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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않고 이기기로 했다』– 최명기
이 책의 저자인 최명기 선생은 정신과 의사다. 깨나 똑똑한 사람인데, 겉모습과 말투로 보아서는 그다지 똑똑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TV에서 자주 보았는데 그렇게 생각한다면 내 생각이 옳지 않을 수 있겠으나, 내가 볼 때는 그렇다는 말이다. 어쩌면 내 눈이 틀렸고 내면이 훨씬 단단한 사람인지는 모르겠다. 그는 중앙대 의대를 나오고 서울 아산병원에서 전문의 수련을 받았고, 전문의로서 이례적으로 미국 듀크대학교에서 MBA과정을 취득했다고 하는데, MBA란 Master of Business Administration을 줄인 말로 경영학 석사 과정을 말한다. 이는 “비즈니스 전반을 총괄적으로 배울 수 있는 고급 실무 과정으로 그곳에서는 단순히 이론 위주의 석사 과정이 아니라, 기업 사례를 바탕으로 전략·마케팅·재무·조직관리 등을 종합적이고, 실무 위주의 프로그램”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관련 콘텐츠들이 많으나 생략한다.
책 제목에서 보듯이 이 책은 사람 심리에 관해 연구한 것이다. 저자를 소개한 것을 보면 〈놀면서 배우는 심리학〉〈나이 들수록 오히려 혼자가 되면 편합니다〉〈내 곁에 진정한 친구가 한 명이 없어도 편안한 이유〉등 동영상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고 하고, 지은 책은 「걱정도 습관이다」「당신은 당신으로 충분히 빛나는 존재입니다」등이 있다고 하는데, 제목만 봐서는 인생을 걱정하면서 살기보다는 스스로를 이겨내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인 것 같다.
책의 제 목은 1장, 슬기로운 소통을 만드는 단어, 2장, 조용한 사람이 이기는 소통법, 3장, 대화가 답답한 사람을 위한 소통법, 4장, 어려운 사람에게서 나를 지키는 소통법, 5장, 건강한 관계를 만드는 소통법 등인데, 이것들을 진작에 더 젊었을 때 읽고 사회생활에 활용하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은 나이 들수록 고집이 세지고 소통도 안 한다고 하는 말을 듣는 것을 보면, 지금 이 나이에도 꼭 필요한 책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흔히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문제들은 ‘소통의 부족’에서 온다고 한다. 그런데 그 말은 틀렸다고 하는데, 오히려 ‘소통의 어긋남’에서 비롯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소통의 강박에서 벗어나 ‘말하지 않고도 관계를 지키는 현실적인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말이 힘든 사람, 말이 많아서 피곤하게 하는 사람, 잡담이 아닌 대화가 고통인 사람들 모두에게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단순하면서 강력한 메시지를 이 책은 전한다. ‘침묵은 회피가 아니다. 말로 싸우는 것은 세상에서 내가 무너지지 않기 위한 가장 단단한 선택이다.’다년간 심리 상담은 물론, 방송과 글로서 수많은 사람들의 고민을 가까이서 마주해온 저자는 도덕적 조언이 아니라,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소통의 전략을 제시해 주고 있다.
‘서로 통한다’는 疏通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그러므로 소통보다 더 나은 방법이 있다면, 그것을 선택해도 상관이 없다. 소통은 결과가 아닌 과정이기 때문이다. 소통을 통해 합의가 도출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단순한 소통도 나름의 의미는 있다. 소통이 다름을 인식하고 최상의 결과를 가져온다면 최고겠으나, 감정의 폭발로 관계가 완전히 파열되면 결과 역시 한쪽은 최악일 수 있다. 다만 다른 한쪽은 최상의 결과를 가져온 것이라고 볼 수는 있다.
언제나 내가 옳고 상대방은 틀렸다고 하다 보면 남의 말에 귀 기울이기 어렵다. 상대의 말에 열린 마음을 가지기보다 방어적으로 반응하게 되면 대화는 경쟁의 장으로 변질되고 만다. 항상 내가 옳다고 생각하면 소통은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럴 때는 상대방과의 관계마저도 틀어지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소통이 부재할 때는 상대방이 문제라고 말한다. 상대가 진실을 밝히지 않는다거나, 내 애기를 귀담아듣지 않는다고 상대를 탓한다. 하지만 상대가 내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내 애기를 듣지 않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상대방의 폭력에 시달리는 피학대자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침묵하거나, 탈출하는 방법뿐이다. 침묵과 탈출도 넓은 의미에서는 소통방식이지만, 선한 이가 악한 이와 맞대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공권력이다. 공권력은 국가가 행사하는 또 다른 폭력이다.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과는 대화가 필요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 이들은 국가의 폭력으로만 제압할 수 있다. 소통은 단순히 말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힘의 균형이 바탕이 되어야 가능하다.
어떤 분야에서든 자신이 우월하다고 느낄 때 소통할 자격이 자동으로 부여된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우월하다고 해서 상대방이 나를 그렇게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상대가 말하지 않는 한 나를 우월하게 보는지 혹은 별것 아니라고 보는지 알 수가 없다. 설사 내가 우월하더라도 그것이 곧 소통의 자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 모든 면에서 완벽한 사람은 없다. 빼어난 외모와 체형, 공부도 잘하고 집안도 부유하고, 목소리와 직업, 성격까지 완벽하고 게임이나 운전, 노래까지도 잘하며 세상 물정에도 밝은, 남의 말을 경청하며 쓸데없는 말 하지 않는 완벽한 사람은 존재하지를 않는다. 우리는 스스로 잘하는 부분을 근거로 소통할 자격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상대방은 나의 부족한 부분을 보고 소통 자격을 박탈하려고 한다.
소통은 양쪽 모두가 원할 때 이루어진다. 서로가 만족해야 진정한 소통이라고 할 수 있고, 그 과정도 동등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양자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만큼, 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흔히 소통을 거부하면 나쁜 사람이라는 압박이 작용한다. 대화가 어떤 사람에게는 승리를 위한 싸움터일 수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감옥과 같다. 대화를 거부하면 안 된다는 당위는 심리적으로 얽매이게 만든다. 누구에게나 대화를 거부할 권리, 침묵할 권리가 있다. 이는 단지 대화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과 경계를 지키기 위한 중요한 선택이다. 대화를 거부할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소통은 자유롭지 못하고, 소통이라는 진정한 의미를 가질 수 없다.
나는 스스로 누구와도 쉽게 친해지는 성격이라고 믿지만, 상대에게는 한두 번 본 사이임에도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오는 태도가 부담스러울 때가 있다.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데도, 자신의 속 이야기를 털어놓고 같은 방식으로 상대방도 마음 열기를 기대하는 경우가 있다. 사람은 친할수록 예의를 지키고 적절한 거리를 유지해야 오히려 사랑도 우정도 오래도록 지속할 수 있다.
조용한 사람이 이기는 소통법이 있다면? 집에서는 아주 말을 잘하는데, 밖에서는 거의 한마디도 하지 않는 경우, 이를 ‘선택적 함구증’이라고 한다. 그저 말수가 적은가 보다고 생각하지만, 초등학교에 가서도 그런 모습을 보이면 문제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먼저 말하는 경우가 거의 없으며 누가 물어봐도 ‘네’혹은 ‘아니요’라고 한 음절로만 대답한다. 언어장애인가 하고 치료를 받게 해도 별 효과가 없다. 이것은 말하기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이 불편하다는 것이다. 주변에서는 답답하지만, 정작 본인은 말 안 하는 게 오히려 편하다. 대인관계에서 오는 긴장감을 줄이는 방법으로 침묵을 선택한 것이다. 집에서 말을 잘 하는 것은 말하는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는 것이고,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것을 보면 언어지능이 매우 높을 수도 있다. 하지만 본인이 말하고 싶지 않은 상황에서 말을 강요받으면 오히려 말을 더듬게 된다.
좁은 의미에서 대화는 서로 말을 주고받는 것을 의미하지만, 넓은 의미의 대화는 침묵도 포함된다. 말보다 침묵이 더 편한 사람은 대화 중에도, 말하는 시간보다 침묵하는 시간이 더 길기 마련이다. 불편한 사람과 대화하는 것이 싫어지므로 가능하다면 그런 사람을 피하거나 만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말이 익숙한 사람은 말로써 자신의 주장을 관철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대화가 모든 문제의 해결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대화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한다. 이런 주장은 침묵을 선호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침묵에 익숙한 사람은 말에 약하다. 말을 해야 할 상황에서도 침묵을 유지하곤 한다. 모든 사람에게 말하고 싶지 않을 때 말하지 않을 권리가 우리에겐 있다. 대화는 의무가 아닌 선택이다.
어릴 때 말더듬이 있더라도 크면 저절로 호전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통 때는 말을 더듬지 않지만 흥분하거나, 당황할 때 말을 더듬는다. 언어능력의 문제라기보다는 감정조절의 문제다. 화가 나서 흥분하면 빨리 더 많은 말을 하고 싶다 보니 말을 더듬게 된다. 겁이 나거나 불안할 때도 그렇다. 말하고 싶지 않은 상황에서 억지로 말하려다 보면 말을 더듬는다. 스피치 훈련을 받아도 소용이 없다. 이런 사람은 침묵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말을 잘하는 연습이 아니고, 말을 안 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말하지 않으면 말을 더듬을 수 없다.
화는 잘 멈춰지지 않는다. 옆에서는 그만하고 용서하라고 한다. 그러면 그냥 졌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 그러나 그게 안 되니 화가 나는 것이다. 그럴 때는 차라리 옆에서 같이 욕하고 화내면 내 편이 있다는 생각에 오히려 화를 멈출 수 있다. 돈이 없고 연인도 없고 일도 없고 집도 없고 외모도 별로인데 자존감이 높을 수가 없다. 그런데도 자존감을 가져라, 높여라고 한다.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라고 한다면, 괴로워하는 것 자체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되어 버린다. 인간은 누구나 눈에 드는 것을 비교하면서 열등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내면의 힘으로 극복하라는 것은 헛소리에 불과하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막상 그런 상황에 처하면 자신이 먼저 열등감에 무너질 수 있다.
우울증도 그렇다. 정신력으로 이겨내라고 한다. 우울증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우울하고 힘들어서 사람을 피하면, 그래서 우울해진 것이라면서 억지로 사람을 만나게 한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면 생활이 불규칙해서 그러니 사람을 만나고 매일 운동을 하라고 한다. 내가 힘들어하는 꼴을 못 본다. 내 속이 썩어들어가는 것이 옆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겉으로 보기 좋으면 내가 좋아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에게는 쉴 권리,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슬퍼할 권리를 빼앗지 말라. 대신 함께 슬퍼하면 그 슬픔이 일찍 끝난다. 함께 화를 내고 함께 쉬어주자.
원래 사람은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혼자 있으면 편하다고 느낀다. 소통이 힘들 때 자연히 혼자 있고 싶어진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과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은 별개다. 혼자 있고 싶은 시간들이 지나면 후회하게 된다. 혼자 있고 싶어지는 가장 흔한 이유는 사실 우울증이다. 우울한 기분으로 평소처럼 이것저것 하는 것은 힘들고 어렵다. 이럴 때는 차라리 혼자 있는 났다. 상대방을 생각해서 억지로 만나고는 하지만 그런 관계가 깊어지다 보면 결국 서로 지치게 된다. 힘든 날은 억지로 만나지 않는 것이 좋다. 혼자 있는 시간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남과 대화하는 것이 답답할 때가 있다. 또 살아가면서 공연히 힘들다고 느낄 때가 있다. 힘이 들면 불안해진다. 불안하건 불안하지 않건 어차피 버거운 일이 닥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안해서 망쳤다면 불안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무조건 성공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불안 속에 하는 노력은 자기 위안은 될지언정 성공과 실패가 주는 영향에는 미약하다. 불안하지 않은 상태에서 미래를 생각하고, 계획적으로 노력하는 것은 극소수에게만 가능한 엄청난 능력이다.
어떤 일이든 도전하기 위해서는 머리와 기운을 써야 한다. 기운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하고 먹고 마셔야 한다. 그 과정은 비용이 든다. 어떤 일을 하느라고 힘을 썼는데 실패하면 결국 돈을 날린 결과가 된다. 이 경우 ‘밑져야 본전’이라는 말은 틀렸다. 다른 일로 즐거웠을 시간이 고통으로 변했기 때문에 그렇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실패하면서 배운다고 하지만 굳이 실패를 겪으면서 배울 필요는 없다. 충분히 배우고 익혀서 자신감이 생겼을 때 시도한다면 굳이 실패할 이유가 없다.
때로는 백 마디 말보다 한순간의 인내와 침묵이 도움이 되기도 한다. 말을 잘하는 사람은 많아도 침묵할 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침묵은 가장 중요한 소통의 수단이다. 침묵이 있어야 말도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다. 타고나길 무례한 사람으로 태어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다르다. 무례함이 힘든 사람이 억지로 온 힘을 짜내 무례하게 대처해도, 상대방은 더욱 거친 무례함으로 보복할 것이다. 상대방이 큰 소리를 지를 때 나도 큰소리를 지르지 못하면 모멸감을 느낀다. 상대방이 욕설을 퍼부을 때 내가 되받아치지 못하면 상처가 된다. 큰 상처를 피하기 위해 작은 상처를 감수해야 할 때도 있다.
평소에는 절대로 사과하지 않던 사람이 사과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가 사과하는 것은 용서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사과하지 않아 발생하는 손해가 너무 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이익이 될 때만 사과한다. 처벌을 줄일 수 있다고 믿을 때 사과한다. 하지만 설령 처벌이 줄어들어도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처벌이 너무 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의 사과는 받지도 말고, 용서하지도 말아야 한다.
세상의 일에는 정말로 별거 아닌 일은 없다. 만약 그 일로 싸움이 일어났다면, 그 일은 분명히 큰 의미를 지닌다. 엄청난 일을 별거 아니라고 여기는 한 싸움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보기에 큰일일지라도 감정을 침착하게 다스리고 해결한다면 별거 아닌 일이 될 수는 있다. 반대로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감정적으로 슬프고, 억울하고 화가 난다면 그 일은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누군가가 나를 미워하면 서로 말을 섞을수록 관계가 악화된다. 예를 들어 부모 자식 관계가 좋지 않은데 억지로 불러 앉혀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내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하고 말해봐야 효과는 없다. 오히려 거리감이 더 커질 뿐이다. 이럴 때는 말 대신 그냥 용돈을 주는 것이 최선의 소통일 수 있다. 용돈이 끈이 되어 시간이 흐르면서 관계를 회복하는 다리가 될 수 있다. 소통 강박에 사로잡힌 이는 숨막히는 대화로 상대방을 질리게 만든다. 소통이 만사형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한 생각이다. 상대방이 혼자 있기를 원할 때는 차라리 조용히 사라져주는 것이 최선의 소통일 수 있다. 소통의 목적은 소통 그 자체가 아니라 바람직한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점차 늘어나고 있다는 청소년의 ADHD(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 장애)가 심할 경우 집중력이 떨어져 즉각적인 대응이 어렵다. 누가 나를 놀렸을 때 당황해 반응하지 못할 때가 많고 심지어 놀림을 눈치채지 못하는 때도 있다. 분위기에 맞지 않은 엉뚱한 말을 하거나 눈치없이 행동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ADHD는 부주의로 인한 실수가 잦다. 실수하면 자연히 놀림의 대상이 되고 자존감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끼고 열등감을 가질 수 있으며, 놀림당할만하다고 합리화하며 감정을 억누르게 된다. 나를 놀리거나 조롱하는 이에게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상대방이 알아서 그만두기를 기다려도 놀림과 조롱은 멈추지 않는다. 하지 말라고 해도 멈추지 않을 때가 많다. 그렇다고 화를 내기도 어렵다면 굳은 표정으로 3분만 가만히 있어 보자. 상대방이 “왜 그러냐?”고 해도 아무 말하지 말고 “잘못했다”고 해도 반응하지 않으면 아무리 눈치 없는 사람도 결국 말을 멈추게 된다.
흔히 쓰는 말로 ‘가스라이팅*’이란 것이 있다. 여기에는 심리적 방법뿐 아니라 물리적 방법도 동원된다. 당하는 사람은 처음에는 거부하지만, 결국에는 받아들이면서 세뇌된다. 세뇌의 일종이다. 그러나 여기서 폭력을 동원하지 않았다는 특징이 있다. 폭력이 두렵거나 욕설과 비난이 두려워 상대방의 뜻을 따르게 되었다면, 가스라이팅이라 하지 않고 폭력죄나 협박죄로 처벌해야 한다. 가스라이팅은 교묘하게 상대방을 심리적으로 지배하는 방식을 말한다. 자신도 모르게 속아 넘어가 상대가 원하는 대로 믿고 행동하게 된다.
*가스라이팅 [gaslighting] : 타인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심리나 상황을 조작해 그 사람을 통제하고 조종하는 일
가스라이팅이 너무 흔하게 쓰이다 보니 폭력이나 협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상대방의 뜻대로 움직인 경우도, 그렇게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굴복한 것으로 협박과 가스라이팅은 엄연히 구분된다. 한 번의 속임에도 삶이 무너질 정도로 괴로울 수 있고, 몇 년 동안 속아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고통은 말할 수 없게 된다. 깨달음 이후에 찾아오는 마음의 고통 때문에 사람들은 종종 현실과 사람을 부정한다. 그동안 잘못된 믿음을 가졌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그만큼 힘들기 때문이다. 나의 불행의 원인이 된 사람을 오히려 은인으로 여기고 있다면, 가스라이팅에 걸린 것이다. 그것을 알게 되면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봐야 한다. 가스라이터는 당신을 그와 둘로 갈라놓고서야 그만 둘 것이다.
잘못이나 실수를 저지르고 사과하는 사람보다는 발뺌하거나 변명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문제 되는 것은 법이나 규정으로 정해지지 않은 부분이다. 상대방이 나를 무시했다고 느꼈을 때 나는 그에게 사과하라고 요구하지만, 상대방은 그런 적 없다고 주장하거나 내가 너무 예민하다고 자격지심이라고 할 수도 있다. 상대방이 나를 무시하거나 함부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하더라도 나는 마음의 상처를 받았으니 사과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마음의 상처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하고 말하면 오히려 기분만 더 안 좋아지기도 한다.
오래전 일이기 때문에 기억에 없다면서 사과하지 않기도 한다. 그러나 피해자는 시간이 흘러도 그 일을 잊지 않는다. 평생 트라우마로 남기도 한다. 나는 지금이라도 사과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하는 반면에 가해자는 세월이 흘렀는데도 잊지 못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고 잘못이기는 하지만, 용서를 빌어야 할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에 형식적으로 사과하는 경우도 있다. 사과는 잠깐이고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것에 대한 변명은 끊임없이 늘어놓는다면, 그것은 사과가 아니다. 잘못한 입장에서 사과하지 않고 잘못된 일 자체를 언급하지 않는 것이 가장 편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속담이 있다. 내가 편하면 남이 불편하고 내가 불편하면 다른 쪽이 편하다. 내가 편한쪽을 택하면 비난받고, 내가 불편한 쪽을 선택하면 화가 난다. 참아도 욕먹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참지 말고 저질러 버리는 것이 낫다고 여긴다. 그렇지만 불편을 감수하고 양보하기도 한다. 불편해도 다투기 싫어서 그렇다. 그리고는 스스로 합리화해서 양보했다거나 희생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세상을 살면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선택할 수 있을 때는 그나마 낫다. 뭔가를 얻고 싶지만 갈등은 피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하지만 나에게 이익이 되면 남에게 손해가 되고 반대도 된다. 그래서 우리는 나에게 이익이면서 남에게 손해가 되지 않는 상황을 기대한다. 그러다보니 결정을 미루게 되고 나에게 이익이 남에게도 이익이라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남을 설득하면 갈등없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갈등없이 윈-윈을 꿈꾸다가 결국은 궁지에 몰린다. 그나마 선택할 수 있을 때 선택했어야 한다고 후회한다. 그때 어떤 선택이라도 했더라면 지금보다는 나았을 것이다.
타인에게 공감을 못 하거나 누군가를 이용해 행동하는 사람을 ‘자기애성 인격장애’라고 한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그런 장애를 가진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될 때가 가끔 있다. 인격 장애를 가진 사람은 숭배를 강요하기도 하는데, 숭배받을 장점이 없더라고 그런 대우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어쩌면 숭배받을 능력이 있으므로 그 능력에 걸맞는 대우를 요구하는 인정욕구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실질적 성취와 무관하게 존경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그렇게 보인다는 말이다. 만약에 그가 미국 대통령이 아니라면 그는 분명 인격장애자다. 그는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에 매우 충동적이고 이기적이지만, 자기애성 인격장애라고 할 수는 없어 보인다. 그가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과도한 존경 요구는 인격장애가 맞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