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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물드는 통영바다
최화웅
부산에는 밤새 태풍 ‘탈림’의 북상으로 문틈이 휘파람을 불었다. 이튿날 2017년 9월 17일 일요일, 오늘은 무광이 부부랑 다도해의 길목 통영국제음악당에 나들이를 하는 날이다. 아침 8시 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미사에 참례한 뒤 10시가 가까워 우리 부부는 무광(문정희)부부가 기다리는 문현동으로 서둘러 갔다. 간간이 비가 뿌리는 흐린 날씨에 우리 일행은 삼백리길(약120km) 물 따라 맑은 해안길을 달렸다. 오늘 콘서트의 의미를 화제로 가을빛 믈 들기 시작한 남도의 바다 정취를 마음껏 즐기며 마음의 우정을 나누었다. 하늘 아래 ‘비와 구름과 바람과 바다’의 서정을 넉넉히 느낄 수 있는 드라이브였다. 올해의 통영국제음악제 주제는 ‘아시아에서 세계로(From ASIA to the World')’처럼 아름다운 음악이 일상에 찌든 우리들의 마음을 활짝 열어주었다. 오늘은 현대음악의 5대 거장으로 평가받는 ‘윤이상 탄생 100주년 기념 가을시즌’의『해피 버스데이, 윤이상!』콘서트를 관람하기 위해서다. 통영시 도남동 1번지 언덕에 자리 잡은 통영국제음악당 콘서트홀에서 이날 첫 무대는 영국 클래식잡지 신피나뮤직이 선정한 역대 최고의 플루리스트 최나경과 중국계 미국인 앤드류 저우의 피아노로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가락’>, 하노버와 슈투트가르트 음대교수를 역임한 인고 고리츠키(Ingo Goritzki)와 솔로 음반으로 독일 에코 클라식의 음반상을 받은 바 있는 곽여희가 연주하는 <두 대의 오보에를 위한 ‘인벤션’>, 2003년 윤이상국제음악코쿠르에서 2위로 입상하고 1997년 차이콥스키 국제 청소년 콩쿠르에서 첼로부문 1위를 차지해 윤이상 음악의 탁월한 해석자로 알려진 과학하는 괴짜 첼리스트 고봉민과 프라임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수석 김아림의 하프로 <첼로와 하프를 위한 ‘듀오’>를 들려주고 이석중과 윤동환의 바이올린과 이수민의 비올라, 그리고 고봉인의 첼로와 배기태의 더블베이스가 협연하는 <현을 위한 현악5중주 ‘융단’>이 장관을 이루었다. 이어 소프라노 이명주가 윤이상의 초기 가곡으로 통영출신 김상옥의 시 <추천(鞦韆, 그네)>, 박목월의 시 <달무리>, 조지훈의 시<고풍의상>을 차례로 노래했다. 다섯 무대 모두 윤이상(1917∼1966)의 작품으로만 연주하였다.
대양을 향해 날고 싶은 갈매기의 날개 짓을 형상화한 통영국제음악당의 콘서트홀은 1309석 콘서트홀 로비에는 전국에서 찾아온 팬들로 붐볐다. 그 중에는 부산사범학교 국어교사와 음악교사로 근무하면서 사랑을 맺은 부인 이수자여사도 아흔의 나이에 딸과 함께 얼굴을 보였다. 나의 통영국제음악제 관람은 세 번째다. 처음은 리처드 용재 오닐이 비올라연주로 개막한 음악제의 마지막 날 부산의 병원의 접고 귀향한 창효 형의 초청으로 남망산의 시민회관에서 열린 2006 통영국재음악제 폐막 연주를 관람하였다. 상트 패테르부르크 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쇼스타비치 교향곡 5번 혁명과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제1번을 듣고 받은 감동이 벅찼다. 두 번째는 일주일 전 통영에서 가진 옛 스쿠바 다이빙 동호인들의 모임을 <베를린 마스터스> 공연을 보고 시작하였고 이어 <해피 버스데이 윤이상>공연이 세 번째다. 2006년 음악제 때 받은 샘플러CD를 통해 윤이상의 음악을, 윤이상의 선율과 음색을, 윤이상만의 불규칙적인 리듬을 접할 수 있었다. 처음 접한 윤이상의 현대음악은 난삽하고 어려워 낯설었다. 서양 악기로 우리의 삶과 전통을 소리 내어보려고 했다. 그 결과 서양 음악에 동양적인 요소를 자기만의 독특한 표현으로 덧칠하였다. 눈을 지그시 감고 음악의 흐름, 리듬, 음과 음 사이의 입체적인 공간 그리고 음에 담겨 있는 감정을 온몸으로 느낀다. 그러면 이국에서 그토록 목말라하던 우리의 삶, 소리, 우리의 하늘과 땅이 펼쳐진다. 나는 오래전에 윤이상에 관한 자료와 루이제 린저가 쓴 대담집『상처받은 용』을 읽었다. 윤이상의 나이 50살 때인 1967년 6월 17일 윤이상과 부인 이수자가 중앙정보부에 의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동백림(동베를린)사건이다. 그들의 혐의는 이른바 북괴 대남적화 공작단 사건』으로 서독과 프랑스 등 유럽지역에 유학하고 귀국한 현직 대학교수와 유학생 속에는 화가 이응노와 작곡가 윤이상과 그의 부인 이수자 여사 등 모두 194명이 강제연행 당했다. 그해 열린 1심에서 무기징역, 2심과 3심을 거치며 10년형으로 감형된 뒤 1969년 3월 서독으로 추방되었다. 2006년 1월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의 조사 결과 동백림사건은 부정선거에 대한 거센 국내 비판을 무마시키기 위해 과장되고 확대해석된 조작극이라는 평가다.
윤이상은 산청에서 태어나 3살 때 통영으로 왔다. 일제강점기 때 통영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청년기에 6.25를 겪었다. 1944년에는 통영청년들과 독립운동을 하다가 옥살이 끝에 결핵으로 서울대학병원의 전신인 경성제대병원에서 입원 중 해방을 맞았다. 광복 이후에는 유치환, 김춘수, 정윤주, 전혁림 등과 함께 통영문화협회를 결성하였다. 첫 결실로 동요집『목동의 놀래』를 냈다. 그 뒤 부산으로 나와 1950년 1월 부산사범학교 근무 때 국어교사 이수자씨를 만났다. 그는 살아 있는 동안 어릴 적 고향 통영의 그 맑고 푸른 바다를 늘 그리워했다. 그는 언제나 고향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한 번은 일본에서 보트를 타고 통영 앞바다까지 다가섰으나 끝내 통영땅을 밟지 못하고 돌아서며 펑펑 울었다는 이야기에 가슴이 아린다. 정치적 차이와 편견이 장벽에 갇혔다. 그는 결코 돌아오지 못했지만 그의 음악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의 꿈은 고국에 음악이 있는 삶을 이루고 우리 문화를 음악을 통해 전 세계에 알리려고 했다. 그는 한국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인물 중 한 사람으로 남북 분단의 슬픈 현실을 오선지 위에 쏟아내며 예술혼을 불태웠다. 동백림사건으로 서울구치소에 구금되었을 때 자살을 시도한 그가 하루는 손가락을 깨물어 흐르는 붉은 피로 구치소의 벽에 “나는 빨갱이가 아니다”라고 쓰며 온몸으로 저항했다고 한다. 그 일로 음악 작업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오페라『나비의 꿈』을 작곡했다. 완성된 작품은 집행유예로 먼저 풀려난 부인을 통해 독일에 전달되어 1969년 2월 23일 뉘른베르크에서『나비의 미망인』이라는 제목으로 초연되었는데 31차례나 커튼콜을 받는 등 큰 호평을 받았다. 옥중에서 건강이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 중『율』과『영상』을 작곡하기도 했다. 당시 스트라빈스키와 카라얀이 주축이 되어 200여 명의 유럽음악인들이 한국 정부에 공동 탄원서를 내며 격하게 항의했다. 그 뒤 윤이상은 대통령 특사로 석방되어 내쫓기듯 서독으로 돌아가 국적을 바꿨다. 그 뒤 그토록 염원하던 남북통일은 요원한 채 시간만 흐르고 윤이상은 끝내 한국에 들어올 수 없었다. 유신독재가 막 시작된 1974년 유럽 교민과 유학생 55명이 모여 민주사회건설협의회 설립을 주도하며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의 철권통치에 맞서 민주화의 횃불을 높이 치켜들었다.
심지어 박근혜 정부시절에도 윤이상은 여전히 금기시 되고 윤이상평화재단이 블랙리스트에 오르기도 했다. 윤이상은 분단의 현실 속에서도 한민족간 문화교류가 이어져 음악이 남북통일의 기초가 되기를 간절히 염원했다. 통영국제음악제는 2002년 페스티발을 시작한 이래 현대음악의 특화된 자체 앙상블을 만들어가고 있다. 2010년 개관한 통영 도천테마기념관또한 그 이름이 이념논쟁으로 지워졌다가 지난 11일에야 통영시의회의 결의로 윤이상기념관으로 제 이름을 찾게 된다. 2014년에 개관한 통영국제음악당은 1309석 규모의 슈박스 형태로 설계되어 완벽한 음향을 자랑한다. 처음에는 윤이상기념음악당으로 세우려고 했으나 지원, 관리 문제와 좌파 여론몰이로 제 이름을 찾지 못했다. 새로운 시대를 형성한다는 것은 미래의 관객을 창출하는 것이다. 올해로 15주년을 맞이한 통영국제음악제를 두고 독일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신문에서 ‘아시아의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이라고 소개하고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높이 평가받는 현대음악제라고 소개했으며 독일 언론인 엘레노어 뷔닝은 통영국제음악당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연장이라고 표현했다.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는 2003년부터 계속 이어지고 있는데 해마다 봄가을 시즌으로 나누어 치른다. 4월초 통영국제음악제와 11월에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 부문의 콩쿠르를 번갈아 연다. 우리는 윤이상을 한 작곡자, 유명한 음악인으로 보지 말고 그가 살아온 격동의 역사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는 음악을 통해 이 땅, 이 바다, 이 하늘 아래 에서 만들어진 우리의 소리를 세계인들에게 들려주고자 했는지 모를 일이다. 그는 한국적인 것, 한국만의 정서를 서양 악기로 표현하고자 노력을 기울였고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염원하다 세상을 떠났다.. 그는 “무심하게 살아가는 작곡가는 세상을 볼 수 없다. 나는 인간의 고통, 억압, 불의에 대해 생각한다. 고통이 있는 곳, 불의가 있는 곳에서 나는 나의 음악을 통해 말하고 싶다.”라는 말을 남겼다.
윤이상은 1955년 ‘현악4중주 1번’과 ‘피아노 트리오’로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하고 1956년 프랑스로 유학, 이듬해 서베를린 음대를 졸업했다. 독재자 박정희의 핍박에도 굴하지 않은 그의 저항수단은 오로지 오선지 위의 음표뿐이다. 그는 동요로부터 오페라와 성악곡 ‘오 연꽃 속의 진주여(1964), 유동의 꿈(1965), 나비의 미망인(1987~8), 요정의 사랑(1969~70), 심청(1971~2),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1986~7), 등이 있고 관현악곡으로 바라(1960), 무악(1978), 예악(1966), 광주여 영원히(1981)을 작곡했으며 실내악곡으로 관악기, 타악기, 콘트라베이스를 위한 무궁동(!1959) 등5곡, 협주곡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등 6곡 등 150여 편의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다. 1971년 서독으로 다시 돌아와 이듬해 서베를림 음대교수가 되었다. 1982년 평양에서 ‘광주여 영원히’가 연주되었으며 1984년 5월 베를린 필 하모니창단 100주년 기념으로 교향곡 1번이 초연되었다. 1988년 평양에 ‘윤이상 음악연구소’가 개관하고 도쿄에서 남북에 휴전선상 ‘민족합동음악축전’을 개최하자고 제안한 결과 2년 뒤에 분단 45년만인 1990년 ‘남북통일음막제’가 열렸다. 그의 나이 78세가 되던 1995년 독일 바이마르에서 괴테상을 수상하고 그해 11월 3일 우리 현대사의 비극과 상처를 안고 눈을 감아 독일 가토우 공원묘지에 잠들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7월 G20 정상회담 참석차 독일을 방문했을 때 통영의 동백나무 한 그루를 공수해 베를린 가토우 공원묘지에 있는 윤이상의 묘비 앞에 심고 동해한 부인 김정순여사가 참배했다. 이 일을 두고 일각에서는 “김일성을 흠모한 윤이상을 흠모하는 대통령 부부”라는 비난을 일삼았다. 그러나 그는 ”언젠가 때가 되면 귀향하여 더 이상 오선지에 곡을 쓰지 않고 그냥 조용히 앉아 내 안에서 들려오는 음악의 울림을 듣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조국을 온몸으로 부등켜 안고 떠났다. 공연이 끝나고 통영국제음악재단 대표 플로리안 라임씨가 무대로 나와 우리말로 감사인사를 전하며 객석에 앉은 윤이상 선생의 부인 이수자여사에게 내려와 꽃다발을 전했다. 옛 충무관광호텔을 헐고 통영국제음악당 콘서트홀에서 데크로 나서자 통영 앞바다에는 때마침 저녁노을이 말없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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