 박영사, 1983, p. 162
4)정진규, 「후기-同人誌로서의 現代詩」,《현대시》6집, p. 262
5)동인지로서의 자각을 확립하며 새롭게 시작한 6집의 동인은 민웅식, 허만하, 주문돈, 김영태, 이수익, 정진규, 이승훈, 황운헌, 이유경으로 9명이었다. 6집 차례를 보면 박목월, 김종삼, 신동집의 시는 초대작품으로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동인과 동인이 아닌 사람의 구별이 확실해졌음을 알 수 있다. 7집부터 박의상과 이해녕이 참여하였으며, 민웅식, 허만하는 빠졌다. 8집부터 김규태3)가 참여하였고, 10집부터 황운헌은 빠졌으며, 12집부터는 김종해가 새롭게 참여하였다. 14집부터는 정진규가, 16집부터는 김영태가 빠지고, 마종하가 참여하였다. 17집부터는 오탁번이 참여하기 시작했고, 25집부터는 오세영과 이건청이 새롭게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정리하자면 김규태, 김영태, 김종해, 마종하, 민웅식, 박의상, 오세영, 오탁번, 이건청, 이수익, 이승훈, 이유경, 이해녕, 정진규, 주몬돈, 허만하, 황운헌의 17명을 현대시 동인이라고 확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중 오랜 기간 동안 활동하거나, 많은 작품을 발표하거나, 에세이를 비롯한 산문을 주로 발표한 사람은 김규태, 박의상, 이수익, 이승훈, 이유경, 주문돈이다.
<현대시> 동인은 특별히 해체한다는 공식 입장을 밝히지는 않았으나 《현대시》26집 이후 동인지를 간행하지 않았으므로 26집 이후 해체로 보는 것이 보통의 시각이다. 물론 1994년 ꡔ현대시94ꡕ라는 한 권의 엔솔러지를 내면서 동인들이 다시 모였으며, 1995년 이후 매해 <현대시 동인회>의 이름으로 <현대시 동인상>을 제정하여 신인 시인에게 수여하고 있으나, 기존의 동인지로서의 성격과는 상이하므로 본고의 논의에서는 제외하기로 한다. 1994년 이후의 동인 활동에 대해서는 이창용, 「1960년대 <현대시> 동인의 활동과 시 세계」, 《현대시학》363호(1996. 6), p. 165 참조.
참고로 제 2회 현대시 동인상은 박상순이 수상자이며, 수상자를 정하며 밝힌 <현대시> 동인회에는 김규태, 김영태, 긴종해, 박의상, 오세영, 오탁번, 이건청, 이수익, 이승훈, 이유경, 이해녕, 정진규, 주문돈, 허만하가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현대시 동인상>을 한국 현대시의 새 지평을 열어가 젊은 시인들을 격려하기 위해 제정하였으며, 선배시인이 후배시인에게 주는 신인상이며, 한국 현대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데 의의를 둔다고 밝힌 바 있다. 「제 2회 현대시 동인상 특집」, 《현대시학》327호(1996. 6), p. 132
6)김규태(1934~)는 1957년에《문학예술》지에 추천되고, 1959년에《사상계》로 등단하였다. 지금까지 ꡔ鐵製 장난감ꡕ(1969), ꡔ졸고 있는 神ꡕ(1985), ꡔ들개의 노래ꡕ(1993)의 세 권의 시집을 상재하였다. 부산일보와 국제신문 기자생활을 오래 하였다.
7)심재휘, 「‘현대시’ 동인과 60년대적 모더니즘」, 《작가연구》16호(2003. 10),
8)허혜정, 「60년대 <현대시> 동인들의 시운동과 시사적 위치」, 《현대시학》327호(1996. 6),
9)최라영, 「현대시 동인 연구ꊱ」, 《현대시학》(2005. 1).
10)권영민, ꡔ한국현대문학사2ꡕ, 민음사, 2002, p.216
11)권영민, 위의 책, p. 215
12)문혜원, 「한국 현대시사에서의 모더니즘」, 《작가연구》16호(2003. 10), p. 24
13)박의상, 「詩와 自由」, 《현대시》9집, pp. 638-639
14)김규태, 「NOTE」, ꡔ현대시ꡕ13집, 1967, p. 472
15)권영민, ꡔ한국현대문학사 1945-1990ꡕ, 민음사, 1995, pp. 185-196 참조.
16)「동인 공동 연구 과제」, 《현대시>9집, 표지.
17)김종해, 「<言語의 식민지>에서의 解放-詩의 한글전용 문제-」, 《현대시》18집, p. 637
18)남기혁, 「서정시의 위상 : 전통적 서정시와 리리시즘의 현대적 의미」, 「한국 현대시의 비판적 연구ꡕ, 월인, 2001, p. 259
19)박현수는 1920년대 민족문학파가 계급주의문학을 부정한 이유 중의 하나는 그 진영에서 문학의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으며, 일제 말기 문장파가 시대적 현실보다 자연을 주요 시적 대상으로 삼은 것도 발표 매체나 표현의 통제 같은 시대적 제약보다는 문학이 전달의 도구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한다. 마찬가지로 전후 전통파 역시 참여문학의 사회참여적 입장에 대해서 문학의 자율성을 옹호하는 견지에서 성립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때의 자율성은 대부분 서정성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고 말한다. 박현수, ꡔ현대시와 전통주의의 수사학ꡕ,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p. 5
20)이준오, ꡔ아르뛰르 랭보의 詩 영혼의 언어와 침묵-동양의형이상학과 미학ꡕ, 숭실대출판부, pp. 29-31 참조.
21)바슐라르, ꡔ공간의 시학ꡕ, 곽광수 역, 1989, p. 201
22)지금까지 살펴본 시들에서 나타난 ‘소강 속의 감성들’(방랑하는 사람(2)), ‘어린 날의 혼들’(한 여름날), ‘내 의식의 착한 버리지들’(정액) 등에서 보면 감성들, 혼들, 버러지들 등 화자의 내면, 혹은 기억을 지칭하는 말들이 모두 복수형임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내가 意識못하는 내 自身’(이유경, 「果木」, 20집), ‘스쳐간 기억들’(마종하, 「노래하는 바다 1」, 21집) 등 화자가 분열되어 둘 이상으로 표현되어 있는 많은 시들이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해 리쾨르의 ‘서술적 자아(ipse)’ 개념을 원용해 자신의 기억 ․ 내면(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아, 혹은 서술적 자아에 의해 이야기된 내면들을 이야기해 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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