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5/ 테레즈 라캥/ 에밀 졸라/ 박이문
* 10월 14일
* 줄거리
- 여인 홀로 병치레가 잦은 아들을 키우는데 군인 오빠가 여자아이를 데리고 와 맡긴다. 오빠는 전쟁에 나가서 죽고 딸아이는 커서 며느리가 된다. 이국적인 며느리는 자기를 길러준 가족에게 반항하지 않지만 가정에 길들여지고 유약한 남편과 삶에서 단조로움을 느낀다. 어느날 남자다운 우람한 남편의 친구를 보면서 야성적인 젊음의 욕망을 느낀다. 어느 순간 눈이 맞아 뜨겁게 육신을 탐닉하지만 남편 친구라는 벽에 가로막혀 마음껏 쾌락의 갈증을 만족하지 못한다. 결국 정부는 남편을 죽이겠다는 행동에 남편의 죽음을 눈감고 만다. 이후 다른 모든 이의 눈을 속여 결혼하지만 그 순간 살인이라는 죄의 그늘에 눌려 지난날과 같은 인생의 욕망과 쾌락을 누리지 못한다. 살인이라는 그늘에 눌려, 서로 싸우게 되고 탈출구로 서로 죽음을 택한다.
- 욕망과 고통의 끝에서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누구나 한 번쯤 꿈꾸어 볼 외도, 로망스, 그리고 끝까지 사랑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테레즈 라캥에서는 시원하게, 스릴있게 갈 때 까지 가 보았지만 결과는 서글프다. 참혹하다. 무가치하다. 인간의 소소한 일상이라 하더라도 인간의 덧없음을 살인죄라는 기준으로 너무 쉽게 끝내고 있다.
에덴동산에서 인간에게 자유를 허락하였지만 단 하나 선악과라는 열매만은 먹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무리 인간이 하고 싶은 일을 해도 선을 넘어서는 안 되는 것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결국 인간은 죽음, 살인이라는 단어 사이에 놓여 있음을 그려내었다.
죽음은 누구나 기다려야 하지만. 살인은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행위가 앞서 나가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은 기다리기 보다는 자기 행위가 들어가고 있다. 결국 인간의 욕망은 살인적인 느낌과 함께 가는 것 같다.
살인을 피하지 않고서는 인간의 욕망은 마음껏 누리지 못한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인간의 욕망은 무엇인가?
인간은 자기가 간절하게 바라거나 누리고자 하는 것을 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욕망을 위해서 인간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테레즈 라캥에서는 욕망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것을 인간은 가졌지만 결국 가지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고
가지지 못했지만 가질 수 있는 것 또한 인간임을 보여주었다.
그 사이에 살인이라는 딜레마를 보여 주고 있다.
살인 전에는 가졌지만
살인 후에는 가지지 못한 욕망
이 욕망이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인가?
육으로만 채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정신적으로만 만족할 수 없는 것도 인간임을 보여준다.
인간이기에 외도도 좋다. 사랑도 좋다. 아니 추악한 욕망이 일어나도 좋다.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기에, 그러나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할 때는 인간으로서 추악한 행위가 범죄가 수반된다. 자신이 산다는 것을 느끼지 못할 때에 서슴없이 살기 위해서 행동한다. 그것이 살인이라 하더라도 그러나 살기 위한 행동으로 살인을 했어도 이 살인이 더 인간이 살아 있음을 느끼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럼에도 인간은 살기 위해서 살인을 행한다.
어째면 인간은 자신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모순 덩어리다.
라깽부인은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자기가 기른 아이들로부터 잃어버렸다.
그 자신도 증오의 악의의 찬 사람이 되었다.
어찌하여 그대는 아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었는가
자신의 욕망을 가졌는가
자신의 흔적을 남겼는가
자신을 나타내지 마라
자신의 욕망을 가지지 마라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마라
단지 죽음만을 기다리라
욕망이 아닌
삶으로서...
그것이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