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쉬는 날 / 조미숙
아침 햇살이 창가에 비춰든다. 긴 머리를 뒤로 묶고 하늘거리는 레이스 앞치마를 두르고 손을 씻는다. 또닥또닥 칼질 소리가 잠든 집안을 깨우고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 냄새가 따뜻하게 식구들의 코로 스며든다. 남편과 아이들이 일어나 안아주고 입맞춤한다. 정결한 식탁 위엔 예쁜 장미꽃이 꽂힌 꽃병이 있고 정성 들인 반찬이 하얀 접시에 맛깔스럽게 담겼다. 반짝반짝 빛나는 아침이다. 이렇게 살려고 했다.
결혼하면서 부엌살림은 신랑이 가져다주는 걸로 채웠다. 시댁이 그릇 가게를 하는데 따로 준비하기도 뭣하고 해서 돈으로 드렸다. 평소 그릇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되는대로 썼다. 밥은 할 줄 알았지만 제대로 요리도 할 줄 모르니 더욱 그랬다. 우리 엄마 말대로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시집이란 걸 갔다.
세월은 흘러 좁은 집에서 세 아이가 복닥거리며 커가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거기에 코딱지만 한 부엌이 늘 불만이었다. 도마 하나 제대로 놓을 자리가 없었다. 어찌 됐건 갖춰야 되는 살림살이는 늘어만 갔다. 가능한 요리가 한두 가지 늘어가는 만큼 부엌은 손이 들어갈 틈 없이 복잡해졌다.
어쩌다 보니 김치는 담가 먹고 살지만 살림은 내 분야가 아니다. 이사만 가면 그림처럼 해 놓고 살 것 같았는데 도루아미타불이다. 식구가 줄었는데도 집은 여전히 난장판이고 살림살이는 늘었다. 여전히 누군가 집으로 초대하는 일은 대단히 어렵다. 사람들을 불러 먹이는 것을 좋아하는데도 말이다.
깨끗하게 정리 정돈 잘 된 집을 볼라치면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진다. 난 왜 이렇게 못하는지 자책감에 빠진다. 그래 좀 치우고 살자. 과감하게 버리고 살자. 아니 애초에 사는 것도 좀 자제하자. 그때뿐이다. 하루 마음먹고 치워도 해결이 안 된다. 치워야지 하다가도 주렁주렁 매달린 게으름이 나를 붙잡는다.
남편은 도시락을 싸 간다. 밥과 국만 챙겨가고 나머지는 내가 틈틈이 준비해 준 반찬을 가게 냉장고에 두고 먹는다. 예전에는 이른 시간에 가게 문을 열고 시어머니가 나오면 집으로 들어와 아침 먹고 출근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새벽에 나간다. 아침하고 점심 두 끼를 도시락으로 챙긴다. 아침잠이 많은 나는 주부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그래서 저녁은 가능하면 정성껏 챙긴다. 하지만 매번 반찬 걱정하는 게 실로 만만치 않다. 딸과 남편의 입맛은 상극이다.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모른다. 늦게 일이 끝나는 날엔 지쳐 들어오지만 앉지도 못하고 부엌으로 가야 한다. 그냥 사 먹거나 대충 때우고 싶어진다. 어쩔 땐 왜 같이 일하는데 여자만 끼니 챙길 걱정을 해야 하는지 억울하기도 하다. 하지만 늦게 퇴근하는 남편을 어쩌랴? 생일도 결혼기념일도 외식하는 일이 없다. 늦은 시간에 분위기 있는 곳에서 근사하게 앉아 먹을 수 있는 곳은 없다. 그런 날도 혼자 먼저 챙겨 먹는다.
이러니 남편은 아이들과 같이 식탁에 앉는 일이 드물었다. 그래서 토요일 저녁은 가급적이면 나가서 함께했다. 배가 고프면 간식이라도 먹어가며 기다렸다. 주로 늦게까지 영업하는 고깃집이다. 그것이 굳어져 토요일은 밥을 하지 않는다. 유일하게 부엌이 쉬는 날이다. 물론 평일에도 때때로 배달 음식을 시켜 먹기도 하지만 토요일 저녁은 온전한 자유가 주어진다. 사실 외식비나 건강 생각하면죄책감이 일기도 하지만 딱 눈 감아 버린다.
남편이 한 달에 한 번 첫 주 일요일에 쉰다(그나마도 일이 있으면 건너뛰기도 한다). 그날도 내 휴무일인데 그때는 연휴가 된다. 토요일 저녁도 입만 놀리면 되는데 다음 날도 그렇기 때문이다. 남편은 늦은 아침에 라면을 끓여주고 설거지까지 한다. 가만히 앉아 밥상 받는 기분이 속된 말로 째진다. 바람을 쐬러 가거나 하면 또 사 먹는다. 남편 카드 고지서의 숫자가 늘어나도 그저 좋다. 주부로서 내 식구 입에 건강하고 맛있는 음식 들어가게 해 주는 기쁨에 살기는 글렀다. 남이 해 준 밥은 다 맛있다.
첫댓글 첫 문단 읽고 댓글 달기는 처음입니다.
웃겨 죽겠습니다.
계속 읽을게요.
야, 나도 첫 문단 얘기 쓸라고 했는데!
@송향라 찌찌뽕.
두 사람, 쌍둥인가요? 어쩜 그리 쿵짝이 잘 맞나요?
댓글마다 두 사람 거 읽는 재미가 쏠쏠하네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조미숙 저도 그릇은 사지 않았습니다. 원래 신랑이 씽크대 공장에서 일했는데 신랑이 결혼만 한다면 씽크대 공짜로 해주다고 하셨는데, 돈은 다 받고 씽크대 공장 사모님이 그릇을 선물해 주셨답니다.
'남이 해 준 밥은 다 맛있다.'까지 완벽한 마무리네요. 신나게 폭풍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그쵸? 주부들은 부엌에서 해방되는 자유가 제일 좋죠!
엥? 저도 첫 문단 읽고 혹시 말미에 어느 영화의 한 장면이라고 적혔나? 하고 요리조리 살폈답니다. 하하하
하하하!
남자의 첫 문단은 간단합니다. '아침일찍 츄리닝을 입고 아내가 하는 가게의 셔터만 올리며 살려고 했다' 하하하.
여자 셔터맨도 필요하지요.
저도 1문단처럼 살고 싶었어요.
우아하게 커피 한 잔으로 아침을 시작하는.
우리 함께 다음 생을 꿈꿔 봐요.
이생에 글른 것이 너무 많군요. 환생을 수없이 해야...
눈 지긋이 감고 잘 사십시다. 게으른 사람들 하하하.
네, 잘 살고 있습니다.
반찬챙겨 밥상을 차려야 하는 주부들은 정말 고역이겠다는 생각을 늘 합니다.
주부의 노고를 알아주면 고맙죠. 선생님은 부엌 일도 잘 하실 것 같아요.
밖에서 진을 빼고 집에 오면 아무 것도 하기 싫은 그 마음 동감입니다. 퇴근길에 밖에서 저녁 해결하고 올 때도 많습니다. 지친 나를 스스로 위로하며.
좋은 방법이네요. 고맙습니다.
우아하게, 공감합니다.
그런데 저도 바깥에서 남의밥 차려주다 집에오면 정말 하기싫어 진답니다. 본인들이 해결하라고 서서히 길들이고 있어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