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터키)는 면적이 78만 평방키로 한국의 8배, 인구8,600만 명의 나라다. 튀르키예는 한마디로 자연과 종교,문화가 다채로운 나라로 나는 세계에서 관광하기 가장 좋은 국가 하나를 고르라면 서슴치 않고 튀르키예를 꼽겠다.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이 세운 나라로 이스탄불은 동로마의 수도였고 기독교의 국가였으나, 7세기 이슬람제국의 지배하에서 이슬람 국가가 되었다가 19세기에는 다시 이슬람교를 배제하는 국가가 되었다. 이런 흔적들이 도처에 유적과 유물로 남아 볼거리를 제공한다. 또한 다른 곳에서는 볼 수없는 지하에 건설된 도시,바위 동굴집, 버섯모양의 기암괴석들,석회 온천,아름다운 열기구 관광, 성당과 이슬람의 모스크 등등 참으로 볼거리가 많은 나라다.
★ 튀르키예 역사
페르시아 제국이 BC 6세기에 이 지역을 차지했으며, 그 이후 그리스 헬레니즘 세력권 안에 들어갔다가 BC 1세기경에 로마에 넘어갔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을 수도로 삼으면서 비잔틴 제국의 영향권 안에 들어갔다.
11세기에 투르크 유목민의 한 집단인 오구즈족이 동쪽으로부터 침입해 들어왔다. 12세기에는 오구즈족의 일파인 카이족이 아나톨리아의 동부와 중부를 차지하고, 카이족의 오스만 1세가 오스만 왕조를 세웠다.
13~14세기 오스만족은 마침내 서부 아나톨리아와 남동부 유럽의 비잔틴 영토를 차지하고 그리스도교를 신봉하는 발칸 국가들을 속국으로 삼았으며, 동부 아나톨리아의 투르크멘 공국을 점령했다. 15세기에는 더 나아가 발칸 속국들을 직접 통치하고,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여 유프라테스 강(동쪽)과 헝가리(서쪽)까지 영토를 넓혔다. 16세기말경에는 그 세력이 절정에 달해 발칸 제국과 중부 유럽의 헝가리, 중동, 북아프리카 지역 대부분을 포함하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오스만 제국은 술탄 쉴레이만 1세(1494~1566)의 통치 이후로는 정치적·행정적·재정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1718년경 오스트리아가 헝가리에서 투르크족을 축출했으며, 러시아는 1783년에 크리미아를 합병했다.
오스만 제국은 19세기에 발칸 제국 대부분과 이집트의 통치권을 잃었다. 19세기말에는 소수 민족과 소수 종교분파에게 지방자치를 용인했던 밀레트(비이슬람 종교자치제) 체제가 붕괴되기 시작하여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조직적인 박해가 시작되었고 결국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이라는 비극을 낳았다. 1908년에 젊은 투르크인들이 혁명으로 제국을 되살리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발칸 제국에서의 군대와 영토 상실로 인한 어려움은 계속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중 튀르키예는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편에 가담했다. 전후 아라비아의 여러 속주와 일부 지역을 잃었지만 격렬한 시민전쟁과 그리스와의 전쟁 결과 1923년 로잔 조약으로 지금의 국경선이 생겼고, 케말 아타튀르크를 대통령으로 한 튀르키예 공화국이 탄생했다. 술탄제와 칼리프제는 폐지되고 아타튀르크의 지도 아래 현대화가 시작되었다.
아타튀르크는 튀르키예의 정치·경제·사회체제 전반에 대한 급진적 개혁을 시도했다.
그는 이슬람의 지배적 역할을 축소하고, 튀르크어를 아랍 문자 대신 라틴 문자로 쓰도록 하므로써 튀르키예 사회에서 종교의 영향을 축소시켰다. 또한 이후 오랫동안 영향력이 지속된 국가통제 방식의 경제발전 정책을 마련했다. 1938년 아타튀르크 사망 후 불안정한 기간과 짧은 군부 통치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의회정치 및 다당제가 정착될 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중에는 중립을 지켰으나, 전후 서유럽과 제휴하고 미국의 군사·경제 원조를 받았다.
1952년에는 NATO에 가입했으며, 1953년에는 발칸 협정의 조인국이 되었고, 바그다드 조약(1955, 후에 CENTO로 이름이 바뀜)과 유럽 경제협력기구(OEEC) 및 유럽 의회에 가입했다. 1959년에는 그리스와의 3년에 걸친 키프러스 분쟁을 잠정적으로 해소했다. 1961년 튀르키예 제2공화국이 출범하면서 새 헌법이 채택되었으며, 1963년에 유럽 공동시장의 준회원국이 되었다.
1963년말 키프로스에 거주하는 그리스인과 튀르크인들 사이의 분쟁으로 키프로스에서 내란이 일어나자 그리스와 튀르키예 양국 관계가 급속히 냉각되어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갔으나 국제연합(UN)의 압력으로 전쟁이 억제되었다.
12007년 개헌을 통해 대통령의 임기를 5년으로 하고 중임이 가능하도록 했으며 직선에 의해 선출되도록 했다. 이 헌법에 의해 2003년부터 총리로 재임했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이 2014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대통령이 된 뒤에 대통령 중심제 개헌안을 추진했는데, 2017년 개헌 국민투표에서 결국 개헌안이 통과되었다. 이 개헌안은 내각책임제에서 대통령중심제의 변경과 대통령의 임기를 5년 중임으로 하되, 중임 임기중에 대통령이 조기선거를 단행하여 당선되면 다시 5년의 임기 수행이 가능하도록 했다. 이 새 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와 총선거가 2018년 6월 24일에 실시되었고, 개표 결과 현 대통령인 에르도안 대통령의 당선이 발표되었다. 헌법에 의하면 에르도안 대통령은 최장 2033년까지 집권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 문화 측면에서 페르시아 제국은 BC 6세기에 이 지역을 차지했으며, 그 이후 그리스 헬레니즘 세력권 안에 들어갔다가 BC 1세기경에 로마에 넘어갔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을 수도로 삼으면서 비잔틴 제국의 영향권 안에 들어갔다. 11세기에 투르크 유목민의 한 집단인 오구즈족이 동쪽으로부터 침입해 들어왔다.
튀르키예의 장구하고 다양한 문화유산은 페르시아·아랍·비잔틴·오스만·서유럽 문명에 기반을 두었다. 아타튀르크의 개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에 대한 이슬람의 영향력을 줄인 일이었다. 오늘날에는 민족주의가 튀르키예 문화를 지배하고 있다.
튀르키예는 오스만 제국이 몰락한 이후 1923년에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세운 공화국으로서 1946년까지 1당 국가체제를 유지했다. 이후 여러 정당들이 집권 경쟁을 벌였고 대부분의 기간에 문민 의회정치로 운영되었다.
★ 외교측면에서 튀르키예는 1949년 8월 대한민국을 승인했으며, 1950년 6·25전쟁에 UN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우방국으로서 1957년 3월 8일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한 뒤 긴밀한 우호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이후 한-튀르키예 양국은 2012년에 전략적 동반자관계로 격상되었다. 한국은 1984년 채문식 국회의장, 1989년 김재순 국회의장, 1990년 강영훈 국무총리, 1996년 이수성 국무총리, 2005년 노무현 대통령, 2008년 한승수 국무총리, 2009년 김형오 국회의장, 2012년 이명박 대통령이 튀르키예를 방문했으며, 튀르키예는 1982년 에브렌 대통령, 1986년 외잘 총리, 1990년 에르뎀 국회의장, 1991년 아크불루트 총리, 2018년 5월에 에르도안 대통령이 방한했다. 한편 튀르키예는 북한과 2001년 6월에 수교했다. 북한은 주 불가리아 대사관이, 튀르키예는 주 대한민국 대사관이 양국의 외교업무를 겸하고 있다.
튀르키예에는 한글학교 4개교가 설립되어 있어 교민과 튀르크인의 한글교육에 이바지하고 있으며, 2017년에 창립된 튀르키예한인회총연합회는 양국민의 친선을 증진하고 있다. 2011년에 튀르키예의 수도 앙카라에 개원한 한국문화원은 한국의 문화·예술을 튀르키예 현지인들에게 알리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2023년 기준 튀르키예에는 2,697명의 재외동포가 있으며, 이들 대부분은 튀르키예의 수도에 거주하고 있다. 한국에는 2023년 기준 2,886명의 튀르키예의 국적의 등록외국인이 거주하고 있다.
★이스탄불은 흑해 어귀에 있는 튀르키예의 주요 도시이다. 구릉성 3각형 반도의 요충지에 있다. 보스포루스 해협 양쪽에 걸쳐 있어서 유럽·아시아 양 대륙에 속한다. BC 8세기말경 그리스인들이 비잔티움을 세운 곳으로, 324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1세가 수도로 채택했고, 후에 콘스탄티노플로 개칭되었다. 1453년에는 오스만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1923년 튀르키예 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수도가 앙카라로 옮겨졌고, 1930년 이스탄불이라는 이름으로 공식 개칭되었다. 튀르키예의 역사·문화의 중심지였으며 수많은 유적들이 남아 있다. 유럽 지구와 아시아 지구를 잇는 보스포루스 다리는 세계에서 가장 긴 고속 현수교 가운데 하나이다.
심 산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