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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사진은 글과 무관하며 기도분의에 성모상주님십자가상묵주
알퐁소 리고리오 성인은 하루에 15분하는 성체조배가 하루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선업(선행)보다도 주님을 더 기쁘게 한다고 말했다.
사실 성당이란 '거룩할 성(聖), 집 당(堂)'자(字)이지만, '성체가 모셔진 집'
이라고 할 수 있다.
전례 신학에서는 감실이 축성한 성체 중에 남은 것을 보관하는 함으로
여기고 있고, 기도하며 성체 안에 계시는 주님과 일치하고 대화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서 성체조배실을 따로 운영하는 본당도 있다.
하지만, 성변화(실체변화)가 이루어지는 제단도, 예수님의 십자가도,
생명의 말씀도, 감실도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므로, 성당안에서
기도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시선을 한군데에 두기가 쉽지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나는 만남의 천막(성막)에 관한 논문을 쓰면서, 특히 '계약의 궤'에 관한
대학원 논문을 쓰면서 오늘날의 성전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많이 묵상하였다.
그리고 한가지 신학적이고 사목적인 차원에서 발견한 것이 있다면,
성당을 미사드리는 장소로서 제단을 중요시하고 말씀 선포를 중요시하여
감실을 성당안에 모시지 않는다면, 그곳엔 기도하는 사람들이 결코
모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미국 성당에 가면 '감실'을 다 '타버너클'(Tabernacle)이라고 부른다.
그것이 바로 만남의 천막안의 지성소안에 있는 '계약의 궤'
(The Ark of Covenant)를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계약의 궤'안에 있는 '십계명 돌판'은 '영원으로부터 살아계신 하느님의 말씀'을,
'금항아리의 만나'는 '성체성사'를, '싹이 트고 꽃이 피며 열매를 맺은 감복숭아
나무가지'(아론의 지팡이)는 '사제직과 성사은총'을 상징하며, 그것이 이 땅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임재를 체험하는 세 가지 방법이요, 도구라고 볼 수 있다
(히브9,4참조).
그러니까 '영원으로부터 살아계신 하느님의 말씀'이요, '생명의 빵이신
성체성사'요, '영원한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체 안에 현존하여
계시는데, 그분을 모신 것이 '감실'이요, '계약의 궤'이기에,
감실은 '성모님의 자궁'과 같은 것이다.
가톨릭 기도서 '성모 호칭 기도'에도 '계약의 궤'라는 호칭이 나온다.
우리는 루카 복음 1장 39절 이하에서, 특히 영원으로부터 살아계신 하느님의
말씀이신 분이 성모님의 피와 살을 취하고 들어오시고(Incarnation) 난 뒤에,
태중에 구원자 예수님을 모신 성모님께서 에인 카렘에 있는 사촌 언니 엘리사벳을
찾아가, 엘리사벳의 배안에 있는 아기인 세례자 요한에게 기쁜 소식인 구원을
전하는 장면을 환희의 신비 2단으로 묵상하고 있지 않는가?
이 장면에서 예수님을 모시고 구원을 전하는 성모님이 바로 '계약의 궤'요,
'움직이는 감실'이라는 사실을 깊이 묵상해야 하는 것이다.
마리아 사제 운동의 창시자이신 고(故) 스테판 곱비 신부님께서도
'성모님께서 사랑하시는 당신 사제들에게'라는 책에서도 언급하셨지만,
어쨌든 나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도, 성당은 '만남의 천막'처럼 일직선으로
지어져서, 지성소의 자리에 감실과 십자가와 제단이 한곬으로 놓여져 있으면,
잘 시선을 집중할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 한분만을 관상할 수 있어서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 성체조배의 순서는 이렇다.
1) 먼저 감실안의 성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영혼과 육신)과 신성(천주성)이
온전히 실제로 실체적으로 현존하심을 믿어야 하기에, '주님의 현존 의식'을
가져야 한다.
2) 그 다음 지금 이순간까지 나를 이 자리에 업어다 주신 주님의 크신 사랑에 대해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드리는 기도를 바쳐야 한다.
3) 세째로 지금 이 시대에 교만과 불순명과 자유남용으로 대죄를 지어
주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는 이들(자신도 포함)의 죄를 대신 속죄하고 보속하여
주님 마음을 풀어드리는 '속죄, 보속의 기도'를 바쳐야 한다.
4) 이제 각자 실존적 처지와 영혼 상태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기도'를
주님 호칭을 부르면서 바쳐야 한다.
여기서 말씀 자체이신 주님을 감동시키기 위해 성경의 예를 들면서 기도하면
더욱 좋고, 나의 기도에 대한 주님의 답변 내지는 응답은 주님께서 몸소
나의 지성에 깨달음과 깨우침으로 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정말로 말씀을 영적으로 알아듣거나 영적인 소리를 들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주님의 특별한 은혜이고, 보통은 다 나의 기도와 묵상을 통해
지성에 하나의 깨우침으로 주시는 것이다.
5) 이렇게 '진실한 기도'가 끝나면, 성체조배의 끝순으로 한,두 가지
새로운 결심을 하고, 그 결심이 주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도록
'구은'(求恩)의 기도를 바치면 된다.
이것이 소위 '성체조배'이다.
이렇게 기도하면 15분이 아니라 30분이 훌쩍 지나간다.
물론 조배하다가 잠이 올 수도 있지만, 그것은 겟세마니동산의 세 제자가
된 꼴이나 마찬가지이기에, 항상 영육간에 깨어 기도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분심중에 기도했거나 많이 졸았다면, 성체조배 끝에 죄송한 마음으로
분심중의 기도나 졸음중의 기도를 성체 안의 예수님께 용서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끝으로 한가지만 더 언급한다면, 우리가 미사중에 영성체를 하고 난 다음에는
우리도 예수님을 모셨기에 또 하나의 성모님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우쳐야 한다.
그래서 성가만 부르지 말고, 단 몇분이라도 무릎을 꿇거나 조용히 자리에 앉아
내 안에 오신 주님과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가져야 하고, 위의 순서에
따라 감사의 기도부터 이행해야 한다.
이 영성체의 시간만큼 지상에서 주님과 하나되고 신비롭게 일치된
은총의 시간, 행복한 시간이 어디 있는가?
바로 이 시간이 지상에서의 '지복직관'(至福直觀)의 시간이요,
영복적(永福的) 사랑을 나누는 시간이다.
나의 지성으로 그날 생명의 말씀에 비추어 실존적이고 살아있는 기도를
드리고, 나의 의지로 주님께 대한 사랑을 고백해야 하며, 성모님과
천사들과 성인성녀들의 전구도 함께 청하면서 주님께 최고의 찬미와
감사와 영광을 드려야 한다.
한편, 성체조배를 관상기도의 형태로 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우선 위와 같은
순서로 매일 30분 내지 한 시간씩 하면 참으로 영신적으로 유익할 것이다.
'관상기도'는 말이 필요없는 기도이기에 '주님 현존 의식'과 더불어
'주님과 일치'하고픈 지향으로 가만히 있으면 된다.
그러나 온갖 분심 잡념들이 떠오르므로 그것을 비워야 하는데,
혹 지루하거나 따분함이 엄습하면, 그럴 때마다 마치 모닥불이 타다가
불이 꺼지면 불쏘시개나 신나를 뿌려 불을 다시 살리듯,
'주님!' 하고 부르거나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 일치하고 싶습니다'
하는 짧은 기도를 바치면 된다.
이런 기도를 하루에 30분 이상 계속하다 보면,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나
주님께서 몸소 이 기도 시간에 관여하시고 주관하시는 때가 오는데,
그때는 수동적으로 따라가면 된다.
카르멜이나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장시간 성체조배를 관상기도의 형태로
봉헌하는데, 이러한 주님 주도의 신비 체험이 없다면, 그들이 이 조배를
그토록 긴 시간 할 수 있겠는지를 생각해 보면 된다.
불광동성당 감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