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의 몫까지 살았더니
오빠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 믿지 않았다. 오빠의 차가운 몸을 만지면서 울부짖었다. 하나님께 살려 주시라고 빌면서 오빠에게 애원하였다. “오빠 일어나! 그만 일어나! 빨리 일어나!”라고. 그러나 오빠는 야속하게 나의 절규를 외면하고 한 줌의 재로 세상을 떠났다.
오빠의 죽음이 인정되지 않아서 오랫동안 오빠와 비슷한 체형이나 얼굴을 가진 사람을 오빠로 착각하기도 하였다. 비슷한 음성이나 비슷한 옷을 입은 사람만 보아도 달려가서 확인을 하곤 하였다. 오빠와 함께 나눈 이야기가 때로는 시냇물처럼, 때로는 바람처럼 들려왔다. 오빠와 함께 걸었던 논길, 강둑길, 도시의 길을 걷노라면 눈물이 앞섰다. 함께 바라보았던 보름달, 함께 만들었던 눈사람, 함께 날렸던 연들, 함께 따먹었던 고드름, 함께 읽었던 만화책, 동화책 등 모든 것들이 나를 오빠와 함께 지냈던 옛 시절로 인도하였다. 혼자 길을 걸으면서 혼자 차를 마시면서 오빠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나는 서서히 오빠의 빈자리가 주는 상실의 고통과 비애를 극복하였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오빠가 일구어준 풍성한 삶에 대하여 깊은 감사를 드린다.
오빠를 너무 좋아하였던 나는 오빠를 그냥 보내드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오빠 몫까지 살기로 작정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의 몫을 살아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나는 무조건 살아내기로 하였다. 그래서 결심한 것이 착한 일을 두 사람의 몫으로 하는 것이었다. 나누고 섬기고 베푸는 일을 두 배로 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리고 오빠의 물건을 팔아서 그것을 종자돈으로 하여 조금씩 불려서 몇 십 년 후에 장학재단을 만들고 기념이 될 만한 건물을 짓기로 하였다.
결심대로 교회 절기 헌금이나 특별헌금을 오빠 몫까지 하였다.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 수해민이나 기타 어려운 이웃을 위한 나눔도 오빠 몫까지 하였다.
어디에 가서 노동봉사를 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오빠 몫까지 열심히 하였다.
나의 천직이 사람을 살피고 섬기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었지만 그것조차도 오빠 몫까지 한다는 심정으로 몰입해서 최선을 다하였다.
지극히 작은 자들을 위하여 몸으로, 돈으로, 시간으로, 마음으로 하는 모든 일에 오빠 몫까지 살아내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나는 늘 두 몫을 살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두 몫을 살 수 있도록 건강 주시라고 기도하였다.
두 몫을 살 수 있도록 시간 주시라고 기도하였다.
두 몫을 살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 집중하며 몰입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두 몫을 살 수 있도록 사람들을 사랑할 마음과 능력과 의지를 주시라고 기도하였다.
두 몫을 살 수 있도록 지혜와 지식을 주시라고 기도하였다.
두 몫을 살 수 있도록 언제나 부지런하며 강인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리고 아낌없이 나누며 베풀며 살 수 있도록 물질도 주시라고 빌었다.
오빠 몫까지 열심히 진지하게 살고 있는데 나의 과로를 염려하며 내가 하는 많은 일들을 성실하게 뒷바라지 해주시던 분이 외국여행 중에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왔다. 너무 기가 막혀서 전신의 맥이 탁 풀렸다. 나는 그의 죽음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한 끝에 그 분의 몫까지 같이 살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세 사람의 몫을 살게 되었다. 헌금이나, 나눔이나, 봉사나, 무슨 일에든지 나는 세 사람의 몫으로 살고자 하였다.
한 사람이 어떻게 세 사람의 몫을 살 수 있을까?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거의 사십 년에 이르도록 이런 의문을 한 번도 가지지 않고 세 사람의 몫을 사는 것이 운명이며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세 사람을 살아내기 위해서 시간과 건강 그리고 마음을 잘 사용해야 했다.
한 사람이 세 사람을 살아 내려고 하니 무엇보다 많은 삼가와 절제, 영감과 통찰, 에너지가 필요하였다.
무엇보다 먼저 그 분들이 살아 있으면 하고자 했을 선한 일에 대한 분별을 해야 하였다.
세상의 모든 선하고 의로운 일을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다 할 필요도 없는 것이므로 나는 많은 일들 중에서 우리 세 사람이 기꺼이 함께 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해야 했다. 그래서 항상 생명의 위협을 겪는 작은 자들, 고아와 과부들의 일에 우선순위를 두게 되었다.
둘째로 가능한 많이 나누기 위해서 단순한 삶을 지향하였다.
의식주 모든 생활을 조촐하고 소박하게 하였고 취미생활이나 여가생활도 주변의 산과 들을 즐기는 것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단순이 나의 최고 아름다운 것이 되었고 최고 가치가 되었다.
셋째로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시간을 잘 사용하는 훈련을 하였다.
집중해서 일하여 시간을 줄였고 일하는 방법에 도가 터서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하는 훈련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TV시청이나 유튜브 등을 보는 일로 시간을 죽이지 않았고, 할 일없이 빈들거리는 일이 없어서 시간이 모자라지 않았다. 시간을 질적으로 잘 사용하기 위해서 몰입하다 보니 마음이 흩어지지 않아 기억력도, 이해력도, 아이디어도 좋아졌다. 뿐만 아니라 창작력, 통찰력, 영감도 번득인다.
넷째로 하나님께 세 사람 몫의 축복과 공급을 받으며 살았다.
세 사람으로 나누고, 돕고, 봉사하고 싶어도 힘이 약하고 부치고 모자라고 지칠 때 마다 하나님께 세 사람을 살 수 있도록 세 사람의 에너지, 기쁨과 평화, 지식과 지혜. 능력과 의지. 집념과 열정을 주시라고 기도하였다. 그리고 생기와 지혜, 능력과 권세를 차고 넘치도록 받아서 절망과 슬럼프를 극복하며 살았다. 지금도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에너지를 공급받아 살고 있다.
다섯째로 세상을 떠난 분들의 몫을 사노라니 세상의 것에 대한 탐욕과 집착이 사라졌다. 그분들이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았으며 세상에서 공로나 업적이나 누렸던 것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안식하는 것을 보았다. 먼저 세상을 떠난 그분들이 나에게 살아 있는 인간이 받는 인생의 최대 축복과 추구할 수 있는 최고의 가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혼자 그러나 셋이 함께 사는 삶이 스콜처럼 장쾌하기도 하고 메마른 광야를 걷는 것처럼 힘들 때도 있었지만 혼자 기도하여도 세 사람의 기도이기 때문에 언제나 간절하고 절박하였다. 그래서인지 응답도 빨랐고 결실도 많았다.
그런데 2005년 7월 7일, 존경하는 대선배님께서 갑작스레 돌아가셨다. 그분은 살만큼 사시며 많은 나눔과 섬김을 하신 분이기에 그 분의 몫을 살지 않아도 되는 분이었다. 그런데 소천 소식을 듣는 순간 눈물이 쏟아지고 가슴이 화산처럼 타올라서 그 몫도 살기로 다짐하였다.
사인이각으로 살아온 삶이 어느덧 14년이 흘렀다. 그 때부터 나의 일이 급물살을 타서 무엇이든지 생각하면 생각하는 대로 잘 되었고 결과가 늘 기대 이상으로 나왔다.
코로나팬데믹으로 모든 것이 정지된 시간에 혼자 네 사람의 몫을 일한 다는 것이 불가능하게 보였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들은 그들의 몫을 훌륭하게 감당하였다.
오직 정치인들만이 세상을 치료하며 살리는 영웅처럼 인식이 되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들이 정해주는 규칙에 순종하는 일 외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상황 속에서 나는 기도 외에는 할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사람들을 만나는 것과 교회를 방문하는 것 자체가 금기가 되니 족쇄를 차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족쇄를 차고서 돌아앉은 세상은 들을 수 없는 기도,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는 기도를 바치는 것이 나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신음 소리, 기도 소리를 들어 주셨다.
비록 혼자 기도를 드렸지만 그들의 탄식과 염원이 함께 하여서 우리는 작년과 올해에 이어 대대적인 코로나 긴급구호를 수차례 반복할 수 있는 공급을 받았다. 인도와 네팔의 받는 쪽에서 긴급구호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할 때까지 지원을 계속 하였다. 올해 만해도 9곳에 3 차례의 긴급구호로 수천 세대를 구호하였다. 현재는 홍수 이재민 320세대 1200여명을 긴급구호 하였고 매일 150여 명의 사람들에게 거리 급식을 하고 있으며 여성들의 자립을 위해 올해 55마리의 돼지를 나누었고 80여명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었다. 고아원 신축 건물을 지었으며 세 개의 고아원 운영을 지원하였다.
지난 삼십여 년 동안 오빠의 차가운 몸 앞에서 결심한대로 오빠 몫을 열심히 살았다. 지금은 오빠를 부르면 오빠가 어린 시절 추억과 함께 나를 동심의 세계로 인도한다. 오빠의 이름을 부르면 살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오빠는 나를 어여삐 여기며 격려해 주셨다. 아직 오빠의 이름으로 아직 장학재단을 만들지 못하였지만 인도 어느 건물에 오빠 이름의 기념실을 만들었다. 그리고 오빠 이름으로 두 명의 가난한 아동들과 자매결연을 맺었다. 앞으로는 오빠 닮은 아이들과 장학결연을 맺어 오빠와의 약속을 지킬 것이다. 다른 두 분과는 두 분의 뜻을 받들어 두 분의 몫까지 사랑의 십자가를 지겠다고 했으니 인생 마지막 순간까지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을 믿는다.
자신의 삶도 살기 어려운 인생길에서 사랑으로 가슴 아파하며 고인의 몫까지도 대신 살고자 했던 결심과 마음가짐 때문에 나는 가난하고, 단순하고, 절박하고, 몰입하며 집중하는 삶을 살았다. 혹자들은 이런 나의 삶의 고백을 자아도취나, 자기최면으로 치부해버릴 수도 있지만 나는 실로 세 배, 네 배의 나눔과 섬김, 노력과 노동, 인내와 이해를 하며 살았다. 오빠 몫을 살기로 다짐했던 순간부터 나는 세상에 살면서 세상을 초월하여야 하는 운명의 사람이 되었다. 그런 마음을 나에게 부어주시고 잊지 않도록 생각나게 하시며 약속을 지키며 살도록 도와주시는 성령 하나님께 무한 감사를 드린다. 오빠의 죽음 앞에서 오빠 몫을 살기로 결심한 것이 내가 받은 인생의 크나 큰 축복이었으며 하나님의 은혜였다.
천국에서 오빠를 만나는 날, ‘오빠 사랑해! 보고 싶었어.’ ‘오빠 고마워. 오빠는 내 인생의 멋진 멘토 였어.’라고 말할 것이다.
2021.11.30. 깊은 밤
우담초라하니
첫댓글 오빠, 지원자의 죽음
세 몫 다짐.
아름다운 삶이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