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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설맥
부모 공경과 자녀 양육
(그리스도 안에서 세워져야 할 가정)
에베소서 6:1-4절
친(親)과 효(孝)의 유래
한문의 어버이를 지칭할 때 父親, 母親이라 합니다. 한문으로 친자는 친할 친자, 어버이 친자라고 합니다. 어버이 친(親)자는 나무(木)위에 올라서서(立) 멀리 쳐다 보는(見) 뜻입니다. '효도 효'(孝)'자는 노인(老)을 아들(子)이 업고 온다는 뜻입니다. 이 글자의 유래입니다.
어느 산중에 나무꾼 아들과 홀어머니가 살고 있었습니다. 아들은 산에서 땔나무를 해서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시장에 가서 팔아서 양식을 마련하여 어머니를 봉양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나무 팔러 장에 갔던 아들이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도 아들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들 걱정에 마음 졸이던 어머니는 저녁을 다 지어놓고, 아들의 모습을 보기 위해 동구 밖 소나무 위로 올라가서 애타는 마음으로 멀리 쳐다 보았습니다. 어버이 친(親)자는 이렇게 생겨났다고 합니다.
또 아들은 갖고 간 것을 늦게까지 다 팔고서 고등어 몇 마리와 어머니께 드릴 몇 가지 물건을 사들고 오는데 동구 밖의 나무 위에서 자기를 기다리는 어머니를 만납니다. “어머니, 다리 아프실 텐데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제가 업어 드리겠습니다. 저의 지게 위에 타십시오.”그래서 지게 위에 태워오는 모습이 한자의 효도할 때의 효(孝)자입니다. 가정 마다 친(親)과 효(孝)가 있을 때 그 가정은 행복하고, 하나님께 복을 받을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
본문은 자녀들은 어떻게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지? 또 부모는 어떻게 자녀를 양육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부모 공경과 자녀 양육은 잘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실천하기가 어려운 난제입니다. 성경의 교훈을 통해서 우리는 어떻게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지, 어떻게 자녀를 양육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자녀들은 어떻게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까?
1-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이 말씀을 보면 자녀들은 어떻게 부모에게 효도해야 하는지 잘 제시해 줍니다.
십계명의 구성은 첫 번째 계명부터 네 번째 계명까지는 하나님께 대한 계명입니다. 5번째 계명부터 10번째 계명은 사람에 대한 계명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입니다. 인간에 대한 첫 번째 계명이 무엇입니까? ‘네 부모를 공경하라’입니다. 그래서 부모에 대한 효는 인간의 모든 행위에서 첫 번째로 중요합니다. 효란 만행의 근본입니다.
순종의 의미
그렇다면 부모를 어떻게 공경해야 합니까? 먼저 부모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부모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헬라어에서는 순종이란 의미를 ‘문에 응답 한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문이란 이중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첫 번째는 부모의 말씀이고, 두 번째는 그 말씀에 응답해야 하는 내 마음입니다.
밖에서 누군가 똑똑 노크합니다. 왜 노크합니까? 노크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문을 열어 달라고 합니다. 귀머거리가 아닌 이상에는 노크 소리를 듣습니다. 그런데 누군가는 달려가서 문을 열어줍니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렸습니다. 반갑게 환영합니다. 그런데 누군가는 문을 안 열어줍니다. 계속 똑똑, 심지어 주먹으로 쿵쿵 치는데도 문을 열어 주고 싶지 않습니다. 왜 안 열어줍니까?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갑지 않은 사람입니다. 자기를 자꾸 귀찮게 하고, 들어오면 잔소리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거부합니다. 귀를 막고, 마음을 닫습니다.
화가 홀만 헌터가 1904년데 만든 ‘세상의 빛’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요한계시록 3:20절을 배경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그림의 내용은 예수님이 어느 집 문 밖에서 등을 들고 서 있는 모습입니다. 어느날 홀만 헌터의 친구는 이 그림을 감상한 후에 문에 문고리가 없기 때문에 잘못 그렸다고 지적합니다. 그러자 헌터는 친구에게 이 그림의 문고리는 보이지는 않지만 문 안에 있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려면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내 마음의 문을 열어야 비로서 함께 교제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자녀가 부모의 말씀에 순종하려면 38선과 같은 마음의 장벽, 닫힌 마음의 문을 열지 않고서는 불가능함을 깨닫게 됩니다. 내 마음에는 이런 검은 장벽이 있는지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공경의 의미
2절에 보면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고 합니다. 공경이라는 말은 자녀가 왜 부모에게 순종해야 하는지 그 동기에 대해서 말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공경이라는 의미는 한문으로는 공손할 공, 공경할 경입니다. 공경이란 부모를 대할 때에 내 몸가짐을 조심스럽게 하고 받드는 것을 말합니다.
헬라어에서 공경의 의미는 ‘가격을 정하다’입니다. 이 말은 내가 부모의 가격을 얼마나 정했느냐에 따라 그 공경도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안 좋은 말이지만, 내 부모를 경매에 내어 놓는다고 한다면 내 부모의 가격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요셉은 형제들의 배신으로 이스마엘 상인에게 은 20십에 팔려 갔습니다. 예수님은 제자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은 30십에 팔렸습니다. 형제들에게는 요셉이 은 20십에 불과하고, 가룟 유다에게는 예수님의 가치는 은 30십에 불과합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내 부모는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을까요? 공경이란 그 정도에 따라 다릅니다. 내 부모가 대통령이라면 절대 공경할 것입니다. 내 부모가 살인자라면 증오하고 멀리할 것입니다. 부모가 부자라면 매일, 귀찮을 정도로 찾아올 것입니다. 부모가 가난하다면 민폐로 생각하여 멀리하고 연락도 끊습니다. 요즘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고독사가 그 증거입니다.
부모를 잘 공경하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복을 받습니다. “이것은 약속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부모님을 하나님처럼 섬기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다. 약속된 복이란 100%, 반드시 받는 복입니다. 장수한다는 것은 오래 사는 것도 있지만, 하는 일들이 형통하고 오랫동안 잘 되는 것을 말합니다. 신명기 7:9절에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느리라”고 했습니다.
둘째, 부모는 어떻게 자녀를 양육해야 합니까?
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왜 어미들아, 아비들아 하지 않고, 아비들아 강조합니까? 성경적인 의미는 하나님께서 아버지를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로서 말하고, 또 축복을 받았으니 축복을 전달하는 통로로서 제사장으로 삼았습니다.
신명기 32:7절에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 출애굽기 13:14절에 하나님이 유월절을 제정하면서 “후일에 네 아들이 네게 묻기를 이것이 어찌 됨이냐 하거든 너는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곧 종이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셨다”고 말하라고 아버지에게 명령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신명기 6:7절의 말씀과 같이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해야 합니다.
자녀 양육에서 주의할 점
이런 아버지가 자녀를 양육할 때 주의할 점은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면 어떻게 됩니까? 화가 난 자녀는 아버지의 말씀을 듣지 않게 되고, 아버지를 통해서 들어야 할 하나님의 언약과 축복의 말씀도 거절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입니다. 모세가 40년을 인도해 온 백성들과 함께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므리바 반석 사건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물을 달라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백성에게 물을 주기 위해서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고 반석에게 명하면 물이 나와서 사람과 짐승이 다 함께 먹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분노하며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 물을 내게 하랴”하면서 반석을 두 번 침으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못했다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느보산에서 죽고 맙니다. 왜 이런 불행한 결과가 생겼습니까? 모세가 참지 못하고 화를 내었기 때문입니다.
왜 부모가 자녀에게 화를 냅니까? 화를 내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모세를 예를 통해서 깨닫는 것은 자신의 인내의 한계 때문입니다. 참고, 참고, 참다가 폭발합니다. 그때 자녀는 심각한 상처를 받고, 걷잡을 수 없는 갈등을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자녀를 사랑한다면, 그의 미래를 걱정한다면, 어떤 경우든지 화를 내서는 안됩니다. 위험한 선택입니다. 잠언 16:32절에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합니다.
잔소리의 역효과
자녀를 화나게 만드는 구체적인 것은 부모의 잔소리입니다. 자녀가 잘못을 했거나,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경우 대다수의 부모들은 잔소리를 통해서 해결하려고 합니다. 사실 잔소리는 별로 효과적이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잔소리를 하는 것은 불행하게도 부모 세대가 자라는 과정에서 답습해온 결과이고, 다른 대화방법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방송(EBS) 다큐멘터리 ‘마더 쇼크’등에 출연한 카톨릭대 심리학과 정윤경 교수는 “엄마, 아빠가 아이에게 하는 말은 아이의 성격을 만들어가는 가장 강력한 도구이자 아이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이끄는 통로이다. 그런데 많은 부모들이 그 도구를 잘못 쓰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잔소리에 만성이 되어 있습니다. 부모의 잔소리가 시작되면 자녀들은 자동적으로 마음의 귀가 닫힙니다. 왜냐하면 자녀들이 부모에게 듣는 메시지는 단 하나입니다. 아버지는 엄마는 더 이상 “너를 믿지 못하겠다”라는 것입니다. 부모들은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잔소리를 하지만, 아이들은 마음의 문을 닫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심한 경우 자기감정 조절 및 우울증 등으로 악화되기도 한다. 자녀가 이러한 부정적인 정서로 인해 부모에 대한 거부감을 형성하게 되고 대화를 거부하거나 싫어한다면, 부모의 양육 방식을 점검해야만 합니다.
나 메시지(I-message)
세계적 임상 심리학 박사인 토머스 고든이 창안한 ‘나 메시지’(I-message:자기표현기술) 전달법은 생각이 아닌 느낌을 ‘나’ 전달법으로 하는 의사소통입니다. 주어를 ‘나’로 하여 자신의 감정을 먼저 표현함으로써 ‘네가 잘못했잖아’와 같은 ‘너 메시지’의 관점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에 초점을 맞춥니다. ‘너’를 주어로 하는 대화는 상대의 잘못을 지적하거나 비난하는 말투가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나’를 주어로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면 상대는 잘 경청하게 됩니다. 물론 적절히 상대의 말을 경청하는 ‘적극적 경청’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저녁식사 할 때 밥 먹으러 오라고 해도 건성으로 대답할 때 너 메시지를 사용해서 “넌 왜 한번 말하면 듣지 않니. 멋대로 할 거면 저녁을 먹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나 메시지는 “차린 음식이 식고 있어. 정성껏 준비했는데 내가 속상하네. 빨리 와서 같이 식사하면 내 마음이 좋을 텐데”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 메시지로서 나의 ‘기분이나 느낌’을 말한 다음에 필요한 ‘요청 사항’을 덧붙여 전달한다면 잔소리라는 즉각적인 반응이 아니라 상대방의 기분과 느낌을 생각하고 반성하게 됩니다.
셋째, 주 안에서 어떻게 부모 공경과 자녀 양육을 할 수 있습니까?
1절에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4절에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합니다. 주 안이라는 의미는 부모 공경과 자녀 양육에 대한 기준점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교육은 모세 오경을 중심으로 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떠나지 않지만, 특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입니다. 그리스도가 행하신 구속사적인 사건 안에서 양육입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죄 용서함을 받고, 영생을 얻은 자로서의 삶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도 이런 복음적인 확신을 가져야 하고, 자녀들도 이런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결국 주 안에서 변화된 복음적인 확신 결여는 온전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가정을 세우기는 어렵습니다. 주 안에서 부모 공경도, 주 안에서 자녀 양육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양육한다고 해야 결국 세속적인 교육, 조상들로부터 답습된 전통 교육만 있을 뿐입니다.
성령으로 변화된 가정
그렇다면 주 안에서 세워지는 가정은 어떤 가정입니까? 성령으로 변화된 가정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은혜아 능력으로 근본적으로 변화된 가정입니다. 조금 깨닫고, 조금 바꾸고, 조금 개선된 가정이 아닙니다.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은 맞지만 성령 안에서 새로워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족 구성원 마다 내가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5:22절에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5:17절 말씀과 같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부모나 자녀, 모두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4:21-24절을 보면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합니다.
주 안에서 세워지는 건강한 가정, 행복한 가정을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성령을 구하십시오. 사람이 가진 지식, 경험으로는 우리 가정을 세워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부모 공경과 자녀 양육을 할 수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나를 포함해서 모든 가족들이 성령이 충만하기를 기도하십시오. 그렇게 하시면 멀지 않아 성령께서 우리 가정을 어떻게 변화시키셨는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대림동 예일교회 이동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