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연습장 30년 / 백현
노래연습장에 처음 갔을 때가 생각난다. 그해에 전근해 온 미술 선생님은 나보다 일 년쯤 선배였는데, 아주 감각적이고 유머 있는 사람이었다. 재미있을 뿐 아니라 여러 분야에 걸쳐 아는 것도 많고, 관심도 다양해서 얘깃거리가 끊이지 않았다. 내 또래 선생님 몇은 퇴근 후에 그녀의 자취방에서 깔깔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그즈음에 유행하기 시작하던 노래연습장이 과역에도 두어 군데 생겼다고 했다. 본가가 있는 광주에서 이미 몇 번 가본 그녀는, 학생을 지도하는 교사들은 모름지기 그런 것을 잘 알아야 한다고 했다. 꾐에 빠진 우리는 그녀를 앞세우고 그곳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1992년인지 1993년인지 조차 정확하지 않고, 그녀와 나를 뺀 다른 사람을 기억할 수도 없는데도, 그날 노래방에서 느낀 감정은 선명하다. 그녀가 처음으로 마이크를 잡고 부른 노래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였다. 그 노래가 처음 나왔을 때 청소년들이야 열광했지만 어른들은 뜨악해하는 노래였다. 그런데 그녀는 그 노래의 랩을 정확히 따라 하며 가수 같은 몸짓과 매너를 보여주었다. 그 순간 뒤통수를 맞는 것 같았다. 어른들이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청소년들이 부르는 노래까지 저렇게 따라 한다고?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저 노래를?
대학 때 잔디밭에 둘러앉아서 과 모임을 하거나 학교 앞 막걸릿집에서 모임이라도 할라치면 으레 노래를 부르곤 했었다. 그때 선배들이 부르던 “찔레꽃 붉게 피는…….”이나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 “나 태어난 이 강산에……” 이었다. 노래방에서 ‘난 알아요’를 듣는 순간 느껴지던 간극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내가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전까지는 노래를 못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잘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중간은 되는 노래 솜씨라고, 솔직히 중에서도 상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나름대로 박자도 잘 지키고 음정도 맞는 편이며 노래의 분위기도 잘 살리는 편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부를 노래를 찾는 것도 어려웠고 박자를 제대로 맞추지 못해서 쩔쩔맸다. 그녀가 처음이라 그런다고 웃으며 위로하던 모습이 남아있다.
분명 중고등학교 음악 시간과 대학 동아리 활동에서 나름대로 검증받은 보통 수준의 노래였다. 그런데 노래연습장에서 부르면 박자와 음정을 아슬하게 넘나들곤 한다. 부르고 싶은 곡을 부르다 보면 분위기를 가라앉히거나, 주제도 모르고 긴 노래를 하는 사람이 된다. 신나고 짧은 곡을 불러서 그 겸연쩍은 시간을 건너려는 노력으로 시작하여 30년 동안 갖은 전략을 구사했다. 다른 이들이 못 따라 하는 신곡 부르기, 분위기 있는 노래로 승부하기, 탬버린 기술로 홀리기, 춤곡으로 분위기 띄우기 등의 신공 끝에 이젠 깨달음을 얻었다.
노래 못하는 사람이라도 자기 마음대로 부르면 안 되나? 게다가 나는 못하는 것도 아닌데? 노래를 잘 못 부르는 취급을 받아도 이제는 내 마음대로 부른다. 어렵거나 길거나, 느리거나 분위기 처지거나 신경 쓰지 않는다.
첫댓글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를 잘 소화시키는 귀여운 미술 선생님. 하하
다른 이들이 못 따라 하는 신곡 부르기, 분위기 있는 노래로 승부하기, 탬버린 기술로 홀리기, 춤곡으로 분위기 띄우기
저도 한 수 배웠습니다.
오랫만에 글로 만납니다.
노래방 전략 배워두면 좋을 것 같지만 저는 포기하렵니다. 하하!
노래방 전략까지 아는 것을 보니 선수네요.
처음 생겼을 때는 많이 다녔어요. 선생님의 30년 내공을 보니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잘 읽었습니다.
자꾸자꾸 부르면 는답니다.
노래방 전략 하나 추가합니다.
기계의 음정을 그대로 두고 부르면 저처럼 타고난 음이 살짝 낮은 사람은(저는 합창부에서 늘 메조소프라노 파트를 맡았답니다.) 부르기 힘들답니다.
그러니 가수의 음의 높이를 고려하여 키를 조금 올리거나 낮추면 됩니다.
가령 장윤정이나 소찬휘 노래는 그대로 부르면 일반인은 거의 소화 못합니다.
그러니 두 키 정도 낮춰서 불러야죠.
반대로 남자 노래는 무조건 여자키로 바꾸지 말고 자기 음에 비슷하게 음정을 조정하면 됩니다.
이승철이나 조용필은 가수 자체가 음이 높아서 저는 남자키 그대로 두고 부른답니다.
제가 스스로 터득한 건 아니고, 기타와 노래 동아리에서 활동했던 후배 선생님이 오래전에 가르쳐 줬답니다.
보성 우리 집에 오는 친구들은 제가 맞춰주기에 다 가수가 된답니다.
언제 우리 집에 놀러 오세요. 하하.
언제 가서 지도를 좀 받고 싶네요. 히히
@백현 그러면 누구나 가수가 된답니다. 하하.
잘 읽었습니다.
노래방이 처음 생겼을 때 날마다 가다시피하는 친구가 있었어요. 노래하는 게 즐겁다고, 자기는 다시 태어나면 가수할 거라고 하는데 음정을 진짜 못 맞췄거든요. 이 친구를 보며 못해도 즐기면 되는구나 싶은데 저는 즐기지도 못해 가는 걸 싫어한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