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소나기 오는 날>/구연식
오늘은 음력 유월 보름날로 부모님 산소에 삭망(朔望) 성묘 가는 날이다. 상석(床石) 위에 두 분께 소주 한 잔씩 부어 놓고 절을 드렸다. 숲 속의 떡갈나무 잎에서 후드득 뚝 후드득 뚝 포도 알 크기의 소나기가 떨어진다. 부모님은 어서 집으로 내려가란다. 다행히 우산을 가지고 올라왔기에 부모님 산소를 손으로 짚으면서 안심시켜 드렸다.
조금 있으니 산소 앞 비닐 멀칭을 씌운 드넓은 밭 위에 어느 전선의 따발총처럼 소나기를 퍼붓는다. 순식간에 산속 전체는 전쟁터 같은 아수라장으로 변한다. 다시 부모님이 뒤에서 밀면서 재차 빨리 내려가라고 성화를 댄다. 부모는 자식이 나이를 많이 먹고 늙었어도 어린애처럼 측은한 모양이다. 소나기에 흠뻑 젖어 있는 부모님 산소를 홀로 두고 워낙 소나기가 세차게 내려 우산은 쓰나 마나 소매와 바짓가랑이는 물을 안 짠 빨래처럼 빗물에 흥건히 젖어 내려왔다.
농경문화가 근본이었던 우리 민족에게는 소나기는 갑작스러운 불청객 같지만, 싫지 않은 죽마고우 같은 오랜 친구이다.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하면 아버지는 천수답 물꼬를 보러 나가신다. 도롱이를 어깨에 걸쳐 둘러 입고 밀짚모자를 쓰고 삽을 들고 비가 오면 담뱃불이 꺼질 테지만 꼭 담뱃불을 붙여 물고 나가신다. 아버지의 외출에는 담배가 갖추어야 할 구색 품목 중에 필수이다.
논밭을 둘러본 아버지는 마루에 걸터앉아 늦은 점심을 드신다. 논 물꼬에서 슬그머니 올라온 거머리가 몸주체를 못 할 정도로 언제 피를 채웠는지 징그럽고 통통한 거머리 피 자루가 아버지 장딴지에 붙어있다. 거머리 빨판은 흡인력이 강해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그 상처에 삐비 꽃을 훑어다가 지혈제로 붙여둔다.
소나기가 그치면 먹이 쟁탈전도 벌어진다. 마당에는 지열을 갑자기 식혀서인지 여기저기 김이 모락모락 올라온다. 땅속에서 더위에 숨통이 막혔는지 지렁이는 고개를 쭉 내밀더니 그대로 기어 나온다. 온몸을 흙탕물 속에서 팔딱거리며 머드 팩 놀이에 정신이 나갔다. 그것을 본 중병아리가 쪼르르 달려가 잽싸게 낚아채니 부리 끝에 매달린 지렁이는 비비 꼬아가며 몸부림을 친다. 옆에서 힐긋 쳐다본 다른 중병아리가 단숨에 빼앗아 고개를 쳐들고 눈을 껌벅거리며 꿀꺽 삼켜버린다.
장독 위를 때리는 소나기는 한바탕 드럼을 연주한다. 장독의 크기와 내용물이 채워져 있는 정도에 따라서 그리고 재질이 옹기냐 쇠붙이냐에 따라서 음색이 다르고 박동 감이 다르게 숨 가쁜 합주가 빗물을 튀기면서 연주된다. 초가지붕 소나기는 비가 그칠 때 처마 끝 여운이 그리도 아름답다. 추녀 끝에 가까스로 매달린 옥구슬들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영롱한 진주알이 되어 반짝거리며 거미줄을 타고 내려오듯 떨어질 때마다 손으로 받아서 보석 상자에 넣어두고 싶다. 연잎과 소나기는 전생에 앙숙인 것 같다. 연잎이 싫다면 하지 말아야 하지 그래도 악착같이 연잎을 괴롭힌다. 연잎은 한 방울도 받지 않고 튕겨버리거나 조금만 채워져도 그냥 쏟아 버린다. 사실 연은 잎에서는 싫어해도 뿌리는 소나기를 무척 좋아한단다.
현대인들은 최첨단의 문명 속에서 살지만 때로는 태고의 자연현상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소나기는 우주로 날아가는 불덩이 같은 누리호 이마의 열을 식혀준다. 몇 백 년 동안 민족의 정서를 가득 품고 살아온 소나무 가지와 뿌리에도 링거액 같은 생명수를 준다. 산등성에 엎드려 조국의 산하를 지켜온 바위에 찰싹 붙어 수많은 별을 같이 세면서 목이 말라버린 이끼에게도 목축임을 주어 생명을 연장케 한다. 소나기는 무엇을 잊었는지 가던 길 뒤돌아오더니 마지막 한 방울을 청개구리에게 피부 보습 마사지를 시키고 간다. 찰나의 시간에 영겁의 업무를 무사히 끝낸 표시로 소나기는 하늘과 땅에서 가장 아름답고 약속의 표시 무지개로 마무리한다.
이처럼 소나기는 불한당(不汗黨)처럼 떼 지어 와서 피해보다는 생명 보존의 고마움을 주고 사라진다. 소나기는 언제나 예비적 신호를 주어 대비하는 시간을 예고하여 피해를 최소화한다. 멀쩡한 하늘에서 쏟아지는 소나기는 없다. 수직으로 발달한 웅대하고 짙은 적란운(積亂雲)으로 태양을 가리고 순식간에 세상을 온통 칠흑 같은 한밤중으로 만들어 놓는다. 그래도 소나기를 피할 생각을 무춤거리면 천지를 개벽이라도 할 것처럼 천둥과 번개로 하늘이 찢어질 듯 불꽃을 튀기면서 호령하여 소나기가 금방 떨어짐을 최후로 경고한다. 처음에는 큰 빗 방을 한 방울씩 떨어뜨리다가 순식간에 퍼붓고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해님까지 가세하여 시침을 뗀다. 그래서 혹자는 소나기가 변덕스러워 여우비라고도 한다.
소나기가 온종일 세상에 내린다면 진짜 불한당 같아서 살아남을 생명체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소나기는 황소 등허리에도 갈라져서 내리는 국지성(局地性)이며 남의 집 추녀 끝에서 잠깐 피해 갈 수 있는 시간이니 위력은 있으나 피해 정도는 미미하다. 누구나 소나기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 하나쯤은 동화책의 삽화처럼 남아있을 것이다.
아파트 북쪽 창은 내 고향 미륵산 자락을 언제나 사진액자처럼 보여 준다. 저곳 소나기 겐 하늘 아래 황순원 님의 「소나기」 속의 소녀와 소년이 되어 토란 잎 우산을 받고 소나기에 흠뻑 젖은 그 옛날로 되돌아가 보고 싶다. (2022.7.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