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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을 완성시키신 예수님
마태복음 5장 21-32절
묵상에는 선악 간에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으로 하는 묵상이 있고, 죄악에 대한 묵상을 통해서 은밀히 죄악을 즐기는 묵상이 있습니다. 하지만 두 묵상에는 반드시 열매가 맺습니다. 그 열매는 매우 큰 차이를 보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묵상은 성령의 열매를 맺지만, 죄악은 또 다른 죄악의 열매를 맺습니다. 당신의 경우에는 무슨 묵상을 많이 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성취하신 분으로서 제자들에게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더 나은 의’를 요구하셨습니다. 48절까지 여섯 개의 주제에 대한 대조구문이 등장합니다. 본 단락은 ‘살인, 간음, 이혼’이렇게 세 가지 주제를 다룹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인하지 말라’는 물리적 살인에 대한 율법의 이해를 분노하는 것도 살인과 동등하다고 의미와 적용을 확장하며 새로운 계명으로 말씀하십니다. 간음에 대해서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조차 동일한 간음이라고 확대 적용하십니다. 이혼 문제도 율법의 본질을 파고 들며 부패한 전통과 관습을 꼬집으십니다.
살인에 대한 가르침(21-26)
율법의 내면을 외면한 채 외형만 준수하였던 서기관과 바리새인 수준에 머물러 있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의 ‘의’는 진정한 의미에서 의가 아니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의 충실한 언약 관계에 있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만약 바른 관계가 이루어졌다면 예수님을 알아보고 경배했을 것입니다.
21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23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25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26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21-26)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여기며 살던 제자들에게 그보다 훨씬 더 높은 기준을 제시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직접적으로 살인이나 간음과 같은 행위를 하지 않으면 계명을 지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계명의 준수의 차원을 행위와 차원에서 마음의 차원으로 높이시며 화를 내고 미워하는 마음을 품은 것이 곧 살인이고, 음란한 생각으로 이성을 바라보는 것이 곧 간음이라고 하셨습니다.
(1) 분노도 살인(21-22)
‘더 나은 의’를 보여주는 첫 번째 예는 살인에 대한 해석입니다(5:21-26). ‘옛 사람들은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을 들었습니다(21). 살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형제에게 화를 내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될 거라고 선언하십니다(22). 형제에게 ‘골빈 놈’이라고 하는 자마다 공의회에 보내질 것이고 ‘멍청이’이라고 말하는 자마다 불타는 지옥에 넘겨질 것입니다. 형제에 대한 분노는 타인의 생명을 부당하게 빼앗는 것인 살인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더 나은 의’는 주관적인 판단으로 작게 여길 수 있는 죄를 심각하게 인식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의 백성은 살인하지 말라는 법을 어기지 않은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상대방을 존중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상대방에 대한 존중은 23-26절에서 구체적인 예로 강조됩니다.
(2) 형제와 화목(23-24)
다음으로 경고한 심판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화해입니다(22). 첫 번째는 예물을 바치는 것보다 화해가 중요한 점을(23-24), 두 번째는 즉시 화해를 실행해야 하는 점을 언급합니다(25-26).
예물을 바치러 가다가 형제가 자신 때문에 뭔가 문제를 안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면, 예물을 제단 아래에 두고 바로 형제에게 가야 합니다(23-24). 산상설교가 주어지는 갈릴리에서 예루살렘 성전까지 가는 데 일주일가량 소요되므로, 멀리 있는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제단에 제물을 올리지 않고 돌아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만큼 화해를 강조하십니다. 깨어진 인간관계를 회복하고 나로 인해 상처를 받은 사람과 화해하는 것은 예배 행위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정도로 중요합니다.
(3) 고발하는 자와 화목(25-26)
화해가 즉시 이뤄져야 함을 묘사합니다. 화해는 빨리 이뤄져야 하며, 그렇게 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입니다(26).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지 않는 것에 머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분노를 주체할 수 없어서 비아냥거리거나 협박과 저주에 가까운 언어 폭력을 사용하면서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나는 아무 꺼릴 것이 없다고 생각하면 자신을 심각하게 오해하는 태도입니다. 자신의 입장에서 작게 보이는 무시와 성처가 지옥에 갈 정도로 심각하고 예배보다 더 먼저 해결해야 될 문제임을 깨닫고 실천해야 합니다. 죄에서 자유케 된 제자는 죄에 대해 무감각해지는 사람이 아니라 더욱 민감해지는 사람입니다.
형제를 향해 분노로 심판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가져야 합니다. 건전한 신학과 교류가 중요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형제를 향해 심판과 관련된 욕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형제를 향한 분노가 최초의 살인으로 나타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분노를 품고 있으면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도 온전하게 진전될 수 없습니다. 마음이 온통 두 마음으로 나뉘어서 결국 미움은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데까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깨어진 관계에 있을 때 웬만한 사람은 정상적인 삶을 이어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속에서 계명을 단순히 문자적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계명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순종하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간음에 대한 가르침(27-30)
하늘나라의 백성들은 남의 여인과 간음하지 않은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새 백성은 이성을 음욕의 대상으로 여기거나 희롱의 방식으로 대하지 않고 온전히 깨끗한 마음으로 자매에게 하듯 해야 합니다. 눈을 빼고 손을 자르라는 명령처럼 단호하게 엄격하게 절제해야 합니다.
27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29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27-30)
예수님께서는 여섯 번째 계명인 살인 금지에 이어서, 다음으로 간음과 관련된 일곱 번째 계명을 언급하십니다(출 20:14; 신 5:18).
(1) 음욕도 간음(27-28)
구약에서 간음(姦淫)은 유부녀가 남편 외의 다른 남자와 성관계를 맺는 것을 가리킵니다. 율법에서 간음 행위는 실체로 드러난 음행을 가리키며, 반드시 법의 판단을 받아야 했습니다(출 20:14; 신 5:18).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이 율법을 주신 원래 의미를 밝히십니다. 여자를 음행의 목적으로 보는 것도 간음입니다. 이곳에서 ‘여자’는 이미 ‘결혼한 여자’, ‘타인의 아내’를 의미합니다(출 20:17; 신 5:21). 남의 아내를 간음할 목적으로 기회를 엿보는 것은 이미 간음의 죄를 지은 것입니다. 마음과 몸(예, 간음의 마음으로 본 눈)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의 일부가 실족하게 만든다면 차라리 그것 없이 지옥의 형벌을 피하는 것이 낫다고 경고하십니다(29-30). 눈은 의도, 손은 행위와 관련된 표현으로, 남의 아내를 탐욕으로(제 10계명) 본 죄의 대가로 눈이 뽑혀야 합니다. 눈이나 손이 잘리는 것이 지옥에 보내지는 비극보다 낫습니다.
이런 표현은 과장법이므로 문자적으로 적용하지 말아야 하지만, 그만큼 하늘나라의 자녀는 마음의 의도까지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고 싶어야 할 것을 예수님께서는 강조합니다. 그냥 넘기기 쉬운 마음의 죄 역시 심각한 것입니다. 인간 법정을 피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제7계명을 인정하시면서 법의 적용 범위를 마음에까지 넓히십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계명을 주신 원래의 의도를 밝혀주심으로써 제7계명을 성취하시고 ‘더 나은 의’를 가르십니다.
이혼에 대한 가르침(31-32)
율법은 이혼 증서를 써주기만 해도 이혼이 성립되게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음행하는 일과 같은 정당한 사유 없이 이혼하는 것을 금하십니다. 배우자를 버리거나 이혼하지 않는 것을 넘어 아끼고 사랑하는 모습이야말로 새 백성이 보여야 할 더 나은 의의 모습입니다.
31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32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31-32)
‘더 나은 의’를 위한 세 번째 예는 ‘이혼(離婚)’입니다. 이혼은 앞의 간음과 연결되는 주제이므로 이 위치에 놓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혼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근거로 아내를 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아무리 법적으로 합당하다고 할지라도 그 속마음과 의도가 옳지 않다면 그것은 죄이며 금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은 신명기 24:1-4을 배경으로 하며, 마태복음 19:3-9에서 자세히 설명될 것입니다. 옛 사람들은 아내와 이혼하는 자는 그녀에게 이혼증서를 주라는 명령을 들었습니다(31). 이혼증서를 써 주라는 부분은 신명기 24:1을 배경으로 합니다. 남자가 이혼 증서를 써주는 것은 고대 사회의 가정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가졌던 남편의 힘을 제한해서 여자와 여자의 가정에 대해 책임성 있는 행동을 하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즉, 이혼 장려가 아니라 여자를 보호하는 목적으로 이혼증가서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음행의 경우 외에 그의 아내와 이혼하는 자마다 그녀로 하여금 간음하게 만들고, 이혼한 여자와 결혼하는 자마다 간음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남자가 아내와 이혼을 하게 되면, 아내로 하여금 간음을 하게 만들고, 이 여자와 결혼하는 자는 간음을 범하게 됩니다.
재혼과 관련해서, 합법적으로 이혼한 사람은 재혼할 수 있었고 이혼증서는 재혼할 수 있다는 권한이고 여자를 보호하는 기능을 했기에 재혼이 금지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남자가 아내가 음행을 했기 때문에 이혼했고, 그 다음 다른 여자와 재혼하는 것은 간음이 아닙니다. 여자가 남편의 간음으로 이혼 당한 경우나 여자가 간음 외의 문제로 이혼을 당했을 경우에는 재혼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만일 여자가 음행을 하지 않았는데, 남편에 의해 이혼을 당했을 경우에, 이 여자와 결혼을 하는 사람은 간음을 한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음행의 이유가 아닌데도 부부가 이혼을 하면, 하나님의 시간에는 여전히 이 둘이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여자와 결혼하는 자는 남의 여자와 사는 것이므로 간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전해진 이혼의 율법을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신명기 24장 1-4절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알리면서, 이 본문이 ‘쉬운 이혼’의 근거로 사용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신명기의 이혼은 인간의 완악함 때문에 ‘허락된’ 것이지 결혼제도를 만드신 창조주의 원해 의도가 아닙니다(창 2:24). 제자들은 하늘나라의 백성이며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넘어서야 하므로, 마음이 완악한 자들에게 ‘허락하신’ 법을 지키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원래 ‘의도하신’ 법에 순종함으로써 결혼과 이혼에 대한 법을 성취합니다.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영원한 관계를 이루도록 의도됐으므로, 이혼은 하늘나라의 제자들이 선택할 사항이 아닙니다. 재혼에 대해 간음에 연루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핵심은 이혼이 틀린 것임을 강조하는 데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제자는 언약 관계인 결혼을 파기하는 행위를 간음으로 간주하고 창조 때의 이상적인 결혼을 지켜야 합니다. 특히, 제자는 자신의 욕심 때문에 이혼의 원인을 제공하는 사람의 위치에 서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의 속뜻을 살피고 그 뜻을 살아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몇 개의 율법 조항을 수정하거나 강화하는 데 그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모세의 하나님이시며 새 언약의 주님이십니다. 그분과 연합하여 살아가는 그 나라의 백성은 세상 사람들보다 더 탁월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의인은 악한 일을 하지 않는 차원의 만족하는 의가 아닙니다. 말씀에 담긴 주님의 속뜻을 헤아려 살아간 삶을 의미합니다. ‘더 나은 의’라고 하는 원리는 모든 삶의 영역에서 적용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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