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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의 뿌리찾기 모임 '龍山(78m)' 정밀 조사
'용산' 알리기 캠페인 일환. 정상에 표석도 세우기로
일반인들은 '용산(龍山)' 하면 용산구를 떠올리거나 단순히 한 지역의 이름으로 인식을 한다. 왜 그럴까? '용산'이란 산은 지도에도 표기되어 있지 않고 그 높이도 잘 알려지지 않으며 이 산을 등산해 본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용산보다 낮은 산인 둔지산(屯之山)은 지도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이에, 용산 사람들조차 이 산을 '용산'이란 산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으며, 또 이 산이 일제 때부터 '용산 기지'의 이름으로 적혀 왔기에 '용산' 하면 이 산을 생각하는 이가 많게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제라도 '용산'을 제대로 알리자는 움직임이 서서히 일고 있다.
한국땅이름학회의 배우리 회장. 용산문화원의 김천수 연구실장, 성곽길 역사문화연구소 최철호 소장, 한겨레신문의 김규원 선임기자 등을 중심으로 한 <용산의 뿌리찾기 모임(가칭)>의 일행들이 10월 2일 오후, '용산(78m)'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그 정상으로 추정되는 용산구 용산성당(산천동 소재) 주위를 돌아보았다.
일단, 등고선이 잘 그려진 일제 초기의 지도를 살펴 그 위치를 추정한 결과 대체로 용산성당과 그 북쪽길 사이의 어딘가쯤으로 특정할 수 있었다. 다만, 일제 말기에 일본군의 포병 진지 구축으로 인해 산머리가 많이 깎여 나간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지도 분석 결과로는 지도에 표기된 그 옆 서쪽쯤에 표시 지점보다 3~5m쯤 더 높은 언덕이 있었음도 알게 되었다.
일행은 1차 현장 조사를 마친 후 용산의 뿌리 연구에 관해 2시간 정도의 토론을 벌였고, 이 자리에서 앞으로 이 일을 어떤 방식으로 펼쳐 나갈까에 대해서 의논하고 이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기로 했다.
모임에선 또 용산 바로알기 캠페인 차원에서 10월 23일 둔지산 일대 답사를 시작으로 그 줄기를 따라 남산과 인왕산을 거쳐 멀리 북한산까지 수주에 걸쳐 답사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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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객들이 경치에 반했던 용산
- 옛 시인들은 정자를 찾아 풍류를 즐기고 -
'용산'의 위치는 정확히 말하면 지금의 용산구 원효로4가, 산천동과 마포구 도화동 사이에 있는 산이다. 지금 이 산에는 많은 아파트들이 들어서 있고, 그 앞의 한강으로는 마포대교가 가로놓여 있다.
용이 물 먹는 모습의 산
조선의 이태조가 도읍을 한양 땅으로 정한 데는 이 곳이 위치, 지리, 교통, 방어 등 여러 면에서 그 입지적 조건이 그 어느 곳보다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 중에서도 풍수적인 면을 매우 좋게 보았다.
뒤로 북악(北岳)과 삼각산(三角山)이 든든히 울타리를 쳐 주고 있고, 주산(主山)인 북악에서 뻗어나온 맥이 양쪽으로 감싸고 흘러나온 데다가 앞에는 안산(案山) 구실을 해 주는 남산이 알맞게 자리잡고 있는 땅. 어느 누가 보아도 길지(吉地) 중의 길지임에 틀림이 없는 곳이었다.
서울의 주산인 북악은 지금은 대개 '북악산'이라 한다. 이 산에서 흘러나온 서쪽의 맥이 우백호(右白虎)이고, 동쪽의 맥이 좌청룡(左靑龍)이다. 좌청룡은 동쪽의 성북동 방면으로 해서 낙산(駱山)(지금의 이화대학병원이 있는 곳)까지 그리 길게 뻗지 못했으나, 우백호는 마포쪽의 한강까지 매우 길게 뻗어 있다.
북악산 서쪽 인왕산의 산세를 무악재를 통해 이어받은 길마재[鞍山=안산]는 그 줄기를 계속 남쪽으로 뻗쳐 '둥그재'[圓峴=원현: 지금의 충정로2가 경기대학 근처], '애오개'[阿峴=아현], '큰고개[大峴=대현, 만리재], 연화봉(蓮花峰), 효창원(孝昌園), 용마루 등을 거쳐 한강 앞으로 다가와 용머리 모양의 등성이를 솟군 후, 강물 앞에서 그 기(氣)를 죽인다. 이 맥이 바로 한양 고을의 우백호가 된다. 이 우백호의 끝 부분이 꼭 용의 머리를 닮았는데, 마포강 앞에서 물을 만나 그것을 마시려고 푹 숙인 모습이다. 지금의 '용산(龍山)'이란 이름은 용이 물을 마시는 모습의 산이라 해서 붙은 것이다.
용산은 그 앞으로 한강이 휘어돌아 경치가 무척 좋았다. 시인 묵객들의 좋은 놀이터였다는 이 곳엔 고려 시대에도 정자가 있었다고 문헌에 나와 있다.
고려 명종 때의 학자인 이인로(李仁老: 1152∼1220)가 이 곳의 정자에 묵으면서 지은 시 한 편을 보자.
두 물줄기 질펀히 흘러
갈라진 제비 꼬리 같고,
세 봉우리 산 아득히 서서
자라 머리에 탔네.
만약에 다른 날
비둘기 단장을 모시게 된다면
함께 저 푸른 물결 찾아
백구(白鷗)를 벗하리.
이 시에 붙인 서문이 있는데, 이를 보아도 당시의 이 곳 용산의 운치를 짐작할 수 있다.
'산봉우리들이 구비구비 서려서 그 형상이 이무기 같은데, 서재가 바로 그 이마턱에 있다. 강물은 그 아래에 와서 나뉘어져 두 갈래가 되고, 강 건너로 먼 산이 있어 바라보노라면 묏산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 말의 목은 이색도 용산을 지나다가 그 경치에 취해 다음과 같은 노래를 지어 읊었다.
'용산이 반쯤
한강물을 베개삼았는데,
소나무 사이 저 집에
묵어 못 감이 아쉽구나.…'
절벽 아래로 푸른 강물이 흐르고, 그 건너로 '너벌섬'[仍火島=잉화도: 지금의 여의도]과 '밤섬'[栗島=율도]이 보이고, 강 건너 멀리 관악산, 청계산 등이 보이는 산마루. 이 용산 마루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옛날부터 한양 일대에서 잘 알려져 왔다.
옛날에 용호(龍湖)라고 불렀던 지금의 용산 앞강 근처는 이처럼 경치가 좋아 그 일대에 심원정(心遠亭), 삼호정(三湖亭), 함벽정(涵碧亭) 등의 정자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없어져 버렸다.
엉뚱한 곳으로 '용산' 지명이 옮겨가고
용산은 이처럼 한강가에 솟은 하나의 산이름이었는데, 지금에 와선 '용산' 하면 하나의 지역 이름으로 알고 있다. 그나마도 용산이라고 불렸던 산 근처도 아니고 거리상으로 크게 떨어진, 용산역 앞 한강로 일대를 그렇게 부르고 있다. 이것은 일제 시대에 일본인들이 한강로 일대를 정비하고 자기들의 주거지로 삼고, 근처에 기차 정거장과 다리(한강대교)를 설치하고 큰길을 내면서 '새 용산'이란 뜻의 신용산(新龍山)이라 한 데서 나온 결과이다.
정확히 말하면 '용산'은 지금의 원효로4가와 마포로 사이에 솟은 둥그스럼한 산봉우리이다. 그러나, 지금은 주택들과 아파트들이 들어서서 '산(山)'이라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는다.
'용산'이란 땅이름은 대개 그 산모양이 용을 닮았다는 데서 유래하는데, 이러한 지명은 전국에 무수히 있다.
용의 옛말은 '미르'이다. 그러나, 용과 관련이 있는 산이라 해도 이 '미르'가 들어간 순 우리말 이름의 산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용산'이란 산은 지금의 용산성당이 있는 곳을 말한다.
이 산은 지금은 아파트와 학교 등이 들어서면서 낮아지고 건물들의 숲에 묻혀 어느 방향에서나 잘 보이지 않지만, 옛날에는 한강가로 불쑥 나가 있는 이 산의 모습을 근처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었다. 따라서, 옛 한양 사람들에게 익히 알려진 산이었다.
문헌에서도 용산이 서울 서쪽의 중요 지맥 끝자락임을 알리고 있다.
'도성의 서산인 인왕산이 사쪽으로 뻗어나가 추모현(追慕峴.무악재)이 되고, 다시 한 산줄기가 남쪽으로 약현(藥峴)과 만리현(萬里峴)이 되어 용산(龍山)에 이른다.' <동국여지비고>(권2) 산천조(山川條)
<동국여지승람>에도 양화나루(양화진.楊花津) 동쪽의 이 언덕을 '용두봉(龍頭峯)'이라 하였는데, 멀리서 보면 용머리처럼 보였던 '용산'을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증보문헌비고>에는 백제 기루왕 29년에 한강에 두 용이 났다고 하면서 '용산'이란 이름이 용의 출현과 관련지어 설명하고 있다.
경치 좋아 용산팔경도 나와
물 가운데로 머리를 쑥 내민 그 산마루에서 바라다보는 물가의 경치가 얼마나 좋았으랴. 예부터 여기서 바라다보는 경치 중 여덟 가지를 꼽아 '용산 팔경(龍山八景)'이라 했다.
1경 청계조운(淸溪朝雲)-청계산의 아침 구름
2경 관악만하(冠岳晩霞)-관악산의 저녁 안개
3경 만천해화(蔓川蟹火)-만천의 게잡이 불빛
4경 동작귀범(銅雀歸帆)-동작나루의 돌아오는 돛배
5경 율도낙조(栗島落照)-밤섬의 지는 해
6경 흑석귀승(黑石歸僧)-흑석동의 돌아오는 스님
7경 노량행인(露梁行人)-노량진의 길손
8경 사촌모경(沙村暮景)-새남터의 저녁 경치
여기서, 만천(蔓川)은 일제 때 '욱천(旭川)'이란 이름으로 바꾸어 왔던 '덩굴내'(지금의 용산 전자상가길 밑으로 지나는 내)를 말하고, '사촌(沙村)'은 '새남터'(지금의 서부이촌동)를 말한다.
고려 충숙왕도 찾아와 경치 즐겨
'용산'은 고려 때부터 주목해 온 명산이다. 고려 충숙왕 때는 이곳에 임시 행궁격인 왕의 전막이 있었고 여기서 '용산원자(龍山元子)'가 태어나기도 했다. 경치가 좋기로 이름난 용산은 옛날 고려 때에도 주목해 왔던 곳이다.
강물이 비탈 아래로 잔잔히 휘어 돌고, 그 가운데에 너벌섬(여의도)과 밤섬이 떠 있으며, 물 건너 남쪽 멀리로는 관악산과 청계산이 솟아 있어 한 폭의 그림 그대로였다.
고려 숙종 때(1096∼1105) 왕명을 받아 남경(南京)의 새 도읍터를 찾아나섰던 대신 최사추(崔思諏) 등이 서울 부근의 산수 지리를 답사할 때 맨먼저 찾았던 곳도 여기였다.
이러한 용산의 아름다움은 고려 왕실에서도 알려져 고려 25대 충숙왕은 그 12년(1325) 8월에 왕비 조국공주(曹國公主)와 함께 개경에서 한양으로 행차, 푸른 강물이 훤하게 내려다보이는 이 곳 용산의 산마루에 올라 작은 전막(氈幕)을 지어 행궁(行宮)으로 삼고, 3개월간 정무를 보기도 했다.
여기서 충숙왕에게는 아주 좋은 일이 생긴다.
그 해 10월에 원자(元子) 아기를 낳는 경사를 맞는 것이다. 한양에 행차한 지 불과 두 달, 행궁을 이 곳에 정한 지 스무 날만에 얻은 큰 축복이고 경사였다. 이 아기를 '용산원자(龍山元子)'라 하였다. 그러나, 그 기쁨은 잠시였다. 아기를 낳은 산모인 왕비가 산후 조리가 좋지 않아서였던지, 그 해 10월 20일에 저 세상으로 가고 만다. 이 때의 왕비 나이는 불과 18세. 이 갑작스러운 일은 왕자를 낳은 기쁨 속에 차 있던 충숙왕을 일시에 슬픔으로 몰아 넣었다.
아기를 낳기 전에는 충숙왕과 공주는 10리나 되는 긴 호수를 이루고 있던 이 곳 용산강에서 만발한 연꽃도 구경했다고 한다. 이러한 좋은 곳에 행궁을 마련했으나, 왕자를 얻고 왕비를 잃는 희비를 맛본 충숙왕은 더 머물고 싶지 않았던지 이 아름다운 용산, 그러나, 왕비를 잃은 슬픔을 안겨 준 한 많은 이 용산을 떠나 11월 4일에 다시 개경으로 훌쩍 돌아가고 만다.
그 달 9일, 왕비의 시신도 운구되었다. 왕비는 원나라 순제(順帝)의 손녀로서, 충숙왕 11년(1324)에 왕이 원나라에 가 있을 때 결혼한 여자였다. 당시 고려는 원나라 속국이나 거의 다름없는 상황이어서 고려의 왕은 원나라 왕녀와 결혼해야 하는 사정에 처해 있었다.
공주의 죽음은 낭설을 자아내기도 했다. 이 용산으로 왕을 오게 한 것은 조륜과 왕삼석 등이었는데, 이들이 왕을 유인해서 왕을 용산 한강가 습한 곳에 머물게 하곤, 공주로 하여금 알맞지 않은 환경 속에 아이를 해산케 해서 병에 걸려도 구할 수 없게 했다는 것이다.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긴 하지만, 외진 용산의 작은 전막에서 왕비가 세상을 떠났으니 여러 가지 설이 나오는 것도 어쩌면 당연할 수 있겠으리라.
용산원자는 그나마 그 뒤 원나라에 들어갔다가 17세의 새파란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만다.
미녀 시인들의 시 모임이 열리기도
고려 말에서 조선 말에 이르는 수백 년 동안 많은 문인들과 명사들은 용산 산비탈에 별장과 정자를 마련하고, 자주 올라와 풍류를 즐기며 시를 쓰기도 하며, 좋은 놀이터로 이용하였다.
조선 선조 때의 덕망 있는 대신인 남공철(南公轍)은 벼슬에서 물러나기 전에 이 곳 강 언덕에 집터를 마련하고, 미리 귀거휴양(歸去休養)의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임금이 퇴직을 허락하지 않아 그 안타까운 심정을 노래로 옮겼다.
'용산의 술집 장막을 꿈에도 잊을 수 없어
강가에 돌아와 살고자 언덕 위에 집을 지었다.
임금의 은택 지극하여 직책을 더디 풀어 주시니
날마다 사람을 보내어 꽃을 심었나 물어 본다.
호수 밖의 푸른 산이 저 멀리 보이는데,
책부터 먼저 실어 촌가로 내어 보낸다.
이 해 다시 저물고, 흰 머리털만 늘어 가니,
뜰 앞의 매화나무가 혼자서 또 꽃을 피우겠구나.'
이러한 그의 심정을 임금도 이해했는지 얼마 후 그를 영의정 자리에서 '봉조하(奉朝賀)'라는, 조금은 가벼운 직책으로 옮겨 준다. 그 후로 남정승은 용산의 정자로 나가 휴양할 수 있었고, 자주 이 곳을 찾아와 주는 원로 대신들과 함께 심원정(心遠亭)에 올라 아름다운 용산 풍경을 즐겼다.
용산강 언덕에선 김금원, 김운초 등 미녀 시인들의 삼호정(三湖亭) 시회(詩會)가 벌어지기도 했다. 원주 출신의 여인 김금원은 타고난 재질로 불과 14세에 국내 명승지들을 찾아 많은 명시를 지었다. 한양에 들어와서는 풍류 문인인 김덕희의 소실이 되었다. 김덕희는 벼슬길을 포기하고, 풍경 좋은 용산 언덕에 '삼호정(三湖亭)'이란 정자를 짓고, 소실인 금원과 함께 나와 거처하면서 경치를 즐기며 함께 시를 읊었다. 여기에 다시 금원의 친구인 여류 시인 김운초, 김경선, 박죽서, 김경춘 등이 자주 금원을 찾아 삼호정에 올라가서 강변 풍경을 명시로 옮겼다.
아름다운 경치 속에 미녀들의 시 모임. 용산의 멋진 그림은 그들이 만들어 냈다.
'……강 언덕의 봄 풀은 비단처럼 깔려 있고,
강 위의 푸른 물결 노란 석양을 흘려 낸다. ……'
'서호의 좋은 경치, 이 정자가 최고라오.
생각나면 올라가 마음대로 즐긴다오.'
금원의 이 삼호정 시들을 보면, 용산강의 옛 정취가 어떠했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용산 기슭에는 심원정과 삼원정 외에 파청루와 추흥정도 있었는데, 특히, 심원정은 임진왜란 때 화전 조약을 맺은 곳으로 유명하다. 지금 심원정 앞에는 천연기념물인 백송(白松)이 몇 그루 남아 운치를 더해 주고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져 버렸다.
전에는 마포의 염리동까지가 용산 영역
지금은 '용산'이라 하면 대개 용산역을 중심으로 한 일대로 알고 있지만, 옛날에는 지금의 마포구 염리동까지가 용산 영역에 속했다.
용산은 고려 말 이전에는 과주(果州)에 딸렸었다. '과주'는 지금의 '과천'에 해당한다. 이 용산 지역은 고려 22대 충렬왕 12년에 '부원군(富原郡)'이 되고, 조선 초에는 한성부 성저(城底) 10리의 구역이 되었다가 중기 이후에는 한성부 서부(西部) 용산방(龍山坊)으로 되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 직후인 1911년에 용산 일대는 경성부(서울) '용산면(龍山面)'이다가 그 3년 후에 이를 고양군으로 돌렸고, 1936년에 경성부 구역 확장에 따라 경성부로 다시 편입하였다. 이어서 같은 해 2월 13일 경성부 출장소를 설치하고, 1943년에 경성부 용산출장소로 개칭하였으며, 같은 해 6월 10일에는 용산구역소(龍山區役所)로 또 개칭함으로써 처음으로 '구(區)'자가 붙은 이름을 달게 되었다.
광복 후에 정식으로 '용산구'가 되긴 하였으나, '용산'이란 산의 북쪽 일대를 마포구로 넘겨 주면서 영역이 많이 바뀌게 됐다. 한때 용산면 관할이었던 도화동과 마포동, 공덕동, 염리동, 토정동까지를 마포구로 넘겨 주면서 용산은 지금과 같은 지역을 갖게 된 것이다.
마포와 연계되어 수운의 중심지로도 각광
용산 일대는 이태조의 한양 도읍 때부터 수도의 중요한 교통 중심지가 되어 왔다.
용산의 산기슭 한강물이 휘어도는 곳, 지금의 마포대교 일대의 강 주위를 '용산강(龍山江)' 또는 '용호(龍湖)'라고 했는데, 왕조 초에 이 강에 수로운전소가 설치되고, 수참전운사(水站轉運使)라는 벼슬을 두어 수로 운송을 원활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경상, 강원, 충청, 경기의 4도의 조세곡 수운선들이 모이는 등 수운의 중심지로 변해 갔다. 수군을 주둔시키고, 군자감(軍資監)을 설치해서 물자의 저장, 출납을 맡아 보게도 했다.
산 아래 한강물이 휘어도는 지금의 산천동 강가에는 '벼랑창'이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이 땅이름은 훈련도감에 소속된 군인들의 급료를 지급했던 창고인 별영창(別營倉)이 있어서 붙여진 것이다.
용산 일대가 군대 주둔지였음은 그 유적지들로 나타난다.
지금의 원효로3가 원효전신전화국 옆은 군자감에 딸린 강감(江監)터로, 옛날에 많은 군수 저장미를 쌓아 두었던 곳이다. 그리고, 원효로4가 성심여고 뒤쪽 언덕 일대는 선혜청(宣惠廳) 관하 구휼(救恤) 양곡을 저장하는 별고(別庫)가 설치되었던 곳이다. 이 별고를 '선창(宣倉)'이라고도 했는데, 지금의 이 곳 '신창동(新倉洞)'이란 동이름은 이 창고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비변사(備邊司) 군인들이 이용하던 우물인 '비변사우물'(다른 이름으로는 '응달우물')이 근처에 있는데, 지금은 구립 용산주차장 건물 아래층에 그 자리만을 남겨 두었다. 그 앞으로 지나는 길은 지금 '비변사우물길'이란 이름을 달고 있었으나 지금은 다른 도로명으로 바뀌어 버렸다.
'용산'은 이제 단순히 산(山)이 아닌 광역 지명이 되었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곳 한강가의 산이 용(龍)을 닮아 나온 것이다. 다행히 오래 된 역사를 가진 '용산성당(龍山聖堂)'이 산마루에서 아파트들 사이에서나마 우뚝 서 있어 그 위치를 잘 밝혀 주고 있다. 옛날, 용산의 경치를 즐기며 문인들이 시회를 열었던 삼호정은 지금의 용산성당의 묘지 아래쪽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함벽정은 지금의 성심여고 뒤쪽에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지금 이 근처에 '삼호정길, '함벽정길' 등이 지나고 있다.
역사와 함께 많은 것을 간직해 온 용산. 그리고, 그 아름다운 경치로 널리 알려졌던 용산. 이렇던 용산도 변화의 물결에 밀려 차츰 그 모습이 하나하나 허물어져 갔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용산 산머리에서 볼 수 있었던 그 아름다운 풍경들의 사라짐이다. 용산팔경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곳에 오르면 주위의 모든 자연 모습이 그림 그 자체였다.
휘어도는 한강 물줄기, 거기에 떠 있는 밤섬과 여의도, 북쪽으로 보이는 인왕산과 안산, 그 뒤를 든든히 받쳐 주고 있는 북한산의 웅장한 자태, 남쪽으로 보이는 새남터, 그 뒤로 멀리 보이는 관악산과 청계산, ……. 어느 것 하나 놓치고 싶지 않은 그림들이었다.
용산의 제일 명소였다고 할 수 있는 독서당은 딴 곳으로 옮겨갔고, 그 터엔 조선 말 세관감시소(稅關監視所)가 세워졌다가 그 후엔 영국인 브라운의 별장으로, 일제 때엔 총독부의 정무총감(政務總監) 별장으로 바뀌어 버리기도 했다. 자유당 시절에는 그 근처에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이 들어서기도 했다.
한강에는 밤섬이 없어져 버렸고, 여의도마저 마포 쪽에서 떨어져 나가 영등포 쪽으로 붙어 버린 데다 아파트나 고층 빌딩들이 묵직하게 얹혀 있어 그 옛날의 모습을 전혀 상상치 못하게 한다. 그런 데다가 강가로는 강변 도로가 강을 막아 물가의 경치들까지 완전히 사라졌다. 산의 남북으로 아파트나 다른 건물들이 들어차서 이젠 용산 산마루에서 볼 수 있었던 그 멋진 경치들을 거의 모두 잃고 말았다.
산 아래 산천동 저지대까지 물이 들어 호수와 같았던 좋은 풍경도 한강 연안에 둑이 생기고, 그 안쪽으로 아파트와 집들이 들어서면서 볼 수 없게 되었고, 정자나 별장들이 있었던 무성한 나무숲의 산비탈까지에도 작은 살림집들이 닥지닥지 들어서 있다가 지금은 아파트단지가 되어 용산의 본모습을 완전히 잃었다. 산허리가 뭉개져 버리고, 건물 숲에 가려져 이젠 마포나 원효로 등 어느 방향에서나 용산의 산머리조차 보이질 않는다. 산등성이에 있는 유서 깊은 용산성당의 종탑(鐘塔)도 산 아래 어느 쪽에서도 잘 보여 전에는 용산 산마루의 위치를 멀리서나마 잘 짐작하게 해 주었는데, 이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아파트(삼성리버힐, 삼성래미안 등) 숲에 묻혀 그 모습을 멀리서는 보기가 어렵게 되었다.
용머리를 물에 담근 채 계속 쉬고만 있던 그 말없는 용. 그러나, 철저하게 등을 할퀴어 버린 용. 이젠 그 아픈 상처를 못 참겠다는 듯이 고개를 번쩍 들고 화풀이라도 하지나 않을지? /// (글. 배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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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산마루 답사하던 날
첫댓글 용산성당 어떤 곳인가?
https://blog.daum.net/yongsanch/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