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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선한 행위는 분리될 수 없다
롬10:9-13 약2:14-18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택함받은 자들의 모임이므로 일반적인 모임하고는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우선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예배하는 곳이고 교회는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하는 곳인데 사랑만 있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보전되기 위해서는 징계도 필요한 곳이 교회이라는 것이다.
교회 나오는 자들은 세상에 속하지 않는 자들이므로 때로는 불신자들로부터 크고 작은 박해를 받기도 하지만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합니다(롬12:14).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있으니(롬12:19) 악으로 악을 갚지 말라고 하지만 인간에게는 악을 행하는 자에게 더 큰 악으로 갚으려는 본성이 있으므로 하나님께 맡기고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해야 합니다(롬12:20). 그러므로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악에게 지는 것이며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 진정으로 승리하는 것입니다. 악한 자에게 지속적으로 선을 베풀면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돌이키게 하셔서 원수가 친구가 되게 하십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성숙한 자세는 형제와 함께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즐거워하는 자와 함께 즐거워해야 합니다. 슬픔은 나누면 반으로 줄어들고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됩니다. 그런데 우는 자와 함께 울기는 쉬운데, 즐거워하는 자와 함께 즐거워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시기심 때문에 형제의 성공을 진심으로 기뻐해 주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기뻐하면서 동시에 씁쓸한 마음이 생기기도 하지만 이러한 마음을 버리고 진심으로 형제와 함께 즐거워하는 자야말로 참으로 성숙한 사람입니다. 다음, 원수 갚은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선을 베풀어야 합니다.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는 말씀은 오직 성경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예가 삼상 25:39절에 나옵니다. ”나발이 죽었다함을 다윗이 듣고 이르되 나발에게 당한 나의 모욕을 갚아 주사 종으로 악에서 지키신 주를 찬송할지로다 주께서 나발의 악행을 그의 머리에 돌리셨도다 하니라. 유대인 랍비들은 원수를 진노하심에 맡기는 것이 경건의 핵심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염려와 모든 이해관계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신앙의 근본입니다. 원수를 갚으면 악순환이 되풀이 되지만 선으로 악을 이기면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집니다. 우리는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끊임없이 선을 베풀어야 합니다. 성경은 선을 행하면 상을 주고 악을 행하면 벌을 받는다는 것이 성경의 일반적인 가르침입니다. 벌을 준다는 것은 지옥을 말하는데 하나님은 독생자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지옥을 만들 수 있냐고 비아냥하는 여호와의 증인같은 자들도 있다. 여호와의 증인을 창시한 찰스 럿셀은 젊을 때 지옥에 대한 공포심을 갖고 있던 중 지옥이 없다는 말을 듣고 감명(?)을 받게 되었으며, 여호와증인들의 교리에는 지옥을 부인합니다. 영원한 고통 형벌을 받는 게헨나라는 지옥은 하나님의 성품에 맞지 않는다고 부인하는 이런 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것은 사랑의 하나님은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한 손에는 사랑을 베풀어 주시면서도 또 한 손에는 공의를 갖고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키는 가를 감찰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마음을 저울질 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관찰력으로 사물을 꿰뚫어봄)하지 못하시겠으며 네 영혼을 지키시는 자가 어찌 알지 못하겠느냐 그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리라(잠24:12)는 사랑의 하나님은 곧 행위대로 보응하시는 공의의 하나님 즉 심판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눈에 보여지는 것이 없으니 깨닫지 못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고 합니다.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때로는 주의 종들이 탄식할 때도 있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악한자의 길이 형통하며 핍박한 자가 안락함은 무슨 연고이니이까'(렘12:1)라고 했고 하박국 선지자도 '왜 의인이 고난을 받으며 공의가 굽게 되었나이까'(합1:2-4)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얕은 인간의 생각일 뿐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질투,시기)하지 말라. 저희는 풀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요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라'(시37:1-2)고 하셨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심판이 즉각적이라면 도둑질하면 손이 잘려지고 욕하면 입이 돌아간다면 사람들이 죄짓지 아니할 것인데,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까 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공포의 두려움속에 살아가는 기계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공의의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어느 나라가 술로 인한 방탕을 막기 위해 술먹는 자의 눈 두개를 뽑는다고 왕이 공포했는데 그 첫번째로 걸린 자가 왕자가 되었습니다. 왕은 많은 백성 앞에서 왕자의 눈 하나를 뽑게 하였고 자신의 눈 하나를 뽑아서 아버지의 사랑과 법을 지키는 공의를 행하였으니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이라고 생각할 때에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함께 집행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공의의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대해 몇 가지 생각하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1)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따르자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죄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죄인으로 태어난 우리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란 예수님을 믿어 죄용서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가를 살펴서 실천하는 것이다.
(마6:33) 오직 너희는 첫째로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은 다른 말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죄사함 받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상한 갈대도 꺽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며 죄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깨달은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해야 할 것입니다. 불평과 원망은 사탄이 사용하는 최고의 무기입니다. 섭섭한 마음이 찾아오면 과감히 물리치고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만을 전해야 합니다. 오 주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들으려 하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왜 의인이 고난을 받아야 합니까? 라는 하박국 선지자의 질문에 '이 묵시도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3-4) 하셨으니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 길은 고난의 길이며 좁은 길이라고 하지 아니하셨던가? 특별히 남을 위하여 희생된 고귀한 성도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신다는 것이다. 여기 2차 대전 때 대니얼 폴링이라는 군목이 죽음을 앞두고 아버지께 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제가 군함을 타고 전장에 나갑니다. 살아서 돌아오기보다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의 행동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해주십시오. 미국의 젊은 군목 대니얼 폴링은 전장에 나가면서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1943년 그가 탔던 도체스터함은 대서양에서 어뢰를 맞고 침몰했을 때 승선인원 904명 중 678명이 순직했다. 배가 기울어져 갈 때 폴링을 비롯한 군목들은 구명대를 다른 사람들에게 주고 어깨동무를 한 채 찬양하며 바다에 가라앉았을 때 그들의 얼굴은 마치 천사와 같았다. 구명보트를 남에게 주고 죽음을 앞두고 하는 기도와 찬양은 우리가 원하는 바를 얻는 쉬운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되는 유일한 길이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들에게는 정녕 의의 면류관이 안겨지리라는 말씀이 그들을 통해 이루어 질 것이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9)는 약속이 그들을 통해 이루어 질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하나님 말씀을 믿고 살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는 인류가 구원받지 못하도록 오직 거짓과 궤휼로 사람들을 속이고 죄짓게 하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 전 까지는 세상의 임금인 마귀가 예수님에게도 하나님말씀을 가지고 시험했는데 마지막 때에도 마귀가 하나님 말씀을 갖고 우리를 넘어지게 한다면 거기에서 벗어 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 까? 그렇다면 마귀가 어떤 말씀을 갖고 인간들을 믿음에서 떠나게 하는 것인가? 그 말씀들을 찾아봅시다.
(롬10:9-10)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주 예수님을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것을 네 마음속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니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예수님을 네 마음속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이렇게 간략하게 기록한 성경도 없을 것이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단순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그 길을 갈 수는 없기에 주님가신 길은 십자가의 길이라고 합니다. 주를 따르는 자들은 주와 함께 십자가를 향해 가는 길입니다. 위에서 말한 대니얼 폴링이 구명보트를 남에게 주고 찬송을 부르면서 목숨을 희생하는 길이 바로 십자가의 길이니 아무나 갈 수 길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은 또한 공의의 하나님 이심을 깊이 깨닫고 두렵운 마음으로 섬겨야 하겠습니다. 무섭다고 겁이 나서 억지로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죄용서 받았으면 주님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고 주님께서 기뻐하는 일들을 마음껏 하여 주님께 영광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은 거짓이 마치 진리처럼 통하는 세상이 된지 오래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떻한가? 사람들이 교회나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아 천국 간다고 믿고 있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예수님 이외엔 우리에게 구원을 알려준 분은 없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그의 이름과 그분의 인격과 그분이 명하신 말씀을 믿고 그분의 가신 길을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이렇게 믿어야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고 좁은 길을 가는 것인데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많지 않고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믿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마치 사사시대에 사람들이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하나님을 믿었던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과는 반대로 행했던 사람들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오늘날도 열심히 믿는 것 같은데 자기중심적으로 믿는 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사실 믿음이란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다. 마지막을 향해 역사의 종점 가까이 와있는 이 세상은 적그리스도를 등장시키기 직전인 지금 세계는 거짓에 익숙해지면서 거짓말에 침몰되어 가는 중이라는 것은 이 세상이 주 예수를 미워하기 때문이다. 거짓을 전유물로 삼는 거짓의 아비인 마귀를 이길 힘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2) 예수님을 믿는 것은 구원의 시작이다
요한복음 8장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하늘의 하나님 아버지가 보내어서 온 세상의 빛이라고 하니까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네가 누구냐?’ 하였을 때 예수님은 ‘나를 믿으라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내 제자가 된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죄와 마귀의 종에서 자유케 하리라’. 그렇게 말씀하셨어도 그들이 믿지 않을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요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마귀는 거짓의 아비라는 것인데 예수님을 믿지 않는 너희는 마귀의 자식들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들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거짓의 아비 마귀에 대해선 창세기 3장 에덴동산에서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는 장면이 나옵니다. 에덴동산 안에 각종 실과나무들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단 선악과를 먹지 말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명하셨는데 마귀는 하와를 미혹합니다. “아무 것도 먹지 말라 하시더냐?
괜찮다. 눈이 밝아지면 하나님처럼 된다는 이 말속에는 왜곡 거짓 선동과 부추김 그리고 의심 간교함이 들어 있어서 선악과를 먹고 죄인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사실 마귀라는 존재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반역하도록 죄를 짓게 하는 데는 최고의 전략가입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지 않으면 백이면 백 다 속아 넘어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사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하셨고 그분의 말씀인 성경말씀을 온전히 믿으면 마귀의 유혹에서 벗어 날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인류역사를 뒤돌아보면 개인이건 국가이건 자신이 속고 때로는 남을 속이는 것들을 누누이 보아왔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사람을 속이며 그들을 실족하게 하는 최고의 사기극이 무엇일까? 대부분은 돈에 대해 사기를 당했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나 이런 물질적인 사기보다도 더 큰 사기가 바로 영혼을 속이고 지옥가게 하였다면 이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무지막지한 사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기로 돈을 잃었던지 사기로 건강을 잃었다면 거기에 따른 고통은 오겠지만 그렇다고 영혼이 멸망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영혼을 상대로 사기를 당했다면 살았을 때 고통받는 정도가 아니라 죽은 후 지옥에 빠졌다면 이는 지상 최고의 사기극이라는 말이다. 이런 종류의 사기는 종교를 다루는 곳에서 발생하는데 예를 들면 신천지교회들은 교인들을 추수한다고 하면서 우리 교회 오면 144000안에 포함된다는 말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미혹당하여 그리로 갔던가? 만약 그리로 갔던 자들이 지옥 갔다면 이것이야말로 영혼들이 사기를 당했다는 것이다. 이런 거짓정보는 이단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그와같은 사기극에 대해서 교회에서도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한번 복습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읽겠습니다.
(롬10:9-10,13) 9 만일 네 입으로 주 예수님을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것을 네 마음속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니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이 말씀은 교회다녔다 하면 몇 번씩 들었을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고 이 몇 절만통해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고 입으로 시인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인데 교인들은 이 말씀을 믿으므로 구원은 이미 받았다고 하는데 정말 이 말씀들이 구원을 보장한다는 것이 사실인가? 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한 말은 또 무슨 소리인가? 이 말씀에 대해 의심을 갖게 하는 말씀이 마태복음에 있다.
(마7:21) 내게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다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오직 아버지의 뜻을 행하여야 들어간다고 하였는데 그러면 교회에서 주님 주님 이렇게 시인하였는데 구원을 못받았다는 것인가?
분명히 예수님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였다고 그들이 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니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예수님인가 아니면 로마서를 기록한 바울이 문제인가? 바울이 기록한 로마서를 11장까지 보자.
롬10:13에서 바울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였으니 이 문제의 답을 얻기 위해 롬11장 21-22절을 참고하자.
(롬11:21-22) 21 하나님께서 본래의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을진대 그분께서 또한 너를 아끼지 아니하실까 조심하라. 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엄하심을 보라. 넘어진 자들에게는 엄하심이 있으나 네가 그분의 선하심에 거하면 너를 향하여서는 선하심이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잘려 나가리라.
유대인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잘려버리시는데 하물며 접붙임을 받은 너희들도 잘려 나간다는 경고의 말씀이므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엄하심을 보라는 것인데 이 말씀은 지금 예수님 믿는 우리들에게 이야기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원가지인 이스라엘도 불순종하였기 때문에 잘라버렸듯이 너희들도 예수님 믿어서 구원받았으니 더 이상 구원에 대해선 걱정 안해도 된다는 것은 하나님 뜻을 왜곡한다는 것이다. 인간들 나부랭이가 성경을 제멋대로 해석하고 칼빈이 어떻고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어 구원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한번 받은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 믿고 구원을 완성해 가는 길에서 잘못 하면 구원에서 떨어진다는 것을 이렇게 말했다. 벧후2:22 개나 돼지들이 토한 것을 먹거나 진흙창에 뒹군다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게 된다는 것은 지금 성도들이 예수님 믿어서 구원받았는데 나중에 세상의 쾌락들 육신과 안목의 자랑들로 인해 믿음을 잃어버리면 나중 형편이 더 심하게 된다는 말을 비유한 것이다. 실제로 바울은 그런 예화를 디모데후서에 기록했다.
(딤후 4:10) 데마는 현재 이 세상을 사랑해서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떠났고 그레스겐은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으며.
여기 나오는 데마와 그레스겐과 디도는 사도바울의 조력자로 왼팔이고 오른팔로 볼 수 있는데 그들이 세상을 사랑하면서 믿음이 파선될 정도로 변질되었는데 하물며 우리도 세상이 주는 부귀영화나 육신의 쾌락에 의해 믿음이 변질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데마는 사도바울과 사역을 함께 했던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나중에는 세상을 사랑해서 데살로니가로 갔다는 것은 우리들도 한순간에 변질되어 지옥에 떨어질 가능성이 있으니 구원에 대해 두려움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분의 영혼을 팔고 사는 사기극 중에는 한번 구원받았으면 영원한 구원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사악한 사기극에서 반드시 벗어나야한다. 우리들의 신앙의 기준은 처음믿을 때 믿음이 아니라 죽음 직전 신앙이다.
인생은 마라톤을 경주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할 수 있다. 마라톤경주는 참가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참가하여 면류관을 쓰는 것이 목적이다. 출발할 때 앞섰다고 면류관 받는 것이 아니다. 반환점 제일 먼저 돌았다고 면류관 받는 것이 아니다. 누구든지 골인점을 제일 먼저 통과하면 면류관을 쓰듯이 우리 신앙생활도 지난 세월에 내가 어떻게 주님을 믿었는지 따지지 말고 지금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잘 믿으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눈은 오직 현재만을 보시기 때문이다.
그러니 과거에 아무리 믿음이 좋았더라도 죽음 직전 세상을 사랑한다면 천국과는 거리가 멀다. 구원은 한번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죽는 그 시간까지 구원이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빌2:12) 바울은 우리에게 너희는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신앙의 인물은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을 가지고 무릎을 꿇었다. 하나님앞에서 순종하는 것은 강압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자칫 노력과 수고로 구원을 스스로 이루어가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지만, 바울은 이어서 바로 하나님께서 그 소망을 성도의 마음에 두시고 그것을 이루어 가신다고 말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의 날까지 쉬지 않고 성도를 돌보실 것입니다(빌1:6). 그러므로 성도는 이 사실을 믿음으로 끝까지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흠없이 순전하게 살아가기 힘든 시대입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야합니다. 예수님은 천국에 대해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고 하셨습니다(마11:12). 천국이라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온 정열로 심혈을 기울이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누가복음에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13:24)고 했다. 이런 말씀은 믿음은 능동적으로 하나님나라의 일을 하라는 말씀이다. 마음으로 조용하게 믿는다고 교회에 나와서 예배만을 드린다고 구원이 보장된다는 말씀은 전혀 아니다.
(눅13:3)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회개치 않으면 다 그와 같이 멸망하리라 하신 것 같이 주님께서 베드로 요한 야고보 같은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만일 너희도 회개치 않으면 구원을 잃어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들도 구원의 길을 가다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인데 우리들이라고 특별 케이스로 한번 믿으면 천국에 간다는 사기에 속지말기 바랍니다. 제자들이 길을 잃어버릴 일이 있다면 우리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을 한번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였다고 구원이 이루어졌다는 말은 인류역사상 가장 극악한 사기라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롬10장에서 바울이 말한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한다면 구원받는다는 것은 뭔가? 이것은 로마서가 쓰여질 때 상황을 알아보자.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한다면 죽게 되거나 재산을 다 뺏기게 된다는 그런 상황에서 주라고 시인하였다가 잡히면 옥에 갇히는 상황에서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자유롭게 사는 이 시대에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과 그 때 당시와 비교하면 천지가 개벽할 정도로 변했다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무엇인가?
(롬12:1-2) 1 내가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는 너희 몸을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살아있는 희생물로 드리라. 2 이 세상에 동화되지 말고 오직 너희는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그 선하시고 받으실 만하며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입증하도록 하라는 이것이 믿음이다. 구원을 시작한 사람의 믿음이란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다. 여러분 날마다 피흘리기까지 죄와 싸우고 있는가? 죄의 유혹은 생각보다 강한데 정말 이를 악물고 죄와 싸우고 있는가?
악한 것을 몹시 싫어하고 선한 것을 굳게 붙들라(롬12:9)는 말씀에 비추어 본다면 세상문화와 정욕과 쾌락을 거부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또 우리를 핍박하는 사람들에게 아무에게도 악으로 갚지 말고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했는데 롬10장 9절에서 바울은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로마서 전체를 보면 어떤 단어로 요약되는가하면 그 단어는 어디서든 예수님을 믿고 있다는 열매가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여러분이 예수믿는 열매를 입증하지 못하면 여러분은 구원을 아직 시작도 못했다는 것이다.
2. 구원은 선한행위로 완성된다 (약2:14-18)
어떤 교회에서 성경공부시간에 토론이 벌어졌는데 토론의 주제가“믿음이 제일인가, 행함이 제일인가?”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편에서는“믿음이 제일이다.”하고 한편에서는“행함이 제일이다.”하면서 여러 가지 말잔치가 벌어졌다는 것인데 이것처럼 어리석은 토론이 없다는 것이다. 믿음과 행함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행함도 있는 것이고, 믿음이 없으면 행함도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는 말씀에 대해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믿음이 있으면 행함도 있어야 한다
(약2:14) 내 형제들아 사람이 자기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행위가 없으면 그것이 무슨 유익을 주느냐?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느냐?
이 말씀은 믿음이 있는 사람은 행함으로 그 믿음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다(약2:18).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이유는 아브라함은 믿음대로 행함을 보여 주었다. 하나님께서 독자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 가서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을 때 그는 이삭을 번제물로 바쳤던 행위는 라합도 여호수아가 보낸 정탐군을 숨겨둔 행위는 곧 믿음이 곧 행함이라는 것입니다. 믿음과 행함은 서로 분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행위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스위치를 올리면 전등불이 켜지고, 꽃이 피면 열매가 맺히는 것과 같이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행함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으면 행함도 없어 죽은 것입니다.
(2)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약2:15-17)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가 그들에게 이르되 평안히 떠나가라, 너희는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하라 하고는 몸에 필요한 그것들을 너희가 주지 아니하면 그것이 무슨 유익을 주느냐? 17 이와 같이 믿음도 행위가 없으면 그것만으로는 죽은 것이니라.
믿음은 주 안에서 생각한 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먹을 것이 필요하구나 생각했으면 먹을 것을 주는 것이고 입을 것이 필요하구나 생각했으면 입을 것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헐벗은 자나 굶주린 자를 다 책임질 수는 없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나누어 줄 수는 있습니다. 그런 것이 없다면 우리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도요한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않는 자가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요일4:20).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계명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줄이면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잠시 생각을 한다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우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선 누구든지 아멘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을 때는 예까지 들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네 오른뺨을 치거든 그에게 다른 뺨도 돌려대며 또 어떤 사람이 너를 법에 고소하여 네 덧옷을 빼앗으려 하거든 네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고 또 누구둔지 너로 하여금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와 함께 십 리를 가며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고 네게 빌리고자 하는 자를 너는 물리치지 말라(마5:39-42).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므로 그런 사람의 믿음은 죽은 믿음으로 구원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3) 행함은 믿음의 열매이다
믿음은 보여 줄 수 없는데 네 믿음을 내게 보여 달라고 합니다.
(약2:18) 참으로 어떤 사람은 이르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위가 있으니 네 행위가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내 행위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사람들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대로 순종하여 고아와 과부들, 궁핍한 자, 환란당한 자를 돌아보면 사람들이 우리의 경건한 행함을 보고 저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자신의 사랑을 그렇게 확증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으면 이웃을 사랑하는 행함도 있어야 합니다. 이 행함이 여러분의 믿음을 온전케 하고 당신의 믿음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함으로 믿음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선한 행위를 하는 것이 옳다고 인정하면서도 선한 행위를 한다고 하여 구원을 받는 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구원받기 위해 선한 행위를 하는 것은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구원받았기 때문에 선한 행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교회에서 믿음은 강조하면서도 정작 선한 행위는 구원과 상관없다는 엄청난 오류를 행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통해 이웃 사랑 즉 선한 행위를 강조하시고 있다. 예수님은 이 선행을 구원의 조건으로 말씀하시지는 않는지요? 이는 선한 행위를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되었을 때 마침 가장 존경받는 제자장과 레위사람은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으나 무시했던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 상처를 치유해주고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으며 주막집 주인에게 돌보아 주기를 부탁하고 그 비용까지 대주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었다(눅10:30-36). 강도 만난 사람은 아무런 댓가없이 생면부지의 사마리아 사람을 통하여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당시 하나님의 율법을 가장 많이 알았고 유대인들에게 존경받았던 사람으로서 어려운 사람을 만나면 제일먼저 긍휼을 베풀 것 같았던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죽어가는 사람을 외면했지만 유대사람에게 멸시를 받던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의 모든 수고와 노력을 다 기울여 최고의 선행을 베풀었다. 사마리아인에게 긍휼함을 입은 강도 만난 사람처럼 우리들도 예수님께 아무런 대가 없는 사랑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믿는다면 예수님은 강도만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처럼 “가서 너도 이와같이 하라”고 말씀하셨다. 이웃사랑에 대한 또 다른 말씀을 봅니다.
예수님의 이 땅에서 최후로 하신 말씀이 마태복음 25장 백보좌심판에서 양과 염소를 가르는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마25:31-43) 31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32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33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 34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35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36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37 그러면 그 의인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38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39 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40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41 그때에 임금은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42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43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예수님 말씀은 최후의 심판 때에 이렇게 할 것을 미리 말씀하신 것인데 심판의 기준은 선한 행위를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 이다. 믿음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선한 행위를 했느냐 안했느냐가 그날의 심판의 기준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바울, 야고보, 요한, 베드로와 같은 신약성경 저자들도 선한 행위를 믿음 못지않게 중요하게 여기고 있으며, 반면에 악한 행위는 불신앙으로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악을 행하는 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욕되게 하는 것으로서 불신앙의 태도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 믿으면 즉각적으로 얻는 구원만을 생각하는데 구원은 시간적으로 이중성을 띤다. 하나는 예수님을 영접할 때에 이루어지는 즉각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난 후에 이루어지는 점진적인 것이다. 후자의 예는, 바울의 명령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그는 구원을 진행형으로 말하고 있다.
(빌2:12) 나의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언제나 순종한 대로, 내가 함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지금과 같이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더 순종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라.
만일 구원이 한 번에 즉각적으로만 이루어진다면, 바울이 이렇게 구원을 진행형으로 이루어 가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같이 구원의 시간적 이중성은 마치 대학에 입학한 것과 대학생활을 실제로 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대학은 합격만 하면 즉시 대학생이 되지만 대학에 입학했다면 대학 4년 동안 대학에서 요구하는 학점을 획득해야 한다. 만일 그것을 이행하지 못하면 졸업 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단번에 이루어져서 믿으면 죄사함받지만 그 체험은 항상 현재로 존재해야만 한다. 그러기에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는 늘 자백해야 (요일1:9)하는 것도 바울이 말하는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삶의 태도이기도 하다. 따라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여 단번에 용서를 받았기에, 우리 미래의 죄까지 용서받았다고 하면서, 더 이상 죄를 자백하지 않거나 용서를 구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며 신앙을 사기치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자신의 자범죄에 대해 늘 용서를 구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이 세상에서 죄 안짓고 살겠다는 것은 숨 안쉬고 살겠다는 말과 같다. 또 계명을 지키는 것은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바울을 통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는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끝을 맺으려 한다고 질타하면서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의 욕망을 거스르는 적대관계이다(갈5:17).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들을 짐작해본다면,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라 할지라도 짐짓 죄를 진다면 그 곁을 떠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주로 영접한 과거의 사실에만 머무를 것이 아니라 지금도 주님이 나와 함께 거하시는지 스스로 점검해 보아야만 한다. 그런데 만일 어떤 이가 믿노라고 하면서도 악한 행동을 지속적으로 하게 되면 그는 다시 죄아래 있게 되고, 결국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 바울의 에베소교회에 대한 경고이다.
(엡5:5) 음행을 일삼는 자나 부정한 자나, 그리고 탐욕을 부리는 자 곧 우상숭배자는 결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왕국에서 상속유업도 받지 못하느니라. 사단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 아니 우리보다 예수님에 대해서 더 잘 안다. 그렇지만 우리는 사단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보는 근거는 다름 아닌 선한 행위를 할 수 없는 것이고 언제나 악을 창출하고 거짓을 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사단을 가리켜 ‘거짓의 아비’라고 하고 있지 않는가? 따라서 믿음에는 반드시 선한 행위가 뒤따라야만 한다. 선한 행위가 없는 믿음은 파선된 믿음일 따름이다. 그런데 오늘날 믿음과 행위를 분리하여 가르치는 경향으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꽃인 선한 행위를 풍기지 못하고 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는 믿음만을 강조한 종교개혁의 슬로건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3. 믿음이 강조된 배경
16세기 종교개혁시대부터 지금까지 믿음으로서 의로와진다고 여김을 받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교리가 복음의 진수로 가르쳐 오면서 이웃에 대한 선행을 강조하는 가르침이나 설교는 종종 비복음적인 것으로 매도당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적지 않은 한국교회의 신자들은 선한행위를 신앙의 영역에서 제거하기 시작했고, 이웃과 사회를 거룩하게 변화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그들의 세속화에 동화되었고, 고귀한 윤리적인 특성을 상실해 버렸다. 지난 15세기 종교 개혁가인 독일의 마틴 루터와 스코틀랜드의 존낙스 스위스의 쯔빙글리 프랑스의 칼빈을 통하여 종교개혁당시 시대적인 상황은 중세 카톨릭 암흑기로서 인간의 선행으로 구원받는다는 행위 구원론이 면죄부 강매등으로 지옥에 있는 영혼을 연옥으로 옮겨지게 한다는 거짓 교훈으로 선한행위가 타락되던 시대에 종교개혁가들은 말하기를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성경으로 라는 종교개혁의 슬로건을 내걸었으며 그런 슬로건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설득시킴으로 카톨릭에서 프로테스탄트라는 개신교가 태동되었고 변화의 물결이 일어났다. 그렇다고 당시 개혁의 슬로건이 다 옳다고 볼 수는 없다. 특히 칼빈이 주장한 한번 구원받은 자는 영원히 구원받는 자라는 이런 구원예정론교리가 오늘날 한국교회를 구원에서 멀어지게 하는 결과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면 이런 사상을 누가 가장 좋아하겠는가? 바로 마귀사탄이라고 생각된다. 이유는 가만히 두면 자기의 기만에 빠져서 멸망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사실 종교개혁자들은 가톨릭교회와는 정반대로, 믿음을 유일하고 충분한 구원의 수단과 조건으로 제시하였지만 정작 그들 자신은 신자의 삶에 있어서 선한 행위의 중요성을 약화시키려는 의도는 없었다. 오히려 루터는 “신자의 선행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은총의 행위이다.”라고 말하였으며, 칼빈도 “신자의 선행은 하나님의 선물이다.”라고 말하였다. 이처럼 루터와 칼빈은 믿음의 열매, 성령의 열매로서의 선행을 반대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들이 반대했던 것은 그 당시 선행이라고 미화되었던 구원의 수단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던 대부분의 종교행위였음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자들이 주창한 “오직 믿음”이라는 구호를 잘못 이해되어, 오늘날 교회 안에서 믿음은 선한 것이며, 선행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잘못된 생각을 불러 일으켰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오늘날 교회는 ‘선행’은 부정적인 율법으로 이해하면서 그 결과 구원파처럼 신자의 행위는 어떠하든지 상관없고, 단지 믿음만 있으면 무조건 구원받고 천국 간다는 식의 잘못된 교리를 낳게 하였다.
4.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구원에 관하여 중요한 것은 어떤 교리가 아니라 말씀안에서 찾아보면 된다. 예수님은 산상설교 중에서 “나무는 그 열매를 통하여 알게 될 것이며(마7:20) 나에 대하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들어간다.”(마7:21)라고 말씀하셨다. 또 바울 역시 성령의 열매 대신 육의 열매를 맺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고 경고하였다.
(고전6:9-10) 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할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속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자나 간음하는 자나 여성화된 남자나 남자와 더불어 자신을 욕되게 하는 남자나 10 도둑질하는 자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욕하는 자나 착취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더욱더 순종하여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라.(빌2:12)”고 권고하고 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의 행위는 항상 구원과 직결되는 문제이다. 물론 예수님과 바울의 가르침 속에 나타난 ‘행위’에는 이미 믿음이 전제되어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도 믿음은 항상 행위에 의해 점검되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행위’가 ‘믿음’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믿음과 행위의 관계는 그 어느 하나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긴장의 문제이다. 이 긴장관계는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답게 만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믿음과 행함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 때는 그것은 굴러가지 못하고 멈추어버리는 성질이 있다. 결국 은혜가 뿌리라면 믿음은 줄기이며, 행위(선행)는 꽃이다. 또 은혜가 나무라면 믿음은 가지이고, 행위는 열매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포도나무로, 우리를 그 가지로 비유하셨다. 예수님은 가지인 우리를 통해 선한 행위의 열매를 맺기 바라신다. 성경이 증거하는 선한 행위에 대해 뭐라고 하시는 가를 찾아보겠습니다.
(딛2:14)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으로부터 친히 우리를 구속하시고 정결하게하사 선한 행위에 열심을 내는 백성 곧 자신을 위한 특별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선한행위를 하는 자들에 대해 특별한 백성이 되라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지금까지 믿음과 행위에 고찰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다는 점과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행위는 서로 상호 역동적인 관계라는 것이다. 또 시간적인 순서에 의하면 은혜가 가장 먼저이고 다음이 믿음이며, 그 마지막은 행위(선행)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믿음과 행함을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믿음은 하나님과 관계이므로 수직선으로 표현된다면, 행함은 인간과 관련되기에 수평선으로 표현할 수 있다. 여기서 구원은 좌표평면상에 두 선이 만나는 점선으로 표시한 이유는, 구원자체는 인간이 명쾌하게 판단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구원을 이야기할 때 믿음만을 가지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행위와는 상관없이 믿음만 있으면 일단 구원 받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다”(마7:21)고 경고하셨다. 예수님이 경고한 이러한 위선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가라지’로 명명하셨다. 바울은 이러한 가라지 교인들을 두고, “모든 불의한 속임을 당하고, 거짓을 믿어서 멸망 받을 자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또한 그는 이들을 믿음이 파선된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믿음과 선한 양심을 가지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선한 양심을 버리고, 그 신앙생활에 파선을 당하였습니다. 그렇게 된 사람 가운데 바로 후메내오와 알렉산더입니다(딤전1:19-20).” 심지어 그는 “친척을 돌보지 않으면 믿음을 저버린 사람이자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나쁜 사람(딤전5:8)”이라고 하고 있다. 야고보서의 말씀대로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의 소유자들이다. 따라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거나 감정적으로 믿어지는 것이 믿음이라고 하면서도, 행함(선행)에 대해 여전히 무감각한 사람들은 구원받았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정말로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으면 확실한 것은 생명책에 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계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한번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면 그는 하나님의 자녀됨을 부인 할 수 없다. 그 믿음은 주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살후 3:2)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이 주신 그 믿음은 모든 사람들의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성령이 증거해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 그 믿음 자체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면 이 믿음을 받는 대상들도 하나님이 창세전에 택하신 사람들이구요. 그러므로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다 주관하시는 것이지 우리가 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며 하나님이 거저 다 마련해 놓으신 것을 손 내밀어 받은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그리스도를 진실로 영접하면 구원은 하나님이 준비하여 놓은 선물로 얻어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말세지말을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최우선적 삶의 목적은 천국 가는 것인데 한국의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있는 구원론은 칼빈의 예지 예정론인 "한번 구원받은 자는 영원한 구원이다"라는 가르침을 믿고 있는 것이 한국 교회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한 시대를 변화시킨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의 메세지라도 과연 그 말씀이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행위의 기준이요 성경(정경)66권으로 비추어보고 자세히 살펴봄으로(행17:11, 사8:10) 비성경적인 요소들은 배제하고 보다 더 성경적인 진리를 추구하고 회복해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점진적인 계시적인 측면과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성숙의 측면에서 바람직할 것입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10:22,24:13) 즉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마치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얼마나 중요한 교훈인지요! 많은 사람들이 시작은 하지만 마치지는 못합니다. 성경에는 믿음으로 시작하지만 마치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한 경고들로 가득합니다.
(고후13:5)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
한국교회가 가장 잘못알고 있는 말씀이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여기서 행위는 율법이라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지 선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 영혼의 구원(거듭남, 죄사함)은 나의 행위로 된 것이 아닌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로 된 것으로 자랑 할 것이 없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므로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예수님의 은혜이며 십자가의 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여러분의 앞에는 여러 길들이 보일 지라도 참되고 복된 길은 오직 십자가의 길 하나입니다. 그 길은 아무나 갈 수 있는 길이 아닌 좁은 길입니다. 끝가지 십자가의 길에서 천국에 이르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