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라의 쓴물과 백성의 불평(22-23)
마라의 쓴물은 우리 삶에서 만나는 고난과 시련을 상징합니다. 우리도 인생에서 어려움을 만날 때, 쉽게 불평과 원망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반응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보여준 것처럼, 우리의 시련 속에서 중요한 것은 환경이나 사람에 대한 불만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것입니다.
22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23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22-23)
이스라엘 백성은 불평을 터트리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시험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쓴물을 단물로 변하게 하시어 갈증을 면하게 하셨습니다. 이어서 도착한 엘림은 광야의 오아시스로 많은 물이 넘치는 곳이었습니다. 거기에 장막을 치고 잠시 머뭅니다. 하나님의 인도로 갈증이 완전히 해소되었을 것입니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불-구름 기둥의 인도하심을 따라 수르 광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뜨거운 광야에서 사흘 길을 가는 동안 물을 구하지 못해 식수난을 겪자 다시 불평을 터트립니다. 기적의 은혜를 체험한 직후 곧장 불평이 시작됩니다. 이것은 출애굽 후 최초로 모세를 향한 불평이며 실제로는 하나님을 향한 불평과 항의인데,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시기가 출애굽과 더불어 ‘바다의 노래’가 울려 퍼진 찬양의 축제가 끝난 직후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향후 광야 생활 40년 동안 지속될 끝없는 불평과 불순종을 암시합니다. 백성이 처음 맞이한 환경은 수르 광야였습니다. 수르는 ‘벽’이란 뜻입니다. 수르가 ‘벽’이란 뜻을 지닌 이유로 어떤 학자들은 아마 이 지역은 애굽 동쪽 국경으로서 국경 수비를 위해 어떤 방어벽을 구축해놓았을 것이라고 추론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거기서 ‘사흘 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했습니다. 많은 경우 ‘삼일’은 문자적인 기간이 아니라 어림수입니다(참조, 민 10:33). 그들은 ‘마라’라는 곳에 도착합니다. 그곳에 물이 있었지만, ‘쓴 곳’이라는 지명 그대로 쓴물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물이 귀한 광야나 사막에서는 소금기가 많은 물이나 오염수들이 더러 있어서 식수로 사용할 물이 귀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쓴물이 짠물일 가능성이 큽니다. 카수토는 이 지역이 비터 호수에서 남쪽 해안을 따라 약 삼일 여행 거리의 짠물 웅덩이가 있는 ‘아인 하봐라(Ain Hawwarah)’일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지하는 전통적 경로에 비추어서 그럴듯하지만 명확한 증거는 없습니다.
마라의 단물과 말씀의 시험(24-26)
우리도 종종 마라의 쓴 물과 같은 어려운 상황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때 사람들을 원망하는 것은 불신앙의 표현입니다. 대신, 이러한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며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통해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원망 대신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24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25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26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24-26)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최초로 원망과 불평을 가리키는 전문 용어 ‘룬’이 등장합니다. 이 단어가 이후 광야 40년 세월 동안 출애굽기와 민수기에서 광야 생활에 불만을 품는 패역한 백성의 반역을 다루는 문맥에서 계속 등장합니다.
이때 여호와께서 한 나무를 가리키셨고, 모세가 그 나무를 물에 던지자 물이 달게 변합니다. ‘가리키다’의 히브리어 ‘야라’의 히필형은 보통 ‘가르치다’, ‘가리키다’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문맥상 잘 맞지 않는 이유로 고대의 일부 역본은 이것을 ‘보여주다’로 수정했으며, 현대의 많은 번역들이 이것을 따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의도적인 단어 사용으로 보입니다. ‘야라’는 율법을 가르칠 때도 사용됩니다. 흥미롭게도 바로 이어서 ‘법도와 율례를 정하셨다’는 진술이 뒤따릅니다. 따라서 나무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 이 동사는 이어지는 법도와 율례에 대한 언급을 미리 암시합니다. 모세가 말씀의 ‘지시’를 받고 순종했을 때 그들은 생명수를 얻었습니다. ‘여호와로부터 나온 지시(instruction)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백성은 영적으로 토라와 교훈의 멍에를 수용할 준비를 갖춘다.’
이들의 식수난은 애굽의 첫 번째 재앙인 나일강이 피로 변한 일을 상기시킵니다. 당시 사람들은 마실 물이 없어서 온 사방에 우물을 파야 했습니다(7장). 나뭇가지를 넣으니 쓴물(아마 짠물)이 단물로 변했습니다. 카수토는 여행객들의 증언을 따라, 실제로 어떤 찔레나무 종류에 이런 효능이 있다는 사실을 소개합니다. 나무의 사용이 실제 있는 어떤 나무의 화학 작용을 이용하신 것인지, 단지 모세의 지팡이 같은 신비한 기적의 시연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떤 나무를 사용했다는 것은 그것의 특유한 효능을 이용하셨음을 암시할 수 있으며, 다만 이것이 통상적인 수준의 효능을 훨씬 뛰어넘었기에 기적이었을 것입니다.
단물의 기적이 일어난 직후, 하나님께서는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시험하셨습니다(25). 이것은 이어지는 26절에서는 계명과 규례로 표현됩니다. 2절의 ‘법도’와 26절의 ‘규례’는 동일한 히브리어 ‘호크’입니다. 법도(규례), 계명, 규례는 히브리어가 각각 다른데, 이것이 각각 어떤 의미론적 범주를 지니는지 정확하지 않습니다. 가장 무난하게 이것들은 단순히 문학적 효과와 강조를 위한 동의어의 반복으로 간주됩니다. 더욱 곤혹스러운 것은 그 법도와 율례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분명한 것은 시내산에서 십계명과 율법이 공식적으로 반포되기 전에 그들은 애굽 땅에 살 때부터 나중에 최종적인 실체가 드러날 어떤 원시적 형태의 율법들을 조상 때부터 이미 전수 받았을 것입니다. 예컨대, 모세가 여호와께 제사를 바치는 종교 행사를 위해 자신들을 보내달라고 파라오에게 요구한 점에 비추어 볼 때, 그들은 이미 법도와 규례로서 제사법과 어떤 ‘절기’를 지키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라에서 받은 율법의 실체가 무엇이었든, 그 법도와 규례는 시내산 율법을 예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법도를 정하신 후, 그것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다양한 시련과 어려움을 주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하셨습니다(출 15:25; 16:4; 20:20; 신 8:2,16). 시험의 목적은 백성이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을 신뢰하는지를 검증하고 그들을 낮추기 위해서이며, 시험을 통과한 백성에게 약속대로 복을 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이 말씀을 잘 지키면 애굽 사람들에게 내린 질병의 재앙이 하나도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질병’을 뜻하는 ‘마할라’는 질병뿐 아니라 육체적 타격으로 발생한 상처나 전쟁 중에 입은 부상을 포함할 수 있습니다(잠 22:35; 왕하 8:29). 따라서 이것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준 열 재앙을 가리킬 것입니다. 만일 이스라엘이 불순종하면 동일한 재앙이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에 순종하면 질병을 내리지 않을 것이며, 자신이 그들에게 ’치료하는 여호와‘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널리 유통되는 ’여호와 라파‘라는 용어가 유대했는데, 엄밀히 이것은 현재의 본문을 비롯하여 성경에 나오지 않는 호칭입니다. 굳이 따지면 ’여호와 로페‘(여호와는 치료자이시다)가 더 정확한 호칭이지만, 이호칭이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용된 경우는 없습니다.
엘림의 많은 물과 백성의 휴식(27)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지칠 때마다 회복의 은혜를 주십니다. 엘림의 풍성함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급을 상징합니다. 쉼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속에서 영적인 회복을 얻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칠 때마다 엘림 같은 쉼터를 준비해 주십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27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27)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 후에 두 번째 휴식을 취한 장소로서 큰 종려나무가 70주 서 있는 오아시스입니다. ‘마라’에서 일시적인 단물의 기적을 만끽하고 ‘엘림’에 도착합니다. 그곳은 샘이 많고 종려나무가 무성한 오아시스였습니다. 그들은 그 오아시스에 장막을 치고 머무릅니다. 이제 더 이상 물 걱정은 없습니다. 쓴물이 단물로 변했고 이제 많은 물이 제공됩니다. 여기서 열두개의 샘과 70그루의 종려나무를 가리키는 숫자 ‘12’와 ‘78’은 완전수의 조합으로서 실제적인 숫자가 아닌 상징적인 문학적 숫자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광야와 같은 시기를 경험합니다. 그곳에서는 시험과 고난이 우리를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가 준비하신 쉼의 장소를 소망해야 합니다. 광야를 지나가는 동안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그분의 인도하심을 신뢰합시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시며, 시험 속에서도 우리를 돌보시고 인도하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