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의추억 178, 명지 행복마을의 낙조
예배당 건물 너머로 천천히 내려앉는 송년의 시간, 행복마을의 낙조가 특별한 이유는 화려해서가 아니라 담담해서다. 높은 빌딩도, 요란한 장치도 없이 그저 붉게 물든 하늘과 철새, 그리고 하루를 다 보낸 지친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그 속에서 각자의 수고를 노을에 맡긴다. 잘한 일도, 아쉬운 마음도 모두 같은 빛으로 덮어 주는 너그러움이 풍성한 행복마을의 황홀함이다.
행복마을의 낙조는 하루의 마침표이자, 내일을 위한 여백이다. 그래서 이곳의 노을은 말없이 “올해도 수고많았다”고 건네는, 가장 조용하고 깊은 위로다. 행복마을이라 칭하는 지역은 부산의 명지에 소재한다. 그 옛날 세칭 동방교=좁은길 제9교회가 소재했던 전설의 동네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도시화되어 상전벽해를 이룬 곳... ㅎ
한해를 마무리하는 오늘, 인생 70줄의 중반에도 아직 세칭 동방교= 자칭 좁은길에 목줄이 매인 부부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명지출신 안타까운 나의 친구가 문득 생각나서 그 이바구 하나를 리뷰한다. 친구 고니아 이바구다.
(본문/이단의 추억 131)
명지(鳴旨)라고 하면 옛날에는 경남의 김해군에 속한 지역이었지만 부산시가 광역시로 확대개편되면서 부산시로 편입된 땅이다. 울 명(鳴)자와 뜻 지(旨)자를 쓴다. 새가 우는 땅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그런지 명지(鳴旨)는 유명한 철새 도래지 을숙도((乙淑島)와 서로 마주보는 쌍벽을 이루고 있다. 지금은 낙동강 하구둑으로 도로가 연결되어 있지만 그 옛날에는 발동기가 달린 통통배, 혹은 노를 젓는 나룻배가 낙동강의 동편 하단과 낙동강의 서편 명지의 사람과 물자를 실어나르던 교통수단이었다.
명지라는 땅은 낙동강의 본류와 서낙동강의 사이에 위치한 삼각주를 일컫는다. 낙동강을 타고 내려오는 많은 퇴적물과 모래톱이 수천년을 두고 쌓여서 이루어진 일종의 퇴적토 지역이다. 퇴적토의 특성상 농산물의 생산에 적합하고 바다의 자연재해로부터 해안선을 방어해주는 역할까지 겸하고 있는 곳이다.
일제치하에 유행했던 호열자 때문에 당시 명지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많이 죽어 이곳 퍼석퍼석한 모래톱을 파고 무덤을 만들어 이곳 저곳에 공동묘지가 형성되어 있었고 밤에는 풍파에 허물어진 공동묘지의 주변에서 인광(燐光)불이 번덕여서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던 곳이다.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언제부터인가 이곳에서 유난히 파농사가 발달하고 있었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파생산 전문농업지역이 되었다.
이곳 낙동강의 끝자락 삼각주에 여러 마을들이 형성되어 살고 있었는데 동리(東里)라는 마을에 세칭 동방교의 명지9교회가 있었다. 초라한 루핑지붕에 비가 오면 집안의 여러곳에 물이 새어서 그릇이나 세숫대야등을 받쳐 빗물을 받아내곤 하던 그야말로 보잘 것 없는 농가주택이었다. 여기에 꽤 많은 세칭 동방교의 신도들이 드나들었다.(고백과 회상 13) ‘맨발의 청춘! 천둥과 번개도 아랑곳없이 달리다!’ 참조)
세월이 흐른 후 그 명지9교회는 부산의 사하초등학교 서편 주택가에 쬐그만 간판하나 대문위에 달아놓고 명맥을 유지하고 있더니 그 지역이 재개발에 휩쓸려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게 되었으므로 지금은 사하구청 입구쪽으로 이전하여 조그마한 가정주택 정도의 규모로 유지되고 있다.
1960년대 당시의 이곳 세칭 동방교 명지9교회가 소재한 동리(東里)라는 지역에서 북향으로 십여리 떨어진 곳에 제도리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곳으로 가려면 동리(東里)의 명지9교회에서 출발하여 농로길을 한참을 걸어 순아교라는 조그마한 다리 하나를 건너야 한다. 이 다리를 건느면 곧 이어 삼광초등학교가 나타나는데 이 삼광초등학교가 제도리의 중심지역이라 할 수 있다.
이곳으로부터 사방팔방으로 펼쳐져 천자도, 전양, 송백도, 중곡, 상곡, 평위도, 순아도, 대부동이라는 8개부락이 소재하고 있다. 이곳 주민들 모두가 퇴적토인 삼각주 땅위에서 열심히 농사짓고 살아가는 평범한 농민들이요 6.25와 4.19, 5.16을 거치면서 험한 세월을 이겨내며 살아왔던 이땅의 순박한 백성들이었다.
천자도 출신인 그의 명명(세칭 동방교 내에서 부르는 이름)은 ‘고니아’다. 그들이 꼭 ‘좁은길’이라고 부르고 이래 노광공을 하나님이요 창조주, 재림주, 그리고 심판주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않는 세칭 동방교의 부산 명지9교회 출신이다. 1960년대 중반에 삼광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주변에 해골이 나딩굴고 공동묘지가 즐비하던 경일중학교를 졸업했다. 지금은 주변에 아파트가 즐비하게 건설되고 있는 국제신도시 형성지역이다.
그러고는 부산으로 나와 어느 고등학교를 졸업한 ‘고니아’는 세칭 동방교에의 신앙심이 특출했으므로 빈집초월(무단가출)하여 부산의 초량12교회에서 빈집초월한 우리와 같이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우리라 함은 거의 동년배인 친구들 몇 명을 아울러 일컫는 말이다. 우리들 중에는 좁은길이라고 부르는 세칭 동방교에 충성을 다 바치다가 나를 포함해서 몇 명은 서울의 대기처로 불려들어가 더욱 온갖 충성을 다 바쳤다. 그중에 일부는 도중에 다시 동방교를 탈출하여 각자의 길로 가게 되었고 일부는 아직도 세칭 동방교에 남아 충성을 바치고 있다.
그중에 한 친구가 바로 ‘고니아’다. 본명으로는 주아무개이다. 청년시절의 그 순박했던 ‘고니아’를 생각하면 지금도 참으로 가슴이 멍멍하다. 몇가지 특별히 생각나는 추억도 있다. 당시 동네사람들은 세칭 동방교를 살짝교라고 부르고 있었는데 몰래 몰래 살짝 살짝 다닌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철모르던 중학교 시절, 살짝교라고 부르던 세칭 동방교에 다니는 학생들을 색출하기 위해 제도리의 입구 순아교 다리위에서 밤길을 지키던 동네 청년들에게 붙잡혀서 취조를 당하고는 “너 이놈, 그 살짝교에 또 나갈끼가 안 나갈끼가...” 닦달을 받고서도 “나는 죽어도 나갈낍니더...” 하고 담대히 대답하던 용기를 지녔던 고니아가 아니던가,
초량12교회에서 대기자로 생활하던 시절 고니아는 지성(헌금)을 바치기 위해 구두딱이 통을 하나 만들어 가지고 초량 뒷골목이며 부산역근처로 다니면서 구두를 닦아 번 돈으로 지성(헌금)을 바치기도 했다. 자랑스럽게 구두딱이 통을 둘러메고 초량12교회를 나서던 의기양양하던 그의 모습이 아직 뇌리에 남아있다.
내가 서울의 대기처로 불려 올라가 용산의 수원정에 머물고 있을 때(이단의 추억 #44, '수원정'에서의 하루(Ⅰ)-순회자의 길, #45, '수원정'에서의 하루(Ⅱ)-전도사의 길 참조) ‘고니아’도 서울의 대기처로 올라와 있었는데 하루는 보니 팔목을 다쳤는지 기브스를 해서 목에 끈으로 걸친채로 한쪽손만 앞으로 내밀고 단정하게 앉아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적으로 그 자세가 무척 우스워서 불경스럽게도 혼자 킥킥 거리고 웃었다.
세칭 동방교의 기도자세는 성화 사무엘의 기도자세와 똑 같이 양손을 합장해서 가지런히 앞으로 모으고 기도자세를 취해야 하는데 한쪽손은 기브스를 한 채로 늘어뜨리고 짝이 없는 한쪽손만 앞으로 내밀고 태연하게 눈을 감고 앉아 기도를 하고 있었으니 속으로 얼마나 우스웠던지... 그래도 스스럼없는 자세로 어떤 민망함도 없이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이 일관된 기도자세를 유지하고 있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서언하다.
끝내 세칭 동방교를 떠나지 못했던 그는 동방교의 대기처(세칭 동방교 신도들의 집단합숙소) 안에서 세칭 동방교의 부산 주학교회(이단의 추억 # 22, ‘주학교회’ 참조) 출신 빈집초월한 대기자 여신도와 결혼했고 아들 딸 남매를 두었다. 아직도 세칭 동방교, 지금은 이름을 바꾼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개혁 교단에 남아 그 산하의 무슨 단체 자리 하나를 비상근으로 맡아 이름을 걸어놓고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그동안 가끔 연락도 하고 얼굴도 보고 밥 한그릇도 나눌 기회가 있었다. 참으로 가끔이었지만...
10대의 어린나이 중학생 시절에 자칭 좁은길이라고 하는 세칭 동방교에 발을 담근 이래 그도 이제 70줄에 들게 되었으니 어찌 회한인들 없었으랴, 평생을 이단 사이비 세칭 동방교에 몸담았던 지난 세월을 돌아보는 심정이 참으로 허망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