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은 죄의 다른 이름일 뿐이며, 치유는 신의 다른 참이름일 뿐이다.
아버지, 당신께서는 당신의 아들이 드리는 어떤 요청도 결코 저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가 어디에 있든, 자신의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든, 자신이 무엇이 되었다고 믿든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는 당신의 아들이며, 당신께서는 그에게 응답하실 것입니다.
기적은 당신의 참사랑을 반영하며, 따라서 그에게 응답합니다.
당신의 참이름은 모든 죄의 생각을 대체하며, 죄없는 사람은 고통을 겪을 수 없습니다.
당신의 참이름이 당신의 아들에게 응답하니, 당신의 참이름을 부르는 것은 단지 그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예수의 추가 설명]
병은 그대가 신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에고의 가장 강력한 주장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대의 몸이 스스로 잘못되는 것처럼 생각될 때, 그대는 배신당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사실 그대의 몸은 스스로 잘못되지 않는다.
그대가 가진 생각과 믿음의 주파수를 반영할 뿐이다.
병을 믿으면, 병에 걸릴 수 있다.
죽음을 믿으면, 죽을 수 있다.
그대의 현 발전 단계에서, 그대는 내가 지구에서 살았을 때 했던 것처럼 과거의 병을 보아야 한다.
그 방법은 내가 사람들을 치유했을 때 한 것이다.
나는 그들이 건강하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졌고, 당시 공부와 실천을 통하여 얻은 나의 주파수가 아주 높아서 나는 그들의 믿음을 기각할 수 있었고,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음을 증명하였다.
그대에게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
몸이 아프면 마음 안으로 들어가서 어디에 병에 대한 믿음이 자리 잡고 있는지, 그 믿음이 무엇인지 탐구하고 바꾸기 바란다.
우리는 그대가 기적심을 일으키기 바란다.
곧 병에 대해 말하는 대신에, 다른 사람들과 그대의 병에 대해 나누는 대신에, 그대의 느낌이 얼마나 나쁜지 말하는 대신에, 그대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라.
“나는 건강하다!
나는 결코 병에 걸리지 않는다!”
그러면 진동 주파수가 변화가 생길 것이다.
그대가 아픈 것은 그대의 믿음 때문이다.
그대의 몸은 그대의 마음의 결과이다.
그렇게 단순하다!
...
[알렌의 설명]
제가 생각하기에 기적수업은 오늘 레슨에서 그러는 것처럼, 늘 우리가 동일시하지 않는 것들을 동일시합니다.
병은 다만 죄의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치유는 다만 하느님의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그리고 오늘 레슨 끝부분에 있듯이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다만 그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수업은 우리가 하느님을 발견할 때 우리의 자아를 찾은 것이라고, 또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자아를 찾을 때 우리는 하느님을 찾은 것이라고 암시합니다.
수업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완전히 다른 것들이 실제로는 같은 것이라고 끊임없이 말하는 듯합니다.
수업은 새해를 맞아 “올해를 똑같게 만듦으로써 올해를 다르게 만들어라.”라고 조언합니다.
수업은 지속적으로 모든 것을 단 하나의 문제, 즉 분리의 문제로 요약하고 해결법은 속죄로 요약합니다.
그리고 수업은 복잡성은 에고의 것이라고, 그러므로 단순함은 하느님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병과 죄가 어떻게 같은 것일까요?
이것은 병과 죄가 같은 것이라는 말과는 상관없는 말입니다.
죄라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죄가 있다고 상상할 뿐입니다.
오늘 레슨은 절대로 만약 당신이 병들었다면, 그것은 당신이 죄 많은 사람이기 때문이라거나, 또는 병에 드는 것은 당신을 죄인으로 만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병든 것은 전혀 죄책감을 느낄 일이 아닙니다!
만약 당신이 아픈데 누군가
“너 뭔가 잘못한 게 틀림없어.
왜냐하면 영적인 사람은 아프지 않거든.”이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 말에 귀 기울이지 마세요.
우리 마음이 하는 생각은 물론 병을 일으킵니다.
<심리치료>에 의하면, 모든 병은 마음의 병입니다.
그러나 잘못 생각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런 생각은 단지 실수일 뿐입니다.
오늘 레슨이 병은 죄의 다른 이름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몸의 병은 마음이 가진 죄의 실재성에 대한 믿음이 반영, 혹은 현현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기적수업은 병은 일종의 자기 처벌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죄책감 때문에 우리가 예상하는 하느님의 처벌을 피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우리 자신을 공격한다고 말합니다.
“병은 밖으로 내보내져 몸에 얹어진 분노이다.
따라서 몸은 고통 받을 것이다. "
저는 기적수업이 병(sickness)이라는 단어를 사용 할 때, 일반적으로 몸의 증상이 아니라 병에 대한 생각이라고 생각합니다.
("병은 마음의 것이며, 몸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예를 들어 불구가 된 사지는 에고에 의해 이용되어 자격지심이나 죄책감, 분리의 생각을 조장할 수 있습니다.
또는 성령에 의해 사용되어, 그 당사자가 몸과의 동일시를 깨고 그 사람들을 하느님께 의지하도록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생각, 오직 생각뿐입니다.
병은 진리에 대항하는 하나의 방어수단입니다.
우리는 기적수업의 사고체계에서 병을 포함한 모든 것은 우리가 내린 선택이며, 또한 그 선택은 그 뒤에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육체적인 증상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선택과 그 뒤의 목적입니다.
우리가 아프겠다고 선택할 때, 우리는 어떤 수준에선가 우리 자신을 영이나 마음이 아닌 몸과 동일시하겠다는 선택을 내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대항하고 있는 진리는, 우리가 영이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 그리고 하느님 안에서 모든 이와 하나라는 깨달음에 맞서 방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플 때 우리는 이 작은 먼지 덩어리를 초월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이상하지만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생각은 침묵하고 고요해집니다.
병은 몸을 실재, 유일하게 실재적인 것으로 보이게 만듭니다.
병은 몸이 정체라는 환상이 우리 마음의 진리, 우리의 영적 정체의 자리를 차지하게 만듭니다.
그러면 병이 왜 죄와 같을까요?
워크북에 의하면, 죄는 마음이 환상들로 하여금 진리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는 수단입니다.
이건 바로 정확하게 병이 하는 일입니다!
내가 나 자신이나 어떤 형제 안에서 죄를 볼 때 그 죄인이 악하다고 증명해 주며, 그러므로 하느님과 떨어져 있다고 증명해 줍니다.
내가 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 안에서 병을 볼 때 몸이 실재이며, 따라서 하느님과 떨어져 있다고 증명해 줍니다.
병과 죄는 둘 다 마음이 분리가 실재라고 증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이라는 면에서 같습니다.
병과 죄는 형태는 같지 않지만 그 목적은 동일합니다.
그 둘 다 내가 나의 정체가 아님을 증명하려는 에고의 시도입니다.
수업은 결과가 아니라 원인과 관계가 있습니다.
저는 만약 마음이 치유된다면(만약 어떤 사람이 생각 수준, 즉 원인 수준 에서 치유된다면) 종종 그 사람의 삶의 형태에 변화를 가져온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이 바뀌면 종종 행동이 바뀝니다.
생각이 바뀌면 몸의 건강이 종종 좋아집니다.
그러나 몸 수준의 변화는 전혀 기적수업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몸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몸은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몸이 중요하지 않다면 몸이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 생각이 하느님의 생각에 맞춰 정렬된다면, 몸은 어떤 형태이든 성령의 목적을 위해 기여할 것입니다.
비록 몸이 죽을지라도.
수업은 오직 마음의 치유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몸은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치유는 다만 신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치유하는 것은, 내 마음과 하느님의 마음의 정체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치유된다는 것은 내가 하느님의 본성을 공유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수업이 치유에 대해 말할 때, 수업은 독감을 극복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업은 몸은 나의 자아가 아님을, 나는 영원히 하느님의 아들임을 인식함으로써 오한과 발열로 고통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몸과의 동일시를 내려놓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늘 그렇듯이 수업은 마음의 변화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나 자신과 내 몸의 동일시가 깨질 때, 나는 내 몸에 일어난 일은 내가 누구인지에 영향을 미치지 않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몸에 일어난 일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몸은 좋아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내가 더 이상 몸과 동일시하지 않을 때, 나는 몸이 무엇인지 신경 쓰지 않을 것입니다.
죄와 병은 둘 다 우리의 분리에 대한 믿음과, 그로 인한 죄책감이 현현된 것이므로 똑같은 것입니다.
죄와 병은 모두 용서의 기적을 통해 치유됩니다.
치유는 온전함으로의 하느님과 하나인 우리의 자아로의 귀환입니다.
모든 치유는 하느님께로의 귀환입니다.
용서와 치유의 기적을 제공하는 것은 하느님을 향한 부름입니다.
이것을 달리 말하자면, 결국 모든 치유는 하느님에게로 인도해 줍니다.
비록 우리가 치유를 경험할 때, 하느님에 대해 생각하거나 하느님을 믿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만약 어떤 것이 치유라면, 그것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심리 치료>는 “환자가 구원에서 진척을 이루기 위해 진리를 하느님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라고 말합니다.
치유가 있다면, 그리고 정죄 대신에 용서가 있다면 비록 그분의 이름을 부르거나 그분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하느님이 거기에 계십니다.
용서하기를 배우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가 어디에 있는, 무엇이 그의 문제처럼 보이든, 또한 그가 무엇이 되어버렸다고 믿든 전혀 상관없습니다.
우리가 부를 때 하느님이 응답하십니다.
비록 우리가 하느님을 부르고 있음을, 우리 자신이 깨닫지 못할 때조차도 말입니다.
하느님은 심지어, 우리가 하느님의 응답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할 때조차도 응답하십니다.
저는 우리가 하느님을 수 백 번 이상 불러 왔으며, 그분이 응답하셨지만 우리는 그것을 연관 지어 생각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심지어 하느님의 도움을 받을 때조차 그분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수업은 우리의 고통과 두려움이 바로 도움을 달라는 요청이라고 말합니다.
당신은 만약 성령이 모든 도움의 요청을 있는 그대로 인식한다면, 그 각각의 모든 요청에 응답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그는 당신의 아들이며, 당신은 그에게 응답하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분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응답하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은 그분의 존재나 본성을 간략히 칭하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정체에 의해 응답받을 것입니다.
그분의 정체는 그분의 아들로서의 우리의 정체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는 죄가 없으므로 우리도 그렇습니다.
죄가 없으므로 우리는 병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병은 죄에 대한 믿음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완벽한 결백함을 깨달을 때, 나는 고통 받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은 저에게 그런 결백함에 대해 말해주며, 그럴 수밖에 없음을 말해 줍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어떻게 거룩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저로 하여금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게 하소서. (제가 바로 이 단어를 쓰든 아니든).
저로 하여금 결백함, 온유함, 그리고 자비에 마음을 열게 하소서.
저 자신과 다른 이들을 위해 치유가 제 목적이 되게 하소서.
오늘 모든 만남에서 다음을 기억하게 하소서.
<나는 치유하기 위해 여기에 있다.
나는 기적을 제공하기 위해 여기에 있다.
나는 죄책감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