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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목사의 이단성 연구 보고서
- 예장(합신) 신학위원회 -
에 대한 반론 (3)
1) 선택에 대한 운명적인 오해
김성수: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면 이 땅에서 행함의 유무가 천국 입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 이미 결정되어 역사 속으로 내려온 이들이 성도이고 그들만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양과 염소는 이미 창세 전에 갈라져 있습니다. 창세 전에 이미 완료의 상태에 들어가 있는 ”성도는 이 땅에 죄인으로 보내져“ (|=> 태초에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선택받은 성도라고 할지라도 이 땅에, 역사 속으로 들어올 때는 죄인의 신분으로 보내진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 한평생이라는 인생의 여정 속에서 육신의 장막에 갇혀 살면서 언제 어느 시점에서 하나님의 부르심과 구원의 사건이 일어나는지는 정해진 시간이 없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으로 일어난다. 예수님의 십자가 우편에 못 박힌 강도는 인생의 마지막 종점에서 말 한마디 하고 구원을 얻었다. 행함이라고 내세울 만한 것은 하나 없지만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닫고 고백한 것 하나로 구원에 이른 것이다.) 자신의 불가능함을 폭로 당하게 됩니다. 알곡과 가라지도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입니다. 인간의 행위는 하나님의 결정에 어떤 영향도 미칠 수가 없습니다” (비유 강해 14, 마 25:31-46, 구역 교재)
김성수: “하나님이 여러분을 역사 속에 보내서 죄의 종으로 만들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 보내서 어린 양의 피로 구원해 내신 것처럼 무력한 자로 폭로해 내신다. 어린 양의 피로만 구원해 내신다. 하나님이 시나리오를 다 쓰신다. 누가 간음한 자로 만들었는가? 하나님이시다. 누가 진짜 신랑인 것을 가르쳐 주시려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화하셨다... 새사람은 내가 노력해서 되는 게 아니라 입는다고 말씀한다. 먼저 새사람이 되겠다고 하니 문제다. 죄인 됨이 폭로된다. 하나님이 볼 때는 죽은 자다. 강시다. 네가 죽은 자인 것을 알라. 내가 치장한다. 그런데 왜 니가 강시에 치장하느냐? 간음하다 잡혀 온 여인과 군중 앞에서 결국 간음한 그 여자만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남아있었다. 최초의 간음 현장은 에덴동산이었다“(2012년 산상수훈 16번).
비판 =>김성수는 구원을 창세 전에 삼위 하나님의 선택 경륜 안에서 폐쇄적으로 완료된 것으로 오해한다. 그러나 돌트신경(Ⅰ.1-4)은 창세기 1-3장의 순서에 따라 구원의 실행은 영원 전 삼위 하나님의 선택 경륜에서 시작하지 않고 시간 속에서 일어난 타락으로 시작한다.
반론 |=> 구원 사역의 시작 시점에 대한 관점에 차이가 있다. 인본주의에서는 크로노스의 시간 공간에서 선악과 사건이 일어난 시점을 타락으로 보고 그 때문에 죄가 시작되었고, 그 죄 때문에 예수그리스도에 의한 대속의 은혜로 구원이 주어진다고 보는 관점이다. 이것은 타락 사건은 원래 하나님의 창조계획 속에 들어 있지 않았다는 신학적 사고이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이 인간의 타락을 미처 예상하지 못하고 대비하지 않고 있었는데 문제가 생기니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라는 처방을 내어놓고 마치 은혜를 베푸는 듯 생색을 내는 하나님으로 이해될 수 있고, 하나님의 창조계획이 그런 타락을 예상하지 못한 불완전하고 미완성된 창조계획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에 불과하다.
인본주의는 김성수가 말하는 구원이 창세 전에 삼위 하나님의 선택 경륜 안에서 폐쇄적으로 완료되었다고 이해하고 그것이 오해라고 지적한다. 이것은 저들이 편협한 미시적인(microscopic view) 시각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김성수는 크로노스의 타락 사건 이전부터, 태초부터 창세의 경륜 속에, 카이로스의 공간 속에서 인간의 창조와 타락과 선택과 구원이 온전하게 계획되었고 완료되었다고 설명하는 것인데 인본주의의 관점에서는 그게 잘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두고 폐쇄적으로 완료되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이고, 그것이 그들이 가진 오해이다. 김성수의 설명은 구원의 사역도 인류의 타락과 함께 창세 전에 계획되고 완료되었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본주의는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서 처음에는 인간이 타락하지 않은 상태로 창조되었으나 사탄의 유혹으로 타락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 타락의 시점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출발점이라고 주장하는 것이고, 김성수는 타락 사건의 발생 이전부터, 태초부터 하나님의 계획 속에 타락 사건과 구원 사역이 다 들어가 있었다(크로노스의 시계가 작동하기 이전에 완성되어 있었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구원 사역의 시점을 더 거시적인 관점(macroscopic view)에서 이해하는 것이고, 인본주의가 이해하는 미시적 관점을 포괄하며, 미시와 거시 양자가 충돌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창조계획이 온전하고 변경될 소지가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신성에 부합하는 해석이지, 인간의 타락 사건이 발생했으므로 그에 따른 대응책으로 하나님이 구원 사역을 시작하셨다고 보는 것은 하나님의 신성을 부정하고 인간과 별 차이 없이 오류를 저지르는 하나님으로 격하시키는 신학적 사고이다.
영원 전 삼위 하나님의 선택 경륜에서 결정된 구원의 대상이 누구인지 먼저 계시하지 않으시고, 성자를 보내어 택자의 구원(생명)을 획득하게 하시고, 이 구원을 택자에게 수여하기 위해서 은혜의 방편, 즉 복음 설교를 듣게 하셔서, 성령께서 택자들에게 참되고 살아 있는 믿음을 일으켜 구주를 영접하게 하심으로 드러내신다.
반론 |=> 이것은 인본주의 신학에서 하나님의 선택 경륜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으나 세부적인 선택의 메커니즘을 먼저 계시하여 알려주지 않으심에 대한 인간적인 섭섭함을 바탕에 깔고 있다. 인간이라면 왜 하나님은 어떤 사람은 구원하시고 다른 사람은 구원하지 않으시는지, 그 선택의 기준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내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궁금증을 가지지 않을 수 없고, 그 요령을 알아내서 나의 열심과 노력으로 반드시 구원을 따내고야 말겠다고 하는 인간적 욕심 내지 소원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인간적인 욕심은 인본주의이든 신본주의이든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똑같이 가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인본주의는 그 선택에서 제외될 경우 원망하고 이를 갈고 슬퍼하는 모습을 드러낼 것이지만 신본주의에서는 ”나는 원래 티끌이고 없음인데 하나님의 처분에 아무 할 말이 없고 주님의 판단에 순순히 따를 뿐입니다.“ 하고 순종하는 자세를 보일 것이다. 토기장이가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빚는다고 해서 천하게 쓰일 용도로 빚어진 그릇이 왜 토기장이에게 나를 천하게 쓸 그릇으로 빚었느냐고 항의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인본주의는 어찌해서든 토기장이의 마음을 감동시켜서라도 귀한 그릇으로 빚어주게 되도록 필사의 노력을 기울이겠다는 욕심을 드러낼 것이다. 선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 영역에 속한다는 사실에 대해 인본주의는 그래도 어찌해서든 나의 노력으로 선택을 받아내고야 말겠다는 실낱 같은 희망을 버리지 않을 것이고, 신본주의는 ”주님의 판단이 지당하십니다. 그 결정에 무조건 따를 뿐입니다.“ 하는 자세를 보일 것이다.
이와 같이 영원 안에서의 선택은 은혜의 방편인 말씀과 성례를 통하여 성령께서 교회 안에서 구원의 서정을 펼치시며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로 나타난다. 구원의 결정은 선택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의 실행은 신자의 신앙의 행위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교훈적 의지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주권적 작정에 의해 선택한 자들로 하여금 그러한 신앙의 행위가 가능하도록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다.
구원의 결정은 선택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그 실행은 신자의 신앙의 행위를 통해 이루어진다 |=> 하나님은 구원의 여부를 선택하는 일만 담당하시고 그 실행은 신자의 행위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선택과 실행이 하나님과 성도 사이에서 분권 독립 체제인 것처럼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선택이 성도의 실행을 통해 현실로 이루어지지 못하면 그 선택이 무력화되고 무효화 되는 해괴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최초에 창조하실 때 한번 반짝 일하시고 모든 법칙을 세우신 후에 지금은 졸고 계시는 하나님으로 인식한다면 이런 분권 독립 체제의 해석이 가능하지만 이것은 지극히 인본주의적 사고이다. "신은 죽었다"고 니이체가 말한 것은 이런 인본주의의 바탕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신본주의에서는 영원 전부터 세상끝날까지, 영원 후까지 살아 계시고 불꽃 같은 눈동자로 간섭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성도의 실행이 가능하도록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성령의 도우시는 은혜까지 베풀었는데 성도가 실행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선택과 작정이 무력화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실행의 여부가 성도의 권한으로 귀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본주의적 사고방식에 따르면 전지전능, 무소불능 하신 하나님의 속성이 크게 훼손된다. 따라서 신앙 행위의 주체가 신자(성도)가 되면 하나님의 신성이 현저히 훼손되거나 부정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래서 신앙의 행위도 하나님이 주체가 되는 신본주의로 해석하지 않으면 무력한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은 그냥 장식용으로 존재하는 기독교가 되는 것이다. 신본주의로 구원의 과정을 이해하면 구원의 선택만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아니라 대속의 은혜를 베푸시는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성도의 행위를 인도하는 성령의 도우심을 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으로 일어날 뿐만 아니라 성도의 행위의 주체도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이끌지 않으시면 구원에 대하여 성도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신앙고백이 나와야 하는 것이 신본주의적 기독교이다.
따라서 선택은 하나님의 약속과 은혜언약 안에서만 실행이 된다(창 15, 17장). |=> 선택과 은혜 언약 사이에 선후관계가 있는 것처럼 오해될 소지가 있다. 선택은 창세 이전의 카이로스적 사건이고, 약속과 은혜 언약은 크로노스의 공간에서 작동하지만 이것 역시 창세 이전에 다 계획이 완성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부연하면 창세 이전에 선택이 일어났다. 이 선택은 인간이 죄를 짓고 사망의 형벌을 받게 될 것도 하나님이 미리 아셨기 때문에 선택의 결정도 미리 완성하신 것임을 알 수 있다. 죄와 선택 사이에는 필요충분조건의 관계가 있다. 인본주의에서는 사탄의 꾀임에 의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시점에서 죄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편협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기 힘들지만 죄가 없는 상황에서는 선택의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인본주의가 주장하는 죄의 시작은 에덴 동산의 선악과 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뭘 모르고 크로노스적 사고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창세 이전에, 천지 창조의 경륜을 계획하실 때부터 인간이 죄를 지을 것도 미리 아셨고 그에 따른 구원의 계획(약속과 은혜 언약)과 선택의 사건도 창세 이전에 이미 다 이루어졌다(완성되었다)고 이해해야 하는 것이 거시적인 관점이고 더 합리적이다. 그게 신본주의적 관점이다.
또한 그 확신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믿음, 하나님에 대한 어린아이와 같은 경외심, 자신들의 죄에 대한 슬픔, 의에 주리고 목마름과 같은 선택의 열매들을 자신에게서 살핌으로 얻게 된다(돌트신조 첫째 교리 12항). |=>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믿음, 하나님에 대한 어린아이와 같은 경외심, 자신들의 죄에 대한 슬픔, 의에 주리고 목마름“과 같은 열매들이 자신에게서 열리는가를 살펴봄으로써 자신이 선택받은 자인가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나무는 그 열매로 알 수 있다.“는 말씀과 같이 선택받은 자인가의 여부를 그 행실로 알 수 있다는 것은 옳은 말이기는 하나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의의 열매를 맺기도 하지만 수시로 죄의 열매도 맺는다. 구원의 확신을 가진 자도 예외일 수 없다. 확신을 가진다는 것은 교만에 빠지게 할 수 있고, 시시때때로 죄의 유혹에 시달리는 인간의 본성을 가볍게 여기고 더 이상 죄에 빠지지 않을 것처럼 건방진 삶을 살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므로 돌트신경이 ‘확신’을 언급하는 것은 자칫하면 ‘행위’로 선택받은 여부를 판단하는 최종적 근거를 삼게 만들 위험이 있다. 김성수는 항상 이러한 ‘확신’을 경계하고 ”하나님 앞에서 저는 티끌일 뿐입니다“라고 하는 ‘겸손’을 강조한다. 선택받은 것은 하나님의 백보좌 앞에서 최종 판결이 내려질 때 알 수 있는 것이지, 판사가 판결문을 낭독하지도 않았는데 나의 재판 결과는 이렇게 나온다고 혼자서 자신의 판결문을 만들어 내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보시고 구원을 허락하신다. 내가 그리스도로 옷 입고 있으면 구원은 하나님이 허락하신다. 그러나 우리에게 내재되어 있는 에피두미아(탐심, 욕심)은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는 시점까지(네크로스의 죽음) 우리를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롬7:15~25) 7:15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16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고전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