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1월 16일(목)
* 시작 기도
(느 6:2) 산발랏과 게셈이 내게(느헤미야) 사람을 보내어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오노 평지 한 촌에서 서로 만나자 하니 실상은 나를 해하고자 함이었더라.
주님...
예나 지금이나 사람은 상대를 속이고 넘어뜨리려 합니다.
내 안에도 이런 악이 횡행함을 고백합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이런 체제와 이념으로 나뉘어 전쟁 중입니다.
총칼을 들지 않았지만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으려고 으르렁거리며 조금의 양보도 없습니다.
서로 자기들이 옳고 다른 편은 틀리다고 아우성입니다.
이 때 서로가 서로를 돌아보고 자신들의 약함을 볼 줄 아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 조국 대한민국을 불쌍히 여기소서.
물론 이 땅 곧 만물 안에 있는 것은 선한 것이 하나도 없음을 압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나의 악함과 부족함을 돌아볼 줄 아는 이들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선하심이 이 나라 대한민국에 넘치게 하소서.
주님의 공의가 강물처럼 정의가 하수와 같이 흐르게 하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우소서.
이 하루도 나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오직 나는 죽고 예수로 부요한 자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요 5:19-29
제목 : 영생을 얻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19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28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 나의 묵상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이후 유대인들과의 논쟁이 계속된다.
그것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 일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신성모독을 범하였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계속해서 말씀하신다.
내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하는데 아들은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이 보고 그대로 행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이 행하시는 그것을 다 아들에게 보여주신다.
나아가 그보다 더 큰 일도 보여주시는데 그것은 너희들로 하여금 놀라워하게 하기 위함이다.
아버지께서는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셨는데 그와 같이 아들도 원하는 자들을 살린다.
아버지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그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기 위함이다.
만약 아들을 공경하지 않으면 그는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진리를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 곧 아버지를 믿는 자는 이미 영생을 얻었으며 심판에 이르지 않을 것인데 이런 자는 또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이다.
이것이 하늘의 진리다.
죽은 자들이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올 것인데 그 때는 곧 지금이다.
아들의 음성을 듣는 자는 지금 살아난다.
창세전에 아버지께서는 자기 속에 있는 그 생명을 아들에게 주어 아들에게도 아버지의 생명이 있게 하셨다.
이는 곧 아들은 아버지의 생명을 받아 태어난 생명이 되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인자됨 곧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가 다시 하늘로 오르신 예수는 인자로서 온 세상을 심판하는 권세를 아버지께서 주셨다(22, 27절).
너희는 이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 것이다.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이 다 그 인자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올 것이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나올 것이고,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올 것이다.
요한복음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생명의 기원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생명은 아들의 생명으로서 창세전에 성부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있는 그 생명을 아들에게 주셨고 그 생명을 받아서 태어나신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창세전에는 말씀으로 존재하셨다.
(요 5: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요 1:1) 태초에 말씀(로고스)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
성부 하나님은 태어난 생명인 아들과 함께 창세전에 한 가지 약속을 하신다.
그것은 곧 우리가 사람을 만들어 영생을 주자는 약속이었다.
(딛 1:2)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전(창세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이 약속에 근거하여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또한 사람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창세전에 한 가지를 더 작정하셨는데 이렇게 만들어진 생명인 아담에게 영생을 주기 위하여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육신으로 보내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벧전 1:19-20)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벧전 1:19-20, 쉬운성경) 한 점의 죄도 흠도 없으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여러분은 구원 받은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시작되기 전부터 그리스도를 택하시고, 이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구원하시고자 보내 주셨습니다.
성경의 두 가지 큰 축이 있다면 그것은 생명과 약속이다.
한 축인 생명은 요한복음 5:26절의 아들이 아버지의 생명을 받아서 태어난 생명이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한 축은 디도서 1:2절의 아버지와 그 아들이 창세전에 우리가 사람을 만들어서 그들에게 영생을 주자는 약속이다.
지금 유대인들과 변론을 하고 계시는 예수님은 창세전에 바로 이 두 축인 생명과 약속을 직접 행하신 분이시다.
그래서 아들은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그 아들이 지금은 죽은 자를 살리러 오셨지만 나중에는 심판주로 오실 것임을 천명하는 것이다(22, 27절).
아들은 창세전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존재로 생명을 받아 태어나셨다.
또한 아들은 그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셨다(요 15:10).
이를 가리켜 복종과 사랑의 존재법이라고 한다.
이 존재법은 아버지와 아들 곧 하나님과 그의 아들 그리스도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존재하는 둘 이상의 공동체 안에 모두 적용되는 불변의 법칙이다.
먼저는 그 공동체를 이루는 각각의 구성원들이 만들어진 생명인 아담의 생명에서 태어난 생명인 아들의 생명으로 바뀌어야 한다.
아담의 생명으로는 어떠한 경우도 복종과 사랑의 존재법이 적용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담의 생명은 결국 아담의 본성인 옛 사람으로 인하여 탐욕과 정욕 그리고 이기심 등 3A에 속한 것에 모든 것을 쏟아 붓기 때문이다.
3A란 Appearance(보란듯한 인생), Achievement(성공과 쾌락), Affluence(풍요와 윤택)을 인생 최대의 목표로 삼는 것이다.
이런 것으로는 남을 짓밟고 올라서야 내가 누릴 수 있는 것으로, 바로 38년 된 병자가 있던 베데스다의 현장이 바로 그런 곳이다.
그곳에서는 남에 대한 배려나 아끼는 마음 그리고 도움이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아비규환의 현장이다.
이와 같이 아담의 생명 곧 옛 사람의 본성으로 살아가는 이들은 다툼과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아담의 생명이 아닌 아들의 생명으로 날마다 성령이 조명해 주시는 은혜 안에서 말씀으로 서로 교제하는 이들은 생명의 공동체 곧 영생의 공동체가 되어 내 것을 내 것이라 하지 않고 서로를 배려하며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게 된다.
그런 공동체 안에서 바로 복종과 사랑의 법이 생명으로 유지되어 가는 것이다.
이는 부부간에, 부자간에, 상전과 종 사이에 이루어져야 할 하늘의 존재법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이런 복종과 사랑의 존재법으로 뭉쳐진 공동체가 아니다.
오직 이기심과 아집 그리고 교만 등 자기주장의지로 똘똘 뭉쳐진 집단이기에 그들을 향하여 주님께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시면서 하늘의 진리를 증거하시는 것이다.
들을 귀가 있는 자들은 듣고 그 죽은 영혼이 살아날 것이다.
하지만 들을 귀가 없는 자들 곧 자기 아집에 둘러 싸여 귀를 막고 있는 이들은 천하없어도 들을 수가 없다.
그들에게는 심판이 임하는데 그것은 곧 사망이다.
오늘 말씀의 핵심주제는 지금은 겉으로 보기에는 살아 있다 하나 그것은 다 프쉬케 곧 육신의 목숨으로 살아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바로 이 프쉬케로 살아 있을 뿐이다.
그들의 생명은 다 아담의 생명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소망은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짐승이 아니기 때문이다.
짐승은 짐승으로 태어나 살다가 짐승으로 죽는다.
그러나 사람은 아담의 생명으로 태어나 아담의 생명으로 살다가 아담의 생명으로 죽는 이들도 있지만, 어떤 이들은 아담의 생명으로 태어나서 아담의 생명으로 살다가 복음을 듣고 그들에게 아들의 생명이 들어가 생명이 바뀌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 3장에서 언급하는 ‘거듭남’이다.
이 거듭남은 다른 그 무엇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물과 성령 곧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가능하다.
(요 3:3, 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벧전 1:23-25) 너희가 거듭난 것(위로부터 다시 태어남)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거듭난 자요 그들이 모인 공동체는 비록 두 발은 이 땅을 딛고 살아갈지라도, 그들은 이 땅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늘시민이며(빌 3:20), 하늘 아버지의 아들들이요(갈 3:26, 4:6), 아들의 생명으로 영원을 살아가는 영생의 공동체이다.
이들의 궁극적인 양식은 육신의 밥이 아니다.
그것은 먹고 뒤로 나오면 그만인 썩어질 것이지만, 썩지 아니할 것 곧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요 4: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주님의 양식은 아버지의 뜻인 영생이며 그 영생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그분의 진짜 양식인 것이다.
주님과 함께 주님의 구속사건 곧 십자가와 무덤 그리고 부활에 연합하여 함께 죽고 함께 장사되며 함께 새 생명으로 일으킴을 받는 이들은 심판에 이르지 않고 영생을 얻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운 자들이다(24절).
또한 이 생명의 말씀 곧 아들의 음성을 듣는 자들은 아담의 생명으로 그들의 영이 비록 죽었을지라도 살아난다.
그 때는 먼 미래가 아니라 바로 지금이다.
주님의 음성인 말씀으로 살아가야 하는 때는 곧 지금이라는 말이다.
그래야 아들이 그 속에 아버지의 생명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아들 안에 있는 생명을 받아 날마다 그리고 지금 현재 영생을 누리며 생명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이것이야 말로 영원에 잇댄 영생의 삶이요 영원을 현재로 누리는 천국인 것이다.
나는 창세전에 아버지로부터 받은 아들의 생명을 알지 못하는 자였다.
창세전의 세계를 모르고 생명을 모르니 신앙생활이 늘 중심이 없이 흔들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거듭남이 무엇인지, 아담의 생명과 아들의 생명 그리고 만들어진 생명과 태어난 생명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저 성경적인 지식만 가지고 성도들을 가르쳐왔다.
그러면서 내가 가르치는 성도들은 왜 이렇게 변하지 않느냐고 하면서 원망과 투정만 부릴 뿐이었다.
그런데 내가 변하지 않는데 내가 가르치는 상대가 변할 리 만무하다.
창세전의 세계를 모르고 아들의 생명도 모르고 태어난 생명을 모르며 심판이 무엇인지 모르는 내가 선생이 되어 가르쳤던 나는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아찔하다.
성경에서 말하는 선한 일이나 악한 일(본문 29절)을 도덕적 윤리적 세상적인 기준으로 생각하여 남들을 많이 도우라고만 할 뿐 그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하여 만물 안에서 헤어나오지를 못한 자였다.
선한 일은 곧 예수를 믿는 것이며 이는 복음을 믿어 아들의 생명을 얻어 날마다 영생을 누리는 것이다.
반면 그렇지 못한 모든 일은 곧 악한 일인데 나는 그 기준을 세상적인 것으로 생각하여 세상이 좋아하는 착한 일을 하여 예수님의 이름이 증거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런 나에게 필요한 것은 심판 외에 없었다.
주님께서는 그런 나에게 심판을 행하셨다.
그러나 그 심판은 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담의 생명에서 아들의 생명으로 거듭나는 무덤의 심판이었다.
생명은 무덤에서 나온다.
그 무덤은 나만의 무덤이 아니라 아들의 무덤 곧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과 연합될 때만 생명으로 나오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명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나의 모든 죄를 주의 보혈로 다 씻어 신랑 되신 주님의 정결한 신부로 선다.
자격 없는 자이나 그리스도의 신부로 선다는 것 자체가 너무 신기하고 황홀한 기쁨이 아닐 수 없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하나님도 모르고 아들도 모른 채 늘 그 이름만 입에 달고 산 자였음을 고백하오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아버지와 아들의 존재법을 알지 못하니 이 땅에서 세상적인 법에 매어 늘 종처럼 살아왔음을 고백하나이다.
그러나 이제는 압니다.
내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진리를 말입니다.
그래서 종에서 아들의 신분으로 바뀌었고, 아담의 생명에서 아들의 생명으로 바뀌었으며, 만들어진 생명에서 태어난 생명으로 바뀐 것도 알고 깨닫습니다.
소설에서는 거지가 왕자로 바뀌었음에도 거지의 습관을 끊어내지 못하고 여전히 거지와 같은 행동이 나오는 것을 보는데,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을 가진 나는 옛 사람으로 살던 그 삶은 이제 개나 먹으라고 던져버리고 나는 새 사람의 옷을 입고 새 생명으로 오늘도 살아갑니다.
만물 안에서 살아가지만 나의 거주지는 하늘이며 그것이 나의 영생의 거주지임을 믿나이다.
이제는 이 영생의 거주지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항상 깨어서 주님과의 교제가 더 깊어지게 하소서.
이웃을 배려하며 사랑하되 주님의 사랑으로 행하게 하시고, 영육간에 연약한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오니 저들에게 그 생명 곧 태어난 생명을 주사 복음을 통하여 아들의 생명으로 온전히 바뀔 수 있도록 성령님 은혜를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