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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배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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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각화사와 태백산사고지답사기
신-맘(김말순) 추천 0 조회 48 11.05.30 14:50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태백산사고지와 각화사

 

 

이번 답사는 봉화군 문화재지킴이모임의 월례행사로서 이루어졌는데,

10월 봉화군문화재지킴이월례회에서 11월은 태백산사고지와 각화사를 탐방하기로 결정한 바있었다.


이지역을 답사코스로 정한 이유는 각화사와 사고지는 지리적으로 직선거리 500미터정도로 가까이 있고 역사적 비중도 크기 때문이다.



먼저 오늘 답사할 태백산사고지와 각화사의 개요를 살펴보면



태백산사고지는

사적 제348호이며 1991년 지정되었으며, 지정면적 1,091 m2

이다.

경북 봉화군춘양면(春陽面) 석현리(石峴里) 산 126-5번지 소재해있으며 태백산맥의 지맥(支脈)인 각화산(覺華山:해발고도 1,176.7 m) 정상부 가까운 곳에 있다.

1592년(선조 25)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춘추관(春秋館) 및 충주와 성주(星州)에 있던 사고가 불타 실록 등 중요한 서적이 소실되고 전주사고만 남게 되자 1606년 명종(明宗)까지의 실록은 다시 발간하고 영변(寧邊)의 묘향산, 강릉의 오대산, 무주의 적상산(赤裳山)과 함께 봉화의 태백산에 사고를 지어 새로 발간한 실록을 보관하였다.


그리고 각화사는

686년(신라 신문왕 6)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였으나, 불에 타버린 것을 고려 예종(睿宗) 때 계응(戒應)이 중건하였다. 1777년(정조 1)에는 이곳에 태백산사고(太白山史庫)를 지어 왕조실록(王朝實錄)을 수장하게 하였으며, 수도하는 승려가 800명이 넘어 3대 사찰의 하나가 되었다.



오전 9시. 지킴이회원이신 강백기선생님의 집 만산고택 (만산(晩山) 강용(姜鎔:1846~1934)이 건립한 가옥으로 경상북도민속자료 제121호이다)에 20여회원들이 모였다가 5대의 차로 나누어타고 각화사를 향해 출발하였다.



춘양은 경북 봉화군의 중북부에 위치한 면으로, 북부로 백두대간이 지나고 동부로 낙동정맥이 흐르는 태백산의 기슭에 위치해있다.현재인구는 6000여명가량의 한적한 시골면이지만, 1950년대부터 영동선의 개설과 함께 목재의 벌채와 수송의 중심지로서 10만여 인구가 모이는 큰 장터가 형성되었던 곳이다.



요즘 날씨가 차지않다고 하여도 이곳 춘양은 지대가 높아 아침저녁으로 겨울날씨다. 만산고택을 나서는데 돌담 응지의 고들빼기가 서리에 쌓여 하얗다.



각화사와 태백산사고지는 각화산 속에 있다. 각화산은 춘양에서 보면 북쪽의 검푸른 산인데 다른 산들보다 머리하나 크기만큼 더 크고 산등성이도 넓어 크고작은 앞산들을 감싸안은 모습이다. 각화산은 가운데를 가르는 골의 윤곽이 멀리서 보이는데 골을 따라 아래쪽에 각화사가 있고 윗쪽에 사고지가 있다.



춘양면에서 영월방향으로 10여분 올라가면 뜰의 모양이 부채와 같다고 해서 ‘부채뜰‘이라는 동네가 나타나는데, 석현이라고도 한다. 올라가는 길 옆으로 ’운곡천’이라고하는 하천이 흘러간다. 운곡천은 낙동강의 상류지천이다. 아침저녁으로 구름이 자주 일고, 맑은 1급수에는 수달이며 골뱅이 꺽지 등이 많다.



그곳까지 오는동안, ’비녀쏘‘ ’미찌골‘, ’돌고개‘라는 지명들이 차례로 지나간다. 그 중에서 미찌골이 눈에 띄는데. 국도에서 우측으로 접어드는 입구가 좁은 골이다. 길을따라 안으로 들어가면 예상 밖으로 넓은 농지와 2십여농가가 있다. 이 ‘미찌’라는 이름은 ‘미로‘라는 뜻이었는데 전하는 바로는 이조단종대왕 폐위시에 숭흥 안씨들이 금성대군과 연루되어 멸족위기에 이르자 피난차 숨어서 찾아든 곳이라고 한다, 그리고 임진왜란시에는 각 성씨들이 피난차 숨어들기도 하였다고 한다.



십승지의 하나로 심심찮게 봉화를 꼽는 감결서가 많은데 이와 연관되지는 않았나 생각해보았다.



지킴이회원들은 석현에서 차를 내려 각화사로 들어가는 삼거리에서부터 가을의 정취를 느끼며 걸어 올라가기로 하였다. 각화사 입구에서 각화사까지는 약 2.5킬로미터정도 된다. 경사가 완만하고 깊은 계곡과 사과과수원이 이어진다. 입구에는 약 30여호의 농가가 있는데, 소나무를 키우는 농장도 보인다. 1.5킬로미터부터는 인가가 사라지고 떡갈나무와 아름들이 적송이 서로의 영역을 다투는 자연림에 들어선다.

 



적송들은  2~3백년은 된 것 같다. 수관부에 가지와 잎이 늘어지고 몸집이 가늘어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우람한 둥치를 실감한다. 수피가 붉고 미끈하며 나무의 중간부터 위쪽으로 올라가면 거북등모양의 껍질이 나타나는데, 이 소나무를 춘양목이라고 불렀다, 옛날에는 임금님의 관을 이 춘양목의 심재인 황장으로 만들었다. 요즘도 궁궐을 보수하거나 문화재를 수리하는데에는 굳이 춘양목을 선별하여 사용하는이유는, 심재가 치밀하여 내구성이 좋기 때문이다.



길을 따라흐르는 계곡에는 고등어만한 열목어가 살았다. 요즘은 불심이 깊어졌는지 각화사 경내에 살고 있다.



각화사의 입지는 대단한 오지에 속한다.

이 오지에 각화사라는 큰 절이 들어서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불교가 속세와 떨어져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 절 역시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라 사람이 살만한 곳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건립당시 통일신라초기의 불교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위세를 지니고 있었음에 유의해보자. 각화사의 건립연도는 686년. 원효대사가 창건했다. 이때는 신라가 한창 국세를 떨칠 때였다. 동쪽과 남쪽으로는 왜구를 제압하였고, 서쪽과 북쪽으로는 당나라와 힘의 대결을 벌이고 있었다. 인근지역에서 각화사와 비슷한 시기에 건립된 사찰로는 청량사. 축서사. 부석사가 있다. 이들 절은 모두 산속에 위치하는데, 당시 호국불교로서 신라가 국세를 떨치면서 삼산오악사상의 확장과 함께 그 위세를 보여주는 대찰들이었다.



신라가 당나라와의 결전을 승리로 이끈 후 신라는 내부적으로 자신감에 넘쳐있었다. 신라는 영토가 넓어지면서 사고의 확장경험을 가진다. 신라는 화엄계사찰을 통해서 만법귀일의 화엄사상을 유포하고 백제, 고구려유민에 대해 통일감을 심어주고자하였으며, 사찰을 중심으로 유민의 감시와 억압의 기능도 하였다. 당시의 사찰들이 이 각화사와 마찮가지로 예외없이 폐쇄적이고 요새화된 공간에 자리잡고 있는데 청량산성 안에 있는 청량사의 경우가 그 기능을 극명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30여분을 걸어서 지킴이들은 각화사 입구에 도착했다. 우측편 언덕 위에 각화사 부도군이 있고,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189호로 지정된 각화사 귀부가 있다.



각화사는 지대가 높고 솔숲에 가리어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어떤 스님은 각화사의 위치에 대하여 각화사는 ‘태백산 정상에서 100리 정도 남으로 내려와 좌청룡 우백호를 거느린 천혜의 수행 도량’이며 “五龍이 여의주를 다투는 형국이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도 이렇게는 만들기 어려운 명당”이라 극찬하였다한다.


우리가 선 곳에서 절이 보이지 않는 것은 우리가 통상 혈이라고 부르는 곳의 바로 옆에 서있고, 각화사는 혈의 윗부분 두툼한 둔덕 위에 서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각화사 일주문 계단아래에 서서 올려다보면 가파른 계단 위에 일주문의 처마가 보인다. 그곳을 통해 각화사 경내에 들어갈 수 있고, 다른 길은 돌벽을 20미터쯤 돌아 옆으로 돌아간다. 돌벽은 근래에 다시 쌓아올린 것이지만 마치 계획된 성곽처럼 보인다.



각화사 경내는 고요하다.


각화산이 큰 몸집으로 절을 감싸고있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이곳에는 안거기간 석달반동안 하루 2~3시간만 자면서 18시간씩 정진하는 전국유일의 가행정진도량인 ‘태백선원‘이 있다, 특히 태백선원에서는 고우스님 유명한데, 지금은 각화사의 좌측편 산기슭에 위치한 서암에서 숙도하고 계신다 한다. 지역민과 관청에서 태백산사고지를 복원하고자 노력하였으나 현재 각화사측에서 난색을 표하는 것은 이 태백선원 때문이라고 한다.



외부인의 소란한 방문은 방해가 되겠기에 가능한 몸가짐을 조용히 하고 지킴이들은 정숙히 경내를 둘러보다가, 돌확에 떨어지는 샘물 한모금씩을 마시고 우측편 산길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태백산사고지는 각화사에서 뒤편, 직선으로 오백미터쯤 위쪽의 골짜기에 있다. 그곳으로 올라가는 길은 동쪽과 서쪽 양갈래로 나있는데, 우리는 동암이 있는 오른쪽 산길을 따라 올라갔다가 반대쪽 서암 옆으로 내려오는 길을 택하기로 하였다.



얼마 올라가자 뒤편으로 각화사 경내가 눈에 들어온다.

고요하기도하고 완고해보이기도 한다.



각화사에서 20분가량 걸어올라가면 가파른 중턱에 자리잡은 작은암자 동암이 나온다.

동암은 얼마전 입적하신 초삼선사가 10여년간 철조망을 치고 장좌불와 용맹정진하신 곳으로 불교계에 유명하다.



동암에서 태백산사고지까지는 25분가량 소요된다.

조선시대에는 이곳 어딘가 산의 중부능선을 따라 봉화와 안동의 경계가 지나고 있었던 것 같다.


이에대한  효종 5년의 실록기록을 보면


정유성이 아뢰는 바

'태백산 사고(史庫)는 봉화땅에 있는데 그 산밑은 춘양현(春陽縣)으로 안동 땅입니다. 그 경계가 우회되어 있고 섞여 있어서 사고를 왕래할 때에 봉화땅에서 출발하여 반드시 춘양현을 거친 다음 다시 돌아서 사고가 있는 봉화 땅으로 들어가야 합니다.'하며 불편함을 호소하고,

이에대해 이경여는 '옛 사람이 이르기를 학(鶴)의 다리가 아무리 길어도 잘라내면 슬퍼하고 오리의 다리가 아무리 짧아도 덧붙이면 넘어진다고 하였으니 장단(長短)의 이치는 억지로 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열성(列聖)께서 이루어 놓으신 법은 특히 의당 준수해야 하는 것입니다.'하며 정유성의 의견을 반대한다. 더하여 영돈녕부사 이경석은, '사고(史庫)가 생긴 이후 곧 이 길을 설치하여 경계가 서로 섞이게 하여 견제하게 한 것은 그 정해진 제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선왕의 법을 어찌 경솔히 고칠 수 있겠습니까?' 하여 이경여를 편들면서 경계는 유지되었다.

 

 



암자 뒤로 길이 없어진 것처럼 펀펀한 언덕이 나오는데 나무와 나무사이를 지나 위로 올라가면 백두대간 등산로의 일부분인 산등성가 나타나면서 북쪽편은 찌를 듯 솟아오른 거친 산세와 깊은 계곡이 숲의 바다처럼 펼쳐진다.

부드러운 햇빛이 어루만지던 산세며 마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날카롭고 쟁쟁한 풍경처럼 크게 소리치면 거칠 것 없이 어디든 목소리가 가 닿을 것만 같다.


이 등성이를 따라 뒤로가면 왕두산이 나온다.


우리는 오르막을 택하여 각화산 정상으로 갔는데, 이 높은 곳에는 언제 쌓았는지 모를  석축이 보인다. 각화사가 건립되는 시기가 될 수도 있고, 이후 임진왜란이후나 일제시대 때의 석축일 수도 있으나 시기에 관계없이 이 능선이 전략적으로 유용한 점이 있었나보다 짐작한다.


산의 중턱이상을 올라오면 남쪽으로 우리가 올라온 길이 휘어져있고, 춘양면의 집들이 바가지에 뜬 것처럼 한눈에 보인다. 조망에서 신기한 점은 사십리 밖에 있는 사람의 움직임도 확인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내가 산등성이에 있을 때 마침 춘양면내에서 김이장님이 전화를 하셨길래 ‘거기서 각화산 꼭대기를 보세요. 이곳에서는 이장님이 잘 보입니다.’했는데, 이장님은 그저 농담인가 여기는 것 같았다.


좁고 경사가 심한 등성이를 따라 올라가다가 좌측편을 유의해서 찾아보면 내리막 오솔길이 나타나는데, 사고지는 그 아래에 있었다.



현재 태백산사고지는 급격한 경사지에 철제 울타리가 쳐진 안쪽으로 잘 정리된 평탄지 위에 주춧돌만 찾아볼 수 있다. 문화재지킴이들은 주위의 헝클어진 수풀을 다듬고, 버려진 쓰레기를 찾아 주웠다. 그리고 사고지터에 둘러앉아 준비해간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으며 우리는 태백산사고지가 이곳으로 오게된 연유에 대하여 각자의 의견을 나누었다.

다음은 우리의 토의를 종합한 개략적인 내용이다.



태백산사고는 한양의 춘추관, 강화도, 묘향산, 오대산 사고와 함께 조선 후기 5대 사고 중 외사고(外史庫)의 하나로, 선조 39년(1606년)에 설치돼 일제시대인 1913년까지 300여 년간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곳이다. 일제가 주권을 침탈한 이후 이곳에 보관돼 있던 실록은 규장각 도서와 함께 조선총독부로 옮겨졌다가 다시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겼다.

이후 빈 건물로 30여 년간 방치되었다가 독립군과 일본군의 교전으로 인한 화재로 완전히 무너졌다고 한다. 그 뒤 산사태 등으로 터마저 알아볼 수 없었던 것을 1988년 겨우 터만 발굴하고, 1991년 2월 사적 제348호로 지정했다. 태백산 사고본의 실록은 부산의 정부기록보존소에 보관돼 있으며, 영인본으로 간행된 것은 이 태백산 사고본이다.



임진왜란 이젠에는 4대사고로 한양의 춘추관과 함께 충주,전주,성주에 사고가 설치되어있었다. 사고지가 이곳에 들어오게 된 까닭은 선조25년(1592년)에 임진왜란으로 서울 춘추관, 충주사고, 성주사고가 소실되고, 전주사고본만 남아 내장산, 해주, 강화도, 묘향산으로 소개하여 겨우 난을 면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제14대 선조 27년(AD 1594) 9월에 비변사에서 외사고 설치를 필택절험지 인적부도처 삼재불입지에 설치하여 환난을 방비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며, 선조 38년(1605년) 10월 경상도관찰사 류영순의 장계  에 의하여 태백산(각화산)으로 입지가 결정되었고 동 39년(AD 1606) 5월에 새로 재간된 조선왕조실록(중초)을 봉안하게 되었다.



사고의 구조는 실록각이 세워지고 선원각, 포쇄각, 근천관 의 순서로 배치되었고 방 3칸 중층으로 된 실록각과 선원각의 둘레이는 담장을 쌓았고, 그 북쪽에 동문을 달았다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당시 조선은 유교사회로서 지배층은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하는 숭유억불정책을 펴고 있었다. 당시의 스님은 천민으로서 도성의 출입조차 제한되었었다. 이는 조선이 구정치이념의 극복과 새로운 대안제시라는 차원에서 유교를 표방한 면도 있고, 신라시대 지배층의 고급불교이념이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대중화되어 조선의 지배층은 새로운 자신들만의 고급이념이 필요했다는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중기의 집권층은 왜란과 호란을 격으며 매우 불안정한 상태에 접어들고 있었다.

특히 임진왜란때 조선의 정규군은 왜군에게 연패를 거듭하며 무능을 드러내었다. 그에 반하여 천민을 포함한 백성들이 조직한 의병과 승병들은 강인하고 질긴 저항을 보여주었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4대사고가 모두 관청에 있었는데, 이후 5대사고를 설치하면서 4곳을 절의 호위에 위탁한 것은 사명대사 등이 활약한 불교계의 위상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사고지의 설치와 관련하여 삼재불입지 등의 풍수용어가 나오는 것은 민간에 전승되던 비결류에 언급되던 10승지의 존재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10승지는 풍수적으로 길지를 의미하기도하지만 백성의 입장에서는 밖으로 외세의 침략으로 인한 환란과 함께 안으로 조정이나 벼슬아치의 권력의 횡포에 대해 피난할 수 있는 지역을 의미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권력자의 입장에서 보면 10승지는 권력을 부정하는 개념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집권층은 자신들의 자존심과 같은 중요한 문서를 보관하는데에 있어서 불교와 민간풍수설에 의존한 것은 시대적 상황이 그들의 선택을 강요한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점심을 다 먹고 지킴이들은 배낭 가득 쓰레기를 채웠다. 내려오는 길은 주민들이 3년전 각화사의 선방을 피해 새로 만든 우측 길을 택하였다.

사람들의 통행흔적이 적어서인지 낙엽이 많이 쌓였고, 처음 길을 만들 때 쳐낸 나뭇가지들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아름드리 소나무의 줄기마다 빗살무늬의 칼자욱들이 새겨진 것은 송진을 채취했던 흔적이다.



우리가 다시 각화사 경내로 돌아오는 길은 15분가량 소요되었다.



내려오는동안 나는 이지역의 형세가 외세에 위태롭게 흔들리던 조선중기의 유교사회와 왜구와 당나라를 압도하던 초기통일신라시대의 불교사회가 사고지와 수호사찰로 대비되었다. 그리고 혹 조선중기의 유교사회의 지배층은 통일신라시대의 힘찬불교사회에 도움을 요청하고 싶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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