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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격월간평
토포필리아적 욕망 공간과 휴머니즘 철학의 기초
- 수필시대 11,12월호를 읽고 -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작가에게 자연환경은 단순한 자원을 넘어 깊은 정과 사랑의 대상이자 기쁨과 확실성의 원천이다. 인간의 장소에 대한 이러한 태도를 ‘토포필리아’라고 하는데, 평자가 수필 속에서 찾으려는 궁극적인 것은 “환경과 그에 대한 인간의 세계관이 무엇에 의해 연결되고 있는가 ”하는 관계론적 사고의 존재 여부다. 작품에서 묘사되는 장소와 공간에 대하여 공간애를 갖는가. 소위, 공간자각인 토포필리아(Topophilla)를 가지는가 여부에 따라 대상에 대한 정서의 스펙트럼이 달라진다. 일반적으로 삶의 터전은 애착이 가는 공간에 속한다. 같은 물건이라도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에 따라 반응이 다르다. 공간자각에 따라 의미적 경험이 일어나기도 하고 사실적 차원 경험이 일어나기도 한다.
원심심과 구심력의 시스템 작용 속에서 존재하는 시공이 우리가 사는 곳이다. 대상과 우주와 삶의 삼각구도 속에서 사태를 파악하는 것을 인식이라고 한다면, 자신이 처한 공간에 대한 질문은 사물을 정확하게 조명하고 개성이 있는 관점을 구축하는 행위로서 사태로 현상학적으로 파악하여 해석학의 지평을 넓히는 일이다. 공간성에 따라 소재의 좌표가 달라진다. 초월적 현상학적 주체로서의 다양한 경험은 수필의 질을 좌우한다. 이번 평은 장소애적 욕망 공간이 드러나고, 바이오필리아적인 차원에서 휴머니즘 철학의 기초가 되는 삶을 사랑하는 수필들에 초점을 두었다. 작품은 대단한 수준에 있으나 이런 관점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작품은 아쉽게도 다루지 못하였음을 미리 밝혀둔다.
이가영의<신화를 얘기하다>는 제주에 남아 있는 ‘조천 새곳할망당’에 관한 신화의 유래를 전하면서, 그 내용으로 인간은 신을 두려워하는 존재라는 주제의식을 길어 올린 작품이다. 작가의 말대로 신화는 그 민족과 문화가 형성되는 과정을 자기인식하는 방법으로 탄생한다. 그리고 그 역사시대로 들어가는 동시에 창조를 정지한다. 그래서 신화가 역사와 접속하는 지점에서 신화의 위상이 정해진다. 작가는 발단부에서, 신화가 주목받는 이유로 상상력과 이미지, 스토리를 들고 있다. 이런 삼 요소에 기대어 수필을 스토리텔링식으로 전개하고 있다. 이 수필 속에는 상상력의 근원으로서의 신화, 신화에 대한 놀라움, 신화에 담긴 풍부한 상상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작가의 신화에 대한 생각이 잘 정리되어 있다. 작가는 이런 신화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전반부에 풀어놓고 신화와 가장 관련이 깊은 동물, 뱀에 얽힌 제주 신화를 삽화로 꾸며 스토리 기법으로 한 편의 수필을 생산해냈다. 그리고는 신화는 인류가 최초로 머리에 떠올린 가장 오래된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원형들, 즉 이미지를 포함하고 있다고 하면서, ‘모든 이야기들은 옛날 신화에 이미 다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는 말로 이야기와 신화를 잘 연결했다. 논리성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작가의 제주도 신화는 작가의 공간자각이 빗어낸 욕망 공간이다. 따라서 토포필리아의 정신이 담겨 있다고 하겠다. 올해 세계 7대 경관으로 뽑힌 제주도를 소재로 삼는 것은 시의성 측면에서 매우 바람직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장소애란 특정 장소에 대한 사랑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이런 공간자각이 특히 잘 나타나 있는 것이 이가영의 수필이다. 대개 장소에 관한 정보는 예술작품을 통해 인구에 회자되면 그에 관한 궁금증으로 관광지가 되곤 하는데 수필가의 특수한 감수성으로 칠해진 자연은 평범한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지금도 인기가 많은 제주도는 죽기 전에 한번 보는 것이 평생의 원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섬을 하루 이틀에 다 볼 수 있는 일이 아니어서 제주행을 가슴에 품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이러한 사정으로 볼 때 제주에 대한 신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신화를 통해 상상력이란 보물을 만나게 해준다는 점에서 수필로서의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문학의 존재 가치는 인간의 삶과 함께 빛난다. 문학이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은 결국 문학은 사회 현실 속 생활인들의 공유체험을 형상화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인간구원에 기여해야 한다. 이 작품은 이런 문학의 요구에 부응하는 작품이다.
안옥수의 <나무와 종부>는 나무를 종부와 비교해서 운명적으로 연결시킨 관계론적 사고와 탁월한 인식이 감동을 주게 하는 요인으로 작동한다. 작가는 기자와 종부의 인터뷰에서 착안하여 제재와 주제의 상관화에 성공한다. ‘종부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작가는 어떤 답이 나올까 호기심이 일어 주의를 집중한다. ‘운명이지요.’라고 하는 종부의 답을 듣자마자, 작가의 시선은 다시 나무를 향한다. 나무도 종부처럼 운명적으로 한 곳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기에 달 밝은 밤이나 어두운 밤이나, 부슬비 내리는 날이나, 함박눈이 내리는 날에도 고독을 씹고 서 있는 것은 아닐까 하며 한 곳에 머물 수밖에 없는 운명을 운명공동체로 인식한다. 나무에 포커스를 두면서 ‘바람친구’나 ‘씨앗자손’ 등의 언어로 해서 나무의 공간을 세상사와 견주어 상상적으로 채색하는 모습이 문학성을 더해주었다. 안옥수 수필의 특징 중 하나는 서정성이다. 그의 글에는 한결같이 다정다감한 인정이 녹아 있다. 요컨대 화자의 인정이 지향하는 욕망 공간은 ‘숲'이다. '숲'은 토포필리아(topo philia)와 바이오 필리아(bio philia)의 접점이다. 나무가 자라는 공간이야 말로 우리가 머무르고 싶어 하는 공간이다. 자연을 찬미하고 명상하는 이 수필은 작가에게 있어 위안이며 고독을 치유하는 장소이다. 자연과의 소통에서 작가는 모든 것을 잊고 모든 것을 가진 듯이 행복해 한다. 유쾌하고 기쁘며 평온하고 화목하다. 이러한 연유로 작가가 찾는 숲은 신록으로 인해 애착을 갖게 된 장소로서 치유의 토포필리아(Topo philia)로 거듭난다.
장소애를 표현하는 방법과 정서도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 나무가 살고 있는 숲이나 산에 대한 사랑도 토포필리아의 소산이다. 머무르지 않고 드디어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 대한 장소애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를 위요한 자연에 대한 공간애를 발휘하였다. 이제 조금 있으면 꽃 피고 새 우는 봄이 와서 나들이하기 좋은 시절이다. 좁은 아파트에 갇혀 쫓기듯 바쁜 일상을 사는 요즘 사람들에게 장소애는 더욱 절실하다. 그래서 세간에는 이런 저런 장소애가 넘쳐난다. 특히 지자제 실시 이후로 장소애는 상업화와 관변에 휘둘리면서 오로지 소비에만 동원되고 있는 듯하다. 우리시대의 진솔한 정서가 녹아 있는 장소로서 그 곳을 아끼고 가꾸는 장소애가 아쉬운 시점이다. 나무가 우리에게 베풀어 주는 고마움은 인정하나 작가는 움직이지 못하고 한 자리를 지키는 나무는 되고 싶지 않다고 한다. 바람 부는 날 바람 따라 새로운 곳을 가보고 싶고, 나비 훨훨 나는 날 나비 따라 새로운 향내 맡고 싶고, 어린왕자의 고향인 작은 별에 가서 바오밥나무도 보고 싶다는 소망에는 한국인으로서 삼천리 금수강산을 누리고 싶은 욕망이 드러나고, 새로운 곳에 대한 공간애가 풍겨 나온다.
서양순은 <인동초>를 통해서 고난을 극복한 사람들에 대한 아낌없는 애정을 보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우리 역사에까지 의미를 보탠다. 인동초가 꽃을 피우지 않았다면 많은 사람들의 애정을 받을 수 있었을까라는 가정적 의문을 통해서 인동초 못지않게 고난을 이겨내고 있는 사람들에 주목한다. 추위를 견디어 내는 사람,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 권력에 시달리는 사람, 정적으로부터 박해를 받는 사람들의 인간 승리에 작가는 큰 박수를 보내면서, 주어에 복수형 ‘우리’를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주관적 생각을 객관화하려 한다. 작가는 불치의 병을 극복하고 승리하는 사람, 권력이나 정적의 탄압을 극복하고 승리를 쟁취한 사람에게도 인동초에 보내는 애정을 아낌없이 보내고 있다. 그리고는 “나는 인동초를 볼 때면 우리 역사를 생각해 본다.”는 전제를 내세우고, 초점을 개별적인 차원에서 민족적인 차원으로, 개인적 영역에서 공적 영역으로 확대해 가는 전략으로 수필의 공간 확장을 꾀한다.
삶에 대한 사랑은 biophilia라 한다. 누구나 살려하고 존재를 유지하려고 한다. 죽음을 사랑하는 정위와 반대되는 것이 삶을 사랑하는 정위이다. 그 본질은 죽음을 사랑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삶을 사랑하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사랑과 마찬가지로 삶에 대한 사랑도 단일한 특징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정위, 곧 존재 방식 전체를 나타낸다. 그것은 한 인간의 육체가 겪는 과정, 감정, 사상, 몸짓에서 드러난다. 이 정위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모든 유기체의 살려고 하는 경향에서 잘 드러난다. 수많은 철학자들이 "살려고 하고 그 존재를 유지하려 하는 것은 모든 생명체의 고유한 성질"이라고 가정한다. 이러한 노력은 모든 생물의 본질이다. 인동초는 주변에 있는 모든 생명체들의 생명력을 표방한다. 빛을 받아 살기 위해 단단한 돌멩이 틈을 뚫고 나오는 작은 풀들에게서,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는 끝까지 맹렬하게 싸우는 들짐승에게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못할 일이 없는 사람에게서까지 생명을 유지하고 죽음과 맞서 싸우려는 경향은 삶을 사랑하는 정위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이며 모든 생명체들에게 공통되는 것으로써, 이 작품에서는 인동초로 형상화되어 있다. 생명을 유지하고 고난과 투쟁하려는 생명성을 삶에 대한 충동으로 승화시켜내고, 작가는 이런 생명에의 지향성을 인동초로 잘 형상화하였다.
김애자의 <알파를 만드는 사람들>역시 삶을 사랑하는 바이오필리아의 정신이 가득 담긴 좋은 수필이다. 그녀는 답사마니아인 남편을 모이는 장소까지 데려다 주고 오면서 공동체적인 의식으로 정의를 실천하는 소시민들, 관심을 가지고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은 아름다운 가슴의 소유자들을 보면서 우리 사회의 알파가 누구인가를 증명하고자 한다. 어린 동생들을 안아 버스에 먼저 태우는 학생이 알파이고, 임산부와 변기에 부딪치는 젊은이들의 오줌발이 이 나라의 희망이라고 믿는 어르신들의 덕성이 알파이고, 길에 떨어진 돌을 굴려 풀 섶으로 밀어 놓은 노인의 손길이 알파라는 진술에는 그녀의 사실적 체험이 의미적 경험으로 투영되고 있어 강한 호소력을 갖는다. 밤새도록 연구실에 불을 켜 놓고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젊은 과학자들이 이 나라를 선진국 대열에 올려놓는 진짜 엘리트들이고 알파라는 그녀의 확신에서 삶에 대한 사랑이 충분히 전개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삶을 충분히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삶과 성장의 과정에 매혹된다. 그는 현상을 유지하기보다는 오히려 건설하려고 한다. 그는 경탄할 줄 알기에 작은 움직임에서 새로운 것을 보고자 한다. 그녀는 삶의 모험을 사랑한다. 그가 삶에 접근하는 방법은 기계적이지 않고 기능적이다. 그녀는 부분만을 보지 않고 전체를 보며, 요약된 것보다는 구조적인 것을 본다. 그녀는 단순한 흥분보다는 삶과 삶에 등장하는 모든 것을 즐긴다. 다음의 인용문을 읽어 보자.
“나이 들어가면서 아이들이 더 사랑스러워 집니다. 가끔 목욕탕에서 임신한 여성들을 보면 한 생명이 자궁 안에서 자라고 있다는 감격으로 미소를 짓게 됩니다. 배꼽이 불거져 나온 만삭의 배가 아름다워 나도 모르게 곁눈질을 하게 됩니다. 젖꼭지 언저리로 뚜렷하게 익어가는 오디 빛 꽃판도, 꽃판을 둘러싸고 돋아나는 꽃술 같은 작디작은 돌기들까지도 다 경이롭기만 합니다. 멈추었던 차에 시동을 걸었습니다. 문득 한 어른신이 보내준 편지 한 소절이 생각났습니다.
“길에서 배부른 임산부를 보거나 아이들을 만나면 나는 행복하답니다.
“오 한 생명이 태어나겠구나.”
오냐, 너희들이 꽃 중의 꽃이구나.”
지하철 공중변소 안에서 젊은이가 황급하게 뛰어 들어와 시원하게 내 쏟는 오줌발이 변기에 부딪치는 소리를 들을 때도
“그래, 저 소리가 이 나라의 희망이구나.”
이렇게 혼자 중얼거리다보면 우리나라의 미래가 밝아 보인다 했습니다.
오늘 아침엔 저도 노란 버스를 타고 간 아이들에게서 탱탱하게 부푼 희망의 꽃망울 몇 개를 선물로 받아들고 돌아왔습니다. 돌아와 책상 앞에 앉으니 세상의 광명은 저 높은 엘리트들이 살고 있는데 있지 않다는 어느 시인의 말이 가슴에 꽂힙니다.“
위의 인용 예문은 깔끔한 언어적 향취가 빛난다, 이런 서정이 우리 수필을 튼튼히 지켜내는 힘이다. 긍정의 논리로 알파의 특성을 열거하던 작가는 메시지가 부족했는지 다시 부정의 지성으로 알파의 대립항에 비판을 가하면서 수필의 주제의식을 더욱 구체화한다. “세상의 광명은 저 높은 엘리트들이 살고 있는 데 있지 않습니다. 독선과 아집, 편협한 사고, 가짜학벌로 짜 맞춘 약력으로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이나, 가진 자들이 내 세우는 위선은 결코 알파를 만들지 못합니다. 내가 일등 정치인이라고 자칭하는 이들이나, 불행을 위장하여 인기를 얻으려는 어리석은 꼼수에 제가 걸려들어 추락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바람구멍 하나가 뻥 뚫리는 허탈감을 느꼈습니다. 이제는 가면을 쓴 연기자들이나 말 잘하는 다변가보다는 소가 먹은 풀을 되새김질을 하듯 속으로 뜻을 헤아리고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사를 밝히는 사람이 더 좋습니다. 우리들에게 희망을 주는 이들은 조금은 어눌하더라도 고진배기이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진술을 열거법으로 놓고,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말이 찡한 울림으로 다가옵니다.’는 속담으로 주제의식의 의미화를 도모하여 강한 공감을 자아내게 한다. 대상에 대해 인정을 흘리는 일, 그리움을 갖는 일, 부정의 지성으로 사회를 바로 세우고자 하는 일, 모두 서정의 발로요, 작가의 의무다. 수필미학은 화려한 문장이나 수사에 있지 않고 대상을 너그럽게 바라보는 관조의 눈 속에 배어있는 따스한 정에서 나온다는 것을 이 수필은 잘 보여주고 있다.
고동주의 <지나친 욕심의 끄트머리>는 삶을 사랑하는 윤리적 특성을 보이는 수필이다. 성찰의 삶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돋보인다. 삶을 사랑하는 윤리는 스스로 선과 악의 원리를 갖는다. 과유불급이란 중용의 미학을 다양한 예화를 통해 구축하고 있어 감동을 준다. 민선 시장을 하면서 겪는 리얼한 삶의 현장은 욕심의 끄트머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가리킨다. 60만원의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하여 10년 동안 투쟁했던 노인도 30억의 재산을 한 순간에 날려 버릴 수 있다는 사례를 보고, 작가는 지나친 욕심의 끄트머리를 확인한다. 필요 이상의 욕심일랑 제발 적당한 시기에 내려놓아야 한다는 깨달음과 반성적 성찰은 삶을 사랑하는 방법을 일러준다. 삶을 사랑하는 사람의 양심은 악을 삼가고 선을 행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그것은 프로이트가 말하는 초자아(superego), 즉 덕을 위해 자신에게 가학증을 발휘하는 엄격한 공사 감독 같은 초자아는 아니다. 삶을 사랑하는 양심의 동기는 삶과 기쁨에 매혹되는 데 있으며, 그 도덕적 노력은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면을 강화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결국엔 자기혐오와 슬픔의 일면에 지나지 않을 뉘우침이나 자책감 속에서 살지 않는다. 재빨리 삶으로 돌아와 선을 행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교훈을 삽화를 통해 감동적으로 전하고 있다.
천년이나 살 것처럼 착각하고 재산을 증식하기 위하여 평생토록 악착같이 달려온 노인의 기막힌 낭패 위에다 작가는 미국의 실업가 록펠러의 모습을 오버랩시킨다. 부자가 되는데 귀재였던 록펠러는 53세에 불치의 병에 걸려 의사로부터 1년 이상 살 수 없다는 진단을 받는다. 마지막 검진을 받으러 가는 날,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 는 글을 보는 순간 마음 속에 전율이 흘렀다. 당장 입원비를 마련하지 못한 환자인 딸을 입원시키고자 하는 여인의 입원비를 지불한다. ‘살아가면서 이렇게 행복한 삶이 있는 줄 몰랐다.’고 후일 자서전에 이 대목의 기록을 남겼다. 작가는 록펠러는 그때부터 자선사업을 대대적으로 진행하느라 부지런히 날뛰는 동안 시한부 병은 사라져버려 록펠러는 98세까지 살았다는 이야기를 통해 부지런히 베풀고 나누며 살다보면 생명까지도 이어주는 행복한 기적이 온다는 바이오필리아적 주제의식을 이 수필 속에서 건져낸다. 선은 삶에 이바지하는 모든 것이고, 악은 죽음에 이바지하는 모든 것이다. 선은 삶을 존중하는 것, 삶과 성장과 전개를 드높이는 모든 것이다. 악은 삶을 질식시키고 삶을 옹색하게 만들고 삶을 조각나게 하는 모든 것이다. 기쁨은 덕이고 슬픔은 죄라는 논리로 삶을 사랑하는 윤리의 기준을 예화와 삽화를 통해 주제의식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고 하겠다.
인간이 사는 공간과 삶에 대한 애정이 배제된 수필은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다. 수필은 인간을 향한 순수한 애정의 편린이기 때문이다. 록펠러의 예화는 삶을 사랑하는 도덕을 보여주는 놀라운 본보기이다. ‘등이 굽은 나무’나 ‘고진배기’에 대한 가치 부여는 삶의 존중하는 바이오필리아적 정신이다. 쾌락 자체는 악하지 않고 선하다. 반대로 고통 자체는 악이다. 수필가들의 삶에 대한 긍정적 사랑은 여러 휴머니즘적 철학의 기초가 된다. 이러한 철학들은 그 개념적 형태는 다양할지라도 토포필리아의 철학과 같은 혈맥에 속해 있다. 이러한 휴먼 철학에는 건전한 사람은 삶을 사랑하고, 슬픔은 죄고 기쁨은 덕이며, 인간 생애의 목표는 살아 있는 모든 것에 이끌리는 것이며 모든 죽어 있고 기계적인 것을 멀리하는 것이라는 원리가 나타나 있다.
위의 수필 속에서 볼 수 있듯이 바람과 나무가 결합하고 나무와 종부가 합일하며 선행을 통해 성장하려는 성향은 바이오필리아적 특성이다. 우리가 한 작가에게 거는 기대는 현실을 얼마나 리얼하게 그려내느냐 하는 기술적인 문제보다도 삶에 대해 얼마나 깊은 의식을 갖고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 고뇌하며, 나름의 해석을 도출하는 데 있다. 공간애와 생명애는 통합하고 합일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으며, 이질적이고 반대되는 존재와 융합하고 구조적인 방식으로 성장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생명체적 특징의 구현이다. 합일과 통합된 성장이란 모든 생명 과정의 특징이며, 세포뿐만 아니라 감정과 사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자연은 삶들로 하여금 두 극이 결합될 때 가장 큰 즐거움을 느끼도록 만든 것 같다. 공간과 그 공간을 향유하는 인간의 결합으로 새로운 존재가 창조되듯, 수필도 그렇게 생성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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