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연한 자연 속에서 진정한 휴식을 경험하다
산장이 너무 춥다며 모두들 캠퍼밴으로 돌아갔다.
아무도 없는 산장 방에서 나 홀로 버티다 새벽 2시경에 결국은 캠퍼밴으로 향했다. 캠퍼밴 문을 열자 장기 가출자들의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그 냄새를 안고 있는 따뜻한 공기에 발길이 절로 캠퍼밴 속으로 향한다.
여행이 시작된 이후부터 위층 독방 신세를 면치 못한 봉주 형님의 코 고는 소리가 오늘따라 우렁차다. 침대에는 허영만 화백과 허 PD가 무슨 꿈을 꾸는지 서로 부퉁켜안고 자고 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이 깼는지 “거기 춥지. 얼른 이리로 들어와라” 하면서 허영만 화백이 이불을 들어 보인다. 캠퍼밴 창문 밖에서 바람 소리가 들린다. 아, 이불 속은 정말 따뜻하다.
잠이 깼다. 어제 봤던 대구 청년은 마운트 쿡을 맨 먼저 보겠다고 일찍부터 서둘러 준비하고 있다.
우리도 어제 저녁을 든든히 먹어서인지 배가 별로 고프지 않아 간단하게 빵과 북어국(?) 이라는 묘한 메뉴로 아침을 때웠다.
일찍 움직여서 뉴질랜드 최대의 태즈먼 빙하가 보이는 전망대까지 올라갔다. 말이 필요 없었다. 길이 29킬로미터, 폭 4000미터, 깊이 600미터의 빙하가 시야를 가득 메운다. 대자연이 불러일으키는 경외심을 아침부터 감당하는 것은 무리였다.
영혼을 울리는 물빛, 테카포 호수
점심 식사 전에 테카포 호수에 도착했다. 테카포 호수는 우울함과도 어울리고 즐거움과도 어울린다. 바람 없는 잔잔함도 광풍의 거친 날씨도 잘 참아낼 줄 안다. 과묵하지만 무겁지 않고 신비하지만 낯설지 않다.
만약 뉴질랜드에 관한 사진엽서를 몇 장 산다면 그중에 반드시 포함되는 곳이 바로 테카포 호수의 풍경이다.

테카포 호수를 보면서 느끼는 감동은 어느 한 곳 손댈 필요가 없는 완벽한 명화를 본 이후의 감동과 같다.
전형적인 동양화를 연상케 하는 중국의 장가계를 여행하면서 함부로 개발된 일부 자연을 보고 느낀 감정은 복잡했다.
고흐의 자화상에 덧그려 넣은 귀같기도 하고, 미켈란젤로의 명화 「최후의 만찬」 테이블 위에 그려 넣은 피자 같은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창조주의 손길에 의해 오랜 시간 동안 빚어진 자연이라는 명화에 인간의 손으로 뭔가를 더해 넣어 완성도를 높이겠다는 시도 자체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 창조주의 손길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완벽하다.
우리가 보존한 자연의 명작들은 실연당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며, 무뚝뚝한 사람에게도 감동을 선사하고, 갈 길을 몰라 헤매는 사람에게 삶의 교훈을 주며, 욕심으로 지친 감정을 편안히 정돈하는 법도 가르쳐준다.
이제는 친숙해진 테카포 호수와 멀리 보이는 서던 알프스의 눈덮인 산들의 조화 속에 창조주의 의도’가 느껴진다. 테카포 호수는 꽃으로 단장한 신부처럼 순결하고 고고하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은 신부의 아름다움을 보고 기뻐하고 찬사를 던지며 사진을 찍는다. 우리는 마지막 여행지인 크라이스트처치로 향했다. 허영만 화백이 오늘 저녁에는 누구도 손에 물을 묻히지 않는 평등한 쫑파티를 주최했다.
모두 여행을 많이 한 사람들이라 헤어지는 법도 이골이 나 있다.
서로의 아쉬움은 웃음 속에 묻어두고, 지금 현재 차려진 맛있는 음식을 즐기며 지난 한 달 동안 함께 나눈 추억들을 이야기했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한국에 돌아가서 해야할 일도 많겠지만, 다시 만날 기족들과 내 나라 내 집의 아늑함을 한껏 기대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의 여행 경험 중에는 장엄한 서던 알프스를 보고 느낀 감동도 있었지만, 감동하는 옆 사람의 얼굴을 보는 즐거움도 컸다.
멋진 풍경을 혼자 보기 아까워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기 좀 봐! " 하면, 옆에서 같은 곳을 보고 같이 감동하는 것. 씻지 않아 때가 꼬질 꼬질했던 서로의 모습에서 발견한 솔직담백함 역시 더 깊은 유대감을 느끼게 했다. 가게 문을 닫을 때까지 우리는 웃고 떠들고 먹고 마셨다. 오늘 밤은 일찍 잠들 것 같지 않다.
제27일
크라이스트처치
대장정을 끝마치다
거의 한 달 동안을 잠시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 여행했지만,어떤 것을 보든지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과 같이 생활한다는 것은 자연을 만나는 것 이상의 기쁨이었다.
돌아보면 뉴질랜드에서 우리가 가보지 못한 곳도 있고 사나운 날씨 때문에 해보지 못한 것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못 가본 곳이 있기 때문에 다시 돌아올 이유도 생기는 거다.
우리의 여행은 이렇게 끝났고 헤어질 땐 “쿨하게 헤어지자”는 봉주 형님의 말대로 공항에서 마지막 사진을 찍고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가족들이 무척이나 보고 싶다.
다음 여행을 위하여

이번 여행에는 빠졌지만 추천하고 싶은 아름다운 곳들
남태평양 해안 하이웨이 (2번-35번-2번 도로)
• 출발:오클랜드→도착.네이피어
• 권장여행 일수 :5일
• 여행 거리 : 1220km
남태평양 해안 하이웨이 (Pacific Coast Highway)는 오클랜드에서 네이피어까지 연결되는 서사시적인 남태평양 해안 도로로 모든 종류의 엄청난 체험거리를 담고 있는 코스이다. 첫 번째 도착지인 템즈를 거쳐 바닷가 외길을 달리면 금광촌인 코로맨달에 도착한다.
아름다운 비치와 그림 같은 반도의 반대쪽은 부드러운 백사장과 서핑으로 유명하고, 모래사장을 파면 뜨거운 온천수가 펑펑 샘솟아 자신만의 온천탕을 만들 수도 있다.
타우랑가의 화려한 밤 풍경을 즐겨도 좋고 와카타네 앞바다의 활화산 섬인 화이트 아일랜드도 매
우 강한 인상을 준다.
동쪽 끝의 해안가에 붙어 있는 길은 마오리족의 정착지로 친근한 모습이 많다. 샤도네 와인의 도시인 기스본, 네이피어는 조각 예술품과 동쪽해안 와인을 즐길 수 있는 마지막 종착지다.
뉴폴리마우스에서 하웨라까지
(45번도로)
• 출발 : 뉴플리머스 • 하웨라→왕가누이
• 권장여행일수 :2일
• 여행 거리 : 198km
주행거리 105km, 주행시간 1 .5 -2시간, 도로 상태는 지방 국도로 양호하다. 타라나키는 180도가 넘는 둥근 반원 모양의 해안선이다.
그래서 뉴플리머스에서 하웨라까지 어디서든지 서핑을 즐길 수 있다. 서핑과 더불어 이 코스의 주된 매력은 바로 에그몽트(Egmont) 국립공원이다.
언제나 접근이 가능하고 트랙은 장대한 타라나키 산 주위를 돌며 정상 트랙으로 연결되어 있다. 타라나키 정상에서는 화산 활동으로 만들어진 완벽한 해안선과 화산 지형을 관찰할 수 있다. 뉴플리머스의 공원이나 박물관도 잊지 말 것.
코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뾰족한 타라나키 산은 거대한 화산으로 250년 전에 마지막 폭발이 있었다. 타라나키 회산은 에그몽트 국립공원의 한가운데에 위치하며, 모든 곳으로 동산용 트랙이 연결되어 있다. 톰 크루즈 주연의 「라스트 사무라이」에 나온 후지 산이 바로 타라나키 산이다. 날씨가 변덕스럽기 때문에 정상 등정을 원한다면 전문 가이드의 도움을 받는 것이 필수.
더니든-캐툴린스지역
19세기 후반, 더니든(Dunedin)은 인상적인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건축물들로 채워졌다. 더니든에 도착하는 것만으로도 역사적인 건물과 인상적인 교회 건물, 호화로운 집들과 화려한 장식의 호텔들을 즐길 수 있다. 또한 중세 시대의 성과 팽권, 앨버트로스 그리고 물개 서식지가 있다.
유명한 캐틀린스(Catlins) 지역은 발클루사(Balcluù13) 다음부터시작된다. 깊게 굽은 길가에는 물개,바다사자, 헥타 돌핀, 팽권 그리고 석화된 숲이 큐리오(Curio) 반도에 있다. 야생 그대로의 비치와 폭포, 워킹트랙, 호수, 그리고 끝이 없는 광경이 이어진다. 인버카길(Invercargill)은 사우스랜드의 중심부이며 남섬의 남쪽 가장 끝 도시이다. 폭이 넓고 오랜 품격이 있는 상점들이 시내에 줄지어 서 있고, 투아타라(tuatara) 집과 남극섬들의 특징을 드러내는 흰 피라미드형박물관이 있다.
스튜어트아일랜드
제주도만 한 크기의 이 섬은 ‘불타는 하늘’이라는 마오리 말 ‘라키우라(Rakiura) ’라는 멋진 이
름을 가지고 있다. 이유는 날씨가 맑은 겨울밤이면 남쪽 하늘에 떠올라 밤을 불태우는 오로라
(Aurora . 극광)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겨울 뉴질랜드의 남쪽 도시인 더니든에서 본 오로라는 평생 잊기 어려운 감동이었다.
뉴질랜드의 상징인 키위는 본토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희귀조이지만, 지역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스튜어트 섬에서는 너무 많다고 여겨질 만큼 많이 번식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키위는 깊은 산속에 살고, 조심성과 부끄러움이 많아 어두운 밤에만 움직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곳에 사는 키위들은 해변에 널려 있는 해초속에 사는 작은 벌레들을 잡아먹기 위해 밝은 낮에도 서슴지 않고 먹이를 구하러 나온다.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섬에 사람이 살지
않아 뉴질랜드에서도 자연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스튜어트 아일랜드는 뉴질랜드 최남단 도시인 인버카길에서 출발하는 9인승 경 비행기나 블러프(Bluff)에서 출발, 1시간 만에 가는 페리를 타면 된다 배멀미가 심한 사람은 경비행기를 이용할 것을 추천한다. 비가 많이 오고 전기요금이 비싼 것을 제외하고는 파라다이스 같은 곳이다.(인구가 적어서 디젤 발전기를 이용해서 발전을 한다.) 특히 새를 좋아히는 사람은 꼭 가봐야 할 곳이 얼바 섬 (Ulva Islands) 이다. 이 섬에서 본 수많은 새들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감동 중 하나다.
준남극지대의섬들
준남극 지대의 섬들은 크게 캠벨 섬, 오클랜드 섬, 스네어 섬으로 나누어진다. 자연의 보고인 이 섬들은 뉴질랜드뿐 아니라 전 세계인들의 보물 같은 곳이다.
특히 캠벨 섬의 앨버트로스 서식지에서는 날개 길이 3.5미터의 서던 로열 앨버트로스를 도시의 비둘기 보듯 볼 수 있다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으며, ‘남반구의 갈라파고스’라고도 불릴 만큼 자연이 잘 보호되어 있어 그동안 「내쇼널 지오그래피」나 BBC 등의 디큐멘터리를 통해 소개된 적이 있다.
오클랜드 섬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희귀한 펭귄인 옐로 아이드 팽귄을 쉽게 만날 수 있고, 뉴질랜드 바다사자 역시 이 곳에서만 사는 보호 동물 중 하나이다. 자연보호국에서 한정된 인원만 섬에 들어가게 허락하고 육지로부터의 거리도 매우 멀어 거친 파도를 뚫고 가
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일단 도착하면 느끼게 되는 보물의 진가는 대단하다.
캠퍼밴 여행을 떠나자
캠퍼밴 여행은 나의 오랜 꿈이었다. 달리면 자동차요, 서 있으면 집이다.
싫증나면 바로 떠날 수 있고 마음에 들면 몇 달이고 머무를 수 있다.
이 얼마나 좋은가. 하지만 한국에서는 캠퍼밴 여행이 그리 쉽지가 않다. 일단 남의 눈에 사치스럽게 보이고, 장기 여행 중 전기와 물을 구할 곳이 없으며, 여행을 떠나지 않을 때 마땅히 세워둘 공간도 없다. 그러던 차에 자그마치 30년이나 품어왔던 나의 꿈이 실현될 기회가 왔다.
뉴질랜드에서 캠퍼밴 여행을 하게 된 것이다. 한 달이나 되는 기간 동안 뉴질랜드의 웅장한 자연과 동거동락하며 지낸다는 것은 정말 가슴 벅찬 경험이었다. 동행했던 김태훈 작가의 글과, 여행 중 틈틈이 작업한 나의 그림을 통해 여러분도 캠퍼밴 여행의 진수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길 바란다.
내가 세운 노후생활 계획은 세 가지인데, 그중 하나가 ‘ 24인승 버스를 개조해 정처 없이 떠나보기’이다.
이젠 노트북과 휴대전화가 있으니 가지 못할 곳이 없고 얽매일 일이 없지 않은가. 나머지 두 가지는 ‘배를 한 척 빌려서 동해, 서해, 남해를 섭렵하는 것’과, ‘야영 장비를 실은 오토바이를 타고 싸돌아다니는 것’인데, 모두 자연 속에 나를 섞는 일이라는 데서 일맥상통한다 세 가지 중 하나만 이룬다고 해도 노후는 외롭지 않을 것이다.
이번 캠퍼밴 여행을 통해 그 행복한 꿈들을 미리 경험해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