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보다 필연 / 양선례
친화력이 좋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동료와도 크게 다투지 않고, 그럴 기미가 보이면 미리 피한다. 오래 만난 사람이 맘에 들지 않아도 그동안 그 사람과 쌓은 시간이 아까워서 웬만하면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런데도 초등학교 때부터 한 골목에서 자라서 단짝이 된 친구와 50년을 이어오던 인연을 끝냈다. 내가 한 말실수가 그녀의 심기를 건들었고, 여러 번의 사죄에도 그녀는 마음을 풀지 않았다. 어떤 말로도 야무지게 빗장을 걸어 잠근 그녀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나는 남은 친구와 여전히 잘 놀지만, 내가 미운 그녀는 모임에서 탈퇴하고, 다른 친구들과도 절연했다. 그 모든 게 나 때문인 것 같아 한동안 괴로웠다.
몇 년이 지나서야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법정 스님이 ‘시절 인연’이라 했던가. 그녀와 내 인연은 여기까지였던 거다. 끊어진 인연 억지로 붙이려 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라는 걸 깨달으니 비로소 마음이 편해졌다.
그림책을 만들면서 시장 나들이에 나섰다. 작은 연결고리를 따라가다 보니 비교적 순탄하게 원하는 내용을 모을 수 있었다. 그런데 최종 탈고 과정에서 추가로 한 사람을 더 넣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볕 좋은 일요일 오후에 오일장으로 향했다. 푸성귀를 파는 상인 여러 명을 훑었지만 원하는 답을 얻기는 어려웠다. 조금만 개인 정보를 캐면 경계하는 게 느껴져서 말 붙이기가 쉽지 않았다. 비어 있는 자리에 쪼그리고 앉았다가 화장실에서 돌아온 할머니에게 자신의 자리에 왜 앉았냐고 면박을 당한 후엔 더 그랬다.
그러다가 한 할머니를 발견했다. 팔 물건이 많았지만 얼굴에 웃음이 가득해서 인자해 보였다. 용건부터 말하기 민망하여 취나물부터 한 소쿠리 샀다. 여든여덟인 할머니는 이것저것 묻는 내가 귀찮을 만도 한데 술술 대답해 주었다. 쉰넷에 남편이 돌아가시자, 그때부터 시장에 나와서 장사했다. 혼자서 딸 다섯에 아들 하나를 키워 ‘장한 어머니 상’도 두 번이나 받았다. 자녀 둘을 목사로 키웠다. 오늘도 오전에는 교회 가서 기도하느라고 이제야 나왔다고 말했다. 그러다가 찾은 꼬투리 하나. 아들이 고흥에서 목사로 있다고 했다.
고흥? 바로 내가 근무하는 곳이 아닌가. 기회는 이때다 싶어서 꼬치꼬치 물었는데 거기까지였다. 아들 이름은 말해 주면서도 어느 지역에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고흥 관내 이곳저곳을 말했지만 더 이상 진도는 나가지 않았다. 그래도 고마운 할머니 덕에 비어 있는 그림책 한 꼭지를 완성할 수 있었다.
당시 우리 학교는 매주 화요일마다 엄마들이 교실에 찾아가서 책을 읽어 주는 활동을 이어왔다. ‘농촌에 사는 엄마들이 바쁜 아침 시간에 올 수 있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지만 좋은 정책은 어디나 먹히는 법, 2년째 순항 중이었다. 매주 학교에 나오는 게 쉬운 일이 아니기에 학기 말이면 협의회를 하면서 보완할 점이나 개선 방안을 나누고, 작은 선물도 안겼다. 은혁이 엄마는 읽어 줄 책을 고르느라 도서관에 자주 다니면서 자신의 자녀들에게도 변화가 생겼다며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이 활동에 참여하는 분인데, 남편이 개척교회 목사였다.
“은혁 어머니, 혹시 주○○ 목사님 아세요? 고흥 작은 교회 목사님이라던데.” “어? 어떻게 아세요? 그분 믿음이 아버님이잖아요.” 그랬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그분은 바로 우리 학교 학부모였다. 코로나가 유행하면서 전 교직원은 물론, 유치원생과 초등학생 모두가 전수 검사를 받은 적이 있다. 도 교육청 체육건강과 팀장까지 나와서 결과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날은 12월 22일, 학기가 끝나려면 불과 열흘밖에 남지 않았을 때라 운동장에 간격을 벌린 채 빙 둘러서서 검사를 기다리는 동안에는 귀가 떨어져 나갈 것처럼 추웠다. 결과를 예측할 수 없어 마음도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한 사람 때문에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한다면서 학생과 교직원의 원망이 컸다. 추가 확진자는 나오지 않았기에 학교가 폐쇄되는 일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우리는 졸지에 고흥에서 유명 인사가 되고 말았다. 믿음이 아버지가 순천시 목회자 모임에 아이까지 데리고 참석했다가 온 가족이 확진되는 바람에 벌어진 일이었다.
며칠 후 사무실 번호로 전화가 왔다. 강진 집단 수용소에서 격리 중인 믿음이 아버지였다. 본의 아니게 학교에 피해를 끼쳐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걸리고 싶어서 아픈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고의로 그런 것 아니니 어쩔 수 없다. 몸조리나 잘하고 오라며 위로했다. 그때 화를 내고 불편한 마음을 표현했더라면 이렇게 연결된 게 마냥 반갑지만은 않았으리라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믿음이 아버지한테 전화를 걸었다. 서로 통성명을 나누다가 내 나이를 짐작한 그가 주○〇이를 아느냐고 물었다. 아뿔싸. 그녀는 내 중고등학교 동창이었다. 키가 커서 ‘키작녀’인 나와 친해질 기회는 없었지만 얌전하고 성품도 온화하여 인기가 많던 친구였다. 졸업하고 지역 새마을금고에 다닌다는 이야기만 어렴풋이 들은 기억이 있는데, 그녀가 바로 믿음이 고모였다. 며칠 후 전화가 왔다. 처음에는 높임말을 쓰던 그녀가 어색해하면서 말을 내렸다. 사투리를 팍팍 써가며 묵은 이야기를 나눴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처음이었다. 이 신기한 우연이 거짓말 같아서 오후 내내 붕 떠 있었다.
케빈 베이컨의 6단계 법칙이 있다. ‘나의 친구의 친구의 친구’처럼 주변 사람이 중간 다리 역할을 해 주면 인간관계는 여섯 단계만 거치면 지구상 대부분의 사람과 연결된다는 사회 이론이다. 페이스북을 쓰는 15억 9천만 명을 분석했더니 평균적으로 3.57명만 거치면 이 세상 누구하고도 이어지더라는 통계도 있다. 우리나라처럼 땅덩어리가 좁은 지역에서는 두 단계만 거치면 아는 사람이 될 거라고 하더니 이번에 그걸 제대로 실감했다.
그림책이 발간되자마자, 믿음이 편에 들려 보냈다. 우리 집 가보라면서 엄마가 애지중지한다고 했다. 우연이 연속으로 이어지면 필연이라 했던가. 이제는 그 학교를 떠나서 믿음이와 그 아버지를 더 이상 만나지는 못하지만 알 수 없는 인연의 힘을 떠올리면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지어진다.
첫댓글 정말 신기한 게 인연인 것 같아요.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하하!
인연이 그렇게 이어질 수도 있네요. 지구는 넓다. 그러나 인연은 좁다.라는 말이 있는데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주변을 보면 케빈 베이컨의 6단계 법칙이 맞아요.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거든요.
물 처럼, 바람 처럼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인연을 따라야 겠습니다. 과거의 좋은 인연이 쌓이고 쌓여서 더 좋은 관계를 만들겠지요. 벌써 12월의 첫 날입니다. 남은 시간도 여유롭게 마무리 하시길 바랍니다.
선생님 글을 읽으며 앞으로 더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하하.
가끔은 인연이 버거울 때가 있어요. 그래도 누군가와 연을 맺는 일을 안 할 수는 없겠죠?
긴 시간 좋은 친구였다가 어느날 멀어지는 경우, 크게 공감합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처방은 그 관계에 거리를 두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저도 덕분에 시간 관리 하는 법과 마음을 꺼내어 휘뚜루 마뚜루 마실가게 하는 일에 제동을 걸었답니다.
정말 세상일이나 인간관계는 알 수가 없지만, 선생님의 글을 보더라도 우리 주변엔
좋은 인연들이 주렁주렁하여 기분이 좋습니다.
단지 가슴아픈 경우는 과제 해결용으로
하나만.하하.
그림책 공부하시는 것은 알았는데, 책을 펴 내신 것은 몰랐습니다. 오일장을 자주 가는지라 글 속의 그 할머니는 내가 아는 분일까 생각하며 읽었는데 한참 전의 일이었네요. 제목처럼 우연보다 필연이었나 봅니다.
시장 할머니, 목사, 믿음이 그리고 동창까지 우연이 필연으로 이어지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