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북 봉화군 명호면 삼동치 범바위 전망대에서 바라보면 원시 낙동강의 속살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이곳 물 돌이 지형은 예천 회룡포나 안동 하회마을, 영주 무섬마을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빼어나다. 스마트폰 시대, 가끔은 단순한 것이 그립다. 일상에서의 삶은 아무래도 단순해지기 힘들다. 그래서 휴가가 있다. 고즈넉하고 한적하여, 도시가 그리워지는 곳. 원시의 낙동강이 살아있는 곳, 세월에 부대꼈으나 시퍼렇게 날이 서 있는 낙동강 협곡을 찾아 한국의 오지 경북 봉화와 안동, 영주를 다녀왔다. 환경단체 생명그물(www.wlw.or.kr)의 '낙동강 유역민 에코 탐방' 일정에도 살짝 참가했다. '한국의 오지' 경북 봉화·안동·영주 길은 좁아지고 다니는 차도 없었다 삼동치 발아래 굽이치는 강의 감동 협곡의 강엔 래프팅하는 젊음의 활기
강변엔 나리꽃·원추리가 피었고 흙길은 폭신하고 암반은 원시 그 자체 '예던길' 걸을 땐 이황 선생을 만났다
■우리 강의 원형을 보다
생명그물의 2박 3일 일정 행사에 하루만 함께하기로 했다. 생소한 낙동강 협곡을 걷는 일이라 동행이 있으면 더 좋을 것 같아서다. 이런저런 짐을 챙기는 버릇이 도져 출발시각이 살짝 늦어졌다. 고속도로에서 조금 빨리 달렸다.안동 시내를 통과해 봉화군 명호면 청량산도립공원 입구로 가는데,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이라는 현판이 보였다.
| 청량산 도립공원 입구. |
안동 경계를 벗어나 봉화로 가는 길은 갑자기 좁아지고, 한여름 아침 나절 다니는 차도 없었다. 속도가 시속 100㎞에서 60㎞로 급감하니 차창을 내려다볼 여유도 생겼다. 느릿느릿 그렇게 낙동강의 비경, 원시 협곡을 찾아 국토의 속살로 들어갔다.
봉화군 명호면 삼동치에 올랐다. 낙동강 범바위전망대에서 굽이치는 낙동강을 봤다. 절경이다. 안동 하회마을이나 영주 무섬마을, 예천 회룡포의 물돌이가 유명하지만, 삼동치에서 본 풍경도 감동이다. 이미 강네트워크 최대현 사무국장이 인솔하는 답사팀은 저 아래 보이는 낙동강에 흠뻑 젖어 있다. 서둘러 승용차로 낙동강 시발점 테마공원이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이미 하루 전 태백 승부역을 걸었던 답사단은 한껏 여유로워 보였다. 전날 내린 비로 강물이 불었는데 다소 붉은 흙탕이었다.
봉화군은 명호면 앞의 지천과 낙동강 합류하는 지점을 '낙동강 시발점'으로 명명해 놓았다. 물살이 제법 센 강에서 은어낚시꾼들이 여름을 즐기고 있다. | 벼랑 밑으로 난 봉화 예던길. |
■'예던길'서 퇴계를 만나다
봉화군은 최근 낙동강 시발점에서 청량산도립공원 입구 청량교까지 9.1㎞ 구간을 세계 유교 선비문화공원의 주제로 '예던길'을 조성했다. 길의 중간 지점인 백용담에서 반대편으로 넘어오는 출렁다리가 아직 완공되지 않아 완전하지는 않지만, 오롯이 낙동강 협곡을 조망하며 걸을 수 있다.
예던길은 '옛길'이라는 말로 안동 도산서원에서 청량산까지 퇴계 이황 선생이 걷던 길을 복원했는데, '봉화 예던길'은 그 연장인 셈이다.
| 나리꽃이 활짝 핀 낙동강 협곡. |
협곡을 흐르는 강에는 래프팅하는 고무보트가 떠 있다. 사진을 찍으려고 했더니 "번호 주세요. 사진 보내주세요~"하며 노를 흔든다. 학생들은 안동에서 왔다고 했다. 폭우가 온 다음날 여름 강은 청년들의 목소리처럼 활달했다. 강변에는 나리꽃과 원추리가 피었다. 아름다운 여름 꽃을 구경하면서 걷는 재미가 좋다. 길은 푹신한 흙길이고 암반은 그 자체로 원시다. 강 건너 태백으로 가는 35번 국도가 생기기 전에는 다들 이 길을 걸어 안동장에도 갔을 것 같다.
| 안동 가송리 퇴계 예던길. |
오전에는 봉화 청량산까지 걸었고, 오후에는 농암종택이 있는 안동의 퇴계 예던길을 걸었다. 농암은 어부가, 농암가, 효빈가 등 가사문학을 남긴 이현보 선생의 호로 종택은 원래 도산서원 남쪽으로 2㎞ 떨어진 분천동에 있었으나 안동댐으로 수몰이 되자 1975년 이곳 가송리로 옮겨 지었다.
지금은 선생의 17대손 이성원 선생이 관리하며 고택체험을 할 수 있도록 개방하고 있다.
풀이 무성한 길을 헤쳐 학소대와 경암을 보았다. 학소대는 먹황새가 서식해 천연기념물로까지 지정됐으나 이제 황새는 없다. 경암은 학자들이 물을 먹 삼아 시를 써서 마르기 전까지 다음 구절을 짓는 놀이를 하며 즐겼다는 곳. 옛사람의 풍류는 없고, 강물만 흐른다.
■흘러야 강이라고 한다
퇴계 예던길을 걷다가 월명담 위에서 말벌에 쏘였다. 벌이 뱃심을 주며 독을 몸에 주입하던 장면이 느린 화면처럼 생생하다. 고고함도, 기개도 없이 살아가는 삶에 대한 일침인가. 벌에 쏘였다니 주변에서 '봉맞았다'며 껄껄거린다. 벌침 요법도 있으니 잘 낫기만 한다면 건강에 좋다는 얘기로 위로한다.
| 동심으로 돌아간 에코탐방 참가자. |
물이 제법 불어 농암종택 앞 강을 건널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서로서로 손을 잡고 의지하며 건넜다. 트랙터가 지나가다가 일행을 태워주기도 했다. 무사히 강을 건넌 사람들은 어린아이처럼 물놀이했다.
"여기까지 와서 무섬마을을 안 보고 간단 말입니까!" 생명그물 이준경 정책실장이 한소리를 했다. 한나절을 함께 걸었고, 하룻밤을 잤는데 다음날 일정까지 하기는 무리였다. 하지만 무섬마을은 꼭 봐야 한다기에 아침도 안 먹고 혼자 차를 몰았다. 영주댐이 만들어지면서 수몰되는 영주시 평은면 금광리 금강마을은 이미 폐허였다. 예전의 평은역은 이제 없다. 철로도 해체되고, 마을회관과 농협 건물은 유령의 집처럼 을씨년스럽다. 아직 물이 차지 않아 모래톱이 보이는 강에 피라미 새끼들만 애처롭다.
금광리를 지나 수도리 무섬마을이다. 외나무다리가 유명하고, 한옥이 즐비해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 벌에 물린 상처가 좋지 않아 마을 청소를 하던 장명자 할머니에게 보건소 위치를 물었다. 할머니는 마침 대기업에 다니는 아들이 인도네시아에서 사 온 연고가 있다며 집에 데리고 가 발라주었다.
영주댐이 막혀 무섬마을 내성천 모래도 사라질 것이라 한다. 여울 모래에 사는 멸종위기종 흰수마자는 어디로 갈 것인가. 패고 상처 입은 내성천에도 할머니의 특효 연고를 발라주고 싶다.
외나무다리를 건너 갔다 오다가 다시 할머니를 만났다.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아들 같아서, 우리집도 민박은 하는데 양옥이라. 다른데 다 차야 마을에서 손님을 보내줘." 할머니의 전화번호를 받아적었다. 그립던 것이 다 거기에 있었다. 글·사진=이재희 기자 jaehee@busan.com
[여행 팁] 부산에서 봉화로 가는 직행 시외버스는 없다. 안동으로 가서 봉화 청량산으로 가는 시내버스를 갈아타야 한다. 부산동부버스터미널(1688-9969)에서 안동으로 가는 시외버스는 오전 7시부터 오후 7시 30분까지 하루 16차례 운행한다. 2시간 40분 걸리며, 요금은 1만 6천200원. 안동시외버스터미널(1688-8228)에서 부산으로 오는 시외버스는 오전 8시부터 오후 8시 30분까지 있다. 안동에서 봉화군 명호면까지는 청량산행 시내버스(하루 5차례 운행. 50분 소요. 요금 1천200원)를 타면 된다. 경안여객(054-821-4071 )의 이 버스는 안동 홈플러스 정류장에서 타는데, 시외버스주차장에서는 다소 멀어 환승을 해야 한다. 내비게이션은 '청량산도립공원'을 입력하면 된다. 열차 여행(코레일 안내 1544-7788)을 좋아한다면 부전역~봉화역 구간을 이용한 뒤 현지 교통편으로 갈아 탄다. 부전역에서 9시 12분에 출발하고, 봉화에는 13시 50분에 도착한다. 돌아오는 열차는 봉화에서 오후 4시 44분에 출발해 부전역에 오후 9시 21분에 도착한다. ■먹거리와 볼거리 낙동강 상류 지역답게 민물고기를 활용한 식당이 많다. 청량산도립공원 상가 지역에 있는 청량마루(054-672-8279)에는 잡고기 매운탕(4만~5만 원)과 메기매운탕(3만~4만 원)이 있다. 청국장(7천 원)과 산채비빔밥(8천 원)도 좋다. 산세가 빼어난 청량산 도립공원에는 글씨의 성인으로 불린 김생이 공부한 김생굴과, 최치원이 수도한 풍혈대, 고려 공민왕이 쌓았다는 산성이 있다. 도립공원 상가 지역에 있는 청량산박물관은 봉화와 함께 청량산 식생, 지형, 생태 등을 소개하고 있다. 인근의 안동에 있는 경상북도산림과학박물관은 여름 휴가철인 오는 24일까지 휴관일(월요일) 없이 운영된다. 이곳에서 나무와 산림에 관해 체험할 수 있다. 이재희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