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문득 나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이었나를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내 삶을 빛나게 해주었거나, 나를 칭송받게 했거나, 나에게 커다란 이득을 가져다주었거나 한 것들이 소중한 것이 아니라 내 곁을 말없이 스쳐간 것들이야말로 귀한 것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한때 높이 오르려고 애를 써보기도 했고, 부를 얻어 보려고도 했으며, 명예라도 차지해볼까 여기저기 기웃거린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 일마저도 어떤 노력이나 투자가 필요했지만 다행히도 그런 노력을 할 만큼 끈기가 있지도 않았고, 투자할 여력도 없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는 자책하기도 했었습니다. 그 길로 가야 정상에 이른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돌이켜보건대, 내가 이루고자 했던 것을-누구나 비슷하지요- 이룬 사람들을 볼 때, 때론 이루지 못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이었는지 알게 됩니다. 그들은 명예와 권력과 부를 얻었지만, 그들이 드디어 성공이라고 여기는 그런 것들이 그들을 얼마나 초라하고 값어치 없게 했는지를 봅니다. 그들은 성공했다고 말하겠지만 얻은 것보다는 잃은 것이 더 많아 보입니다. 때로는 무능한 것도 도움이 되는군요.
그곳으로 가기 위해 걸을 때마다 우뚝 솟아 있던 산과 그 곁을 흐르던 강, 주변에 어울려 피어 있던 들꽃과 들꽃 사이를 날던 나비와 벌들,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것 같았던 바위나 돌덩이, 한가롭게 바람에 흔들거리던 나뭇가지들, 남들이야 어디로 가건 말건 제 일에 열중하던 농부들……. 내가 그들에게 바라는 것이 없었던 것처럼 그들 또한 나에게 바라는 것이 없었지요. 그런 것들이 소중했었음을 느낍니다.
터키 안탈리아 어느 찻집에서 만나 차를 마신 사람들은 기억하지 못해도-이해관계가 없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항구에 떠있던 범선과 높게 쌓아올린 성곽 그리고 지중해 햇살에 빛나던 올리브 잎과 열매, 가로에 줄지어 서있던 오렌지나무와 그 가지에 달려있던 붉은 오렌지, 오래된 건물 지붕 위에서 졸고 있던 고양이는 기억합니다. 파도에 떠밀려와 해변에 놓여있던 색이 아름답던 돌은 물론 놓인 자리까지도 생각이 납니다. 내 곁을 지나던 서양 부부나 관광객의 얼굴은 기억하지 못해도 그들이 잠시 쉬려고 앉았던 아르테미스 신전의 무너져 내린 대리석 기둥은 기억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곁에 피어있던 마가렛 꽃의 하늘거림도 또렷합니다. 그럴 때마다 마음속에서 지난날의 환희와 슬픔이 일고는 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만났을 때 그들이 나에게서 구하려 한 것이 무엇이며, 보려고 한 것이 무엇일까요? 바꿔 말하면 나는 그들에게서 그들이 지니고 있는 어떤 능력을 보려고 했지요. 그것이 나에게 이득이 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소용되는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면 곧장 뒤돌아서서 가버렸습니다. 버리거나 버려졌다고도 생각했지요. 자연스럽게 그에 관한 기억도 사라져버렸습니다. 사는 동안 매사가 그런 식이었습니다. 지금껏 만난 것 중에서 기억이 나지 않는 것들의 대부분은 사람입니다. 곁에 남아있는 사람은 그래서 수가 적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 가슴에 상처를 준 사람이 기억에 오래 남아 잊히지 않을 것 같았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를 용서할 수 없다거나 훗날 복수라도 해야겠기에 잊지 않을 것이라 여겼지만 그런 사람을 두고두고 기억하는 것만큼 어리석고 스스로를 괴롭히는 일도 없어서 자신도 모르게 잊게 되나 봅니다. 그와 함께 나에게 상처를 주었던 것이 금전이라거나 어떤 이득에 관련된 것이었을 경우는 더더욱 말할 것도 없는데, 그 까닭은 나이가 들면서 그런 것들이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하찮은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가끔 친구들이 내 집에라도 오면, 실상 이곳도 그들이 살고 있는 큰 도시 못지않게 못된 일들과 나쁜 것들이 판치지만, 이런 곳에서 사는 자네는 좋겠다고 합니다. 더러는 자신도 이런 공기 좋고 조용한 곳에서 살았으면 한다고 합니다. 이곳도 사람 사는 곳입니다. 규모가 작고, 도시 사람들에게는 왜소해 보이고, 머리 쓰는 것이 도토리나무에서 도토리 떨어지듯 훤히 들여다보여도 도시 못지않답니다. 처음 고향으로 내려올 때는 친구들이 말했던 것들을 기대했었지만 그런 기대야말로 세상물정 모르는 바보 같은 생각이라는 걸 얼마 되지 않아 알았습니다. 공기 맑은 것을 빼고는 도시보다 크게 나은 것이 없으니 친구들에게 이곳에 와서 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종산에 오르며 산길 양쪽으로 피어있는 꽃이나, 우뚝 서있는 소나무나, 밤나무나 혹은 참나무의 변함없는 모습이 세상을 떠다니는 되바라진 군상들보다 차라리 더 낫다는 걸 알았지요. 그것들과 말은 통하지 않아도 더 많은 대화를 하지요. 오죽하면 면벽수행이라는 말이 나왔겠습니까. 나는 살면서 이처럼 자신과 대화를 많이 나눠본 적이 없습니다. 자연은 무욕의 모습으로 일관하고, 저들만의 말로 대화하며, 세상일에 무심한 채로 삽니다. 그가 누구였든지 간에 주지 않는 것은 바라지도 않고, 가져가는 것 또한 말리지 않습니다. 꺾어 가든, 잘라 가든, 베어 가든 그런 일들은 인간의 일입니다.
나는 함부로 사람들에게 기대지 않지만 할아버지 산소 곁의 키가 큰 소나무나 참나무에는 마음 놓고 기대앉습니다. 누구에게도 무릎을 내어달라고 하지 않지만 할아버지 산소 앞 잔디에는 아무 생각 없이 드러눕기도 합니다. 그리고 잠이 스르르 오는 편안함을 느낍니다. 그러는 동안 누군가가 주머니 속 지갑이라도 가져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세상의 시름을 앓지 않아도 되지요. 이제야 느끼는 바지만 믿어야 할 것을 믿지 않고 믿어서는 안 되는 것을 믿은 잘못으로 말미암아 삶이 힘들었습니다.
물론 겪고 나니 해보는 소리입니다. 그럴 것이면 애당초부터 그런 자연 속으로 들어가 새와 나무와 자연을 벗해 살았으면 되었을 것을 무슨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냐고 할 것입니다. 그건 그렇습니다. 솔직히 그럴 용기도 없었으면서 마치 무슨 큰 깨달음이라도 얻은 양하는 것이 스스로도 우습기는 합니다. 그럴 수 없었음이 또한 인간이 지닌 한계이자 태어난 죄 그 자체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한 가지 말해 둘 것은 있지요.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런 것을 동경한다든가,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든가 하는 것까지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언제나 깨달음은 나중에 오지요.) 그래서 바보 같이 죽은 나무에서 잎이 돋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화분 속에 있는 치자나무를 그대로 두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지요. 그 죽은 나무가 내 어머니께서 오랫동안 아끼며 가꾸었던 화초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머니를 생각나게 하는 데는 죽은 치자나무만한 것도 없었으니까요. 죽은 치자나무가 효자지요.
부모님 산소를 찾아가다가 가끔 하늘을 우러르고 있는 나무를 가만히 만져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이기도 합니다. 그 나무는 할아버지 적 이전부터 거기 서있었기 때문이죠. 소중한 것들과의 만남이란 어떤 때는 부러움과 부끄러움이 겹쳐 오기도 해 어쩔 수 없이 반성이나 후회를 하도록 하는 모양입니다.
첫댓글 감히 평하건데 " 삶 한 발" 연작 중 최고의 글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