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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이후 권력의 심장으로
중국 수도 베이징의 중남해(中南海)에 있는 근정전(勤政殿)은 중국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공간이다. 인터넷에서는 근정전의 사진조차 구하기 힘들다. 가까이서 찍은 사진은 거듭 검색해도 찾을 수 없다.
중국 최대 검색엔진 바이두(百度)에서 ‘중남해’ ‘근정전’ 등을 키워드로 쳐보니
서울에 있는 경복궁(景福宮) 근정전의 사진이 더 많이 나온다.
중남해의 근정전이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과 같은 한자를 써서다.
중남해의 근정전이 베일에 가려진 까닭은 현재 중국의 최고권력자인 당총서기의 집무실이 있는
중국 권부의 핵 중 핵이기 때문이다.
3월 5일 전국인민대표대회를 통해 시진핑(習近平) 당총서기는
중남해 근정전의 명실상부한 새 주인으로 등극한다.
지난해 11월 제18차 당대회를 통해 후진타오(胡錦濤) 전 총서기로부터 당총서기,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을 넘겨받은 데 이어 국가주석직까지 물려받는다.
중남해는 중해(中海)와 남해(南海) 두 호수 지역으로 되어 있고,
두 호수 사이에 있는 근정전은 중남해의 정전이다.
근정전은 중해를 등지고 남해를 바라보는, 중남해를 아우르는 요지에 있다.
근정전에 들어가는 사람은 중국 권부의 상징인 ‘중남해’를 아우르게 된다.
근정전은 ‘날 일(日)’ 자 형태이고, 3층 높이의 장방형 건물이다.
근정전에는 서열 1위인 당총서기의 판공실(집무실)을 비롯해 당 중앙서기들의 집무실이 마련돼 있다고 한다.
중앙서기들은 류윈산(劉雲山)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등 7명이다.
이들은 총서기를 비롯한 중앙정치국 상무위에서 결정된 사항을 받들어 실제로 집행하는 당의 일꾼들이다.
근정전에서는 당총서기가 주재하는 7인의 중앙정치국 상무위 회의나 좌담회가 열리고, 중요 외빈들을 접견한다.
시진핑이 입주한 근정전의 총서기 집무실 옆방에는 미국 대통령 집무실인 백악관과 연결되는 직통전화도 있다.
중남해 근정전과 백악관 지하1층의 긴급상황실을 잇는 직통전화는
1997년 장쩌민(江澤民) 당시 총서기가 미국을 국빈 방문한 직후 개설됐다.
미·중 핫라인 개설은 1989년 천안문사태 이후 냉각된 양국 관계가 풀렸다는 상징이었다.
시진핑 총서기는 국가부주석이던 지난 2011년 6월 근정전에 설치된 미·중 핫라인을 이용해
미국의 조 바이든 부통령과 통화를 한 게 알려졌다.
통화 2개월 후인 2011년 8월, 바이든 부통령은 친선 농구단을 이끌고 방중했다.
문혁 때 중앙경위단장 공관으로
근정전이 중국공산당 최고실력자의 집무실로 사용된 것은 1989년 천안문 사태 직후
덩샤오핑이 장쩌민에게 대권을 넘긴 후부터다.
이후 장쩌민, 후진타오 등 역대 총서기들은 근정전 총서기 판공실에서 중앙정치국 상무위 회의를 주재하고
외빈을 접견하는 등의 공식적인 집무를 봤다고 알려진다.
반면 장쩌민의 전임 최고지도자였던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은 각각 중남해 안팎에 있는
자신의 관저에서 권력을 휘둘렀다.
마오쩌둥과 덩샤오핑 집권 때는 외빈 접견도 근정전이 아닌 주로 관저 응접실에서 이뤄졌다.
총서기들은 결재서류를 들고 마오와 덩의 관저를 드나들었다.
처음 공산당 총서기 집무실을 근정전에 설치한 사람은 후야오방(胡耀邦) 전 총서기다.
1981년 덩샤오핑 아래의, 명목상의 당 최고지도자에 오른 후야오방은 당총서기 집무실을 근정전에 설치했다.
덩샤오핑의 오른팔이었던 후야오방은 중남해의 업무 공간을 넓히는 ‘519공정’에 착수한다.
1966년부터 1976년까지 문화대혁명이 한창일 때 중남해는 자광각(紫光閣) 등 일부 공간을 지방에서 상경한
홍위병에 개방하면서 관리가 엉망이었다고 한다.
홍위병들이 당시 국가주석 류사오치(劉少奇)의 관저였던 복록거(福祿居)에 난입해 류사오치에 대해
고문과 구타를 가하고 복록거를 헐어버린 일도 있다.
문화대혁명 당시 근정전은 중앙경위단장(경호실장에 해당)을 지낸 왕동싱(汪東興) 전 부주석의 공관으로 사용됐다.
중남해의 요인 경호를 담당하는 중앙경위단(8341부대·중앙경위국의 전신)을 지휘한 왕동싱은
원래의 근정전을 헐고 당시 돈 690만위안(元)을 들여 자신의 공관으로 개조했다.
당시 근정전 수리 면적은 5387㎡에 달했다고 한다. 청와대 본관(8476m²)보다 조금 작은 규모다.
하지만 덩샤오핑의 집권과 함께 왕동싱이 중남해에서 밀려나면서 근정전도 부활한다.
결국 ‘519공정’에 따라 근정전에는 총서기 판공실을 비롯해 덩샤오핑의 명을 집행할 당 중앙서기들의 집무실을 배치했다.
원래 중남해 동쪽 담 너머 북장가(北長街)의 관저에서 중남해로 출퇴근하던 후야오방은
근정전에 총서기 집무실을 마련한 다음부터는 근정전에서 집무와 주거를 해결했다고 한다.
이후 근정전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직후 모습을 회복했다.
1949년 건국 초 근정전에는 당 중앙위원회 주석(마오쩌둥)의 집무실을 비롯해 30여개의 회의실이 있었다고 한다.
마오쩌둥은 1958년 천안문광장 옆 인민대회당을 건립하기 전까지 근정전을 공식 외빈 접견 공간으로 활용했다.
또 외빈 접견을 위해 베이징 고궁박물원에서 차출한 국보급 보물들을 근정전 곳곳에 배치했다.
1951년 티베트의 항복문서에 해당하는 ‘티베트 해방조약’이 체결된 곳도 중남해 근정전이다.
자금성보다 넓은 중남해
근정전이 처음 세워진 것은 청나라 강희제 때다.
‘정무(政)에 힘쓴다(勤)’란 뜻에서 강희제가 직접 붙인 이름이다.
청말 광서제는 중남해 근정전에 머물면서 캉유웨이(康有爲), 량치차오(梁啓超) 등과 함께 무술변법을 추진했으나
백 일 만에 실패로 끝났고, 근정전 남쪽에 있는 영대(瀛臺)에 연금됐다가 독살당했다.
당총서기 판공실에 있는 근정전은 청말의 그때 그 근정전은 아니다.
원래 근정전은 중화민국 초기에 헐렸고, 이후 수차례 개축을 거듭했다.
근정전을 정전으로 한 중남해의 전체 면적은 약 100만㎡로 자금성(72만㎡)보다 넓다.
중해와 남해라는 두 개의 인공호수를 끼고 있어 중남해란 이름으로 통칭된다.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를 비롯해 중앙서기처, 중앙판공청, 국무원 등 주요 당정기관이 포진해 있다.
베이징 천안문에서 서쪽으로 나 있는 서장안가(西長安街)의 붉은 담장을 따라 걷다보면 신화문(新華門)이 나온다.
신화문은 중남해의 정문이다. 2층 누각 형태의 신화문 안쪽 담에는
‘인민을 위해 복무한다’는 마오쩌둥의 친필 휘호가 보인다.
신화문에서 ‘八(팔) 자’로 뻗어나온 담장 서쪽에는 ‘위대한 중국공산당 만세’,
동쪽에는 ‘전무불승(戰無不勝·전투에서 패한 적 없는)의 마오쩌둥 사상 만세’란 붉은 현판이 달려 있다.
정복과 사복을 착용한 위병들은 어른 키 3~4배 높이의 붉은 담장에 일정 간격으로 늘어서 경계근무를 선다.
남해 쪽은 주로 공산당이, 중해에는 국무원이 사용하는 공간들로 나뉜다.
서열 1위인 당총서기는 남해 쪽에서, 국무원 총리는 주로 중해 쪽에서 공식 활동을 한다.
총서기 집무실이 있는 근정전 바로 남쪽의 영대는 총서기가 중요 외빈을 접견하는 곳으로, 근정전과는 석교로 이어진다.
중남해에서 가장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영대는 무술정변으로 서태후에 의해 유폐된 광서제가 독살당한 곳이다.
후진타오 전 총서기는 2008년 8월 베이징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한
푸틴 당시 러시아 총리와 부시 미국 대통령을 영대에 초대했고,
장쩌민은 2003년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을 영대로 초대했다.
▲ 중국 베이징 중남해의 회인당.
마오의 국향서옥, 저우의 서화청
중해와 남해 사이에는 풍택원(豊澤園)이란 정원이 있다.
과거 황제가 풍년을 기원하며 파종을 한 풍택원 내에는 국향서옥(菊香書屋)이 있다.
1949년 중남해에 입주한 마오쩌둥은 원래 황제의 서재였던 국향서옥을 관저로 사용했다.
1976년 마오쩌둥의 서거 직후부터는 마오쩌둥기념관으로 바뀌어 제한적으로 공개됐다.
풍택원 내 이년당(頤年堂)에서는 1958년 인민대회당 건립 전까지 공산당의 주요 회의들이 열렸다.
1950년 6·25전쟁이 터졌을 때 마오쩌둥이 ‘조선 출병’ 결정을 내린 곳도 이년당이다.
풍택원 북쪽에 위치한 회인당(懷仁堂)은 주로 당의 공식 행사를 연 곳이다.
1949년 제1차 정치협상회의(정협)를 통해 국기(오성홍기)와 국가(의용군 행진곡), 수도(베이징),
주석(마오쩌둥)을 정한 곳도 회인당이다.
마오쩌둥의 사망 직후인 1976년 10월 6일, 문화대혁명을 주도한 ‘4인방’이 체포된 곳이기도 하다.
중앙정치국 확대회의 등도 회인당에서 열렸고, 총서기에서 밀려난 후야오방이
1989년 정치국 회의 중 심장마비를 일으킨 곳이다.
회인당 동쪽에는 ‘유영지(游泳池)’로 불리는 실내외 수영장이 있다.
북쪽은 야외수영장이고, 남쪽은 실내수영장이다. 원래는 야외수영장밖에 없었으나,
실내수영장을 야외수영장 남쪽에 신설했다.
이후 실내수영장은 마오쩌둥의 전용 수영장으로 쓰였다. 1974년에는 실내수영장 남쪽에 ‘202호’로 불린
마오쩌둥의 관저를 새로 지었다.
실내수영장과 복도로 이어진 ‘중남해 202호’는 마오쩌둥이 사망한 곳으로, 까다로운 내진 설계로
진도 7.8의 탕산대지진(1976년) 때도 흔들림이 없었다고 한다.
야외수영장 북쪽에 있는 자광각(紫光閣)은 주룽지, 원자바오 등
역대 총리가 외국에서 온 귀빈을 맞이하고 기자회견을 여는 공간으로 쓰인다.
원자바오 총리는 지난해 8월 베이징을 방문한 장성택 북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을 자광각에서 맞았다.
중남해 서북쪽의 서화청(西花廳)은 원래 청말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의 부친인 재풍(載豊)이 섭정하던
섭정왕부(攝政王府)가 있던 자리다.
저우언라이와 덩잉차오 부부는 서화청에 머물렀고, 이들 부부의 양아들인 리펑(李鵬) 전 총리는
서화청을 저우언라이·덩잉차오 기념관으로 조성했다.
별도 전력선과 비밀 지하터널
중남해는 당 고위 간부들의 주거 공간이기도 하다.
마오쩌둥은 국향서옥과 수영장 저택에 살았고, 부인 장칭(江靑)은 춘연재(春蓮齊)에 거주했다.
춘연재는 마오쩌둥이 댄스파티를 열던 곳이다.
국가주석을 지낸 류사오치는 복록거에 살았고, 6·25 당시 파병군 지휘관이었던 펑더화이는 영복당(永福堂)에 거주했다.
총리를 지낸 저우언라이는 중남해 서북쪽 서화청에 살았다.
이에 중국에서는 ‘중남해 특별 공급’이란 뜻의 ‘중남해특공(中南海特供)’이란 상표가 붙은 제품이 지금도 ‘명품’으로 통한다.
거주민의 경우 해당 인사가 퇴임 후 사망하면 그 가족은 중남해를 떠나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국가주석을 지낸 리셴녠(李先念)의 부인 린자메이(林佳媚) 여사는
1992년 남편 사망 후에도 중남해 퇴거를 거부해 1998년 총리가 된 주룽지가 애를 먹었다고 한다.
중남해의 안전은 ‘8341부대’로 불리는 중앙경위국(중앙경위단의 후신)에서 담당한다.
인민해방군 총참모부 소속이지만 사실상 독립부대로 운영된다.
또 중남해는 베이징 외곽의 2개 발전소와 별도 전력선을 구축하고 있어
베이징 시내 전력이 차단돼도 불이 꺼지지 않는다고 한다.
중남해 지하에는 소련과의 핵전쟁에 대비한 대형 지하터널이 있다.
마오쩌둥의 주치의로 중남해에 22년간 거주한 리즈수이(李志綏) 박사에 따르면,
지하터널은 트럭 4대가 동시에 통과할 수 있는 크기로 천안문광장, 인민대회당, 해방군 305의원(병원),
국방부청사 등 베이징 시내의 요지와 직결됐다고 한다.
의료시설 역시 중국 최고를 자랑한다.
당초 마오쩌둥의 전용 병원으로 지어진 인민해방군 305의원(병원)이 중남해 북문 바로 건너편에 있다.
해방군 305의원은 저우언라이가 임종 전까지 수십 차례 수술과 입원을 거듭했던 병원이다.
“중남해를 시민에게 돌려달라”
하지만 현재는 중남해의 주택 공급이 수요에 비해 부족한 편이라고 한다.
이에 최근에는 중남해를 집무실로만 사용할 뿐 가족과 함께 머물지는 않는 것이 대세라고 한다.
퇴임한 장쩌민과 후진타오도 중남해가 아닌 베이징 외곽 옥천산(玉泉山) 요인거주구역에
새 주거지를 마련했다고 홍콩 언론은 전한다.
퇴임하는 후진타오가 중남해의 집무실까지 옮겼는지는 불분명하다.
과거에도 린뱌오(林彪)는 중남해 서쪽에 있는 모가만(毛家灣) 요인거주구역에 살았다.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은 중남해 춘연제로 들어오기 전까지 중남해 서쪽 조어대(釣魚臺) 11호루에 주로 머물렀다.
예젠잉 등 군부 인사들도 베이징 외곽의 서산(西山)이나 옥천산 요인거주구역을 주거지로 선호했다.
특히 군부 인사들이 중남해를 꺼린 까닭은 군사상 이유에서다.
덩샤오핑은 “폭탄 한 방이면 지도부가 괴멸된다”며 중남해 입주를 꺼렸다.
덩샤오핑은 1977년 자금성 북쪽 경산(景山) 인근 주택으로 이사해 말년을 보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전후로는 “중남해를 베이징 시민들에게 돌려달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마오쩌둥의 국향서옥이나 저우언라이의 서화청 등을 일반에 개방해서 관광명소로 활용하자”는 의견이다.
중남해는 마오쩌둥의 서거 직후인 1977년부터 1985년까지 풍택원과 영대 등 일부 공간을 개방했다.
하지만 1989년 천안문 유혈사태 직후 신화문을 굳게 걸어잠근 뒤, 최정상급 외국 국빈에게만 개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