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 문중인 외부 세력 개입으로 생겨난 용주사 위기는 의현스님의 총무원 집권 시기에 나타났다. 1986년 의현스님과 정대 스님의 행정가들의 종회와 총무원 세력화 선두 자리를 차지하기 선점하기 위한 대립은 종단 내 분쟁 요소로 현실적 문제가 되었었다. 그런 와중 의현스님이 종단의 안정을 위하여 용주사를 방문하므로 일단락되었다. 당시 이 정치적 화해를 이루는 두 스님의 행적을 보았다. 우선 의현스님의 행위 단면을 엿볼 수 있는 행동을 살펴보면 내가 1988년 문경 봉암사에서 동안거 결제 중일 때 봉은사 문제로 밀운스님과 의현스님의 강 대 강 맞대응으로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었던 시기였다. 그 당시 수좌들 행보에 따라 사판들의 지위와 행적에 엄청난 영향을 주는 시절이었다. 봉암사 결제 대중 98명이 위아래 선방으로 나뉘어 정진하였으니 당시 불교계 수좌 대중의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커다란 압력단체인 셈이다. 수좌들이 모여 원행 수좌를 주지로 추대하였던 시기이기도 하다. 서암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대중은 원만한 수행 공간에서 정진할 때 의현스님이 방문하겠다는 소식을 전해 왔음을 대중에게 알렸다. 표면적으로는 조계종의 특별 선원이라는 위치에 총무원장으로 위문차 오는 것이라지만 실상 근본 목적은 수좌들의 지지세를 얻어 밀운스님과 분쟁을 끝내고 봉은사를 장악하기 위함이 방문 목적이라는 것이 그 시절 대중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그렇게 봉암사를 찾아온 총무원장 의현스님 복장은 낡은 승복에 풀 메김 없는 차림으로 와서 스님들만 보면 합장하고 90도 허리 구부려 인사하는 것이었다. 행자도 그런 행자는 보기 드물 것이다. 86년도 용주사에서 있었던 일 그리고 88년도 봉암사에서의 처세 능력을 보면서 의현이라는 스님이 굉장한 자기 연출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런 그가 용주사 본사를 빼앗으려는 시도는 치밀하였으리라. 그렇게 내가 본 용주사와 관련하여 가장 큰 위기 때는 1993년 용주사 중앙선원으로 하안거 정진하러 가서였다. 당시 성각수좌가 함께 용주사 선방에서 지내자 하였기에 나는 광덕 안심대 만좌선실에서 있다가 지장리에 계시는 기성스님을 찾아뵙고 함께 용주사 선방으로 갈 것을 청하였고 스님께서 성은 수좌가 가자는데 가야지 하시어 스님을 모시고 용주사 중앙선원 가면서 용주사에 큰 위기가 있음이 드러난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선방 서기 소임을 맡아 보았는데 대웅전에서 행하여지는 제사 음식 차림을 보면서 이것부터 바로 잡아야겠다고 판단 되었으니. 그 연유는 제사 차림으로 쓰던 것 쌓아놓고 반복해서 쓰며 신도 대상으로 속이는 행위를 당연하게 하는 것이 내 시선에 들어온 것이었다. 그리하여 제사상 차려놓고 천도재 시간이 다 될 무렵 성각스님과 선방 다각 스님 내려오라 하여 성각스님과 다각 스님에게 간단하게 제사상 차림에 대하여 설명하고 스님들 모두 행위가 맞지 않다고 동의하여 다각 스님에게 "여기 차려진 것 몽땅 내려서 가지고 올라가세요" 하고 "후 일은 내가 책임지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 사중이 발칵 뒤집혔다. 은사 스님이 나를 불러 원주스님 편에 서서 살림 사정을 설명하며 "다른 큰 사찰에서도 다 그렇게 한다." 하여 나는 "다른 큰 사찰이 그렇게 한다고 해도 나는 그렇게 하도록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주들에게 제비 사용에 대한 설명을 통해 양해를 구하고 제비에 맞게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하니 은사 스님은 작은 소리로…. (중요 사찰 이름을 거론하며 현실 사례를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였던 내용이라 기록하지 않겠습니다)... 하시면 불편함을 보였다. 그렇게 용주사 내 작은 복력을 증장시켰다. 다시 본래 용주사 위기 극복 이야기로 돌아가면 의현스님 총무원장을 하면서 교구본사를 장악하려는 시도가 처음 실행된 곳이 다름 아닌 분쟁 본사인 마곡사였다. 당시 교구본사인 마곡사는 여러 가지 시끄러운 일들로 세간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황진경 스님과 상좌 간의 분쟁들이 사회 전면에 드러났다. 그렇게 분쟁 교구 본사 사찰 마곡사, 본사를 접수 장악하였고 봉선사 문중으로 도봉산 망월사 주지로 있던 능엄 스님이 마곡사 본사 주지를 맡았었다. 두 번째 본사 장악으로 봉선사 또는 용주사로 낙점했었다는 것이 풍문으로 돌았었다. 그런데 용주사 본사 주지 임기 만료 시점을 계기로 용주사 접수 움직임이 시작된 것이었다. 이런 사실을 은사 스님이 기성 스님에게 도움을 청하면서 표면화되었다. 참고로 기성 스님과 의현스님의 관계 1ㆍ의현스님이 기성 스님에게 두 번의 은혜를 입었던 사실이 있었단 사실 2ㆍ기성 스님은 조계종 정화 당시 활동한 이력으로 그 능력 역량을 모두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3ㆍ 용주사에서 전강 조실스님이 중앙선원을 개원하여 선문을 열었을 당시 중광스님 기성 스님 등이 정진한 곳이기도 했다. 이렇듯 기성 스님의 등장은 나의 은사이신 정대 스님에게는 어둠 속 태양을 만난 격이라 하겠다. 그것은 기성 스님을 모시고 가자, 은사 스님 얼굴에 화색이 돌고 맞이하는 모습에서도 충분하게 드러났다. 정진하러 왔다가 분쟁 속 해결사 역할을 해야 하는 입장으로 당시 기성 스님의 고뇌를 옆에서 보는 나는 미안한 마음으로 나 역시 아무것도 모르고 스님을 모시고 온 것임을 밝혔었다. 참고로 기성 스님과 의현스님 과거 인연 관계를 보자면 정화 당시 대구 동화사가 기성 스님 몫으로 되자 의현스님이 자신에게 넘겨주기를 간청하여 그렇게 해주었고 돈을 쓸어 담는다는 갓바위 암자를 맡아 있을 적 역시 그곳조차 자신이 운용 하도록 해달라는 요구에 말없이 넘겨주고 선방으로 돌아간 사례로 의현스님이 조계종 행정가로 성장하는 동력이 된 이 일로 기성 스님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처지인 것이다. 기성 스님 갓바위 머물던 시절 당시 갓바위 기도 오는 분들 시주금이 너무 많아 은행직원이 와서 세어보지도 않고 은행에 몇 자루에 넣어가면 은행직원들이 돈을 정리하여 통장에 기록하여 가져오면 그대로 통장만 받았다고 한다. 이렇듯 알짜 사찰을 통장과 함께 넘겨 받은 의현 스님이 동화사와 더불어 운영하였으니 자금 운영에 영향력을 확실하게 지녔을 것이다. 기성 스님이 용주사 중앙선원에 왔다는 소식에 중광스님이 내려와 20 여일 주변에 머무르면 용주사가 위기로부터 지켜지도록 힘을 보태었다. 힘이 모여지고 전략적 선택이 마련되자, 기성 스님을 비롯하여 중광스님 등이 총무원으로 의현스님을 몇 차례 찾아가 완벽하게 분쟁을 종식했다. 그렇게 중앙선원의 여름 한 철을 보내며 용주사 위기를 넘기게 된 것이다. 그때 중광스님이 대중들을 위하여 오랫동안 놓았던 붓을 다시 들고 선화를 그려 대중 스님들에게 바쳤고 은사 스님이 족자로 만들어 스님들께 전달하였으니, 용주사는 그렇게 외부 세력의 분쟁 회오리로부터 지켜진 것이다. 용주사 문중은 위기 극복에 힘을 모아주신 기성 스님과 중광스님 그리고 주지 임기 만료 시기였던 정대 스님을 비롯한 함께한 분들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전강 조실스님의 의지를 받들어 선가의 문중으로 그 명맥을 지켜내고 정대 스님께서 수도원 허가를 받아 송림 지역에 지으신 현 선원은 당시 주공 스님 등 선방 스님들의 지혜를 모아 설계하여 지은 것이기에 한국 선불교 도량으로 그 가치를 드러낼 수 있는 살아있는 수좌계 혁신 도량이 되도록 전강 문도와 제방의 수좌 스님들은 힘써야 할 것이다. 조계종은 선종 사상 회복으로 출발한 불교 단체이다. 선종의 가치를 떠난 행위는 용인되어서는 조계종 존속 이유가 없다 할 것이다. 송담 선사의 조계종 탈퇴는 조계종의 선 사상이 선종으로부터 멀어졌다는 강력한 의미가 된다. 선승의 지도자가 떠난 자리는 선종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 증명되는 현실 조계종을 바르게 살펴야 할 것이다. 사람이 모이면 된다. 선을 행하는 수좌가 바로 서면 되는 간단한 논리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행정승들의 횡포가 극심하다고 해도 결국 사람들 일이다. 속가 법에 앞서 세속 관습법에도 의탁하지 말고 승가 본연의 수행 규범을 따라 실행하면 된다. ■ 참선 수좌 착한 대중의 힘이 최우선의 법이 되어야 하는 까닭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선종 승가를 지켜내는 힘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