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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거제 어장‧소유권 청원서와, 1861년 표왜선 구조‧호송 과정 장계>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이번 지면에는 1907년 거제도의 어장‧소유권 문제 해결을 위한 「청원서(請願書)」와, 1861년 표류왜선 구조‧호송 과정을 보고한 「장계(狀啓)」 등 2건을 소개하겠다.
먼저 ①「1907년 11월 거제군 어장(漁基)의 소유권 문제 해결 청원서(請願書)」는 1907년 대한제국기 거제도 지역 어장(漁基)의 소유권이 궁내부로부터 의친왕궁(義親王宮) 소속으로 옮겨가면서 민간의 사유어장(民私條)까지 궁궐 소속으로 뺏어간다. 그래서 백성들이 억울함을 호소하며, 청원서로 이어진 것이다. 앞서 다른 문건으로 소개한 바가 있지만, 결국 이 문건은 대한제국 말기, 왕실 재산을 확충하려는 정책과 그 과정에서 발생한 관리들의 부패, 그리고 이에 굴하지 않고 문서(문권)를 근거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했던 연해 어민들의 능동적인 대응을 잘 보여준다. 게다가 당시 구한말(19세기 후반~20세기 초)에는 일본 어민들의 조선 진출로 인해 대한제국의 어업권 침탈, 경제적 수탈, 그리고 영토 주권 위협이라는 심각한 피해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다음으로 ②「1861년 1월20일 표류왜선(漂倭船) 구조와 호송 과정 보고 장계(狀啓)」는 19세기 거제도 해안 지역에서 발생한 일본 선박(왜선)의 표류와 구조, 그리고 이에 대한 지방관들의 보고 과정을 담은 문건이다. 당시 일본 선박 2척이 거제도 옥포 인근 해상에서 표류하다가 조선 수군에 의해 발견되어 안전하게 항구로 예인된다. 거제부사(정제민)를 대신해 거제 관아의 좌수 윤주백이 도착하였고 옥포왜학(통역관) 박영환, 통사 하치윤 등과 함께 일본인들을 심문(問情, 조사)하였다. 통행증인 노인(路引), 사신 편지, 조선 역관의 수본(보고서) 등을 소지하여 불법 침입이 아닌 공식적인 이동 중이었음을 확인하였다. 또 일본인들이 말하길 "조선의 표류민 배 1척이 현재 대마도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이 기록은 조선시대 교린(交隣) 정책에 따른 표류민 보호 절차를 잘 보여준다. 거제 옥포만호 → 가덕첨사 → 다대포첨사 → 부산첨사(왜관)로 이어지는 왜선 인계과정의 긴박한 군사망을 확인할 수 있다.
○ [표류왜선 왜관 인계 및 송환] 조선시대에는 표류 왜선(일본 선박)에 대한 구호 조치와 더불어 부산 초량왜관을 통한 송환 과정은 양국 간의 신의와 인도주의를 바탕으로 한 중요한 외교 절차였다. 조선은 '유원지의(柔遠之義) 즉, ‘멀리서 온 손님을 부드럽게 대접한다’라는 원칙에 따라 표류해 온 왜인들을 우대했다. 물론 우리 표류 선박도 상호 교린의 원칙에 따라 똑같이 구호를 받으며 돌아왔다.
왜선이 제일 먼저 표착(漂着, 표류하다 도착한 곳)한 지역(주로 경상도 해안 등)의 지방관이 즉시 표류민을 수용하고 안전한 곳에 머물게 했다. 그리고 표류민들에게 의복과 식량을 넉넉히 지급하여 치료하고 보호했다. 이어 통역관을 통해 표류 경위와 목적을 조사(問情)하여 해난 사고임을 확인했다. 만일 사망자가 있을 경우 매장해 주고, 표류선은 수리하거나 새로운 배를 제공하기도 했다. 공식적인 일본과의 외교 창구이자, 관사(館舍)인 왜관(倭館)으로 인계하여 일본(대마도)로 송환하도록 조치했다. 그래서 표착한 곳의 지방관은 표류민을 부산의 왜관까지 안전하게 호송해야 했다. 조선의 동래부사와 왜관의 관수(일본 측 책임자)가 서계(외교 문서)를 교환하며 표류민을 공식적으로 인계‧인수했다. 왜관에 머물던 표류민은 대마도에서 온 배를 타고 일본으로 귀국했다. 18세기 이후에는 표류민 인계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복잡한 절차를 대폭 줄여 신속한 송환을 도모하기도 했다. 조선은 표류한 왜인들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고, 초량 왜관을 통해 체계적으로 구호하고 안전하게 송환함으로써 대일 외교 관계의 안정성을 유지했다.
1) 「1907년 11월 거제군 어장(漁基)의 소유권 문제 해결 청원서(請願書)」
이 청원서는 1906년(광무 10년) 11월, 거제군 주민들이 거제 지역 어장(漁基)의 소유권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대한제국 재무 행정 기관인 경리원(經理院)에 제출한 문서다. 당시 백성들이 관청의 '떠넘기기식 행정'에 얼마나 고통받았는지, 또 절박한 심정과 행정 체계가 잘 보여주는 문서다.
내용인즉, 조정에서 거제군의 모든 어장을 의친왕궁(義親王宮) 소속으로 옮겼다는 지령을 내렸다. 이에 주민들이 반박한다. 거제 어장 중 '진상(임금에게 바치는 용도)' 어장은 5곳뿐이며, 나머지는 모두 백성들의 사유어장(民私條)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작년에 이미 궁내부로부터 민간 소유임을 인정받는 완문(完文, 공식 확인서)을 발급받았는데, 왜 이제 와서 다시 궁궐 소속으로 뺏어가느냐고 항변한다. 다른 군의 사유 어장들은 조사 후 다시 민간에 돌려주면서, 왜 유독 거제군만 이미 돌려준 어장을 다시 회수하여 백성들을 절망에 빠뜨리느냐며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결과(지령)] 그러나 경리원 대신의 답변은 냉담했다. "이미 의친왕궁 소속으로 정해졌으니, 해당 궁(義親王宮)에 가서 직접 말하라"며 책임을 회피하는 지시를 내렸다.
이 문서는 대한제국 말기, 황실 재산을 관리하던 기관들이 백성들의 사유 재산을 궁결(宮結)이나 궁장토로 편입시키려 했던 수탈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 특히 거제 지역 어업권이 당시 경제적으로 큰 가치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 덧붙여 이번 「1907년 11월 청원서(請願書)」는 발신자가 거제(巨濟)의 윤영우(尹永禹), 옥선환(玉宣煥), 윤영엽(尹永燁) 등(等)이고 수신자는 경리원경(經理院卿)이며, 출전은 『각사등록(各司謄錄)』과 『경상남북도각군소장(慶尙南北道各郡訴狀)』이다.
*「1907년 11월 거제군 어장(漁基)의 소유권 문제 해결 청원서(請願書)」*
경상남도 거제군 주민 윤영우 등의 청원서. 청원인 : 경남 거제군 주민 윤영우, 옥선환, 윤영엽 등. 수신 : 경리원 대신(經理院 大臣) 각하.
*[청원 내용] 본 군의 어장(漁基) 실태에 대해서는 이미 이전의 보고서에서 상세히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런데 군의 회신 지령을 보니, "거제군의 어장 전부를 이미 의친왕궁(義親王宮)으로 이속(소유권 이전)시켰다"고 하셨습니다.
본 군의 어장 중에는 임금님께 진상하는 용도의 어장이 5곳이 있고, 그 나머지는 모두 백성들의 사유지(民私條)입니다. 이것은 백성들이 생계를 유지하는 소중한 자산입니다. 지금 "전부"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 진상용 어장 5곳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백성들의 사유지까지 합쳐서 전부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백성들의 사유 어장에 대해서는 작년에 황제의 칙교(명령)를 받들어, 궁내부(宮內府)로부터 완문(完文, 공식 소유 인정 문서)을 작성하여 민간에 돌려주라는 처분을 받은 바 있습니다. 문서상에도 분명히 돌려준 것으로 구분되어 기록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지금에 와서 다른 군의 사유 어장들은 문서를 조사하여 모두 민간에 돌려주면서, 유독 우리 거제군만 이미 돌려주었던 어장을 다시 궁궐 소속으로 옮기시는 것입니까? 이는 백성들의 희망을 끊어놓는 일입니다. 가련한 온 군의 만백성들이 죽어서도 원한이 남을 것이니, 부디 굽어살피시어 처분해 주시기를 엎드려 빕니다. 광무 10년(1906년) 11월 일.
거제군 윤영우 등이 청원함. 다른 군의 사유 어장은 조사하여 민간에 돌려주면서, 본 군만 독단적으로 궁궐 소속으로 처분한 것에 대해 항의함.
*[지령(답변)] 이미 의친왕궁 소속으로 결정되었으니, 해당 궁(의친왕궁)에 가서 직접 말하도록 하라. 광무 10년 11월 12일.
[慶尙南道巨濟郡居民〈請願人〉尹永禹, 玉宣煥, 尹永燁等.
右請願事段, 本郡漁基事實은 已悉於前呈中이온바 郡報指令內, 巨濟漁基全部을 業已移屬于義親王宮事이다온 本郡漁基에 有進上條五處이고 其外 盡是民私條, 而民生賴業之物리오니 今謂全部者 以進上條五處而謂全部乎잇가? 竝民私條而謂全部乎잇가? 民私條段은 在於昨年奉承勅敎하옵셔 自宮內府롭셔 成完文還出給民間하셔시즉 文簿上에 必有出給樣으로 分揀이옵거 忽於今者에 他郡漁條 調査文蹟야 盡爲出給, 而獨於本郡야 前已出給之漁條를 還爲移屬하시와 以絶民望즉 哀此全郡萬姓이 死有餘冤이온니 萬加洞燭處分하시물 伏祝. 光武十年十一月 日. 經理院大臣閣下.
摘槩, 巨濟郡尹永禹等請願, 他郡私條漁基, 調査出給, 本郡獨爲屬宮處分事.
指令, 旣屬于義親王宮니 往呈于該宮 事. 光武十年十一月十二日]
2) 「1861년 1월20일 표왜선 구조와 호송 과정 보고 장계(狀啓)」
이번 장계(狀啓)는 조선후기(19세기) 거제도 해안 지역에서 발생한 일본 선박(왜선)의 표류와 구조, 그리고 이에 대한 지방관들의 보고 과정을 담은 공문서(치통)의 기록이다. 조선시대 경상도 연안(다대포, 가덕도, 거제도 옥포 등)에서 발생한 왜비선(倭飛船, 일본의 빠른 배) 2척의 이동과 그에 따른 호송 과정을 기록한 공문서(치통 및 수본)다. 또한 이 문서는 함풍 11년(1861년, 철종 12년) 1월 20일에 작성된 보고서로, 표류했다가 구제된 조선인들과 일본 배(왜비선)의 귀환 일정 및 관련 서류 제출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문서는 표류민 송환이라는 외교적 사안이 ‘대마도에서의 보호 → 조선 연안 도착 → 각 진영의 호송 → 왜관 인계 → 조정 보고’라는 체계적인 시스템을 통해 완료되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내용인즉 표왜선 발생과 구조 시기는 1861년 1월 12일~16일 사이이고 부산첨사 신태선, 다대포첨사 정선용, 옥포만호 김한순, 거제부사 정제민 등이 구조 호송과정에 참여했다. 당시 일본 선박 2척이 거제도 옥포 인근 해상에서 표류하다가 조선 수군에 의해 발견되어 안전하게 항구로 예인된 사건이다.
*구조 경과를 날짜별로 살펴보자. 12일 유시(오후 5~7시) 정체를 알 수 없는 배 2척이 옥포 앞바다에 나타남. 12일 술시(오후 7~9시) 옥포만호 김한순이 배를 타고 나가 확인하니 일본 소선(小船)이었음. 끌어오려 했으나 바람이 역풍이고 밤이 어두워 인근에서 밤을 지샘. 13일 사시(오전 9~11시) 옥포 강구(입구)에 안전하게 정박시키고 수호함. 13일 유시(오후 5~7시) 거제부사(정제민)를 대신해 거제 관아의 좌수 윤주백이 도착. 왜학(통역관) 박영환, 통사 하치윤 등과 함께 일본인들을 심문(問情, 조사)함.
*문정(심문) 결과, 승선 인원은 두왜(우두머리) 2명, 격왜(사공) 10명, 교대를 위해 가는 관리(금도왜)와 하인 등 총 20여 명이 나누어 타고 있었고 소지 물품으로는 통행증인 노인(路引), 부산 왜관의 관리(관수대관)에게 가는 사신 편지, 조선 역관의 수본(보고서) 등을 소지했다.(즉, 불법 침입이 아닌 공식적인 이동 중이었음을 확인) 표류 원인은 12일 오전 9~11시경 대마도(馬島)를 출발해 부산 왜관으로 향하던 중, 수지(水旨, 바닷길의 길목)에서 역풍을 만나 거제도까지 밀려온 것이라 함. 게다가 일본 측은 "조선의 표류민 배 1척이 현재 대마도(부중)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며, 인명 피해 여부나 귀환 시기는 아직 알 수 없다고 말했다.
*[문서의 역사적 의미] 이 기록은 조선시대 교린(交隣) 정책에 따른 표류민 보호 절차를 잘 보여준다. 보고 체계 : 옥포만호 → 가덕첨사 → 다대포첨사 → 부산첨사(동래부)로 이어지는 긴박한 군사 보고망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비록 왜선이라 할지라도 조난 시에는 안전하게 예인하고 식량이나 머물 곳을 제공하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다. 또한 표류 사건을 계기 삼아 일본 측으로부터 대마도에 체류 중인 조선 표류민의 소식을 확인하는 등 정보 교류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요약건대, 옥포에 머물던 왜비선 2척이 3월 15일에 도착했으나 바람 때문에 지체하다가, 16일에 출발하여 여러 진영(조라포 → 천성진 → 다대포)을 거쳐 호송되었다. 역풍과 밤눈 등으로 인해 각 진영의 만호(萬戶)와 군관들이 차례로 인계하며 감시 및 보호(領護)를 맡았다. 17일 밤 부산 다대포에 도착한 후, 19일 오후(미시)에 최종적으로 초량 왜관(館所)에 복귀했다. 훈도 현학로 등이 왜인들을 조사(問情)한 결과, 옥포에서 조사했던 내용과 차이가 없었으며 풍랑으로 표류했던 사정이 확인되었다. 왜인들이 소지했던 노인(路引, 통행증) 2도(왜비선 2척의 통행증)와 역관들의 수본(보고서) 등을 수합하여 상부에 보고(송부)했다. 또 일본 측으로부터 대마도에 조선 표류민이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전달받는다.
이 기록은 조선 시대 왜관(倭館)으로 향하던 일본 선박(왜비선)이 풍랑으로 지체되자, 경상도 연안의 각 진영(옥포, 천성, 다대포 등)에서 차례로 호송하며 보고한 긴박한 상황을 담고 있으며, 당시 조선 수군이 일본 선박의 이동을 얼마나 엄격하게 감시하고 단계별로 인계했는지 보여주는 구체적인 사례다.
* 덧붙여 이번 「1861년 1월20일 표왜선 구조와 호송 과정 보고 장계(狀啓)」는 발신자가 동래부사(東萊府使) 박신규(朴臣圭)이고 수신자는 승정원(承政院)이며, 출전은 『각사등록(各司謄錄)』과 『동래부계록(東萊府啓錄)』이다.
*「1861년 1월20일 표왜선 구조와 지방관의 호송 과정 장계(狀啓)」*
*15일 자시(밤 11시~새벽 1시)에 도착한 부산첨사 신태선의 보고(치통) 내용에 따르면, 다대포첨사 정선용의 보고를 접수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가덕첨사 조형오가 통영(삼도수군통제영)으로 달려가던 중, 가수보장(임시 수비대장) 천성보 만호 조흥신이 긴급히 보고해온 내용을 받았습니다. 그 내용은 옥포만호 김한순의 보고를 접수한 것인데, 내용은 이러합니다.
"이달(1월) 12일 유시(오후 5~7시)에 조선 배인지 왜선인지 판별되지 않는 배 2척이 먼바다에서 나타나 본 포구(옥포) 경계로 떠내려오고 있다는 망군(초소병)의 보고를 받았습니다. 상황을 파악하고자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보니, 그 배 2척은 일본 소선(小船)이었습니다. 같은 날 술시(오후 7~9시)에 만나 배를 끌어오려 하였으나, 바람이 역풍으로 불고 밤이 어두워 해시(밤 9~11시)에 같은 장소에서 닻을 내리고 밤을 지냈습니다. 13일 진시(오전 7~9시)에 배를 끌기 시작하여 사시(오전 9~11시)에 본 포구의 강구에 머물게 하고 수호하고 있습니다."라는 보고를 받았기에 이를 전달합니다.
*16일 유시(오후 5~7시)에 도착한 같은 첨사(부산첨사)의 보고 내용에 따르면, 다대포첨사의 보고를 접수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천성보 만호의 보고를 통해 옥포만호의 보고를 접수하였는데, 내용은 이러합니다.
"본 포구에 머물고 있는 일본 비선(飛船, 빠른 배) 2척에 대하여, 지방관인 거제부사 정제민이 순영(경상감영)으로 달려가던 중이라, 좌수 윤주백이 13일 유시에 도착하였습니다. 본 포구의 왜학(일본어 통역관) 박영환, 통사 하치윤 등과 함께 즉시 사정을 물었습니다(문정).
확인 결과, 일본 섬 안에는 별다른 일이 없으며, 우두머리 왜인 2명, 격왜(사공) 10명, 교대하러 가는 별금도왜 2명, 중금도왜 5명, 소금도왜 3명, 하대왜 5명 등이 나누어 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통행증인 노인(路引) 및 왜관의 관리(관수대관)에게 전하는 사적인 편지, 바다를 건너온 조선 역관의 보고서(수본) 등을 모두 봉하여 가지고 있었습니다.
해당 왜인들이 말하기를, '우리 배 2척은 이달 12일 사시(오전 9~11시)에 대마도를 출발하여 부산 왜관으로 향하다가 수지(바닷길 목)에 이르러 풍세가 불리해 바람을 따라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같은 날 술시에 구조되어 13일 사시에 이곳에 머물게 되었으니, 일행은 모두 무사합니다. 또한 귀국(조선)의 표류민 배 1척이 현재 대마도 관청에 머물고 있는데, 인명의 생사나 언제 돌아올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사정을 물어본 후 거제 좌수는 돌아갔으며, 해당 왜선은 그대로 머물게 하며 수호하고 있습니다."라는 보고를 받았기에 그 연유를 보고합니다.
*18일 인시(凌晨, 새벽 3~5시)에 도착한 동첨사(同僉使)의 통지문에 따르면, 즉시 다대포 첨사의 통지를 접수하였습니다. 가덕도 가파수장(假把守將)인 천성보 만호가 급히 보고하기를, "옥포 만호의 보고를 접수하니, 본포(옥포)에 머물던 왜비선(倭飛船) 2척이 15일에 도착했으나 바람에 막혀 머물다가 16일 사시(오전 9~11시)에 출발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조라포 만호 이응석(李膺奭)이 영호(領護, 거느리고 보호함)하여 차례차례 인계하던 중, 바람과 물길이 모두 거슬러[逆] 술시(저녁 7~9시)에 천성보 경계인 마거리(磨巨里) 앞바다로 옮겨 정박시킨 후 수호하였습니다.
추후 도착한 호송장 천성보 군관 김철동(金哲東)의 보고에 따르면, 마거리에 옮겨 정박한 왜비선 2척은 밤새 아무 탈이 없었고, 17일 오시(오전 11시~오후 1시)에 출발하였습니다. 군관이 영호하여 바다 한가운데[半洋]에 이르렀으나, 맞바람을 만나 곧장 건너가 인계하기가 어려워 그대로 거느리고 와서 술시(저녁 7~9시)에 본진(다대포)에 인계하였습니다. 이에 전선장(戰船將) 박재규(朴在珪)로 하여금 거느리고 앞장서게 하였으나, 바람이 거세고 밤이 어두워 해시(밤 9~11시)에 본진 강구(江口)에 옮겨 정박시키고 수호한다는 내용을 급히 통지해 왔기에 그 연유를 보고합니다.
*19일 해시(밤 9~11시)에 도착한 동첨사의 통지문에 따르면, 즉시 다대포 첨사의 통지를 접수하였습니다. "본진 강구에 정박 중이던 왜비선 2척이 당일 진시(오전 7~9시)에 출발하였기에, 수호장인 전선장으로 하여금 그대로 관소(왜관)까지 호송하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함께 호송한 장수의 보고에 따르면, "해당 선박 2척을 미시(오후 1~3시)에 관소에 인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추후 도착한 훈도(訓導) 현학로(玄學魯)와 별차(別差) 이본수(李本修) 등의 수본(보고서)에 따르면, 왜비선 2척이 왜관으로 돌아오자마자 즉시 문정(問情, 사정을 물음)하니, 타고 있는 왜인의 수와 풍랑을 만나 표류한 사정 등이 옥포 왜학(倭學)의 조사 내용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해당 왜인들이 말하기를, "우리 선박 2척은 이달 16일 사시에 옥포를 출발하여 술시에 천성 경계에 머물렀고, 17일 오시에 출발하여 해시에 다대포에 머물렀으며, 오늘 진시에 출발하여 미시에 왜관에 도착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동 비선이 소지한 노인(路引, 통행증) 2도와 도해역관(渡海譯官)의 수본 15도를 받아 상부로 보내는 일에 관한 수본에 의거하여, 해당 노인 2도와 도해역관이 올린 비변사 및 동래부 수본 각 5도를 보냅니다.
즉시 접수한 도해당상 역관 이철무(李哲懋)와 당하 역관 한기순(韓琦淳) 등의 수본에 따르면, "이전에 전라도 영광에서 표류한 민선 2척과 경상도 흥해에서 표류한 민선 1척 외에 창원 거민 9명이 함께 배 한 척에 탔는데..." (이하 생략)
*경신년(1860년) 11월 21일 오시(오전 11시~오후 1시) 무렵, (조선인들이) 대마도 부중(府中, 도주의 거처가 있는 곳)에 표류하여 도착하였습니다. 이에 (대마도 측에서) 불러다가 사정을 묻고[問情] 술과 밥을 먹인 뒤, 배를 수리하여 조속히 돌려보내겠다는 뜻을 왜인들에게 엄히 지시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11월 26일 만송원(萬松院) 연례, 12월 1일 중연(中宴), 같은 달 15일 이정암(以酊菴) 연례, 같은 달 26일 예단 다례(禮單茶禮)를 차례로 치렀으며, 배를 타고 돌아갈 날짜를 신유년(1861년) 1월 6일로 택정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연유를 급히 통지하기에 보고하는 바입니다.
위 사항에서 언급한 표류했다가 왜관으로 돌아온 왜비선의 노인(路引, 통행증) 2도는 봉인하여 해당 조(예조)에 올리며, 이러한 연유를 갖추어 아뢰오니 차례대로 잘 보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함풍 11년(1861년) 1월 20일.
[本月十五日子時到付釜山僉使申泰善馳通內, 卽接多大浦僉使鄭善容馳通, 則加德僉使趙亨五馳往統營門, 卽到假把守將天城堡萬戶趙興信馳報內, 卽接玉浦萬戶金漢順馳報, 則今月十二日酉時, 朝倭未辨船二隻, 自洋中現形, 漂來于本浦境是如望軍進告據, 探知次, 乘船下海, 則同船二隻, 以倭小船. 同日戌時逢曳之際, 風逆夜暗, 亥時同處下碇經夜. 十三日辰時領曳, 巳時止泊本浦江口守護事馳報據, 馳通爲有等以, 緣由馳通云云是白齊.
十六日酉時到付同僉使馳通內, 卽接多大浦僉使馳通, 則卽到加德假把守將天城堡萬戶馳報內, 卽接玉浦萬戶馳報, 則本浦止泊倭飛船二隻亦中, 地方官巨濟府使鄭濟旻馳往巡營門, 座首尹周伯, 十三日酉時馳到, 與本浦倭學朴英煥, 通事河致潤等, 卽爲問情。則島中別無他事, 而頭倭二人, 格倭十名, 交代次別禁徒倭二人, 中禁徒倭五人, 小禁徒倭三名, 下代倭五名等分騎, 持路引及館守代官倭等了私書, 與渡海譯官手本, 一行私書都封爲有矣. 同倭等言內, 俺等船二隻, 今月十二日巳時, 自馬島發向館所, 及到水旨, 風勢不利, 從風轉漂, 同日戌時逢曳, 十三日巳時, 止泊此處, 而渡海一行, 俱爲安過。貴國漂民船一隻, 又爲留在府中, 人命生死, 出來遲速, 未知是如爲乎等以。問情後, 巨濟座首還歸, 同倭船仍留守護事馳報據, 馳通爲有等以, 緣由馳通云云是白齊.
十八日寅時到付同僉使馳通內, 卽接多大浦僉使馳通, 則卽到加德假把守將天城堡萬戶馳報內, 卽接玉浦萬戶馳報, 則本浦止泊倭飛船二隻, 十五日至, 阻風仍留, 十六日巳時離發, 助羅浦萬戶李膺奭領護, 次次交付之際, 風水俱逆, 戌時天城堡境磨巨里前洋移泊守護是如爲有旀。追到護送將天城堡軍官金哲東馳報內, 磨巨里移泊倭飛船二隻, 無弊經夜, 十七日午時離發, 軍官領護, 及到半洋, 逢風直渡, 勢難交付, 仍爲領來是如, 戌時交付本鎭。故使二戰船將朴在珪, 領護前進, 而風逆夜暗, 亥時移泊本鎭江口守護事, 馳通爲有等以, 緣由馳通云云是白齊.
十九日亥時到付同僉使馳通內, 卽接多大浦僉使馳通, 則本鎭江口移泊倭飛船二隻, 當日辰時離發, 使守護將二戰船將, 仍爲護送館所是如爲有旀。卽到同護送將馳報內, 同船二隻, 未時領付館所是如爲有旀. 追到訓導玄學魯, 別差李本修等手本內, 倭飛船二隻, 回館卽爲問情, 則所騎倭人名數, 逢風漂右事情, 與玉浦倭學問情無異. 而同倭等言內, 俺等船二隻, 今月十六日巳時, 自玉浦離發, 戌時移泊天城境, 十七日午時離發, 亥時移泊多大浦, 今日辰時離發, 未時回館是如爲乎等以。同飛船所持路引二度, 渡海譯官手本十五度, 捧上上送事手本據, 同路引二度, 渡海譯官所呈備邊司·東萊了手本各五度, 輸送爲乎旀。卽接渡海當上譯官李哲懋, 堂下譯官韓琦淳等手本, 則前此全羅道靈光漂民船二隻, 慶尙道興海漂民船一隻外, 昌原居民九名同騎一船,
庚申十一月二十一日午時量, 漂到馬島府中, 故招致問情, 饋給酒飯後, 修改舟楫, 從速出送之意, 倭人處申飭. 而十一月二十六日萬松院宴禮, 十二月初一日中宴, 同月十五日以酊菴宴禮, 同月二十六日禮單茶禮經行, 乘船辛酉正月初六日擇定是如爲有等以, 緣由馳通爲臥乎事爲等如, 馳通爲白有等以. 上項漂右回館倭飛船路引二度, 監封上送于該曹爲白乎旀. 緣由馳啓爲白臥乎事是良厼, 詮次善啓向敎是事. 咸豐十一年正月二十日.]
[주1] 경신년(1860년) & 신유년(1861년) : 문서 작성 시점(함풍 11년)은 신유년 1월이므로, 전년도인 경신년 말에 발생한 표류 사건을 처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주2] 만송원(萬松院)·이정암(以酊菴) : 대마도에 있는 주요 사찰이자 외교적 의례가 행해지던 장소다. 일본 측이 조선 표류민을 송환하기 전 공식적인 절차를 밟았음을 의미한다.
[주3] 노인(路引) 2도 : 앞선 문서에서 언급된 왜비선 2척의 통행증이다. 이 선박들이 공식적인 임무를 띠고 이동했음을 증명하는 서류로, 행정 절차에 따라 예조(該曹)로 보내 기록으로 남긴다.
[주4] 함풍(咸豐) 11년 : 청나라 문종의 연호로, 조선 철종 12년(1861년)에 해당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