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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 로또 1등
아이가 성장하듯 우리 신앙도 기도로 자라납니다
찬미 예수님.
지난주에는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만남,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기도가 어떤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나야, 나” “하느님, 저예요, 저!”라는 한마디만으로도 서로 알아차릴 수 있는 기도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지요. 이에 덧붙여, 오늘은 청원 기도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지난가을, 몇몇 신자분을 만난 자리에서 ‘수험생을 위한 100일 기도’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이 기도에 대해서 약간은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던 저는 “이러한 기도를 바치는 것이 너무 기복적인 모습이 아니겠냐”는 말씀을 드렸죠. 그랬더니 대부분 하시는 말씀이, “처음 시작할 때는 그런 마음일 수 있지만 기도의 여정 안에서 많은 것을 깨닫게 되고, 또 기도가 끝나갈 무렵에는 기복적인 마음보다 하느님 뜻에 모든 것을 맡겨드리는 마음이 더 크게 들었던 감사한 경험이었다”는 겁니다. 또 다른 분께서는 약간은 볼멘소리로 이런 말씀도 하셨죠. “그런 것을 기복 신앙이라고 해서 부정적인 것으로 많이 이야기하는데, 어떤 것은 청해도 되고 어떤 것은 청하면 안 되는 기준이 무엇이냐, 결국 우리 신앙이 기복 신앙에서 출발하는 것 아니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사실은 맞는 말씀이다 싶습니다. ‘기복’이라는 말 자체가 ‘복을 비는 것’을 의미한다면, 누구보다 더 우리에게 복을 빌어주기를 원하시는 분은 다름 아닌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이렇게 말씀하시죠.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창세 12,2) 또 모세에게 당신 자신을 계시하실 때도 하느님께서는 이집트의 억압에서 고통받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구해내라는 사명을 모세에게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입장에서 보면, 고통 속에서 자신들을 구해주시길 청하는 것이 그들이 하느님과 맺은 관계의 첫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이 온전한 기복 신앙이라고 하기엔 뭔가 개운치 않은 것이 남아 있기도 합니다. 우리는 과연 하느님께 어떤 것을 청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께 청해도 되는 것과 청하면 안 되는 것 사이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하다못해, ‘하느님, 이번에는 꼭 로또 1등에 당첨되게 해 주세요’라는 기도를 드릴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제가 우선 드리고 싶은 답은, 로또 1등에 당첨되게 해달라는 기도도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는, 우리 인간이 태어나 자라는 모습에 비추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한 가정에 아기가 태어났다고 생각해 볼까요? 그런데 이 아기가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요? 처음 한동안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웃거나 우는 것밖에 없습니다. 기분이 좋을 땐 생글생글 웃고 있지만, 배가 고프거나 기저귀가 축축하다 싶으면 여지없이 울어 젖히죠. 그럼 엄마 아빠가 다가가 무엇 때문에 그런지 살펴보고 아기의 필요를 채워줍니다. 그런데 이런 아기를 두고서 “넌 왜 그렇게 이기적이니? 엄마 아빠한테 의지하지만 말고 너도 좀 알아서 해보렴”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있다면, 이상한 사람이겠지요. 그만큼 어린 아기는 자신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 그래서 모든 것을 엄마 아빠에게 청하고 의지해야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이 아이가 자라면서는 어떻게 될까요?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을 다니다가 어느 해 어버이날에는 커다란 도화지에 카네이션을 그려옵니다. 그리고는 ‘엄마, 아빠 사랑해요’ 삐뚤빼뚤 글도 적어오지요. 그 의미를 온전히 다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자녀로서 부모님께 감사드려야 한다는 것을 조금씩 배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자기 삶의 대부분을 부모님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어린아이입니다.이 아이가 더 자라서 초·중·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생이 될수록 자기 스스로 해나가는 일들이 조금씩 더 많아지고, 때론 집안일이나 부모님 일도 도와드리게 됩니다. 그리고는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도 점점 더 커지게 되겠죠. 하지만 여전히 부모님께 많은 것을 의존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다가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 첫 월급을 타게 되면 부모님께 빨간 내의를 선물해 드리고, 비로소 보다 독립된 삶을 살기 시작하죠. 그리고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첫아이를 낳게 되면, 그때서야 부모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길러주셨는지 체감하게 되고 부모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을 더 온전히 지니게 됩니다. 그리고는 연로해져 가는 부모님을 사랑과 감사의 마음으로 계속해서 모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한 인간의 일생을 생각해 보면, 부모님께 많은 것을 의존하는 어린아이의 시기에서 사랑과 공경의 마음으로 부모님을 모시는 어른으로 성장해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린아이에서 어른으로 자라나는 모습이지요. 그런데 우리 신앙의 모습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즉, 우리의 신앙도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에서 어른의 신앙으로 성숙해 가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도 말씀하시죠. “형제 여러분, 여러분에게 이야기할 때, 나는 여러분을 영적이 아니라 육적인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젖만 먹였을 뿐 단단한 음식은 먹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1코린 3,1-2) 세례를 받고 신앙인으로 살아가지만, 그 신앙의 정도가 모두 같지 않음을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신앙은 처음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났을 때의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에서 성숙한 어른의 신앙으로 성장해야 할 필요가 있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성숙한 신앙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은총을 우리는 견진성사를 통해서 얻게 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우리 신앙의 성숙 정도를 여러 단계로 나누어 놓고 볼 때, 아직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에 머물러 있는 분이라면 아까 말씀드린 ‘로또 당첨’과 같은 청원 기도도 하느님께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지 못할 청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언제나 어린아이와 같은 청만 하느님께 드린다면 그것도 썩 좋은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어린아이처럼 부모에게 의지만 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싶지는 않으시겠죠?
우선,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하느님께 청하세요. 사소한 것, 자잘한 것, 이기적인 것까지도요. 아직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이라면 그것으로도 좋습니다. 부모님이 아이를 키워내듯 하느님께서 우리를 키워주실 테니까요. 우리의 신앙이 자라날수록, 청원의 내용도 나 중심에서 너 중심의 내용으로 자연스레 바뀌어나갈 테니까요.
[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 원망의 기도
화가 나면 화가 난다고 하느님께 있는 그대로 고백하세요
찬미 예수님.
심리학에서 말하는 ‘방어 기제’라는 것이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 특별히 내적으로 두렵거나 뭔가가 불쾌하거나 또는 욕구 불만의 상황에 처했을 때,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서 자기도 모르게 취하게 되는 적응 행위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실수를 했을 때 그 실수가 자기 탓이 아니라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고 합리화하거나, 실제로는 자신이 느끼는 불편한 감정을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라고 투사하는 것 등이 그렇지요. 이러한 방어 기제의 가장 기본은 바로 부정입니다. 자신 안에 느껴지는 두려움이든 불쾌함이든, 마주 하기 싫은 감정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마치 없는 것처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꼭 방어 기제가 아니더라도, 이처럼 자신 안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못 본 척 부정하는 모습을 우리 신앙생활 안에서 종종 보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부정적이라고 이야기하는 화, 짜증, 미움, 두려움, 원망 같은 감정들이지요. 어떤 어려움이나 힘든 일을 겪을 때 느끼는 감정이기도 하고, 때론 인간관계 안에서 누군가를 향해 느끼는 감정이기도 합니다.
이런 감정들이 느껴질 때 어떻게 하시나요?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아마도 우리 대부분이 곧바로 하게 되는 반응은 이런 감정들을 없애려는 생각일 것입니다. 부정하는 것이지요. 내 안에 그런 감정들이 있다는 것이 마치도 내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신앙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있으면, 자꾸만 그 마음을 없애 달라고 기도하지요.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던 예수님처럼(루카 23,34 참조), 자기도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어떤 힘든 일, 어려운 일을 겪게 되었을 때 십자가를 생각하며 그 아픔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려 애쓰기도 합니다. ‘그래, 예수님도 우리더러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셨으니까, 내게 주어지는 십자가로 생각하고 받아들여야지. 이런 건 힘들다고 불평할게 아니야!’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나 아픔은 꾹꾹 눌러놓고 가야할 길을 꿋꿋하게 걸어가는 것이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떠세요? 이런 모습이 정말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 그래서 우리 모두가 가야할 길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정말 고통스럽고 힘든 일을 겪게 되었을 때, 하느님을 원망해본 적 있으세요? 네? 어떻게 하느님을 원망할 수 있냐고요?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에 대해 이런 일화가 전해 내려옵니다. 어느 날 성녀께서 마차를 타고 어딘가로 가고 있었는데, 마차가 거리의 도랑에 빠져 바퀴 축이 부서졌지요. 그래서 성녀께서 진흙탕을 밟고서 마차 밖으로 나와서는 하늘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어떻게 친구를 이렇게 대하시느냐’고 원망을 가득 늘어놓으셨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성녀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죠. “내 딸아, 나는 내 친구들을 종종 이렇게 대접한단다.” 그러자 성녀께서는 거침없이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아, 그렇고 말고요, 주님. 그래서 주님께는 친구가 없는 겁니다!”
성녀께서 하느님, 예수님과 얼마나 가깝게 살아가셨는지를 잘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관계 안에서 성녀께서 늘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하고 사랑하는, 좋은 것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인간적으로 느끼는 감정이나 불만, 하느님께 대한 원망까지도 하나도 숨김없이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픈 것, 힘든 것, 원망스러운 것은 속으로 감추고 좋은 것만 꺼내놓는 관계가 아니라, 정말 마음 속 모든 것을 그대로 드러내는 진실한 관계였던 것이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모습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 마음 안에 있는 부정적인 것, 힘든 것, 아픈 것은 꾹꾹 눌러놓고 좋은 모습만 보여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생생한 마음들, 특히나 부정적인 생각, 분노, 원망, 미움 같은 것도 그대로 당신께 내어놓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원망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탓 없이 겪게 되는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누구 하나 원망할 수 없어서 더 아픈 상황에서, 하느님께서는 ‘그래, 네가 이렇게 힘들 때 내 탓이라도 해라. 그렇게 해서 네 마음이 나을 수 있다면 내가 그 원망을 다 받아줄게’ 하시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이런 모습의 가장 대표적인 예를 예수님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당신 수난이 올 것을 아시고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기도하시죠? “네, 아버지. 아버지의 뜻이니 저는 당연히 따르겠습니다. 전혀 두렵지 않습니다!” 하고 기도하셨나요? 아무런 고민 없이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십시오” 응답하셨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처절하게 기도하십니다. 다가올 수난이 두렵다고, 그 길을 가고 싶지 않다고, 할 수만 있다면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니다. 당신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니 제자들더러 함께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시죠. 그 공포와 번민이 얼마나 컸는지,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졌다고 복음사가는 전하고 있습니다.(루카 22,39-44 참조)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의 신비를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인성의 차원에서 보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 앞에서 참 인간으로서 당신이 느끼는 모든 것을 토해내셨습니다. 고통에 대한 두려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날 것 같은 허무함,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 그리고 어쩌면 이 험난한 길을 요구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원망까지도 다 내어놓으셨던 시간이 바로 겟세마니에서의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다 쏟아내시고 난 후에야,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 14,36) 속으로는 따르기 싫은데도 그 마음 없는 것처럼 한쪽으로 꾹꾹 눌러놓고 억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당신 힘든 마음, 싫은 마음 다 표현한 후에야 ‘그래도 아버지께서 원하신다면 따르겠습니다. 그 길이 쉬워서가 아니라, 아버지 뜻에 저도 동의하기 때문에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하는 마음이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결국 하소연의 기도, 원망의 기도입니다. 성숙한 신앙인이 되려고, 내 십자가를 잘 받아지려고 억지로 참을 것이 아니라, 미우면 밉다고, 화가 나면 화가 난다고, 힘들면 힘들다고 하느님께 말씀드리세요. 용서하기 싫다고, 이 십자가를 지기 싫다고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세요.
그러고 난 후에라야,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이 들릴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음성을 따라갈 때,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 웃음꽃
‘지금 이곳’에서 하느님 따를 방법 구체적으로 찾아야
찬미 예수님.
얼마 전 어느 본당에 미사를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사실, 처음 신학교에 와서 한동안은 한 달에 한 번, 동기신부가 보좌로 있는 본당에 정기적으로 미사를 드리러 다녔습니다. 유학 생활 내내 신자분들과 떨어져 지냈던 아쉬움에, 비록 신학교에 있지만 그래도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주일미사 강론 준비도 하고 신자분들과 함께 미사를 드리는 것이 저의 사제 생활에 도움이 되겠다 싶어 부탁한 일이었습니다. 주일 밤 9시 미사였는데, 처음 얼마간은 그렇게 신자분들과 함께 미사 드리는 것이 참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제대에 서서 신자분들을 바라보는 제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폈으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한 학기를 지내면서는 본당에서의 미사도 좋지만 그보다 신학교 소임에 더 집중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동창 신부에게 미안하지만 저 대신 다른 신부를 찾으면 좋겠다고 이야기 하고서 미사 다니는 것을 그만 두었습니다.
그 이후로 본당에 미사 드리러 가는 일은 거의 없었는데, 그래도 어린이 미사를 한 번 드리고 싶은 마음은 늘 있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어린아이들을 좋아했던 저인지라,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이들과 함께 “하느님 말씀 잘 들었어요~ 내 마음 깊이깊이 새길테야요~” 어린이 미사곡을 부르면서 미사 드리고 싶은 마음이었죠. 그래서 동기신부들 모임 때 어린이 미사를 한 번 드려보고 싶다고 몇 번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 그 말을 기억했던 한 동창이 중고등부 주일학교 행사로 자리를 비우게 된 어느 주일 어린이 미사를 제게 부탁했던 것입니다. 어린이 미사라면 마지막으로 드려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아주 오래 전 일이었던지라 저는 흔쾌히 응답했지요.
미사 드릴 본당으로 가는 길부터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미사 전에 고해소에서 아이들 고해성사를 주면서는 순수한 아이들의 고해 내용에 혼자 흐뭇해했지요. 미사가 시작되어 제의실에서 복사 아이들과 함께 나오려는데, 네 명이나 되는 복사 아이들이 자기 자리를 못 찾아 서로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래, 아이들이니까 이러는 게 당연하지.’ 강론 때 이런 저런 질문을 아이들에게 하면서는 대답하는 아이들에게 선물을 줘야 하는데 미처 준비를 못해왔다는 후회도 했지만, 그래도 서로 대답하겠다고 손을 드는 유치부 아이들부터 꼭 자기를 시켜달라는 눈빛으로 두 눈에 힘을 주고 저를 바라보는 초등학교 저학년, 고학년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행복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아이들의 모습을 얼마나 흐뭇하게 바라보실까!’ 미사 내내 제 얼굴에 웃음꽃이 다시 활짝 폈습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미사 때 밝은 얼굴로 웃음꽃을 피우는 것이 참 오랜만이라고요. 생각해보면, 신학교에 처음 왔을 때도 미사 드리는 제 표정이 꽤나 밝았던 것 같습니다. 비록 본당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제가 되겠다고 신학교에 와서 생활하고 있는 신학생들을 바라보는 제 마음이 참 많이 반갑고, 대견하고, 행복했기 때문입니다. 미사 때 뿐만 아니라 교정을 오가며 신학생들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였지요. 제 나름으로는 반가운 얼굴, 웃는 표정으로 다정하게 신학생들을 바라보며 인사했던 처음의 모습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제 얼굴에서 웃음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처음 하게 되는 신학교 양성소임에 적응하는 것이 못내 힘들었기 때문일까요? 주어지는 여러 일들을 해나가는 것에 육체적으로 지쳐가기도 했고, 또 사제 양성을 위한 보다 이상적인 환경이 아닌 구조적인 한계에서 오는 어려움들 때문에 마음으로도 많이 지쳐갔던 것 같습니다.
본당에서 미사 드리던 것을 그만둔 이유도 사실은 그런 데에 있었지요. 비록 한 달에 한 번이지만 아침에 신학교 미사를 드리고 나서 다시 저녁 늦은 시간에 오며 가며 3시간을 들이는 것이 버겁기도 했고, 우리 교구의 사제 양성 현실이 많이 부족한데 이렇게 자꾸 신학교 밖의 일에 마음을 써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도 자꾸 들었던 것입니다. 그 때문이었는지, 학생들로부터 ‘신부님, 요새 표정이 많이 어두우세요’, ‘신부님, 요즘도 많이 피곤하세요?’하는 이야기들을 점점 자주 듣게 되는 것이 신학교에서 지내던 그간 저의 모습이었습니다.
신학교에서 지내는 것이 행복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신학생들이 참으로 예수님을 닮은 좋은 목자로 성장하는 데에 할 수 있는 한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도 여전합니다. 그런데 제 표정은 왜 자꾸만 어두워지고 또 계속해서 몸과 마음의 피로를 느껴왔을까요?
처음에 신학교 양성소임을 맡게 되면서 가졌던 생각과 마음은 그대로지만, 그 마음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다 싶습니다. 제가 살아야 할 방향에 대해서 추상적으로만 생각했지, 그런 방향성을 제가 ‘지금 여기’에서 처해 있는 상황 안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천할 지에 대해 찾는 것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그런데다가 신학교 사제양성 현실의 부족함과 한계에 대해 제 나름으로 느끼는 안타까움과 불만은 점점 늘어갔으니, 제 표정은 어두워질 수밖에 없었죠. 계속해서 새로운 길을 찾지 않고 주어지는 현실에 수동적으로 끌려가기만 했으니 몸과 마음이 지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머리로만 행복하다고 생각했지 실제 마음으로는 그렇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제 경우도 그렇지만, 우리 신앙인의 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 한 번, 하느님 따라 너중심으로 살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해서 그 이후의 삶이 자동으로 너중심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지금 내가 처해 있는 현실 안에서 어떤 것이 예수님을 닮고 하느님을 따르는 구체적인 실천인지를 계속해서 찾지 않는다면, 우리는 금세 나중심의 움직임으로 되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구체적인 길, 늘 새로운 길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그래서 기도 이야기입니다. 지난 몇 주간에 걸쳐 기도의 몇 가지 방향성에 대해 말씀드렸죠. 인격적인 관계의 기도, 청원의 기도 그리고 원망과 하소연의 기도였습니다. 물론 이러한 것이 기도의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이 성숙해간다면 우리 기도의 모습도 또 달라질 테니까요. 하지만 매일의 삶을 두고 구체적으로 드리는 청원의 기도, 하소연의 기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느님과 생생한 관계를 맺기란 어려울 것입니다. 기도의 삶은 저 멀리에 떠있는 뜬구름을 잡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구체적인 일을 대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내가 선택하고 따라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찾아보세요. 생각으로만 행복한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찾아보세요. 그럴 때 우리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날 겁니다. 바로, 기도의 삶입니다.
[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이야기] 삶의 나침반
기도, 삶의 방향성을 찾아가는 여정
찬미 예수님.
베르나르 신부님은 그리스도인의 기도를 ‘은총으로 사는 자신의 실존과 성소에 대한 영적인 동의’(샤를 앙드레 베르나르, 「영성신학」, 557)라고 정의하십니다. 무슨 뜻인지 금방 내용이 들어오지는 않죠? 여기에서 ‘실존’과 ‘성소’라는 말은 ‘정체성’과 ‘사명’이라는 말로 바꾸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나는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과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사명과 연관된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찾아가는 과정, 그리고 그 안에서 얻어진 답들에 동의하면서 그 동의한 대로 살아가는 과정이 기도입니다. 이러한 여정이 자기 혼자의 인간적인 판단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 여정은 당연히 ‘영적인 동의’의 여정이 되는 것이죠.
이처럼 자신의 정체성과 살아가야 할 방향을 찾는 것은 한 번 이루어졌다고 해서 더 이상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라 너중심으로 살면서 하느님과 일치하고자 하는 전체적인 방향성은 이미 찾아져 있지만, 그러한 방향성을 지금 여기, 오늘의 이 특정한 상황 안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따라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묻고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제 이야기를 말씀드렸던 것이죠. 신학교에 발령받아 오면서, 적어도 신학교에 있는 동안 ‘사제 양성에 도움이 되기 위해 있는 사람’이라는 정체성과 따라서 ‘신학생들을 위해 도움 되는 것을 찾아서 마련해주어야 한다’는 사명에 대해서 일찌감치 깨닫고 동의했던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제 실존과 성소에 대해 끊임없이 새롭게, 그리고 제가 처한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그 길을 찾는 것이 부족했기 때문에, 양성자로서의 저의 생활이 추상적인 차원에만 머물렀고 그 안에서 자꾸 나중심의 삶으로 돌아가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생활의 결과는 말씀드렸던 것처럼 제 얼굴에서 웃음꽃이 사라지는, 즉 행복하지 않은 삶이었습니다.
결국 베르나르 신부님의 말씀을 따라서 우리는 기도 안에서 끊임없이 자기 실존과 성소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가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네? 고민하는 것과 행복이 어떻게 연결되느냐고요?
그러한 삶의 가장 완전한 답을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를 모범으로 하고 있죠. 그래서 베르나르 신부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기도에 대해 먼저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도의 바탕이 되는 그리스도의 기도는 바로 ‘아들로서의 실존과 그분의 사명에 대한 영적인 동의’(샤를 앙드레 베르나르, 「영성신학」, 555)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도 끊임없이 당신의 정체성과 사명에 대해 고민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님 아들로서의 당신의 정체성과 사명을 찾아가셨을까요?
예수님께서 태어나면서부터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신 것을 다 아셔서, 열두 살 되던 해에 성전에 남아 가르치면서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말씀하셨을까요? 또 다 정해진 수순에 따라서 30년 동안의 사생활을 사시고, 때가 되면 요르단 강에 가셔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게 되리라는 것, 그리고 나면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받게 될 텐데 그 첫 번째 유혹은 뭐고 두 번째, 세 번째 유혹은 무엇이라는 것을 미리 다 아셨을까요? 그 이후의 당신 삶이 어떻게 되고, 제자들은 누구누구를 뽑게 되고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시게 될지를 예수님께서 미리 다 알고 계셨던 것일까요?
사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예수님을 ‘참 하느님이시며 참 사람’(「가톨릭교회교리서」 464항)으로 고백하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지 우리는 온전히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죄 말고는 모든 것에서 우리와 같아지신’(히브 4,15 참조) 예수님의 인성의 측면을 생각할 때, 적어도 우리는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자의식을 태어나면서부터 온전히 지니고 있었던 것은 아닐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참 사람’으로서의 예수님은, 육체의 측면만이 아니라 정신의 측면에서도, 우리와 똑같은 성장법칙을 따르셨기 때문입니다.(“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 2,40))
그렇기 때문에 복음서에서 우리가 어떤 모습을 보게 되죠? 바로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주 홀로 하느님 앞에 머무시면서 기도하십니다. 하느님의 아들로서 모든 것을 다 아시고 그대로 따라가신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누구인지, 지금 여기는 어딘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이 하느님의 뜻에 맞는 것인지를 계속해서 기도 안에서 찾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조금씩 더 하느님을 아버지로 알아듣게 되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로 자각하게 되는 그런 길을 걸으셨던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참 인간’이셨던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지상에서의 삶의 모습일 것입니다.
예수님 수난의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죠? 수난의 길이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힘든 때만 참아내면 나중에 부활 할 것이라는 것을 다 아셨기 때문에, 아무런 어려움 없이 십자가를 지겠다고 응답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인간적으로 너무나 당연한 두려움, ‘정말 이 길이 나의 길이 맞나?’ ‘하느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길일까? 만일 아니라면 어떻게 하지?’ 하는 두려움이 있으셨음에도, 그 모든 것을 다 토로하신 후에 아버지의 뜻에 ‘동의’하신 것입니다. 가기 싫은 마음을 억지로 꾹 눌러놓고 마지못해 가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 길이 당신이 가야할 길이라는 것에 동의하셨기 때문에 참된 순명과 믿음으로 응답하셨던 것이죠.
그렇게 나선 수난의 길을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셨을까요? 그 처참한 힘겨움에 마냥 괴로우셨을까요? 아니면, 비록 고통스러운 길이긴 하지만, 그래도 당신이 동의한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 있다는, 당신 자신의 실존과 성소를 온전히 가고 있다는 기쁨을 느끼셨을까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기도는 우리 삶과 동떨어진, 저 멀리 하늘만을 바라보고 마음의 평화를 느끼게 하는 추상적인 시간이 아닙니다. 기도는 지금 여기에서의 나의 구체적인 삶과 행동을 방향 짓게 하는 나침반과도 같으며, 그 방향을 따름으로써 우리 삶에 실제적인 변화를 일으키게 하는 구체적인 여정입니다. 하느님께서 지어주신 본래의 나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행복입니다.
[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삶의 자리마다 정체성과 사명 끊임없이 성찰해야
찬미 예수님.
그리스도인의 기도를 어떻게 ‘은총으로 사는 자신의 실존과 성소에 대한 영적인 동의’로 이해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계속 살펴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또 성모님께서도 기도, 곧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끊임없이 당신 자신이 누군지를 깨달아 가셨고 그러는 가운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무엇을 바라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계속 찾아가셨죠. 결국 ‘나는 누구인지, 그리고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대한 답을 찾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물음과 깨달음의 과정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또 지금 자신이 처해있는 구체적인 상황 안에서 계속해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왜일까요? 그럴 때 우리 삶의 의미가 찾아지고 그 안에서 우리가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서품을 받고 아직 새사제로 출신 본당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제 출신 본당 옆 다른 본당의 주임 신부님께서 중요한 일로 한 달 동안 본당을 비우셔야 할 일이 생겼지요. 그래서 그 신부님께서 제 출신 본당 주임신부님께 한 달 동안의 미사 부탁을 하셨고, 마침 새사제까지 있던 터라 주임 신부님께서는 흔쾌히 그 부탁에 응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어느 날 식사 자리에서 주임 신부님과 보좌 신부님, 그리고 저까지 셋이서 미사 배정을 어떻게 할지 계획을 짜기 시작했습니다.
제 출신 본당과 옆 본당의 미사 시간을 다 놓고서 셋이서 돌아가며 하나씩 맡아 나갔죠. 그런데 그러다 보니 미사 대수가 딱 맞아 떨어지지 않아서, 셋 중의 둘은 미사를 한 대씩 더 맡아서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자, 셋 중에 누가 미사를 한 대씩 더 드리게 되었을까요? 아무래도 주임 신부님이 제일 어른이시니까, 보좌 신부님과 새사제인 제가 한 대씩을 더 맡아서 하게 되었을까요?
그런데 주임 신부님께서는 공평하게 사다리를 타자고 제안하셨습니다. 사다리 타는 것이 어떤 것인지 독자 여러분들도 아시나요? 흰 종이에 여러 세로줄을 긋고 그 사이 사이에 가로줄을 그어 전체적으로 사다리 모양의 그림을 그리는 겁니다. 그리고 각각의 세로줄 밑에는 ‘1등’ ‘2등’ ‘3등’을 적어 놓는데, 어떤 세로줄을 택해야 마지막에 1등이라고 쓰인 세로줄에서 끝나게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세로줄 중 하나를 선택해서 따라 내려가다가 가로줄을 만나게 되면 그 가로줄을 따라 이동하고, 그에 이어지는 세로줄을 따라 내려가다가 또 가로줄을 만나면 그를 따라 이동하는 방식으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중간에 가로줄이 얼마만큼 그어져 있는가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에, 그렇게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보지 않고서는 결과를 예측할 수 없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사다리 모양의 그림을 그려놓고 두 분 신부님과 제가 출발점을 하나씩 선택하고는 그 줄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누가 1등을 했는지 또 누가 꼴찌였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어쨌든 그렇게 순위가 정해졌지요. 그리고 저는 당연히 2등과 3등을 한 신부가 미사를 한 대씩 더 맡아서 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주임 신부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 신부다. 그리고 신부는 미사를 드리는 사람이고 그렇게 미사 드리고 싶어서 신부가 된 것이기 때문에 남들보다 한 대라도 더 미사를 드리고 싶은 것이 우리 마음이다. 그러니 꼴찌가 아니라 1등과 2등을 한 신부가 미사를 더 맡아서 하는 것이 맞지 않겠느냐?”
어떠세요? 그 신부님 말씀에 수긍하시나요? 이제 막 사제로서의 삶을 시작했던 저에게는 하나의 새로운 충격이었습니다. 안 하면 더 좋을 것을 꼴찌가 되었기 때문에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더 많이 할 수 있는 1등이 되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다른 신부보다 미사 드릴 기회가 더 많아서 좋다고 느끼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사제로 사는 참 모습이고 참 기쁨이라는 것을 배울 수 있었던 체험이었습니다.
그 신부님께서는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으셨을까요? 어쩌면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신부님의 그 말씀은 끊임없이 자신이 사제로 사는 의미, 그 이유를 기억하고 그에 따라 사제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다해가려는 마음에서 나온 말씀이다 싶습니다. 자신의 실존과 성소에 대한 성찰과 동의를 계속 해나가는 모습에서 비롯된 말씀인 것입니다.
사제성소에 응답하고 오랜 시간을 준비하고 가꾸어 사제가 되는 이유는 미사를 봉헌하고 또 여러 성사와 성무를 수행하면서 그를 통해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전하고 싶은 마음 때문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이끌고,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기쁨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서 사제직에 응답하는 것이죠. 물론 현실의 상황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본당에 홀로 있으면서 모든 미사를 다 집전해야 하고, 계속해서 본당의 수많은 단체들을 돌보고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 것, 끊임없이 다른 이를 위해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 삶이 마냥 편하고 좋을 수만은 없습니다. 그런 외적인 환경 때문이든 아니면 자신의 내적인 약함 때문이든, 그래서 때론 지치기도 하고 어려움과 한계들을 느끼게 되는 상황이 다양하게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사 드리는 것을 힘들어 하거나 최대한 안 하려고 하고 또 고해성사나 다른 면담의 기회들을 귀찮아하고 피한다면, 사제로 사는 의미가 있을까요? 사제로서 성무를 수행하며 살아가는 것에서 기쁨을 얻지 못하고, 그래서 다른 인간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것들 안에서 기쁨을 얻으려고만 한다면, 사제로 살아갈 이유가 있을까요? 그렇게 사는 삶이 행복할까요?
신학교에서 지내는 요즈음에 제 모습에 대해 말씀드렸던 것 기억하시나요? 사제 양성에 도움이 되기 위해 신학교에 있다는 양성자로서의 정체성과 소명에 대해 동의는 하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그것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기에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고 마음도 무거워졌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나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에 대해서 한 번 깨달았다고 해서 충분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처하는 현실은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그 안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나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를 계속 성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성찰이 이루어지는 자리, 그리고 그럼으로써 지금 여기에서의 내 삶의 의미를 더 깊이하고 또 그렇게 살아가는 기쁨을 얻게 되는 자리가 바로 하느님과의 만남인 기도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머무르면서 가만히 되뇌어 보세요.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가?’ 그리고 하느님의 영께서 일러주시는 말씀을 가만히 들어보세요. 그 말씀이 우리의 삶을 비추어줄 것입니다.
“당신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입니다.”(시편 119,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