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유를 부은 여인(막 14:9)
예수님의 죽음이 임박해 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자신의 죽음과 다시 오실 때를 가르치시면서 제자들에게 시대를 분별하고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반면에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일 방도를 찾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그가 가르치시는 하나님 나라는 자신들의 종교적 위선을 드러내고, 종교적 기득권조차 위협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정죄받고 고립된 이들을 찾는 예수님의 삶은 끝까지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때에 한 여자(나사로의 누이 마리아 요 12:3)가 값진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 분주했던 그의 자매 마르다와 달리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데 집중했던 여인이었습니다.
베다니 나병환자의 집으로 추정했을 때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집에서 일어난 사건에 사람들의 반응을 주목해야 합니다. 매우 값비싼 향유 옥합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야 하는 것이 더 옳은 일이라고 판단한 이(가룟 유다)는 화를 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고 가족과 모든 소유를 버렸지만 여전히 그의 시선은 세상의 권력과 부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의 행동을 직접 목격했다면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교회를 향한 헌신을 폄하하거나 비난하는 모습들을 직시하게 됩니다.
여인의 행동에 대한 분노와 책망과는 다르게 예수님은 여인이 ‘내게 좋은 하였다(6절)’고 말씀하셨습니다.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던 예수님이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7절)’며 여인의 행동의 의미를 밝히셨습니다. 값비싼 향유를 깨뜨려 예수님께 부은 여인의 행동이 가난한 이들 가운데서는 가치와 효율성이 없는 무의미한 행동이었지만 임박한 예수님의 장례를 위한 여인의 헌신이라는 것을 일깨웠습니다.
건조한 기후의 유대 지역의 장례 풍습은 시신이 썩는 냄새를 방지하기 위해 시신에 향유를 바르고 굴 속에 안치하는 형태였습니다. 여인이 예수님의 죽음을 예측하고 향유를 예수님께 부은 것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돌발적인 여인의 행동은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기 위한 헌신이었다는 것을 예수님은 다시 한번 자신의 죽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리고 온 천하에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헌금을 드리면서 이 여인의 행동을 기억하는 찬송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위해서, 복음이 전파되는 현장을 위해서 값비싼 향유를 깨뜨린 여인의 행동에 집중하는 왜곡된 헌신을 강조하는 안타까운 교회 역사를 반성합니다.
여인의 행한 일과 그녀를 기억하라는 목적은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을 주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마 10:45). 가난한 자들을 도우시고,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선한 일을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신 예수님을 기억하기 위한 여인의 헌신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여인이 부은 향유의 헌신이 기억되어야 하지만 여인의 향유는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한 참목적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기 위해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하고자 깨진 향유 옥합처럼 예수님의 삶을 위해 우리의 향유 옥합을 깨뜨려야 합니다. 사람들은 분노하며 허비한다고 비난하지만 생명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깨뜨려진 향유 옥합처럼 목숨을 깨뜨린 예수님을 기억하며 예수님께 우리의 향유 옥합을 깨뜨리고 드리는 바다교회 가족이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