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는 득, DJ에겐 미안했다” 초판 7만부나 찍은 그 소설
이문열, 시대를 쓰다
관심
17. 소설가의 정치적 발언
사람들은 종종 내게 과분한 수식어를 붙인다. 어떤 홍보 문구들은 낯 뜨거울 정도다. 이야기꾼이라는 말도 내게 친숙한데, 그 호칭을 처음 안긴 사람은 문학평론가 유종호 선생이었다. 선생이 내 동인문학상 수상작품집 『금시조』(1983년)에 붙인 해설에서 ‘능란한 얘기꾼의 솜씨’가 돋보인다고 한 게 시작이었다. 이후 저널리즘이 ‘시대의 이야기꾼’ ‘탁월한 이야기꾼’, 심지어 ‘역사고전 이야기꾼’으로 변주해 받아쓰면서 이야기꾼은 당연한 수식어처럼 나를 따라다녔다.
“이야기꾼 호칭, 기분 나쁜 것 없다”
이야기꾼이라고 해서 기분 나쁠 것은 없었다. 비하의 감정을 담아 부정적으로 사용한다면 모를까. 이야기는 오히려 소설을 포괄하는 더 큰 범주다. 세상에 이야기 아닌 게 있겠나. 처음과 끝이 있고, 그 안에 전개와 반전이 있으면 곧 이야기이고 스토리다. 사람들이 이야기에 매혹되는 이유는, 우리 살이(生)라는 것이 참으로 난해하고 다양할 수밖에 없는데 어떤 사람 이야기를 듣고 거기서 자기 문제의 답이나 해결을 보았다는 기분이 들거나 반대로 어떤 사람은 그래서 틀렸다는 기분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2006년 11월 미국 LA 한국교육원 강연에 앞서 청중석에 앉아 있는 이문열씨. 한국 사회와 거리를 두기 위해 당시 미국에 체류 중이던 이씨는 세 권짜리 장편 『호모 엑세쿠탄스』를 미국에서 완성했다. 중앙포토
그래선지 나는 소설가보다 작가라는 직함이 더 재미있고 편했다. 소설가가 뭔가 직업적인 전문가 같은 느낌이라면, 작가는 언제 어떤 이야기를 해도 되는 약간의 자유와 유보를 가진 직업 같아서였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세상이 참 이야기로 넘친다고 생각하니 내게는 역사든 한 사람의 삶이든 거기서 무얼 줄여버리고 무얼 들어내면 쓸 만한 이야기가 되느냐가 문제였다. 다음에는 이런 이야기 한번 써봐야지 하는 것이 늘 있었다.
1992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장편소설 『오디세이아 서울』(1·2권)은 달랐다. 어쩌다 보니 조선일보의 제안을 뿌리칠 수 없어 갑작스럽게 쓰게 된 작품이었다. 91년 봄에 방랑 시인 김삿갓을 소재로 한 장편 『시인』을 출간한 나는 그해 말까지는 새로운 일에 손대지 않을 작정이었다. 당연히 연재를 위한 사전 구상이나 써보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리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