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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제 : 표적(7)/부활
제 목 :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
성 경 : 요11:1-14,38-44
찬 송 : 542장
저 자 : 이삼규 목사
출 처 : 20240825 낙양교회 주일 낮 예배
요 11:1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요 11: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요 11: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요 11:4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요 11: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요 11: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요 11:7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요 11:8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요 11: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요 11: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요 11: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요 11:12 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요 11:13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그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요 11:14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요 11: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요 11: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요 11: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요 11: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요 11: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 11: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요 11: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요한복음에 나타난 일곱 가지 표적 가운데 마지막 표적인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표적’을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동안 누차 말씀드렸듯이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7가지 이적을 소개함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하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이적 가운데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단연코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이적입니다. 여기에는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이적을 총괄하는 결론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최대의 표적이라는 데에 그 특징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공생애의 사역 가운데 나사로를 비롯한 세 사람을 살리시는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야이로의 딸과 나인성 과부의 아들입니다. 똑 같이 죽은 자를 살리시는 표적이지만 차이점이 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은 죽은 지 몇 시간 안 되어 그의 집에 찾아가셔서 ‘달리다굼’하시면서 소녀를 살리셨습니다. 다음으로는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는데 사람들이 과부의 아들을 장사하기 위하여 메고 나갈 때 장례의 행렬을 멈추게 하시고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셨습니다. 죽은 지 하루 만에 살리신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오는 나사로는 무덤까지 찾아가셔서 살려 주신 것입니다.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 지나서 이미 부패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전에 시무하던 교회에서 성도님 한분이 돌아가셨는데 위암이 나중에는 림프암으로 발전하여 온몸이 망울져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부패하기 시작하는데 염을 하면서 너무나도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대부분 죽은 지 하루 만에 장사를 치릅니다. 우리나라보다는 더운 지방이기 때문에 쉽게 부패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죽은 지 나흘이 되어 부패하는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린 것입니다. 주님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는”(잠 4:18)것을 보여 주는 표적입니다.
나사로의 부활사건은 십자가를 겨냥하면서 이루어진 표적이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큽니다. 큰 표적은 그 표적을 통하여 나타나는 계시적 의미가 커야 합니다. 그러면 그 뜻이 왜 커야 합니까? 풍랑을 잠잠케 하실 때는 대 자연을 지배하시는 예수님을 보여 준 것입니다. 병을 고치실 때는 병을 물리치는 의원이 되시는 예수님을 보여 주었고, 귀신을 내어 쫓으실 때는 영적인 세계를 지배하시는 분이심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또한 죄로 말미암아 깊이 빠져드는 사람에게는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는 말씀을 하심으로 죄를 사하는 권세를 계시하는 능력의 하나님을 나타납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의 사건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부활의 능력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은 부활 생명을 계시하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큰 표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사건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촌 베다니
√요 11:1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베다니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마을을 내려다보시는 주님에게는 그 마을이 ‘마리아와 마르다의 마을’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 마을에는 헌신된 두 사람들이 있었으며 그들이 우리 주님께는 그 마을에 사는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더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동네에는 어떻습니까? 정말 여러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 있어서, 주님을 위하여 헌신하고 계셔서 주님이 여러분의 마을을 특별한 장소로 생각하고 계실까요? 예수님께서 왜 베다니 마을을 마리아와 마르다의 촌이라고 그토록 마음에 두고 계셨을까요?
√요 11: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
마리아와 마르다의 정성어린 헌신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위하여 어떤 헌신을 하고 계십니까? 만일 여러분들도 마리아와 마르다처럼 주님을 위하여 헌신된 삶을 사신다면 여러분의 동네를 “아무개의 촌”이라고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기억되어지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 11: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요 11: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자가 병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가 왜 병들어야 합니까? 우리 생각 같으면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자는 병도 안 들고 실패도 없어야 하지 않을 까요? 뭐든지 척척 잘 풀려야 하지 않을 까요? 그런데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중요한 진리를 가르쳐줍니다. 분명히 성경은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도 병들 수 있습니다. 병들었다고 무조건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나 보다, 내가 벌 받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시지 않으셨다.’라는 쓸데없는 망상에 사로 잡혀서는 안 됩니다.
주의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습니다. 사랑도 보통 사랑이 아니요 특별한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지극히 사랑하셨습니다. 그의 가족들을 지극히 사랑하셨습니다. 그때 당시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사랑하는 것은 순교의 각오를 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사로의 형제들은 항상 예수님을 따뜻하게 영접하였고 오실 때마다 그 집에 머무르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셨겠습니까? 그런데 이 사랑하시는 자가 병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병
우리가 성경을 보면 나사로라는 사람이 두 명이 나옵니다. 하나는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거지 나사로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부자 나사로입니다. 거지 나사로는 사람들의 돌봄을 받지 못하였고 심지어 개들이 와서 헌데를 핥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나사로는 그의 누이들의 사랑에 넘치는 시중을 받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불리려 하였으나 베다니의 나사로는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부활한 후에 주 예수와 함께 잔치 상에 앉아있는 모습이 나옵니다. 나사로는 베다니에 살고 있었습니다. 베다니는 ‘무화과 집’, ‘고통의 집’이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기에 살고 있던 나사로가 병들어 그의 누이들이 예수님께 전갈을 보낸 것입니다.
√요 11: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그 누이들의 전갈을 받은 예수님은 어떤 반응을 보이셨습니까?
√요 11:4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 하시더라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이 말씀은 9:3절의 말씀과 비슷한 유형의 말씀입니다.
요 9: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예수님은 사랑하시는 자의 병든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며, 더 나아가 아들의 영광을 나타내려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병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습니다. 병들었을망정 사랑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러한 전제 아래서 병을 보아야 합니다. 한마디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병을 주신 것입니다. 내게만 특별한 질병을 주신 것입니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나서 나에게 무엇이 이로운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질병은 우리에게 엄청난 것을 줍니다. 어떤 분들은 질병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고 돌아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질병은 영광에 이르는 질병입니다.
질병은 우리를 쉬게 합니다. 생각하게 합니다. 겸손하게 합니다. 화목하게 합니다. 기도하게 합니다. 병드는 목적, 하나님께서 질병을 주시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병듦으로써, 잃어버리는 것보다 얻는 것을 더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생각지 말고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내게 병을 주셨다고 생각하면 어떤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도 많은 사랑하시는 자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에는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갈 것입니다.
√요 11: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머무셨을 까요? 하나님의 영광을 더 크게 나타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만일 야이로의 딸이나, 나인성 과부의 아들처럼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나사로를 살려 주었거나, 또는 죽기 전에 그의 병을 고쳐주었다면 그렇게 큰 영광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이미 시체가 부패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신 것입니다. 얼마나 큰 영광스러운 사건입니까?
고통은 깊을수록, 잘 감당할수록 더 많은, 더 큰 영광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지연시키는 그 섭리를 기다리기가 어렵습니다. 당장 주셨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기다리게 하십니다. 우리는 현재를 구하나 주님은 영원을 주십니다. 우리는 물질적인 것을 구하나 하나님은 신령한 것을 주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영광을 더 크게 하기 위하여, 더 큰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지연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사로에게로, 또는 베다니로 가자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유대로 다시 가자!’ 유대는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다시 가자고 하시는 말씀은 분명 제자들을 시험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그곳으로 다시 가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또 그리고 가시려 하나이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낮에 다니면 빛이 있기 때문에 실족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분명히 아셨습니다. 그분은 항상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시면서 사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자기의 길을 맡기셨습니다.
잠 3:5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잠 3: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습니까? 어떤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십니까? 그러한 고통과 괴로움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된다면 얼마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요? 어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큰 영광을 드러내시는 우리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베다니 마을로 오셨습니다.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이미 죽어 무덤에 있은 지 나흘이 지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한 오리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 많은 유대인들이 마르다와 마리아를 위문하러 왔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르다는 급히 나가 예수님을 맞이하였습니다.
√요 11: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성경에는 이렇게 간단하게 씌었지만 그 때 마르다의 얼굴은 별로 화평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좀 짜증스럽고 불평으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장례까지 끝난 다음에 왜 오십니까? 못 오신다고나 하시지 왜 죽을병이 아니라고 하셨습니까?" 할 말이 많았겠지만 마르다는 그저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사실은 이것도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계시면 고통도 없고, 문제도 해결된다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믿어야 하는데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주님이 '다시 살리라' 할 때에 "아멘"하고 믿어야 하는데, 이 믿음이 필요한데, 참 믿기가 어려웠습니다. 마르다가 기껏 생각해내어서 하는 말이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줄을 내가 아나이다."합니다. 마지막 날,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갈 때에는 다 부활할 것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사실 이것도 믿음은 믿음입니다. 최종 부활에 대한 그녀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요 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참 어려운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죽은 사람이나 예수님을 믿고 산 사람이나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 앞에서는 모두가 같다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지금 살아있지만 언젠가는 죽을 것이고, 나사로는 죽었지만 다시 산다는 것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앞에서는 죽음이 아무런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하고 말씀하실 때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아멘'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믿음을 가지는 것이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는 40절에서 더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요 11: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원리적인 것도, 과거의 것도 아닙니다. 장차 부활하리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바로 지금, 현재 이 상태에서 네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는 말씀입니다. 나사로가 병들어도 하나님의 영광, 죽어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빨리 오시지 않고 지체하신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일이 여러분의 뜻대로 되는 것도, 여러분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도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믿습니까? 대부분이 생각하기를 내 뜻대로 무엇이 이루어지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고, 내 뜻대로 무엇이 안 되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나사로는 죽어서 장례까지 치렀지만 지금도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십니다. 이것을 믿어야 했습니다. 사실 모든 사건, 크고 작은 모든 일의 결정과 결과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존재합니다. 바울 사도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순교자는 순교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스도인은 손해를 보아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병에 걸려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믿음입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지금 주님은 마르다에게 이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
마르다는 여기까지 인내하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용케 참고 있었는데 마침내 결정적인 순간이 왔습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하십니다. 여기에 시험이 있습니다.
이때 마르다가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라고 조금 불평조로 말합니다. '이제 와서 열어보면 뭐합니까? 죽은 시체 보나마나지. 열어볼 필요가 있습니까?'하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지만 마르다는 이 말씀이 추상적인 진리로만 생각했습니다. 원리적이고 교리적으로만 생각했을 뿐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돌문을 옮겨 놓으면서도 나사로가 살아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믿음은 약하고 온전하지 못했지만 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불평과 원망을 하면서도 마르다는 돌문을 옮겨 놓습니다. 섭섭한 마음도 있고 믿음도 부족하지만 "예"하고 순종하며 옮겨 놓습니다. 이것이 마르다의 믿음입니다. 의심이 많았지만 마지막 시험에 순종하였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는 말이라든가 "냄새가 나나이다."라는 말속에는 확실히 섭섭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는 말씀을 믿고 돌을 옮겨 놓았습니다. 이것이 순종하는 마르다의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첫 번째 표적을 행하실 때도 돌 항아리에 물을 떠다 채우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포도주가 떨어졌는데 예수님은 엉뚱하게도 돌 항아리에 물을 떠다 아구까지 채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설상가상으로 이제는 그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인들이 순종했더니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표적이 일어난 것이 아닙니까? 또한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께 이삭을 바친 것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다시 데리고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마르다가 순종하여 돌을 옮겨 놓자,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립니다.
√요 11: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요 11: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하신 것은 자신의 이적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고데(Godet)는 말하기를 '기적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응답 받은 기도를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일을 행하신 것은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마치신 후에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죽은 자를 향하여 명령하신 것입니다. 산 자도 죽은 자도 이 말씀의 능력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듣고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옵니다. 그때야 마르다는 깨닫습니다. 왜 이러한 고통이 자신들에게 있어야 하는지, 왜 예수님께서 지체하셨는지, 마침내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그가 순순히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으나 하란에 머물러 지체하였고 아버지 데라가 죽은 후에 하나님께 끌려 가나안 땅으로 온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2:5에 보면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마침내' 들어갔더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은 누가 써야 할 마침내 입니까? 하나님께서 쓰여야할 '마침내'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여러 가지 연단을 통하여 마침내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게 됩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하신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입니다. 이제야 부활의 현재적 의미를 깨닫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 것입니다.
요 11: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는 말씀에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가 생명이요, 그 다음이 자유입니다.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 모든 사람은 영생을 얻습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다"(요3:36). 그러나 많은 신자들이 아직 자유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전통의 수의, 오해의 수의 그리고 불신의 수의에 묶여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그래서 나사로는 살아났고 풀려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오늘 나사로의 자매들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시기를 소원하십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는 길은 능력의 주님을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 낙양교회 모든 성도님들도 마르다와 마리아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신하면서 믿음 생활을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