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6장 남장여인의 정체
여러 장로들은 다른 방도가 없었다. 별 수 없이 모두 앞으로 나가 미립에게 예를 올릴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그들은 이것이 씻을 수 없는 아주 큰 치욕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억지로 예를 올리고는 있지만 모두들 마음 속으로는 그 반대가 되는 심지들을 하나씩 심었다.
미립이 눈치챈듯 만족하지 못한 얼굴로 그들을 비웃었다.
"개방의 장로들은 원래 불같이 뜨거운 충성심을 가진 사람들이 아닌가요? 오늘 이 새 방주에 대해서도 마땅히 그같은 마음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소?"
장로들은 미립의 말을 귀넘어듣고자 했다. 이미 예를 행하여 비록 겉으로나마 충성을 다짐한 것인데 더는 참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속에서는 미립이 원한 불보다도 더 뜨겁고 강렬한 것이 활활 용솟음치고 있었다. 바로 미립에 대한 원망의 불꽃이었다.
범장로가 안되겠다는 듯 미립에게 다짐을 하며 나섰다.
"방주가 구양봉을 자기의 신변보호자로 삼고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이렇게 하는 것이오. 방주도 해는 내일도 뜬다는 것을 알아두어야 할 게요."
범장로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자존심조차 누르며 내보이는 쉽지 않은 말이었다. 그러나 미립에게는 지나는 날벌레의 날개짓소리로도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범장천, 내일이 있으면 어찌하겠소? 당신이 날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말이요? 아니면 나의 아버지에게 했듯이 독으로 두 다리를 못쓰게 만들기라도 할 건가요?"
미립의 말에 범장천 뿐만 아니라 모든 장로들의 머리속은 혼란스러워졌다. 그녀는 아직 자신들을 그 범인으로 일축하려는 태도를 버리지 않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범장천은 이 개방에서 누가 과연 미운산을 폐인으로 만들었을까 고심했다. 그토록 훌륭한 인물을 망가뜨렸으니 실로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미립은 방주의 자리를 더욱 견고하게 다지려는 듯 다시 장로들의 시선을 끌어모았다.
"여러 장로들이 나의 명령에 따르기로 원하였으니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으시오."
이미 철저한 계략에 의해 꾸며왔던 일이기에 미립의 행동은 거침이 없어 보였다. 아주 매끈하게 일을 처리해나가는 미립을 보는 장로들은 그저 화가 치밀어오르는 가슴을 누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먼저 범장천에게 명령했다.
"범장로. 그대는 소씨 거렁뱅이를 즉시 찾아내어 내게로 오라 전하시오!"
그녀는 이어서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에게도 명령을 내렸다.
"그대들 두 사람은 발 빠른 첩자를 돌려 구구 중양절 날 개방 분타(分舵)의 타주(舵主)들은 모두 건강(建康)으로 모여달라고 하시오. 내가 선포할 말이 있어요."
범장로는 그녀의 말에 빈틈이 없다는 사실에 또 한번 놀랐다. 비록 대답은 하지 않았으나 결국 묵인을 한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사개 정원과 소미타 추우는 시키는 대로 하겠다며 대답을 했다.
미립이 고개를 돌려 소검 오평에게도 말했다.
"그대의 기개는 내가 탄복하는 바이요. 그러나 당신은 끝내 나를 따르지 않을 건가요?"
소검 오평은 미립이 개방의 방주의 자리에 올라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순간적으로 이리저리 묘안을 모색해보았지만 선뜻 잡히는 것이 없었다. 일단 그녀를 인정해놓고 보자는 마음 쪽으로 머리가 기우는 것에 자신도 놀라면서 어쩔 수가 없었다.
"좋수다."
하고 머리를 숙여 대답하고야 말았다.
나머지 장로들은 소검 오평의 행실을 보며 속으로 개탄의 눈물을 흘렸다. 그는 가장 강직한 성품을 가졌다고 알려진 인물인데 이런 몰골을 보이다니 눈앞에 시커먼 먹장구름떼가 몰리는 기분이었다.
노명성과 노경 그리고 나장태에게도 명령이 내려졌다.
"미방주께서 폐인이 된 일은 공적인 것보다 사적인 것으로 보지만 모두 방내의 대사에 속하오. 그러니 세 장로들께서는 전력을 다해 그 일을 밝혀내시오. 한가지 그 일에 대해 소홀히 하는 자가 있다면 내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그런데 노명성이 뜻하지 않게 미립의 말에 제동을 걸었다.
"미립방주님, 우리더러 그 일을 하라고 하는데 과연 가능하다고 봅니까?"
미립이 대답을 미룬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노명성의 물음을 무시하듯 뒷짐을 지고는 방안을 서성였다.
"우리 아버지는 일찌기 두 사람에게 분부하여 그들을 방주에 앉히려고 했었소. 한 사람은 모두 알다시피 소씨 거렁뱅이였고 다른 한 사람은 홍칠공있었소. 아버지는 홍칠공에게 <강용팔장>을 전수해주기도 했어요. 그러나 시간이 모자라 그에게 미처 <타구봉법>은 전수해주지 못했어요. 그래서 내가 홍칠공을 찾아내어 그에게 타구봉법을 전수해주면 일을 좀더 수훨하게 풀어나갈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런 다음 난 방주자리를 아예 홍칠공에게 넘겨주려고 해요."
장로들은 이제서야 미립이 녹옥죽봉을 탈취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깨달은 장로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그녀가 방주 자리를 노린 것은 그런 야심이 있었기 때문이란 것도 알게 되었다. 장로들은 미립에 대한 태도를 허물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여러 장로들께 잠시 죄를 지은 점 사과를 드려요."
미립이 의외로 장로들에게 다가와 예까지 몰리며 허리를 숙였다. 장로들은 미립에게서 더욱 벗어날 수가 없는 몸이 되고 말았다. 재간은 물론 위풍도 부릴 줄 아는 여인 앞에서 장로들은 설복이 되고만 셈이었다.
미립이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신호를 보내자 여인 셋이 술단지를 들고 나왔다. 모두 세 개였는데 미립이 그것을 가르키며 한껏 웃어보였다.
"이 단지 속에 든 술은 보통술이 아니랍니다. 장로들께서 술을 즐기신다기에 마련한 것이예요. 어느 장로님께서 오늘 이 자리에 어울리는 이름을 지어보실래요? 그런 다음 우리 함께 축배를 들어요."
그런데 한가지 술단지를 들고 있는 여인들은 누더기옷을 입고 나왔지만 어딘가 이상했다. 원래부터 닳아 남루해진 옷이 아니라 일부로 천을 찢어 만든 것처럼 보였다. 가만히 보니 자루를 뜯어 만든 옷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장로들은 미처 깨닫지 못하는 눈치들이었다. 여인들이 따르는 술냄새에 코를 갖다대고는 벌써 취한 듯 자세를 풀었다. 범장천과 노명성은 술냄새를 맡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확 얼굴로 풍겨오는 냄새에 범장천이 화들짝 놀랐다. 그는 장사를 해본 적이 있어 다른 사람과는 반응이 달랐던 것이다.
"아니 이건! 강남의 여아홍(女兒紅)이란 술인데 담근 지 오십년이나 되는 것이로군!"
장로들이 매우 놀라워했다. 오십년이나 되었다면 술을 담근 사람이 소녀였다 해도 지금은 할머니가 되었을 게 분명했다. 여인의 성숫미처럼 오랜 세월 발효되어왔을 실로 귀한 술이 아닐 수 없었다.
여인이 이번엔 다른 단지의 덮개를 떼어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술냄새는 나지 않고 단지 속에서부터 새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이었다. 미립이 여인을 시켜 술을 따른 다음 소검 오평에게 보이라고 했다.
소검 오평이 냄새를 맡고 김을 확인하고는 말했다.
"이건 황궁에 있는 화주(火酒)가 틀림없어!"
방안에 모인 사람들 모두가 소름이 돋을 정도로 놀라움에 휩싸이고 말았다. 이유는 화주라는 술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화주를 알아본 소검 오평에게 그 원인이 있었다. 놀란 것은 미립도 마찬가지였다. 화주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그런데 소검 오평이 첫눈에 알아맞춘 것이었다.
미립은 이 소검 오평이 어떻게 화주를 알아본 것인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굳어졌다.
"난 이 술을 마신 적이 있지요."
하며 소검 오평이 미립에게 설명을 했다. 미립이 탄복을 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전 이 술을 구하느냐 온갖 힘을 다 들였는데 장로께서는 벌써 마셔보기까지 했다니 정말 놀라워요."
소검 오평이 웃었다.
"하하, 사실은 내게도 분에 넘치는 복이 있었지요. 어느날 홍칠공이 한 단지를 얻어와 함께 마셨는데 벌써 삼년도 더 넘은 일이지요. 하지만 지금까지 그 맛은 잊을 수가 없소."
소검 오평이 이렇게 말하고는 얼굴을 붉혔다. 그는 성미가 깐깐하고 강직한 사람이라 술을 맛본 내력을 말하고는 부끄럽게 생각되었던 모양이었다.
장로들은 소검 오평이 원래 말수가 적은 사람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 성미를 가진 소검 오평이 이처럼 감탄의 말을 이어가자 틀림없는 훌륭한 술이라 생각되었다. 미립이 다시 신호를 보내자 마지막 여인이 술단지를 내밀었다. 그 여인이 내민 술단지를 이번엔 노명성이 알아보고는 깜짝 놀랐다. 다른 장로들은 그 술이 어떤 술인지 알지 못했다. 그 술은 그리 특별해 보이지는 않았다. 단지 안의 술은 그리 맑지도 않고 모래 같은 알갱이가 드문드문 섞여있었다.
그러나 향기만은 독특했는데 꼭 배향기 같았다.
소미타 추우가 대신 물었다.
"이건 무슨 술이요?"
그러자 미립이 기꺼이 물음에 답해주었다.
"이건 천하에서 아주 진귀한 장백산 곰술이지요. 이 술은 보기에는 이래 보여도 아주 독하답니다."
곰술이라면 아주 기이한 술이었다. 황금계절인 가을에 과원의 배나무에 배가 무르 익으면 저절로 떨어지는 것처럼 향기만으로도 사람을 취하게 만들 수 있는 술이었다. 가을에 곰이 땅에 떨어진 과일들을 보고 게걸스럽게 씹지도 않고 삼키는데 그중 들배가 곰의 위속에서 발효되면 그 곰은 취해 쓰러져 잠이 든다는 것이다. 그때 사람들이 달겨들어 곰을 묶어놓고 산채로 배를 가른다. 그리곤 곰이 방금 삼킨 것들을 꺼내어 술에 담가 만들었다는 게 바로 이 곰술이었다.
그러니 이런 술이 진귀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장로들의 얼굴에 흡족한 기운이 만연했다. 강남의 여야홍이란 술은 담근 지 오십년이나 된다니까 보기조차 힘든 술이요, 화주는 임금의 궁전에만 있는 술이니 역시 얻기 힘든 술이며, 이 곰술이란 것도 살아있는 야생곰의 배를 갈라 얻은 술이니 진귀한 술이 아닐 수 없었다. 개방의 장로들은 남북 각지를 돌아다녀 견식이 많은 사람들이었지만 이런 술들은 아직 마셔보지 못했던 처지였다.
미립이 다시 신호를 보내자 여인들이 의자들을 날라왔다. 미립은 장로들을 좌석에 청해 앉힌 다음 말했다.
"술은 마땅히 도수가 낮은 것부터 시작해야 점점 취흥이 더해가는 법이지요. 마치 겨울로부터 시작하여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의 절기를 겪는 것처럼 차츰 뜨거워져야 하지 않겠어요."
먼저 강남의 여아홍이란 술부터 마시기 시작하였다. 단지에 있는 향기로운 술을 사발에 따라놓으니 더욱 진하게 향이 퍼졌다. 그 향기만으로도 취할 것만 같았다. 장로들은 제각기 술을 음미하고는 부드럽고 시원한 맛에 탐복을 했다. 차츰 그 향기는 뜨거운 열기로 변해 가슴속에서부터 서서히 끓어올랐다.
그 다음이 화주였다. 화주는 궁전의 술로 황제가 마시는 귀한 것이었다. 적당한 열기로 가슴을 데우고 있는 여아홍에 가미된 화주는 겉잡을 수 없는 흥분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온몸이 불덩이처럼 달라올랐지만 나른하다거나 정신이 흐려지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눈앞으로 맑은 기운이 자리하는 듯했다.
술을 마시며 시중을 드는 여인을 바라보니 더없이 미인으로 비쳤다. 그 옆에서 줄곤 미소를 띠우고 있는 미립 역시도 천하에 둘도 없는 절색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 다음이 곰술 차례였다. 미립이 웃음을 가득 얼굴에 그리며 말했다.
"이 술을 마시려면 한가지 지켜야할 게 있어요."
"그게 뭐요?"
범장천이 거나하게 취한 눈빛을 미립에게로 옮겼다.
"단숨에 비워야 하지요. 그래야만 흥이 나는 법이거든요."
장로들은 미립의 말대로 잔에 담긴 술을 단숨에 들이키기 시작했다. 그 술은 어찌나 독한지 예리한 칼로 뱃속을 후벼파는 듯했다. 그러나 그 짜릿하고도 가벼운 통증을 동반한 맛에 장로들은 또 한번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새로운 흥분을 가져다 준 것이었다.
소검 오평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호탕하게 웃었다.
"허허허, 정말 훌륭한 술이군, 훌륭해!"
장로들도 하나같이 모두 엄지손가락을 세워 칭찬의 말을 한마디씩 주고 받았다.
묘대야는 방안에서 자화(字畵)를 감상하고 있었다. 그는 서묵(書墨)에 각별한 취미를 갖고 있어 고서와 자화를 대하기만 하면 빠짐없이 사들이기도 했다. 또한 때때로 그것들을 집에서 감상하는 것을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한 시간으로 여겼다.
그의 장서에는 옛날 무명씨의 작품으로부터 창힐(蒼*)의 귀곡도(鬼哭圖)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소장품들이 보관돼 있었다. 귀곡도에는 창힐이 글자를 만들 때 귀신들의 노여움을 사게 되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창힐의 주위를 숱한 귀신들이 둘러싼 채 그와 실랑이를 하고 있는 그림이었다. 이밖에도 당조 때의 몇몇 대가들 그림도 보관돼 있기도 했다. 이런 명화들은 아주 진귀하여 쉽게 구경할 수조차 없었다.
묘대야는 그 그림들을 어루만질듯 감상을 하면서 매우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때 누군가 밖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묘대야님 계시오?"
묘대야는 그림들을 얼른 간수하며 대답했다.
"누구요?"
묘대야가 문발을 헤치고 밖을 내다보니 그곳엔 선비가 서 있었다. 그런데 선비의 행색이 어딘지 어색해 보였다. 묘대야는 곧 그가 미립이란 것을 알아차렸다.
묘대야와 미립 간에는 지난날 아주 각별한 인연이 있었다. 그는 미립과 가까워지려고 노력했었는데 알고보니 묘령의 여인이었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묘대야는 실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자기를 다시 찾아온 미립을 보자 묘대야는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는 미립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말했다.
"묘하군, 과연 묘해."
미립의 남복 차림에서 묘대야는 공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다만 얼굴이 지나치게 하얗고 눈매가 곱다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또한 귀도 공자보다는 작았다. 미립을 바라보는 묘대야는 저도 모르게 옛정에 빠져들고 말았다.
'나는 이전에 저 여인이 사내인 줄 알고 애써 잘 보이려고 했었지. 그런데 여인인 것을 알게 되어 얼마나 실망을 했던가.'
그런데 묘대야는 다시 남장을 하고 나타난 미립을 보자 마음에 혼란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동안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고 깨달았다. 비록 여인이라고 해도 겉으로는 사내였다. 언제 자신이 저런 수려한 용모를 가진 사내와 접촉해 볼 수 있단 말인가. 이제부터라도 정답게 대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마침 잘 왔네. 내가 심심하던 참이었는데 함께 유희라도 즐기세."
미립이 예전과는 다르게 자신을 대해주려는 묘대야의 태도에 약간 놀라는 듯했다.
"형님께서 소원이라면 그렇게 하지요."
그들 두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문을 나서 큰거리에 이르렀다. 그들은 먼저 호수 쪽으로 가기로 했다. 그러나 유람객들로 너무 붐벼 그들은 자연히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게 되었다. 사람들이 그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호기심 어린 얼굴로 서로 소근댔다.
그들은 호수를 지나 낙사거(*士居)란 곳에 이르렀다. 이 낙사거는 아주 아늑한 곳이었다. 비록 그저 그런 술집이긴 했지만 이곳에 와 술을 마시는 사람들은 대체로 국자감(國子監)에서 글을 쓰는 사람이거나 풍류재자(風流才子), 묵객소인(墨客騷人)들이 대부분이었다. 이곳의 유난히 새하얀 바람벽에는 온통 시구절들로 얼룩져 있었는데 운치가 있고 글씨체도 멋졌다. 또한 금속공구로 글씨를 새겨놓은 것이어서 그 멋이 색다르게 느껴졌다.
묘대야와 미립은 이층으로 올라가 정갈하게 마련된 좌석에 앉았다. 주인이 곧 달려왔다. 이 낙사거의 사람들은 다른 술집의 시중꾼들과는 달리 모두 소매를 졸라맨 짧은 적삼을 입고 있었다. 머리에는 일률적으로 똑같은 모자를 썼으며 그 모자 뒤에는 이삭처럼 생긴 꼬리가 달려있는 게 특색이었다. 그들은 분주하게 몸을 움직이며 술시중에 여념이 없었다.
또한 이곳의 시중꾼들은 두 부류의 사람들로 나눌 수 있었다. 한 부류는 글을 읽다가 중도에 포기한 사람이었는데 이들은 그러나 이해할 수 없지만 시중꾼의 노릇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곳의 시중꾼들의 절반은 성품이 곧은 선비출신들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른 한 부류는 용모가 깔끔하게 생긴 계집들이었다. 하지만 아두(*頭)의 옷차림과는 달리 당조 때의 복장을 하고 있는 게 특징이었다. 이들은 일솜씨가 일품이었고 손님들의 비위를 잘 맞추는 것으로 유
명했다.
두 사람 앞으로 곧 술과 요리가 날라왔다. 묘대야가 술잔을 들며 입을 열었다.
"동생과 오랜 만에 한 자리에 앉아보는군."
미립이 대답 대신 미소를 보였다. 두 사람의 나이는 사실 차이가 많아 형제라는 말이 어울리지가 않았다. 하지만 묘대야는 궁궐 속에 오래 거처하면서 근심걱정 없는 나날들을 보낸 사람이라 겉보기에 조금도 늙지가 않았다. 비록 몸이 좀 불기는 했지만 아직도 용모가 우아하고 젊어보이기까지 했다.
미립은 반면에 단정하고 수려한 선비 같았다. 그래서 그들이 올라오자 시중을 드는 계집애들이 자꾸 미립에게 눈길을 주기도 했었다.
미립도 술잔을 들었다.
"시귀를 짓지 않고서야 어디 낙서거에 왔다고 할 수 있겠는지요. 형님께서 한수 지어보시는 게."
그러자 가까이 있던 계집이 얼른 웃음을 머금으며 지필묵을 받쳐들고 왔다. 그 계집은 옷소매를 걷고는 먹을 갈았다. 그러면서 자꾸 미립을 훔쳐보는 것이었다.
이 낙사거에서 시를 짓는 일을 놓고 떠도는 말이 있었다. 새하얀 벽에다 장방형의 공간이 생기도록 금을 그어놓았다. 이 장방형 속에 글을 남기려면 은자를 좀 내야했다. 이 낙사0거는 풍류인사들이 모여드는 곳이라 때로는 당조(當朝)에서 가장 유명한 문인들도 가끔 찾아올 때도 있었다. 이름을 날리기 위해서 명부에 기록하는 것 말고도 이 벽에다 시와 이름을 함께 남기기도 했다.
미립이 제법 묵직한 은덩어리를 꺼냈는데 얼추 보아도 쉰냥짜리는 될 성싶었다. 미립이 그 은덩어리를 탁자 위에 놓으며 말했다.
"이것을 받게."
그러자 계집이 은덩어리를 집어 살펴보지도 않고 옷소매 속에 얼른 감추는 것이었다. 벽에 시를 써도 좋다는 뜻이었다.
묘대야는 왼손에 잔을 든 채로 오른손으로 붓을 집었다. 여유있는 자세로 벽 쪽으로 다가가는 묘대야는 속으로 말했다.
'동생이 내게 시를 지으라 했는데 실망시켜서는 안될 것이다.'
벽 앞에 선 묘대야는 계집이 내민 벼루에 붓을 담갔다 천천히 들고는 시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제목은 "국화를 읊노라(*菊)"였다.
꽃송이 고개 숙이니
금빛 뿔용이 깃드는 듯
밝고 어두움이 모두
그대에게 달렸어라
빛과 색깔 취하지 않고
그대로도 절색이니
너의 집에 가지 말고
내 집으로 오소서
묘대야는 시를 다 지어놓고 웃음 띤 얼굴로 미립을 주시했다. 묘대야는 방금 전 지은 시에 대해 다시 한번 속으로 음미해 보았다. 바로 미립을 향해 쓴 자신의 마음이었다. 이 시를 미립이 읽고나면 자신의 진심을 알아차릴 거라 생각했다.
미립이 시를 보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훌륭해요. 참 멋진 시예요. 형님이 이처럼 글재간이 대단한 줄 정말 미처 몰랐는데요. 형님이 진작 이런 글재주를 보였더라면 장원급제하여 조종을 더욱 빛낼 수도 있었을텐데 말이예요."
"너무 추켜세우지 말게. 되는대로 뇌까린건데 어디 쓴 만한 구석이라도 있는가? 이 낙사거의 명사(名士)들께 웃음거리나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
미립이 고개를 크게 저으며 말했다.
"겸손의 말씀이세요. 큰형님의 재질에 전 아주 탄복을 했어요."
그러나 시중을 드는 자 중 몇몇은 매우 마뜩찮은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까짓 시구를 가지고 저 야단이라니 하는 낯빛이었다. 사실 이곳에서는 아무나 돈만 내면 시를 지을수 있으니 그들의 눈에는 달리 비칠 수 없었다.
반면에 이름을 오래 남길 만한 것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바로 왼쪽 벽을 보면 대거사 구양수(歐陽修)가 국화를 읊은 부(賦)가 씌여져 있었다. 또한 문 옆에도 대학사 소식(蘇軾)이 남긴 주사(酒*)가 펼쳐져 있기도 했다. 비록 일시의 취흥에 의해 씌여진 것이긴 하지만 그 농후한 기백과 운치는 속인들이 따를 수 없는 경지의 것들이었다.
이번엔 묘대야가 품속에서 은덩어리를 꺼내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자, 동생 차례요."
"저는 관두겠어요."
그러나 묘대야가 재차 권하자 미립은 어쩔 수가 없었다. 미립이 벽에 쓴 것은 한수의 소령(小令)이었다.
하도 권하기에 사양타 못해 나섰노라
동쪽 기슭 낙사거에서
술김에 부(賦)를 지으려나 뜻대로 안되네
구양수가 이곳에서 시를 읊었고
소식이 이곳에서 문재를 떨치었거니
전인들의 그 재질에 어이 미치리
묘대야가 그것을 보고는 마음 속으로 감탄했다. 미립의 문재가 자기보다 월등히 높았던 것이다. 한수의 소령을 짓는데도 이처럼 사나이의 기백이 넘쳐흐르지 않는가. 자기는 날마다 식칼과 국자나 주무르다 보니 사나이의 기백이란 무뎌졌다는 것에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묘대야는 미립을 더욱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묘대야가 한껏 웃으며 말했다.
"동생, 내 쉰냥짜리 은자를 모처럼 값지게 썼네. 동생의 글을 보니 이 형은 아주 부끄럽기 짝이 없다오."
이들의 웃음과 행동을 멀리서 지켜보는 이가 하나 있었는데 서생같은 차림의 인물이었다. 정확히 미립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마도 미립의 재능에 관심을 두고 있는 모양이었다. 미립이 시선이 따가워 고개를 그쪽으로 돌렸다. 마침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미립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연형(年兄)께 인사드립니다."
연형이라 부른 것은 미립을 향해 존대를 하겠다는 뜻이었다. 연형이라고 하면 같이 과거를 본 선비들 사이에서 진사가 된 상대를 향해 부르는 호칭이었다.
미립이 바삐 예를 갖추며 자신도 똑같은 자세를 취했다.
"연형께도 인사를 드립니다."
자리에 앉은 서생차림의 사내가 잔을 들며 말했다.
"저는 연형을 오랫동안 지켜보았습니다. 연형께서는 이처럼 풍채가 좋으신데 필시 저보다는 선배일 듯싶군요. 제가 연형과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어떠하신지요?"
"벌써 말문을 열어놓고 있지 않습니까?"
하며 미립도 점잖은 태도로 응수했다.
한편 묘대야의 기분은 그늘이 져 있었다. 마침 술도 어지간히 마셨고 시를 놓고 한껏 즐거운 시간을 가졌기에 그만 미립과 일어서려던 순간이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인물이 불쑥 끼어들어 속으로 은근히 화가 났던 것이다.
그러나 묘대야의 이런 심중을 알아차리지 못한 사내는 미립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전 장성(章誠)이라 부르고 호는 자거(子居)라 하죠. 그리고 정도(定都)사람으로 삼방이갑(三榜二甲) 진사이기도 합니다. 연형께서는 어디서 오신 뉘신지 알고 싶습니다만."
불현 미립은 상대의 태도에 웃음이 나왔다. 갑자기 상대가 싱거운 사람으로 비쳐졌기 ㄸ문이었다. 그러면서 미립은 마지못해 응수를 해주었다.
"부끄럽습니다. 저는 향시에는 참가해보았으나 아직 문턱조차 넘어보지 못한 사람이니 부디 비웃지 마십시오."
그러자 장성이라 자칭한 사내가 느닷없이 탁자를 치며 화를 냈다.
"공정하지 못하군. 정말 불공평해! 이처럼 재기와 식견이 있는 인물이라면 장원급제라도 문제가 없는데."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는지 묘대야가 차가운 시선을 그에게 던지며 말했다.
"그만 물러가시오!"
장성이 묘대야의 반응에 당황하며 미립을 바라보았다.
"이 연형께서는 지금 뭐라 하시는 건지요?"
묘대야가 다시 언성을 높였다.
"어서 물러가란 말이다!"
그런데 장성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묘대야의 태도를 책망하려고 했다.
"이 동생은 이토록 얌전한데 저 연형께선......"
말끝을 얼버무리는 것이 묘대야를 업신 여기겠다는 뜻이었다. 고개마저 설레설레 흔들며 매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묘대야가 장성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정말 물러가지 안겠어!"
급작스레 벌어진 일이라 장성은 꼼짝없이 아가미를 잡혀 끌어올려진 잉어꼴이 되고 말았다. 또한 멱살을 잡힌 탓에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지만 힘이 들어보였다. 겨우 묘대야의 억센 팔을 물리치고 입을 열었다.
"당신 이게 무슨 짓이야? 감히 사문(師門)을 욕보이다니?"
그러자 묘대야가 기다렸다는 듯이 주먹을 그에게 날렸다.
"어쿠!"
장성은 주먹을 맞고는 벽 쪽으로 나가떨어졌다. 묘대야가 미립의 손을 이끌고는 술집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술을 마시고 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길을 막았다.
"네 놈은 도대체 어떤 놈이냐! 어떤 놈이기에 까닭없이 우리 선비를 때리느냐?"
"저 놈을 관청에 일러바쳐! 일러바치라구!"
"누가 이 낙사거에까지 와서 행패를 부려!"
여기저기서 묘대야를 가로막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그러나 묘대야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미립의 팔을 잡고는 술집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들은 계속 쫓아왔는데 그러나 선뜻 달겨드는 사람은 없었다.
묘대야가 돌아서며 말했다.
"동생, 우리집으로 가서 못다 한 얘기나 하지?"
미립이 난처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전 할 일이 있어 안되겠어요."
그러나 묘대야가 미립의 팔을 잡아끌었다.
"동생, 우린 아직 풀어야 할 이야기가 많은데 이대로 헤어지겠다는 건가?"
묘대야는 강제로 미립을 끌고는 객점으로 들어갔다.
객점에 자리를 잡은 묘대야는 미립의 눈을 응시했다. 그는 내심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털어놓지를 못하고 미립의 얼굴만 바라볼 뿐이었다. 묘대야의 눈에는 그동안 참아두었던 정이 잔뜩 어려 있는 듯했다.
그는 원래 여인들과 정을 나누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런 그가 처음 미립을 마음에 새긴 것은 미립을 사내로 알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미립이 자기와 함께 철장방이란 범굴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들어가 한 일에 대해 매우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미립이 사내가 아니라서 그는 실망을 하고 말았다. 더군다나 후에 홍칠에게 쫓겨나는 등 미립을 석연치 않게 생각하는 점도 있었다.
"동생, 동생은 아직 날 미워하고 있는 게 아니오?"
그러자 미립이 웃었다.
"왜 제가 당신을 미워하겠어요."
묘대야는 미립의 반응에 어리둥절해졌다. 미립이 자기를 미워하지 않고 있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였다. 지난날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고 있는 미립에게서 또 한번 야릇한 심정을 느낄 수 있었다. 묘대야는 차츰 미립의 태도에 기분이 흡족해질 수밖에 없었다.
"미립 동생, 그때 일에 대해 내가 사과를 하지."
그러면서 미립에게 예까지 올리려고 했다. 그러나 미립이 제지했다. 미립이 새하얀 손을 들어 자신을 말리자 묘대야는 잠시 정신을 잃을 뻔했다. 그 손은 아주 섬약해보였다. 미립이 손으로 묘대야의 입을 막으면서 말했다.
"형님, 당신의 다섯 형제들은 무엇 때문에 황궁을 떠났나요? 무슨 일이라도 벌이려는 건가요?"
갑자기 화제를 돌린 미립에게서 묘대야는 낯선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왜 미립이 그런 걸 물어오는지 알 수 없었다.
"왜 그런 건 묻지?"
"알고 싶어요."
"음...... 황제 앞에서 아무리 오래 일을 해봤자 음식을 만드는 사소한 일밖에 더 하겠나? 아무런 보람도 재미도 없었어. 우리 다섯 형제는 그일을 그만두고 밖에서 더 즐거운 일을 하고 싶었지."
하며 묘대야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전번에 널 그렇게 대했지만 넌 결코 나를 미워하지 않고 있구나. 그걸 보면 너 역시 내게 감정을 두고 있는 게 분명해. 사실이 그렇다면 내가 널 속일 필요야 없겠지.'
묘대야가 손을 뻗어 미립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동생, 난 동생을 좋아해. 난 조금도 동생을 속이고 싶지는 않아. 내 진심을 어느 때이든 동생에게 말해줄 수 있어."
묘대야의 얼굴 바로 앞에서 미립이 갑자기 호 하고 낮은 숨을 내쉬었다. 그 바람에 묘대야는 혼백이 흩어질 듯 정신이 몽롱하고 온몸이 나른해져왔다.
"동생, 우리 이 침상에 누워 밤을 밝혀 밀린 얘기를 나누지."
미립이 곧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옆에서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는 묘대야는 흥분되었다. 옷을 벗은 미립이 침상으로 오르더니 곧 이불 속으로 몸을 감췄다. 그러면서 묘대야에게로 뜨거운 눈길을 보냈다. 흥분을 이기지 못한 묘대야가 허겁지겁 옷을 벗고는 미립 옆으로 가 앉았다. 미립을 끌어안으려는데 갑자기 미립이 이불 속에 넣었던 한손을 꺼냈다. 그 손은 무언가를 움켜쥐고 있었다.
"형님, 내 손에 무엇이 있는가 보시겠어요?"
그러자 묘대야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그게 뭐지? 그게 아무리 귀하고 희한한 물건이라도 동생만큼이나 하겠나."
하며 다시 미립을 안으려고 했다. 미립이 묘대야를 가볍게 밀어냈다. 묘대야의 눈에는 미립의 아름다움만이 들어차 있는 듯했다. 아름다운 미색을 갖춘 여인이 더군다나 귀공자 차림을 하고 있어 더욱 묘하게 끌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미립은 자꾸만 엉뚱하게도 자기 손에 들린 것을 보라고 할 뿐이었다. 미립의 부드러운 살결만을 생각하고 있는 묘대야로서는 안달이 날 판국이었다. 그녀의 손에 황금이 들어있다고 해도 지금으로서는 거들떠보고 싶지 않았다.
미립이 묘대야의 심기를 엿보았는지 묘하게 웃으며 입술을 놀렸다.
"당신이 관심이 없다 해도 전 보여드려야 하겠어요."
묘대야가 양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다급하게 말했다.
"그럼 어서 보자고. 도대체 무엇인가 그래?"
미립이 천천히 손을 폈다. 그 안에는 새빨간 옥석으로 된 교룡(*龍)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것을 본 묘대야가 아연실색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동생...... 이 금용을 어디서 얻었지?"
이것은 원래 쌍으로 되어있는 옥벽(玉壁) 중 하나였다. 하나는 황제가 지니고 있는 신물(信物)이고, 다른 하나는 누구의 수중에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 존재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묘대야는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놀라움을 금하질 못했다. 묘대야의 얼굴빛이 갑자기 이끼라도 덮은 듯 파르스름하게 변해갔다. 그는 천천히 눈을 돌려 앞에 앉아있는 아름다운 여인을 바라보았다.
"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묘대야는 불현 자신의 가슴을 옥죄는 무언가에 깜짝 놀라 소리쳤다. 미립이 요사스럽게 웃어댔다.
"호호호!"
"동, 동생은 아니, 당신의 정체는?"
미립이 갑자기 웃음을 거두더니 두개골이라도 뚫을 듯한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보며 말했다.
"당신이 나에게 시를 지으라고 했을 때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호호호, 그 시 속에 숨은 뜻을 당신은 결국 찾아내지 못했군."
묘대야는 사태가 범상스럽지 못함을 깨닫고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기 의복을 황급히 찾아 입고는 옆눈으로 미립을 살폈다. 그는 똑바로 미립을 쳐다보지 못했다. 머리속은 온통 흙탕물로 소용돌이 치고 있는 순간이었다. 그 흙탕물 한가운데에 자신이 몸부림을 치며 빠져있는 것을 순간 목격했다.
의복을 갖춘 묘대야가 미립을 향해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미립의 웃음소리가 다시금 가슴을 후벼파듯 들려왔다.
"호호호, 형님! 갑자기 왜 이러시나요?"
묘대야가 황망히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오. 소인을 제발 살려주시오. 어떤 분부라도 목숨을 걸고 거행할테니 제발...... 우리 다섯 요리사는 천만번 죽더라도 따르리다."
미립이 팔짱을 끼며 조용히 물었다.
"형님, 이 옥벽을 기억한다면 황제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는가도 아시겠죠?"
묘대야가 떨리는 목소리로 얼른 대답했다.
"알고 말고요. 황제께서는 '짐이 눈앞에 있는 듯' 처신하라고 하시었소."
"호호호, 맞아요. 황제께서 당신에게 날 보거든 황제를 만난 것처럼 대하라고 하셨다지요?"
미립이 이렇게 말하자 묘대야는 더욱 몸둘바를 몰라 쩔쩔맸다. 온몸을 북풍한설에 잔가지 떨리듯 벌벌 흔들어대고 있는 묘대야가 고개를 깊숙히 숙였다.
"속하(屬下)는 낭낭(娘娘)께서 여기 계신 걸 몰랐소이다. 다만 낭낭께 용서를 빌 뿐이옵니다."
방금 전 옷을 벗는 미립의 자태를 감상하던 자신이 생각났다. 그런데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그때의 여인은 보이지 않았다. 품속에 안길듯 말듯 매끄러운 웃음을 피우며 넘실대던 아리따운 여인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또한 자기와 함께 낙거사에서 시를 지으며 유쾌한 웃음을 만들던 여인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오만해진 표정을 지으며 미립이 묘대야를 주시했다.
"황제께서 너희들을 출궁시키면서 분부를 내리셨을 게다. 급한 일이 생기면 내가 너희들을 찾아갈 거라고 말이다."
"그렇습니다."
"묘대야, 너희들 다섯 사람이 다시 황궁으로 들어가기를 원하는지 아닌지는 모르겠다만 어떠하냐? 다시 황제의 시중을 들 마음이 있는가?"
미립이 묻자 묘대야가 대답했다.
"낭낭께서는 소인의 마음을 훤히 꿰뚫고 계실 줄 압니다. 우리 다섯 형제는 모두 하루속히 황궁으로 돌아가기를 소원하고 있소이다. 밖에서 빈들거려야 무슨 진전이 있겠습니까? 낭낭께서 황제에게 저희 다섯 사람을 다시 천거해주신다면......"
미립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여부가 있겠느냐. 하지만 너희들 다섯이 어떻게 처신을 하는가에 달려있다."
"낭낭의 분부대로 하오리다!"
"너희들 다섯사람은 이곳에 너무 오래 있었다. 너희들은 이제 한가지 일을 해야하겠다."
미립은 자세를 바꿔 의논을 하자는 투로 물었지만 묘대야는 결코 그런 뜻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오로지 자신은 목숨을 걸고 낭낭의 명령을 수행해야할 뿐이라 여겼다.
"낭낭께서 어떤 분부를 내리신다 해도 저희 다섯 형제는 충심을 다해 받들겠소이다."
묘대야의 말에 흡족해진 미립이 다시 입을 열었다.
"좋다. 너희들은 앞으로 많은 일을 해야한다. 우선 나에게 두가지의 일을 해줘야 하느니라. 그 하나는 미운산의 개방총부로 가서 밀실에 있는 홍칠과 두 남매의 시체를 거두어 내게 가져오거라."
"명심하겠습니다."
미립이 한층 누그러뜨린 목소리로 말했다.
"홍칠은 이제 시체가 되었을 것이다. 너희들 형제는 그 시체를 가져다 내게 보이기만 하면 된다. 또 계집이 하나 있는데 넌 그 년이 누구인지 알겠느냐?"
"모르옵니다."
"그년이 바로 미립이다."
"예?"
묘대야는 너무 놀라 머리를 바닥에 찧을 뻔했다.
"그년이 진짜 미립이란 말이다."
마치 악마를 대하는 기분이었다. 묘대야는 공포에 절여진 눈길로 미립을 힐끔 훔쳐보았다. 이 여인이 바로 황궁에서 나온 황제의 심복이란 것을 묘대야는 확실하게 깨달았다. 황궁에서 깊은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는 이 여인에게 잘못 보이기라도 하면 큰 화근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분부를 듣고 난 묘대야는 그녀에게 공손히 예를 올린 다음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호호호, 잠깐 서시오."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다시 불러세우는 것이었다. 긴장에 눌린 묘대야는 몇걸음 그녀 앞으로 다가가 다시 허리를 숙였다.
"전 당신의 동생이 아닌가요?"
느닷없는 질문에 묘대야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에겐 못다 한 시간이 아직 남아있는 것 같은데, 어때요? 오늘은 그만 쉬고 내일 떠나는 것이."
묘대야는 어쩔 줄을 몰라 허둥대기만 했다.
"아니, 아닙니다."
절대 그럴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여인의 정체를 알아버렸는데 그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판단되었다. 그러나 여인은 다시 간드러진 웃음으로 묘대야의 목덜미를 콱 움켜잡았다.
"묘대야,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텐데요?"
더이상 물리칠 수 없는 일이 돼버리고 말았다. 여인의 말을 조금이라도 거역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묘대야로서는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미립이 가슴까지 올리고 있던 ㅇ은 이불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다시 한 여인의 아름다운 자태가 드러났다. 백옥같이 고운 살결 위로 묘대야의 뜨거운 시선이 날아가 꽂혔다. 묘대야가 천천히 그녀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 앞에 선 묘대야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곤 그녀의 발끝에 입을 맞추면서 서서히 입술을 위로 움직였다.
"음......"
미립의 낮은 신음이 들려왔다. 묘대야는 미립의 탄력있는 허벅지 쪽으로 입술을 옮기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형용할 수 없는 여인의 살냄새가 심장을 뛰게 했다.
미립이 천천히 뒤로 누웠다. 묘대야는 눈앞에 드러난 눈빛 살결과 봉긋한 앞가슴에 다시 한 번 흥분에 휩싸였다. 묘대야가 손을 뻗어 그녀의 젖무덤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아, 좋아!"
미립이 몸을 비틀며 촉촉하게 물기어린 신음을 다시 토했다.
다섯 요리사들은 개방의 총부에 당도하자 곧 신속하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총부의 뜨락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질 않았다. 창문은 지나는 바람에 속절없이 몸을 내맡겼는지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다. 또한 문짝도 떨어져나가 을씨년스럽게만 보였다.
한차례 바람이 불자 그것들은 아주 처량하게 울기 시작했다. 더섯 형제들은 정원 안팎을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것도 발견해내지를 못했다.
더욱 안쪽으로 걸어들어가던 그들은 곧 걸음을 세웠다.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던 것이었다. 둘째가 한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큰형님, 여기를 좀 보십시오. 혹시 이곳에 암도(暗道)로 통하는 발판이 있는 게 아닐까요?"
그리곤 그곳을 들어보이려고 했다. 이때 묘대야가 제지를 하며 말했다.
"덤비지 말게."
하며 묘대야가 손에 들고 있던 칼로 발판이 있음직한 곳을 힘껏 눌러보았다. 그러나 전혀 움직이지를 않았다. 그는 다시 국자로 그곳 주위를 여기저기 두드려보았다. 그러나 마찬가지였다. 분명 석실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있을텐데 좀체 눈에 뜨지를 않았다. 숨겨둔 그 길을 어서 찾아야만 했다.
그런데 주위를 자세히 훑어보던 묘대야의 눈빛 갑자기 돌변했다. 벽 모서리가 조금 이상하게 보였던 것이다. 국자로 곧 그곳을 눌러보았다.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곧 요란한 소리를 내지르며 벽 모서리로부터 틈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곤 출입구가 눈앞에 펼쳐졌다.
"바로 여기로군!"
다섯 형제들은 초를 켜들고 발판에 올랐다. 발판은 이들을 아래로 내려주었다. 곧 웅웅 하는 소리가 멎더니 바닥에 닿았다.
이들은 통로를 따라 조심스럽게 걸음을 내딛었다. 곧 석실을 발견한 이들은 모두 숨을 멈추었다. 석실 안에는 침상이 놓여져 있었는데 그러나 역시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홍칠공이 꼭 죽었다고 볼 수는 없지."
묘대야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형제들에게 명령했다.
"이곳을 샅샅이 뒤져보세."
그들은 뒤쪽으로 가 식량을 쌓아두는 방 앞에 섰다. 누군가 그동안 식량을 덜어내 먹었다는 흔적을 발견한 묘대야가 소리를 죽이며 말했다.
"빨리 가서 홍칠이를 찾아야 하네. 그는 분명 죽지 않고 여기 어딘가에 있을테니, 어서!"
묘대야는 석실로 처음 들어설 때부터 그런 감을 잡아낼 수가 있었다. 비록 비어있는 침상이었지만 사람의 온기를 분명 느낄 수가 있었다.
묘대야의 예감이 적중했다. 그들은 곧 홍칠의 일행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다른 석실로 갔을 때였다. 묘대야가 걸음을 우뚝 세우고는 주위를 짧게 둘러보았다. 자신의 눈앞에 작게 놓여져 있는 것이 분명 홍칠이 틀림없었다.
'저 자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홍칠은 기공을 하고 있는지 앉은 채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 옆에는 한 여인이 있었는데 그녀가 곧 진짜 미립이란 것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묘대야는 숨을 멈추며 형제들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해야 좋겠냐는 눈빛이 자신에게로 일제히 쏠렸다. 묘대야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홍칠! 누가 왔는지 몸을 돌려보아라!"
그러자 비로소 홍칠이 자세를 풀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모습엔 전혀 당혹함 따위는 배어있지를 않았다. 홍칠은 누군가 자신의 뒤에 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태연하게 행동했다. 홍칠이 잡고 있던 미립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지난번엔 널 용서해주었는데 왜 또다시 찾아왔느냐?"
묘대야가 사소롭다는 듯 식칼을 들어보이며 소리쳤다.
"네 놈을 죽이려고 왔다!"
순간 그들은 재빨리 몸을 움직여 홍칠을 칠 자세를 갖추었다. 더섯 요리사들은 홍칠의 거동을 주시한 채 틈을 엿보기 시작했다.
쩔컹! 쩔컹!
묘대야가 손에 든 칼과 국자를 맞부딪치며 서서히 거리를 좁혀오려고 했다. 미립과 잠깐 자리를 비워다가 달려온 미기가 얼른 홍칠의 뒤로 숨으며 몸을 떨었다. 홍칠이 손을 잡아주며 일단 안심시키려고 했다.
"홍칠아, 넌 오늘 우리들 손에 죽게 되어있다. 그렇게 시킨 사람이 있으니 날 원망말아라. 그리고 허튼수작은 더더욱 하지 말아라!"
홍칠이 한발을 굴려 석실 바닥을 쿵 하고 울리게 했다.
"너희 다섯놈이 날 죽이려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런데 누군가 시켰다는 게 사실이더냐? 누구인지 어서 밝혀라?"
묘대야가 웃었다.
"하하, 죽는 마당에 알아서 무엇하겠냐? 네 놈은 평소 화를 부르고 다녔으니 널 죽이려고 하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느냐?"
다섯째가 앞으로 나설 듯 몸을 움찔거리며 외쳤다.
"홍칠아, 우선 네 놈이 달고 있는 살코기를 한 두근 얻어야겠다!"
하며 저울대를 들고는 순식간에 달겨들었다.
그는 비비 꼬아둔 저울대로는 홍칠의 가슴팍에 있는 대혈을 겨누고 있었다. 또한 사슬이 달린 갈쿠리로는 홍칠의 얼굴을 갈기려는 묘한 법수를 구사하기 시작했다.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그의 동작을 피하며 홍칠이 소리쳤다.
"너희 다섯놈 모두 덤벼랏!"
그러나 그중 둘째만이 홍칠의 무예를 걱정하여 앞으로 나섰다. 일단 공격을 성공하지 못한 다섯째가 더 큰 실수를 할까봐서였다. 그는 큰 쇠솔을 머리 위로 휘두르며 홍칠의 가슴을 노렸다.
피릭- 피릭-
무서운 소리를 내며 쇠솔이 석실 안을 휩쓸어댔다. 홍칠이 또다시 공격을 피하며 큰소리로 비웃었다.
묘대야는 화가 치밀어 불덩이가 튈 것 같은 눈을 부릅 떠 홍칠을 노려보았다.
"네 놈은 이번에 결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네 놈의 시체를 가져오라는 분부를 기필코 이행하고야 말겠다!"
묘대야가 다시 쩔컹 쩔컹 소리를 내며 앞으로 나섰다. 홍칠은 재빨리 미립을 이끌고 한쪽으로 피했다. 이제 다섯 모두가 홍칠에게 덤벼들 기세였다. 그들의 공격은 사실 홍칠로서는 벅찼다. 계속 반격은 하지 않고 피하기만 하던 홍칠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몇합을 겨루자 그들이 차츰 우세해지기 시작했다. 사실 홍칠은 옆에 있는 미립과 미기 때문에 제대로 법수를 쓸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법수를 쓰게 되면 두 남매와 조금 떨어질 수도 있었는데 혹시 묘대야 형제에게 빈틈을 보이게 될까봐서였다.
그것을 모르는 다섯 형제들은 더욱 득의양양해서 제각기 들고 있는 무기들을 요란스럽게 휘두르기 시작했다. 곧 홍칠이 무릎을 꿇을 것이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홍칠아, 너희들은 이제 죽는 길밖엔 없다. 햇빛을 보려면 오로지 그 방법밖에는 없으니 명심하거라!"
하며 묘대야가 국자를 홍칠에게 휘둘렀다. 이번에도 홍칠은 피하기만 할 뿐 이렇다 할 공격을 날리지 않았다. 이를 본 묘대야가 다시 빈정댔다.
"왜 그동안 저 년과 그짓만을 일삼아 다리에 힘이 떨어졌느냐? 왜 고양이 만난 쥐처럼 슬슬 꽁무니만 빼느냐?"
홍칠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미립과 미기를 벽쪽으로 가만히 밀며 웃었다.
"하하, 네 놈이 과연 날 죽일 수 있겠느냐? 오히려 그 잘난 목을 내놓게 될텐니 각오해라. 네 놈의 목을 잘라 쥐에게 던져주마!"
"꿈같은 소리 집어치워라! 오늘은 바로 네 놈 뿐만 아니라 저 남매들까지도 각오해야 할 것이다!"
묘대야로서는 다른 방도가 생각나질 않았다. 분부에 따르면 시체를 곱게 들쳐업고 오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홍칠을 비롯한 남매는 멀쩡히 살아있었기에 결국 이들을 죽일 수밖에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 받아랏!"
묘대야가 다시 국자를 높이 쳐들고는 홍칠을 향해 몸을 날렸다. 나머지 형제들도 석실 바닥에 떨어진 먼지들을 일깨우며 득달같이 달겨들었다.
휙! 휙!
홍칠의 머리와 어깨 옆을 스치는 병장기들의 소리가 매서웠다. 홍칠은 여전히 그들의 공격을 피하며 미립 남매를 추스리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계속 피하기만 해서는 안되었다. 어서 이들을 물리치고 이곳을 빠져나가야만 되었다.
홍칠이 미립 남매를 벽쪽으로 더욱 바싹 붙여놓고는 두손을 앞으로 힘껏 뻗었다. <항용유회>법수였다. 장을 뻗어 기를 뿌리자 엄청난 힘이 쏟아졌다. 우뢰와 같은 소리와 함께 홍칠의 장에서는 돌풍이 뿜어졌다.
"저 놈의 장은 역시 무섭구나!"
돌연 뒤로 물러선 다섯 형제들이 입을 모았다. 홍칠은 이제 안전한 거리를 확보했다고 생각하고는 조금 여유롭게 법수를 부리기 시작했다. 양손을 번갈아 뻗어 장을 날리며 그들을 향해 돌진해들어갔다.
"야압!"
그의 장법은 더욱 놀라운 경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석실에 갇혀있던 지난 보름 동안 남모르게 익혀두었었다. 그는 또한 스스로 새롭게 세가지의 장법을 더 연마해 "강용팔장"을 십일장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리하여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듯 강력한 힘을 내뿜고 있었다.
"아니, 정말 대단한 장법이군!"
묘대야는 입을 떠억 벌린 채 홍칠의 법수에 놀라고 말았다.
"어서 저 놈을 쳐라!"
묘대야가 다시 자기 형제들에게 소리쳤다. 세째가 뒤로 물러서던 동작을 반대로 틀며 나섰다.
"홍칠공, 나의 장을 받아라!"
그러나 그의 공격은 느릿한 거북이의 다리를 닮아있었다. 놀던 어린아이도 피할 수 있을 정도로 부드럽고 약한 공격이었다. 다시 세째가 힘을 모아 홍칠에게 장을 날렸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순간 부드러운 기운을 헤치고 나온 한갈래의 기가 거침없이 홍칠을 향해 날아왔다. 눈앞이 일순 어두워지려는 찰나였다. 홍칠은 반사적으로 그것을 향해 장을 뻗었다. "용전어야(龍戰於野)"라는 법수였다.
삼시간에 세째를 향해 돌풍이 몰아쳐갔다. 이때 둘째가 쇠솔을 홍칠을 향해 휘둘렀다.
"얍!"
홍칠이 둘째에게로 장을 날렸다.
"앗!"
쇠솔을 감아버린 홍칠의 돌풍이 둘째를 쓰러뜨렸다.
"다시 덤볐다가는 모두 저 꼴로 만들어놓겠다!"
홍칠이 소리치자 모두들 흐트러진 자세를 고쳐잡고는 다시 달겨들었다. 홍칠이 계속을 장으로 다섯 형제들의 공격을 막으면서 반격을 가했다. 잠시 다섯 형제들이 원을 그리듯 분산되어 있을 때였다. 불현 한쪽을 살피던 묘대야가 짧게 소리쳤다.
"다섯째, 어서 아이를 잡아!"
곧 미기가 그의 손에 덥썩 잡히고 말았다. 미처 손을 쓸 수가 없는 상태였다. 홍칠보다는 다섯째가 더 미기 쪽에 가깝게 있었기 ㄸ문이었다. 미기의 덜미를 한손으로 움켜쥔 채 다섯째가 으름장을 놓았다.
"네 놈이 순순히 포박을 받지 않으면 이 아인 죽은 목숨이다!"
홍칠이 주먹을 모아쥐며 말했다.
"그 애를 죽이기 전에 너희 다섯놈의 모가지가 먼저 잘려나갈 줄 알아라!"
이때 미기가 버둥대며 외쳤다.
"날 죽이겠으면 어서 죽여라. 난 무섭지 않다!"
모두들 의외였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조금도 두려움에 떨고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자기 동생이 위기에 몰리자 미립 역시도 강하게 마음을 다져먹은 듯했다. 미립이 다섯 형제들을 향해 매몰찬 목소리를 내질렀다.
"내 동생을 놓아주어라! 내가 너희들을 따라갈테니 죽이려거든 나를 죽여라!"
"오호라, 네 년을 먼저 죽여하는 걸 미처 깨닫지 못했는데 고맙구나. 네 년을 먼저 죽이고 그 다음에 저 아이를 없애야겠다. 그땐 홍칠이 너도 더이상 날뛰지는 못할 것이다."
묘대야가 기교만장한 얼굴을 길게 뽑으며 말했다. 모두들 그 말에 기분 나쁜 웃음을 지었다. 묘대야가 다시 말했다.
"셋째, 자네에게 저 처녀애를 줄테니 잘 봐두게. 자네와 과연 아귀가 들어맞을지 한번 살펴보라구. 자물통도 아귀가 들어맞는 열쇠가 있어야 열리는 법이니까. 흐흐흐."
그러자 셋째가 얼른 미립이 홍칠이 있는 쪽으로 가지 못하게 막고 나섰다. 그리곤 미립에게로 가까이 다가서며 음탕하게 웃었다.
"헤헤헤, 아가씨, 우리 형님 말씀 잘 들었지? 그런데 어쩌지 아귀가 맞는지 안맞는지는 일단 안아봐야 알텐데. 자, 내가 옷을 벗겨줄까?"
미립이 소리를 지르면서 얼른 장으로 세째를 향해 일격을 가했다. 미립의 무예는 결코 그보다 뒤떨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어렸을 때 한질(寒疾)을 앓은 탓에 기력이 약했다. 미립의 공격을 반사적으로 피한 세째가 다시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헤헤, 네 년이 벌써 앙탈을 부리는 것이더냐? 괜히 고생스럽게 힘을 낭비할 필요가 있겠느냐. 힘은 비축해두었다가 나를 위해 쓰도록 하거라."
미립은 그러나 공격을 멈추지 않고 계속 그를 향해 손을 날렸다. 그러면서 기력이 약한 탓에 그를 쓰러뜨리지 못하는 자신을 원망했다. 세째는 미립이 곧 기진맥진 맥을 놓자 재빨리 목덜미를 잡아챘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홍칠은 미처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그는 미립을 질질 끌고 가더니 덮쳐들어 옷을 벗겨내려 했다.
"악! 안돼!"
미립이 소리를 지르며 발버둥을 쳤다. 순간 그의 억센 손이 옷속으로 불쑥 쳐들어오는 바람에 미립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웅크렸다. 옷이 찢어지고 손톱에 긁혔는지 허옇게 드러낸 허리에서 피가 배어나왔다. 다시 그가 미립을 껴안으려 할 때였다. 미립이 발로 그의 사타구니를 힘껏 차버렸다.
"욱!"
옆으로 나가떨어져 제 사타구니를 움켜쥐고 벌벌 기던 그가 다시 일어섰다. 그러더니 이번엔 미립의 숨통을 두 손으로 누르기 시작했다. 미립은 곧 죽을 듯 숨을 헉헉 몰아쉬며 몸부림을 쳤다.
"홍칠아. 네가 무릎을 꿇지 않으면 이 년은 황천길이다!"
그러자 미립이 꺼져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저는 상관말고 어서 제 도, 동생을 구해주세요."
세째가 더욱 손아귀에 힘을 주자 미립은 결사적으로 발을 굴렸다. 옆에 있던 다섯째가 거들었다.
"홍칠아, 네 놈이 계속 반항한다면 이들 남매의 목숨은 곧 꺼져버릴 것이다!"
"너희 다섯놈의 행실은 가히 비겁하기 짝이 없구나. 강호에 너희들의 이름이 남겨질까 두려울 따름이다."
묘대야가 홍칠 앞으로 걸어나와 눙치듯 타일렀다.
"홍칠아, 네가 그만 손을 뗀다면 우린 너의 목숨을 살려주는 것은 물론 저애들도 놓아주겠다."
그러자 먼저 묘대야의 간사함을 알아차린 미립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호, 홍칠공, 저 놈이 뭐라고 해도 듣지 마세요."
"미립!"
그러나 홍칠은 그쪽으로 다가갈 수가 없었다. 그쪽으로 달려가려면 우선 앞에 버티고 있는 묘대야를 물리쳐야만 했다.
"좋다. 과연 묘수인주 묘대야의 재간이 얼마나 되는 보자!"
"허허, 끝까지 고집을 피우는구나. 좋다 정 네 놈의 소원이라면 어쩔 수 없지."
그런데 묘대야가 갑자기 자세를 풀더니 미기가 있는 쪽으로 가는 것이었다. 홍칠은 어리둥절해 묘대야의 행동만을 주시했다. 묘대야가 다가오자 미기가 소리쳤다.
"네 놈이 미워. 내게 손대지 말란 말이야!"
묘대야가 타이르듯 조용히 말했다.
"꼬마야, 내 말만 들으면 널 해치지 않을테니 걱정마. 자, 봐라. 이건 바로 칼이란 거다. 내가 이걸로 저기 쓰러져서 꼴딱꼴딱 숨넘어가는 소리를 하고 있는 네 누나의 가슴을 찌르고 와라."
"뭐야? 네 놈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미기는 벌버둥을 치며 묘대야에게로 발길질을 해댔다.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것은 홍칠도 마찬가지였다.
"네 이놈! 어서 이리와 내 장을 받아랏!"
그러자 묘대야가 음흉스럽게 웃었다.
"좋다. 네 놈이 원한다면 먼저 이 두 년놈을 죽여버리겠다!"
하며 묘대야가 칼을 쥔 손을 높이 쳐들었다. 그리곤 미기를 향해 내리치려고 했다.
|
첫댓글 즐감
슬슬 흥미가 느껴지기 시작 하네요?
감사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