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懿陵哀想 의릉애상 20241031 진허 권오철 拙吟
天藏芳眠石串魂 천장산에 꽃처럼 잠들어 있는 돌곶이의 영혼이여
景宗長臥夭折怨 경종대왕 오래도록 잠든 곳, 요절함이 원망스러워
大嬪碎影成塵夢 장희빈의 깨어진 그림자 먼지와 꿈으로 변했구려
宣懿孤心憤淚冤 선의왕후의 외로운 마음,분노의 눈물의 원한이네
藝綜學堂韓本座 한예종의 대학 건물에는 한류의 근본이 존재하고
中情官舍統民原 중앙정보부 강당에는 민족통일의 바탕이 있나니
錦山繡水再興護 아름다운 금수강산, 이제 다시 부흥토록 보호하사
千世兩宮常降恩 영원토록 두 분의 은혜가 이땅에 내리기를 바라네
이 시는 역사적 인물과 그들의 비극적인 운명을 회상하며, 고통과 슬픔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해석과 해설을 해보겠습니다.
해석
첫 번째 구절: "천장산에 꽃처럼 잠들어 있는 돌곶이의 영혼이여"
이는 고인의 영혼을 애도하는 모습으로, 고요하고 평화로운 안식처에서 꽃처럼 잠들고 있음을 표현합니다.
두 번째 구절: "경종대왕 오래도록 잠든 곳, 요절함이 원망스러워"
경종대왕이 젊은 나이에 요절한 사실에 대한 원망과 슬픔을 나타내며, 그가 영원히 잠들어 있는 곳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을 담고 있습니다.
세 번째 구절: "장희빈의 깨어진 그림자 먼지와 꿈으로 변했구려"
장희빈의 비극적인 삶과 그녀의 유산이 결국 먼지와 꿈으로 사라진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는 그녀의 삶이 가진 비극성을 드러냅니다.
네 번째 구절: "선의왕후의 외로운 마음, 분노의 눈물의 원한이네"
선의왕후의 고통과 그로 인한 분노를 표현하며, 그녀의 아픔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보여줍니다.
다섯 번째 구절: "한예종의 대학 건물에는 한류의 근본이 존재하고"
한류의 시작과 발전이 한예종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강조하며, 현재의 문화적 성과를 기념합니다.
여섯 번째 구절: "중앙정보부 강당에는 민족통일의 바탕이 있나니"
과거의 아픈 역사와 현재의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을 동시에 표현합니다. 이 구절은 민족적 화합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일곱 번째 구절: "아름다운 금수강산, 이제 다시 부흥토록 보호하사"
자연의 아름다움과 그 보호의 필요성을 노래하며, 부흥과 회복을 기원하는 마음을 전합니다.
여덟 번째 구절: "영원토록 두 분의 은혜가 이 땅에 내리도록 바라네"
두 인물(경종대왕과 선의왕후)의 은혜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기원을 통해 그들의 영향력을 기리고 있습니다.
해설
이 시는 한국 역사 속의 인물들과 그들의 비극적인 삶을 통해 한국 문화와 민족 정체성을 탐구합니다. 각 인물의 삶을 회상하며 그들의 슬픔과 고통을 공유하고, 그로 인해 현재의 문화적 자산과 미래의 희망을 연결짓고 있습니다. 또한, 자연과 민족의 통합된 정체성을 강조하며, 과거의 아픔을 잊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지를 보여줍니다.
시 전체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깊은 애도와 회한, 그리고 민족적 연대의 중요성을 다시금 환기시키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시는 단순한 개인의 슬픔을 넘어선 공동체의 기억과 희망을 담고 있습니다.
懿陵哀想
의릉(懿陵)은 조선 제20대 왕 경종(景宗)과 그의 계비 선의왕후 어씨(宣懿王后)의 능이다. 이곳은 서울특별시 성북구 석관동에 위치하며, 대한민국 사적 제204호로 지정되어 있다. 의릉은 그 자체로 조선 왕실의 비극적 역사와 문화적 유산을 간직하고 있는 장소로, 많은 이들에게 여전히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
경종의 생애와 의릉의 조성
경종은 1688년에 태어나 1720년에 왕위에 올랐으나, 건강이 좋지 않아 재위 기간이 고작 4년에 불과했다. 1724년 3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경종은, 영조의 즉위와 함께 의릉에 장사 지내졌다. 그의 무덤은 중량포 천장산 언덕에 조성되었으며, 경종의 계비 선의왕후 어씨는 1730년, 겨우 2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후, 경종의 능 아래에 함께 묻혔다.
의릉은 동원상하릉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이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무덤을 좌우가 아닌 위아래로 배치한 결과이다. 이로 인해 능침의 정혈을 벗어나지 않도록 한 것이 특징적이다. 왕릉은 12칸의 난간석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왕비릉에는 곡장이 없다.
문화재로서의 의릉
의릉은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더불어 주민들에게 편안한 휴식 공간을 제공한다. 단풍이 아름다운 천장산 기슭에 위치하여, 산책로를 따라 여유롭게 산책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추고 있다. 이는 아이들에게 교육의 장으로도 활용되며, 역사적 장소의 의미를 더하고 있다.
의릉은 또한 조선 왕조의 역사적 맥락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경종의 통치 아래 정치적 혼란이 있었고, 그의 죽음과 함께 왕비의 급작스러운 죽음은 왕실 내의 권력 다툼과 복잡한 관계를 반영한다. 선의왕후는 경종의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그 후 영조가 왕위에 오르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의릉의 복원과 보존
1960년대에는 중앙정보부에 의해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으나, 이후 공개가 이루어졌다. 2003년부터 2005년까지 진행된 복원 사업을 통해 외래 식물을 제거하고 전통 식물로 복원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현재 의릉은 왕릉의 역사적 가치와 아름다움을 보존하며, 방문객들에게 감동적인 경험을 제공하고 있다.
의릉은 단순한 역사적 유적지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경종과 선의왕후의 이야기, 그리고 그들이 남긴 슬픔을 기억할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다. 이는 조선 시대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인생의 덧없음을 상기시켜 주는 장소로, 많은 이들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준다.
[다음]을 참조하여, 경종과 선의왕후 어씨의 '懿陵哀想'라는 제목으로 한시를 지어라. 칠언율시이다. 중국어이다.
1. 의릉의 광경 2. 기구한 운명 3. 장희빈과 경종 4. 선의왕후와 영조 5. 중앙정보부의 점령 6. 한국예술종합학교의 등장 7. 지나간 원한을 풀고
8. 이제 국가와 인재를 보호하시라.
라는 항목으로 정리하라.
[다음]을 기사화하라.. 제목은 ‘懿陵哀想’이다
[다음]
의릉(懿陵)은 조선 제20대 왕 경종과 계비 선의왕후 어씨의 능이다. 대한민국 사적 204호로, 서울특별시 성북구 석관동 1-5에 위치한다.
개요
경종이 후사를 남기지 못한 채 경종 4년(1724) 8월 25일 창경궁 환취정(環翠亭)에서 37세를 일기로 승하하자 영조 즉위년(1724) 9월 묘호(廟號)를 경종, 무덤의 이름을 의릉이라 하고, 이 해 12월 양주 남쪽의 중량포(中梁浦)의 천장산(天藏山) 언덕에 장례 지냈다.
선의왕후 어씨는 본관이 함종(咸從)으로 영조 6년(1730) 6월 29일 경희궁 어조당(魚藻堂)에서 소생없이 승하하니 춘추 26세였고, 시호를 선의(宣懿), 무덤의 이름을 의릉이라 하여 10월에 천장산 경종릉 아래에 장례를 지냈다.
의릉이 여주 효종의 영릉(寧陵)과 같이 쌍릉이면서도 좌우가 아닌 위 아래로 자리잡은 것은 좌우로 무덤을 만들 경우 능침(陵寢)이 정혈(正穴)을 벗어난다는 풍수지리설에 따랐기 때문이다.
왕릉에는 병풍석(屛風石)을 세우지 아니하고 능침 주위로 12칸의 난간석을 설치하였으며, 그 밖으로 양석(羊石)과 호석(虎石) 각 2쌍, 상석(床石) 1좌, 망주석(望柱石) 1쌍, 3면의 곡장(曲墻)으로서 위 층계를 이루었다. 그 한 단 아래에는 문인석(文人石)과 마석(馬石) 각 1쌍, 사각형 명등석(明燈石) 1좌가 있고, 그 아래 층계에는 무인석·마석 각 1쌍이 배치되어 있다. 왕릉 아래 왕비릉은 곡장이 없는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 난간석·양석·호석·상석·망주석·명등석·문인석·무인석·마석의 설치는 왕릉과 같다.
왕비릉 언덕 아래에 정자각(丁字閣)·비각(碑閣), 그리고 입구에 홍살문(紅箭門)이 있다. 재실(齋室)은 홍살문 동북방 도로변에 있었으나, 고종의 셋째 아들이며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였던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이 1970년 5월 서거한 후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金谷洞) 홍릉(洪陵)·유릉(裕陵) 경역내에 영원(英園)을 조성한 후, 1973년도에 영원의 재실로서 옮겨 세워졌으며, 그 터는 일반 주택지가 되었다.
의릉은 아담한 천장산 산자락 밑에 위치 되어 단풍이 아름다우며 넓은 잔디밭이 있는 주민휴식공간이다. 1시간정도 걸리는 의릉산책로는 늘 한적해서 명상을 하면서 둘러보기에 더 없이 좋고, 아이들에게도 훌륭한 교육의 현장이 되고 있다.
능의구성
의릉은 조선 20대 경종과 두 번째 왕비 선의왕후 어씨의 능이다. 의릉은 같은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이 앞뒤로 나란히 배치한 동원상하릉의 형식으로, 곡장을 두른 위의 봉분이 경종의 능, 곡장을 두르지 않은 아래의 봉분이 선의왕후의 능이다. 이러한 형식은 능혈의 폭이 좁아 왕성한 생기가 흐르는 정혈(正穴)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풍수지리적인 이유이다. 능침은 두 봉분 모두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고, 장명등, 혼유석, 석양, 석호, 석마, 문무석인 등을 배치하였다. 경종의 능침에 배치된 망주석 세호는 왼쪽은 위를 향해 올라가있고 오른쪽은 아래를 향해 내려가 있으나, 선의왕후의 능침은 반대로 조각되어 있다. 특히 경종의 능침 무석인의 뒷면에는 짐승 가죽을 나타내기 위해 꼬리가 말린 것을 조각하였고, 선의왕후의 능침 석호는 꼬리가 등 뒤로 올라가게 하는 등 재미있게 표현하였다.
능의역사
1724년(경종 4)에 경종이 세상을 떠나자, 같은 해 양주 중랑포 천장산 언덕에 능을 먼저 조성하였다. 그 후 1730년(영조 6)에 선의왕후 어씨가 세상을 떠나자, 의릉 동강 하혈(下穴)에 능을 조성하였다. 의릉은 1960년대 초 당시의 중앙정보부가 능역 내에 있어서 일반인에게는 철저히 봉쇄된 구역이었다.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에 연못을 만들고 돌다리를 놓는 등 훼손이 심하였다. 이 후 중앙정보부가 국가안전기획부로 바뀐 후 서초구 내곡동으로 이전하면서, 1996년에 일반인에게 다시 공개되었고, 2003년 12월부터 2005년 12월까지 외래수종 제거, 전통수종 식재, 인공연못 성토, 금천교 복원 등 기초적인 의릉 능제복원 정비공사를 마쳤다.
경종의 의릉과 순조의 인릉
조선후기에 현재의 서울에 조성된 왕릉으로는 경종의 의릉(懿陵)과 순조의 인릉(仁陵)이 있다. 1724년 8월 경종이 창경궁 환취정(環翠亭)에서 승하하자, 영조는 먼저 경종의 원비(元妃)였던 단의왕후(端懿王后) 심씨의 혜릉(惠陵)이 있는 언덕에 능을 쓸 만한 자리가 있는지 살펴봤다. 혜릉은 현재 동구릉 경역 내에 조성돼 있었는데, 영조는 다른 길지를 찾아볼 것을 지시했고, 최종적으로 정해진 곳은 경기도 양주 중랑포 천장산 자락이었다. 6년 후인 1730년 경종의 계비 선의왕후(宣懿王后) 어씨가 승하하면서 경종 앞에 능을 조성했다.
경종의 의릉은 왕과 왕비의 무덤이 언덕 상하에 있는 동원상하릉의 형식이다.
.
경종의 의릉은 왕과 왕비의 무덤이 언덕 상하에 있는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의 형식인데, 이것은 경종의 옆자리에 무덤을 조성할 곳이 마땅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동원상하릉의 또 다른 사례로는 경기도 여주의 효종과 인선왕후의 영릉(寧陵)이 있다. 현재 의릉 경내에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석관동 캠퍼스가 자리를 잡고 있으며, 옛날 중앙정보부의 강당으로 쓰던 건물에서는 1972년 7월 4일 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되기도 했다.
영돈녕부사 어유구(魚有龜)[3]의 딸로서 어유구는 노론 영수 김창집의 제자이며 일가가 모두 노론계이다. 즉, 소론계의 배후를 갖던 경종과는 정치 성향이 반대인 집안의 딸을 세자빈으로 삼은 것.[4][5]
1718년 14세(만 12세)의 나이로 세자빈에 간택[6], 같은 해에 왕세자와 어의궁에서 친영례를 치르고, 경희궁 광명전에서 동뢰를 치렀다. # 다음 해인 1719년 9월에 관례를 올렸다.
2.2. 늦은 왕비 책봉[편집]
1720년 숙종이 사망하고 경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다. 경종의 정비인 단의왕후 심씨의 왕비 추봉과 선의왕후의 왕비 책봉을 동시에 주청한 것이 청나라에 트집 잡혀 1721년에야 고명을 받을 수 있었다.
경종 1년, 경종 부부에게 후사가 없다는 이유로 하여 노론 4대신[7]과 혜순왕대비 김씨(인원왕후)의 강력한 추진으로 연잉군의 왕세제 책봉이 결정되었을 때, 선의왕후의 나이는 갓 17세에 불과했다.[8][9] 일설에 따르면 선의왕후 어씨는 연잉군을 반대하여 종실과 비밀리에 연합하여 소현세자의 직손인 밀풍군 탄, 혹은 밀풍군의 아들인 관석을 입양하려 하였으나[10] 경종의 급서로 실패하였다고 한다.
실제로 기록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선의왕후가 이인좌 등에게 비밀리에 언문교서를 내렸는데 "왕실의 씨가 바뀌었으니[11] 바로 잡아라"는 하교를 내렸다고 전한다. 이인좌 등이 왕대비(선의왕후)의 밀명을 받았다고 주장한 흔적은 영조 실록에 수차례 등장한다.
또한 효장세자 독살 의혹[12]의 배후로 추정되는데 당시 세자를 독살을 했다고 추정되는 궁인이 왕대비 어씨를 끌어들였다. 일개 궁녀가 국본인 왕세자를 독살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당시 친국에서도 궁녀가 김상궁이 사주했다고 납초하였고 실록에도 김상궁은 동조(東朝)[13]를 섬기던 상궁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는 점, 영조가 이를 서둘러 차단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2.3. 영조 즉위와 왕대비가 되다[편집]
1724년 경종이 사망하고 영조가 즉위하면서 불과 20세의 나이로 왕대비가 되었다. 영조 2년에는 대비전이 있는 창덕궁이 아닌 경종이 세자 시절 거처하던 창경궁 저승전에서 지냈으며, 1730년 8월 12일(음력 6월 29일) 경덕궁 어조당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나이 겨우 26세(만24세)로 조선의 역대 왕대비 중 가장 단명한 왕대비이다.[14]
선의왕후를 죽음으로 이끈 병명은 밝혀지진 않았으나 실록에서 왕후가 죽기 전날의 기록을 보면 죽기 직전까지 몸을 떨며 통곡을 하고 읍성[15]을 냈다고 한다. 또한 손으로 뭔가를 치는 듯한 행동을 보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에 영조가 의관들에게 그러한 증후를 본 적이 있는지 묻자 중관이 헛소리를 하는 것이라 대답하였다.
선의왕후가 거처하던 저승전은 후에 세자궁으로 개조되어 사도세자의 처소가 되었으며 저승전 건너편에 위치했던 취선당[16]은 세자궁의 소주방으로 개조되었는데,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가 정신 질환을 앓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 불길한 저승전에서 자라고 취선당에서 지은 밥을 먹은 탓이라 하였다. 사도세자의 이른 죽음을 저승전의 이름에서 그 원인을 찾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애초에 풍수지리적인 이유를 빼고 보더라도 저승전이나 취선당이라는 장소가 영조에게 있어서는 어쨌든 생애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을 누군가를 떠올리기에 충분한 입지였다.[17]
저승전은 영조 24년(1746년) 월랑이 화재 피해를 입었고# 16년 뒤인 영조 40년(1764년) 건물 전체가 불에 타 사라졌다. 이후 신하들이 저승전을 다시 지을 것을 청했으나, 영조는 "조종의 검소한 덕을 본받아야 한다"며 허락하지 않았다.# 이후 저승전은 두 번 다시 재건되지 않았다.
시동생인 영조와 사이가 대놓고 좋지 않았다. 즉위 초부터 선의왕후는 남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영조를 위한 예식과 절차를 거부하기 일쑤였고 영조는 왕대비(선의왕후)에게 올려지는 물품을 매번 삭감하여 국고나 백성에게 돌렸다. "왕대비(선의왕후)에게 진연을 올리자"는 홍치중의 주청이 있자 영조가 진노 어린 비답을 내려 종실 전성군 이혼 등 종친부가 일제히 상소하여 진연 올리기를 청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영조는 "나의 성의가 부족한 것 때문에 (선의왕후의) 윤허를 받지 못했다" 라며 비난과 책임을 회피하였고 이후 진연을 올리는 것이 정해지기는 하였지만 수 차례 연기되었다. 심지어 영조는 선의왕후의 국상 기간 중에[18] 후궁 귀인 이씨를 내명부 정1품 빈(嬪)으로 삼고 대대적인 잔치를 열어 도성 안팎은 물론 노론 대신들까지 탄식을 쏟아낼 정도였다.
선의왕후가 사망한 이유는 지문에 기록된대로 오랜 지병을 앓아서가 아니라 죽기 약 4개월 전인 1730년 4월 15일에 발생했던 영조 암살 미수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어조당에 유폐되자 분개하여 식사를 거부한 끝에 아사한 것이라고 전한다.
선의왕후의 외가를 살펴보면 의외의 가계를 확인할 수 있다. 선의왕후의 외할아버지는 이하번이라는 인물인데 이하번의 4대조 (고조할아버지)가 영양군 이거이다. 봉군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듯 왕족으로 정확히는 중종과 창빈 안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데 영양군의 동생이 다름아닌 덕흥대원군, 바로 선조의 아버지다. 경종이 덕흥대원군의 7대손이고 선의왕후는 외가로 영양군의 6대손이니 경종과 선의왕후 부부는 촌수로 15촌 사이이다.
의릉(懿陵)은 경종(景宗)을 위쪽에, 계비 선의왕후(宣懿王后) 어씨(魚氏)를 24m 아래에 장사를 지낸 동원상하봉릉(同原上下峰陵)의 형식으로 조성된 능이다. 경종은 숙종 14년(1688)년 10월 27일에 희빈 장씨(禧嬪張氏)가 낳은 이윤(李昀)이다. 왕위에 오른 지 14년 만에 아들을 얻은 숙종(肅宗)은 나라의 근본이 정해지지 않아서 인심이 매인 곳이 없었는데 그 문제가 해결되었다며 매우 기뻐하였다. 서인의 영수 송시열은 정비인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아직 젊은데 후궁의 소생을 원자(元子)로 삼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강력하게 반대를 하였으나 숙종은 경종이 태어난 두 달 만에 원자로 삼았다. 경종은 1720년 6월 13일에 경덕궁에서 조선 20대 왕위에 올랐으나 병약하여 후사가 없었으니 이듬해에 이복동생인 연잉군(延仍君)을 왕세자로 책봉하였다. 경종은 즉위한지 4년여 만인 1724년 8월 25일 창경궁에서 37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총호사 이광좌(李光佐)가 상지관 11명을 거느리고 장지를 구하다가 구 영릉(舊寧陵, 구 효종릉)·중량포(中粱浦)·용인(龍仁)·교하(交河)·왕십리(往十里) 등 다섯 곳을 선정하였다. 이광좌는 구 영릉을 주장하고, 도감당상 김일경(金一鏡)·이사상(李師尙) 등은 중량포를 주장하였다. 이광좌는 “구 영릉은 건원릉(健元陵)의 좌측에 있는데, 옛 부터 대신들과 상지관들에게 대단한 땅으로 일컬어졌으며, 영릉을 옮길 때에도 병풍석 등 석물에 틈이 벌어졌으나 풍수적으로 나쁘다고는 말을 하지 아니하였으니 구 영릉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른 대신들은 우리나라에서는 천릉(遷陵)한 장소는 다시 쓰는 전례가 없다고 하니, 오직 임금께서 결정하실 뿐입니다.”하였다. 한편 김일경은 “비록 사대부의 집안이라 하더라도 옮겨간 장소에다가 그 어버이를 장사지내려고 하지 않는데 하물며 왕릉을 조성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신하들은 중량포를 장지로 정할 것을 주장합니다.”하였다. 용인과 교하 땅은 선조 임금을 장사지낼 때 후보지로 거론되었으나 이항복(李恒福)이 반대하여 쓰지 안했다는 이유로 제외하였다. 영조(英祖)의 명으로 중량포를 다시 살펴보게 하였는데, 모두 아름답다고 하니 대비(大妃, 선의왕후)에게 아뢰고 마침내 중량포 천장산(天藏山)을 장지로 결정하여 그해 12월 16일에 북동향(申坐寅向)으로 장사 지내고 능호를 의릉이라 하였다.
구 영릉을 옮길 때 상지관 반호의(潘好義)가 “지금은 비록 천릉을 하나 훗날 반드시 이 자리를 다시 쓸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을 근거로 이명언(李明彦)이 다시 구 영릉을 장지로 정할 것을 주장하니 영조는 “산릉의 일은 매우 중요하여 총호사나 나도 함부로 결정을 하지 못하였다. 더구나 조선 3백 년 동안 천릉한 곳에 다시 쓴 전례가 없을뿐더러 새 능 자리를 번복하여 다시 정하는 것은 매우 중대하다. 그런데 이를 다시 상언하는 것은 아주 경솔한 행동이다.”면서 이명헌을 추고 할것을 명하였으나 다른 대신들의 반대로 철회하였다. 이명헌은 김일경의 오른팔이었으나 산릉의 일을 가지고는 다른 논리로 나왔었다. 그러나 구 영릉은 52여 년 후에 영조의 능인 원릉(元陵)이 되어 반호의의 말이 현실로 되었다.
경종을 장사 지낸지 6년 뒤인 영조 6년(1730) 6월 29일에 선의왕후 어씨(魚氏)도 경덕궁에서 26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총호사인 우의정 이집(李㙫) 등의 추천으로 장지를 의릉의 아래에 정하여 그 해 10월 19일에 경종과 같이 북동향(申坐寅向)으로 장사를 지냈다. 이 터는 경종을 장사 지낼 때 그 왼편에 묘(墓)를 쓸 만한 혈(穴)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자신의 친정아버지인 함원부원군에게 “나는 반드시 이곳을 돌아갈 터로 삼겠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영조가 선의왕후의 뜻을 저버릴 수 없어 영릉(寧陵)을 모방하여 경종의 무덤과 상하혈(上下穴)로 장사를 지냈다. 선의왕후는 어유귀(魚有龜)와 해미현감 이하번(李夏蕃)의 딸 사이에서 숙종31년(1705) 10월 29일에 태어나 1718년에 세자빈으로 책봉되어 9월 16일에 혼인을 하고, 1720년에 왕비가 되었다. (선문대 최낙기 교수)
의릉-경종과 선의왕후릉
소재지 : 서울시 성북구 석관동 1-5
사 적 : 제 204 호
懿陵의 특징
景宗{이균; 1688-1724, 재위 4년}과 계비(繼妃) 선의왕후 어씨(宣懿王后魚氏; 1705-1730)의 의릉은 쌍릉(雙陵)의 형식이면서도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의 영향으로 좌우로 나란한 봉분 조성이 아니라 앞뒤로 봉분을 조성했습니다. 여주(驪州)에 있는 효종(孝宗)의 영릉(寧陵)과 유사한 모양이지만, 경종의 의릉은 영릉보다 더 정확하게 앞뒤로 조성되어 정자각(丁字閣)에 보았을 때 앞의 능은 선의왕후릉이고 뒤의 능은 경종의 능입니다. 경종의 능에만 뒤에 곡장(曲墻)이 있어 쌍릉(雙陵)의 형식임을 알 수 있고, 숙종의 명릉(明陵)에 이어 역시 왜소한 석물(石物)들과 사각(四角)의 장명등이 특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