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10장
1. 번성의 이유(1-12)
신앙생활을 잘해서, 하나님께 복을 받으라는 말을 많이 들을 수 있지만, 사람이 아무리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해도, 하나님께 복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으로 변하지 않습니다. 신 28장에 보면, 하나님의 복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지켜 행하는 사람에게만 해당됩니다.
그 말은 누구도 하나님의 복을 받을만한 사람은 없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철저히 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지켜 행하는 수준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무엇을 해도 우리는 흠있는 자이고, 복이 아니라 저주가 마땅한 존재일 뿐입니다. 이 같은 사실을 바탕으로 할 때, 하나님의 은총의 의미가 생생하게 증거될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의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바벨론에 포로가 되게 하신, 유대 민족을 예루살렘에 돌아오게 하시고, 큰 힘을 이루어 헬라민족으로 치도록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또 유대인들을 용사의 칼과 당긴 화살같이 만드시겠다는 말씀도 하십니다. 강한 자가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유대 민족으로 돌아오게 하시고, 큰 복을 누리게 하시겠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대 민족이 이같은 복을 누릴 만한 사람으로 변한 것은 아니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곧 하나님의 복은 유대 민족의 신앙이나 인간됨과는 상관없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10장의 내용도 9장의 연속입니다. 1절 “봄비가 올 때에, 여호와 곧 구름을 일게 하시는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무리에게 소낙비를 내려서, 밭의 채소를 각 사람에게 주시리라.”
농사에 있어서, 비는 없으면 안되는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가 없다면, 그것은 곧 생존 문제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이스라엘에게 비는, 하나님의 축복이고 은총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비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소나기를 내려서, 풍성한 채소를 먹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구하면 주시겠다는 뜻인데, 이것은 하나님과 유다 백성의 관계가 문제없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2-5절을 내용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상을 섬기는 이방 민족들을 쇠하게 하시지만, 유대인들은 오히려 강성해져서 용사 같이 되게 하시고, 대적들을 밟게 하신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믿는 사람은 잘되고, 믿지 않는 사람은 망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지 않습니까? 믿는 자는 잘되고, 믿지 않는 자는 망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고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구별할 수 있을까요? 물론 교회를 다니는 것을 제외하고 말입니다. 믿는 자라고 해도 삶의 방식을 보면, 세상과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과 똑같이 힘을 추구하는 인생을 걷고 있습니다.
성도라는 이름으로 무엇을 해도, 그 중심에는 자신이 있습니다. 곧 믿음도 자기 유익을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이방인이 자기를 위해, 우상을 찾는 수준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이방인은 쇠하게 하시고, 유대인은 강하고 번성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까? 무엇을 근거로 이방인과 유대인을 구별하시느냐는 것입니다.
그 답을 6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6절 “내가 유다 족속을 견고하게 하며, 요셉 족속을 구원할지라. 내가 그들을 긍휼히 여김으로, 그들이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가 내버린 일이 없었음 같이 되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라. 내가 그들에게 들으리라.” 이 말씀에서 구별의 근거가 될 만한 말은 무엇일까요? 긍휼입니다.
유다 족속을 돌아오게 하시고, 견고하게 하시고, 구원하시는 모든 근거는, 바로 하나님이 그들을 긍휼히 여기셨다는 것에 있습니다. 비를 구하면 소낙비를 내려서, 풍성한 소출이 있게 하시는 근거도 긍휼입니다.
긍휼히 여기시는 것은, 사람이 조건이 아닙니다. 곧 긍휼히 여길만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기로 작정한 자를 사랑하시고, 미워하기로 작정한 자를 미워하십니다. 곧 사랑과 미움은, 이미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방식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롬 9:13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야곱이 착해서 사랑하기로 하신 것이 아니라, 창세전의 택함입니다. 그렇다면 미움을 받게 된 사람은, 억울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선악과를 먹은 후, 인간은 이미 하나님께는 미움의 대상일 뿐입니다.
곧 미워할 자를 미워하는 것이기 때문에, 부당하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사랑은 미움을 받아야 할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자가 사랑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사랑에 대해 감사와 기쁨으로 반응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성도입니다.
엡 6:4-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를 사랑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은총을 베푸신 이유를,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성도의 존재이유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총은 저주가 마땅한 우리를, 저주에서 해방시키시고, 생명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근거가 내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에 있음을 잊지 않는다면, 자신의 본분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에 있음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유다를 돌아오게 하시고, 그들을 강하게 하시고, 번성하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에도, 이같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8절 “내가 그들을 향하여 휘파람을 불어 그들을 모을 것은, 내가 그들을 구속하였음이라. 그들이 전에 번성하던 것 같이 번성하리라.”
하나님께서 유대 족속을 모으시고, 번성하게 하시는 이유,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속하셨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속하시고, 하나님의 소유로 삼으셨다는 것이, 그들을 모으고 번성하게 하시는 이유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신 구속의 언약이, 그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고, 번성의 길로 가게 한 것입니다.
유다가 이 은총을 알고 잊지 않는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번성한다고 해도, 번성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또한 번성을 힘으로 여기지도 않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총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넘치도록 부어주신 은총과 긍휼의 결과일 뿐입니다.
12절 “내가 그들로 나 여호와를 의지하여 견고하게 하리니, 그들이 내 이름으로 행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한다는 것은, 인간의 이름과 수고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여호와를 의지하는, 믿음 위에 견고하게 서 있는 성도입니다. 자신에게는 나타낼 가치 있는 것이 전혀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게 하시고,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생명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시고, 생명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도록 붙드십니다.
이 놀라운 은총의 이유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에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를 긍휼히 여길 자로 택하신, 하나님의 은총이며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오늘 여러분을 있게 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