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32] 최봉춘(崔奉春) - 일본 개척의 감회 8. 일본에 거물급도 연결되고 - 3
15 그때부터 우리 교회는 완전히 달라졌다. 40명, 50명 되던 식구가 3, 4백 명으로 불어나게 되었으며, 일본 정부에서도 반신반의하면서 주목을 하게 됐다.
16 어떤 지도자는 일본 내의 자유화 물결로 인해 득세한 공산주의, 창가학회 문제에 골치를 앓고 있는 차제에 최고 지도 이념을 갖고 있고, 세계주의 이념을 부르짖는 통일교회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 했다.
17 어느 날 형사가 와서 나의 고향이 어딘가를 묻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시침을 딱 떼고 시가현(滋賀県) 어느 시골로 대었다. 벌써 그들은 4년 동안 나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18 우리를 반대하는 세력을 등에 업고, 경찰은 드디어 1964년 6월 2일 나를 연행하고 말았다. 6월 4일 입국 관리국으로 넘어가 44일의 옥고를 치르게 됐다. 이 기간 중 많은 식구들이 정성 어린 면회를 와서 보는 이로 하여금 경탄과 의아심을 금치 못하게 했다.
19 이때 일본 재계의 거물인 사사가와 료이치(笹川良一)라는 분이 들어오게 됐다. 이 분은 일본 선박회사 총연합회 회장으로 있으며 권세가 당당한 사람이다.
20 이 분이 법무위원장에게 가서 “나는 이미 나이 먹어 일본에 공을 못 세우지만 이 청년은 일본에 와서 청년운동을 하고 일본을 위해 큰일을 하는데 이 청년을 석방해 달라”라고 교섭한 것이다.
21 법무위원장은 “지금 이 청년이 사회에 문제가 되고 있어서 나 혼자 힘으로 힘이 드니 이 청년이 석방된 후 한국에 나갔다 들어오면 영주권을 주겠다”라는 조건을 제시했다.
22 그래서 만 7년 만인 1964년 9월 1일 귀국하였다가 12월 17일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다.
9. 다시 세계복귀선상에
1 1965년 1월 28일에 선생님께서 친히 일본을 방문하셔서 성지택정, 식구 교육 등 유사 이래 볼 수 없었던 하늘의 큰 축복을 내리셨다.
2 나는 선생님의 명령에 의해 3월 16일 천로역정의 일본 선교를 마무리 짓고 다시금 미국 선교의 노정에 올랐다. 이때 선생님의 세계 순회 노정에 동행하면서 놀라운 축복을 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