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학자인 외우 김동소 교수는 "한국 최초"라는 이력을 많이 갖고있다.
지금은 거의 사어가 된 만주어, 이미 사어간 된 여진어, 거란어 등에 관한 연구에서도
독보적이거니와 만주어로 복음 성경을 번역, 역주한 이력은 "최초"라는 분야에서도 가히 백미에
속한다.
800여권의 언어로 번역된 성경 수집도 그 자체 독보적이거니와 그 뜻 역시 최초의 지경이겠으며
역사 영화에 나오는 여진어를 영화감독에게 자문, 교수한 것도 그 방면의 최초가 아니겠는가.
지금도 국어학 및 동북 아시아 언어 연구 세미나에서는 초청 발제의 자리를 놓치지 않으니
이 또한 연령대로 볼 때 최고, 최초가 아닌가 한다.
친구 자랑이 길어졌다 (꾸중이나 들을까 걱정이기도 하다).
사실은 이 친구의 선친, 소암 김영보 어른의 작품 전집이 최근 출간되었다.
한국 문학의 각 장르, 각 분야에서 이분이 달성한 최초, 최고의 기록은 이 또한 상상을 초월할
경지에 이른다.
일찌기 영남일보를 창간하시고 최초 편집국장과 이어 사장의 자리를 오래 맡으신 줄은 세상에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이전에도 소암 선생께서는 한국 근대 문학에서 수많은 최초의 기록을 세우신
줄은 아마 내 외우까지도 잘 몰랐지 싶다.
소암 어른의 겸양지덕이 깜박 중요한 역사적 사실들을 묻히게 할뻔 하였다.
언어학자인 외우 김동소 교수는 필생 동북어 언어학 연구에 심혈을 기우리다가 만년에 선친의
업적을 상고하게 되면서 크게 찬탄을 금치 못한 바 있었던듯하다.
만주어 연구의 속도에도 잠시 완속을 하면서 선친께서 광복 전후 어느 시점부터 멀리하고
묻어두셨던 한국 최초의 기록을 깨는 문학 작품들을 다시 찾아내고 그 의미를 재조명하여 세상에
알리면서 묵직한 하나의 전집으로 재창조해 냈으니 어쩌면 김동소 교수는 이런 방면에서도
최초가 아닌가한다. 덕분에 한국 문학사의 많은 부분이 새로 쓰여졌고 앞으로도 개정되어야 함은
물론이겠다.
소암 김영보 전집의 의의를 아래와 같이 정리해 본다.
<소암 김영보 전집> 소개글
소암 김영보 선생(1900-1962)은 20대에는 극작가로, 30대 이후에는 언론인으로 활동한
선각자이다.
1922년, 한국 최초의 창작 희곡집이자, 그 장정가가 알려진 최초의 단행본인 <황야(荒野)에서>
(조선도서주식회사)를 출간하여 한국 희곡사와 출판 미술사에서 꼭 기억될 인물이었고,
1930년에는 전래 동요ㆍ동화집인 <(악보 붙은 동요ㆍ동화집) 꽃다운 선물>(삼광서림)을 편찬
하여 당시 조선 어린이들에게 수준 높은 읽을거리를 제공한 아동 문학가였다.
개성학당 상업학교 교사(1921년-1924년)와 서울 수송유치원 원감(1924년-1926년)으로
있으면서 예술협회, 녹파회, 극문회 등 극단에서 연극 활동을 하며, <나의 세계로>, <연(戀)의
물결> 등 창작 희곡과 소설, 수필, 논설 등을 발표했다.
특히 <황야에서> 안에 나오는 빅토르 위고의 희곡을 번안한 <구리 십자가>는 한국 최초의
빅토르 위고 희곡 소개이고, 1923년 시사 문예지 <시사 평론>에 5회 연재됐던 번역 소설
<웰텔의 비탄>은 한국 최초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번역ㆍ소개라는 점에서 문예사적
의미가 크다.
결국 소암 김영보는 ‘한국 최초’라는 타이틀을 4개나 갖고 있는 ――최초의 창작 희곡집 작가,
장정가가 알려진 최초의 단행본 작가, 최초의 빅토르 위고 번역자, 최초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번역자>―문인인 셈이다.
1928년 <매일신보(每日申報)>의 편집국에 입사하여 광복 때까지 기자, 통신부장, 지방부장,
오사카 지사장, 경북 지사장을 지내며, 많은 논설 및 탐방기를 신문에 게재하였고, 광복 후
대구에서 최초의 지방 신문인 <영남일보>를 창간하여 그 초대 편집국장과 제2대 사장을
역임함으로써 대구ㆍ경북 지방 언론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한국 전쟁 중에는 서울에서 피란 온 많은 문인들을 신문사에 받아들여 한국 문학의
명맥을 이어갈 수 있도록 애썼다.
이 <소암 김영보 전집>은 김영보 선생이 전 생애를 통해 신문ㆍ잡지 등에 발표했던 글들과,
발표하지 않은 유고(遺稿)를 모두 모아, 현대어로 옮겨서 출판한 것으로, 한국 희곡사와 한국
언론사에 관심 가진 젊은 독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외우의 선친과 전집을 읽으며 만감이 있다. 보통 때 그저 최초, 최고, 최상 등으로 써보던
어휘를 재음미 해보게 된다.
최초란 정말 어떤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가?
단순한 성취감의 다른 표현일까?
천만의 말씀이라는 생각이 든다.
목숨을 건 대서양 최초 횡단의 린드버그, 정말로 목숨을 버리고 사하라에서 사라진 쌩 땍스,
어두운 실험실을 지키며 최초의 발견과 발명을 꿈꾸는 수많은 과학자들의 숨은 뜻은
"숭고함"이라고 밖에는 달리 부를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외우 김동소 교수와 그 어른의 선각한 뜻도 바로 이런 반열 혹은 그 이상으로 평가되어
마땅하리라는 자각이 든다.
그리고 사족으로는 미국에서 러시아어를 연구하다가 귀국하여 이제 의학계에서 활약하고 있는
외우의 맏 영식은 요즈음 관심이 집중되는 러시아 원동 지역의 환자 치료, 그리고 문화 교류에도
눈을 돌려서 한국 최초의 "한-러 의료 문화 장르"의 개척에 꿈을 두고 있지 않겠는가,
개인적인 기대를 가져봅니다.
◆ 한국 최초의 창작희곡집 ‘황야에서’
언론인 김영보의 활약상은 비교적 잘 드러난 반면 작가로서의 그의 활동은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그가 일정 기간 이후에는
문학활동을 일절 하지 않았으며, 어떤 이유에선지 자신의 문학활동에 대해서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영보는 22세인 1922년에 한국 최초의 창작희곡집 ‘황야에서’를 발표했다. 이 책에는 총 5편이 수록되었는데, 자유연애 등을 다룬
내용이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다. 김원중 전 영남대 교수는 ‘초창기 희곡문학과 소설의 비교연구’라는 논문에서 “1920년대에
김영보라는 희곡 작가의 성향이 이광수나 김동인보다 진보적이었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창작희곡집 ‘황야에서’는 현재 절판되어 시중에서 구할 수 없지만, 경매에서 수천만원의 가격이 형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뿐 아니다. 김영보가 남긴 저작물을 보면 그가 다양한 영역에 관심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김영보의 논설 ‘새 문화 창조의 이상과 종교’를 보면 스물을 갓 넘은 청년으로서 세계 사상사의 자취를 훑고 있어 놀라움을 준다.
이 논문에서 그는 현대의 사상이 점차 물질적으로 경주하고, 이미 있어 온 동서양의 종교가 모두 세속화하고 타락한 것을 개탄
했다.
새로운 문화창조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정신의 개조가 필요한데, 굳이 사람을 떠나서 신을 구하려 하지 말고 신의 자유와
부처의 평화를 지상에 건설하고자 하는 태도를 지닌 신종교 사상에 신순하여 나아갈 것을 역설했다.
시대를 앞선 작가이자 사상가였던 그가 문학을 그만두고 언론인의 길을 걷게 된 계기는 뚜렷하지 않다.
다만 누군가의 죽음과 관계가 깊었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김영보의 아들인 김동소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는 “그즈음 김우진과
윤심덕의 동반 자살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또 도쿄의 조선여자동포원에서 여학생 2명이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두 사건
모두 어떤 식으로든 아버지와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때의 심적인 고통이 문학활동을 그만두는 계기가 됐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영남일보 김은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