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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0: 32. 머물러 서서 - 마 20: 34. 예수를 좇으니라.
마 20: 32. 머물러 서서 -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희를 불러 )
맹인들의 낙심치 않는 부르짖음은 마침내 주님의 관심을 끌었다.
예수께서는 머물러 서셨고 그들을 부르셨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무엇을 받을 것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기도하면, 그리고 낙심치 않고 계속 또 더욱 부르짖어 기도하면, 그가 그의 시선을 우리에게 돌리시고 우리의 기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실 것이다.
1]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들의 낙심치 않는 부르짖음에 마침내 주님이 관심을 나타내 예수께서는 머물러 서셨고 저희를 부르신 것이다.
주께서는 이전에 '구하라, 주실 것이요'라고 가르치셨다. 그때에나 지금이나 기도하는 자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얻었다.
우리가 기도치 않으면 받을 것을 기대치 말아야 한다.
2]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기도하면, 그리고 낙심치 않고 더욱 부르짖어 기도하면, 그가 시선을 돌리시고 우리의 기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하기를 힘쓰며 기도할 때 낙심치 말자.
3]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기도 중에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질문을 하신다. 이 때 질문에 합당한 대답을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소경들의 소원은 분명하였다.
하나님은 중언부언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우리는 명확하고 구체적인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확실한 기도의 응답을 얻게 된다.
마 20: 33.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 이르되,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 가라사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우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
맹인들의 소원은 분명하였다.
그들은 눈을 뜨기를 원하였다.
1] 이르되, 주여!
그들은 소원을 주저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구하지 않았다.
부귀와 명예를 원하지도 않았다. 앞에서 두 소경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자신을 주님께 맡겼더니 주님께서 '내가 무엇을 불쌍히 여길꼬?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셨다. 그때 그들은 서슴지 않고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주님께서 그들의 형편을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다. 왜 물었습니까? 그들의 믿음이 있는가를 시험하신 것이다. 지금도 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의 믿음을 시험하신다.
주님은 우리의 환경도, 조건도, 그리고 우리의 요구를 다 아시지만 우리의 믿음의 요구를 시험해 보신다.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당신은 눈을 뜨게 하실 분인 것을 내가 믿나이다'라는 신앙고백이다. 지금도 우리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신다.
우리가 '하나님! 우리를 축복해 주십시오.' 이런 기도를 많이 했다. 이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축복을 해 줄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믿지 않고 어찌 우리가 축복을 원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해 주시는 것을 믿기 바란다.
2] 우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그들은 눈을 뜨기를 원하였다.
모든 사람이 다 소유한 가장 보편적인 것이지만 자신들이 갖지 못한 '보는 것'을 구했다. 따라서 성도들은 내게 필요한 것을 찾아내는 영적 분별력을 갖추어야 한다.
인류의 구속을 완성하시기 위한 예수님의 메시야 사역이 점차 무르익어 갈 무렵이었다. 예수께서는 드디어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위해 여리고로부터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도중에 두 맹인의 간절한 부르짖음을 듣게 되었다. 그는 발걸음을 멈추셨고 그들의 필요를 따라 눈을 뜨게 해주셨다.
(1) 그들은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었다.
그들에게는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짐으로써 이해하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감각 방법이 없었다. 따라서 그들이 주님의 신적 능력 행사에 대한 여러가지 이적과 베푸신 자비, 그리고 사랑을 실천하시는 활동에 대해 그들은 남으로부터 전해 듣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맹인들은 주님의 능력에 대한 몇 가지 소문만으로도 예수께 나오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안타까운 형편을 호소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초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전적인 신뢰다. 지금까지 육신에 속한 이성적 합리적 연구 결과로서 이 신앙에 들어간 자는 아무도 없었다. 신앙은 말 그대로 믿음, 즉 자신의 전적 무능력과 어찌할 도리 없는 형편 자체를 하나님의 주권적 능력에 맡기는 것을 말한다.
(2) 그들은 예수의 이름을 불렀다.
① 이름을 부른 것은 신뢰를 의미한다.
눈 뜨기만을 간절히 소원하였던 그들은 '주여…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예수님을 불렀다. 그들의 외침은 그들의 갈급한 마음 만큼이나 진지하였다.
그 외침은 단순한 외침이 아니라 신앙의 외침이요 믿음의 부르짖음이었다. 베드로는 이러한 신앙의 외침을 성도에게 촉구하였다.
* 행 2: 21 -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② 이름을 부른 것은 의지한다는 뜻이다.
맹인들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쫓아온 것은 예수님만이 그들이 의지할 대상이라는 말이다. 사실상 그들이 하루하루 생명을 부지하고 살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이 던져 준 동정어린 몇푼의 동전 때문이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그들에게 산 소망을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에게 인격적인 대우를 해준 사람도 없었다. 아마 부모 형제조차도 그들을 매우 짐스러운 존재로 여겼을 것이다.
이웃의 사람들이나 그를 알고 있는 이들은 혹 그들을 해롭게 하거나 자기의 유익을 위해 이용하거나 심지어는 조롱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들이 전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도 그들과 마찬가지다. 우리가 실제적으로 영원히 의지할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즉 부모 형제도 아내와 자식도, 그리고 심지어는 자기 자신도 결코 신뢰하고 의지할 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수긍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참 의지할 대상으로 주신 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기 때문이다.
* 행 4: 12 -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3) 예수님은 걸음을 멈추셨다.
예수께서는 그를 옹위하는 무리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향해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이제 메시야적 사역의 마지막 일들을 위해 다윗의 자손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입성하려고 하셨다.
실로 많은 일들이 산재해 있었고, 그가 받으실 고난은 가공할 만한 두려움을 가져다 주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일들을 일단 중지하시고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셨다.
이것은 예수께 있어서 성도들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고달픈 영육간의 문제가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당신이 그 문제를 호소하기를 원하고 계신다.
(4) 예수님은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다.
눈을 뜨고자 간절히 부르짖는 맹인들의 외침은 예수님 주변에 있는 무리에게는 그리 달갑지 않은 한낱 소동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사람들은 조용히 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무리와는 대조적으로 예수님께서는 발걸음을 멈추사 돌이켜 그를 만나 주셨고, 소원을 물으셨다. '너희에게 무엇을 해주기 원하느냐?'
'주여. 우리가 눈 뜨기를 원합니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들의 요청은 밝은 눈으로 만물을 밝히 보고 싶은 것밖에는 없었다. 그들은 드디어 눈이 뜨였다.
맹인의 눈뜸은 새로운 탄생이다. 모든 것이 새롭다. 예수를 만난 인생은 새 삶을 경험한다. 영적인 눈이 뜨였기 때문이다.
(5) 그들은 예수님을 따랐다.
눈을 뜨게 된 순간부터 그들은 예수를 볼 수 있었고 그 즉시 주님을 좇았다.
예수로 인해 눈이 뜨여진 그들은 제일 먼저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맹인들에게 가장 먼저 비친 유일한 분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좇았다. 좇는다는 말은 그를 모신다는 뜻이다. 그와 동행하며 함께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들은 자랑스러운 예수님을 따라 어디든지 갈 것이다. 이것이 성도들의 삶의 모습이다.
마 20: 34. 예수를 좇으니라. -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저희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저희가 예수를 좇으니라. )
예수께서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그들의 눈을 만지셨다.
그러자 그들은 곧 보게 되었다. 주의 능력의 치료와 구원은 신속하고 완전하였다.
여기에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신적 영광이 나타났다.
1]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예수께서는 그 소경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알지 못하는 이웃을 보고 불쌍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예수님은 인생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시고 동정하시는 사랑의 주님이시다.
2]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그뿐만 아니다. 그는 인생의 연약함을 치료하시고 도우실 수 있는 능력의 주님이시다.
사랑과 능력이 갖춰질 때 치료와 구원이 가능하게 되었다.
3]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예수께서 그 시각장애인들의 눈을 만져 주시니 그들이 즉시 보게 되었다.
주의 능력의 치료와 구원은 신속하고 완전하였다. 여기에 다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신적 영광이 나타났다.
그리고 치료를 받은 그 시각장애인들은 그들에게 최대의 은인인 예수님을 따랐다. 오늘날도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자마다 구원하신 주님을 따라야 할 것이다.
주님이 만져주시니 그들의 두 눈이 반짝 떠졌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니라' 가 중요하다. 우리가 은혜를 받고 고침을 받은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하느냐? 예수님을 좇아야 한다. 그들의 방향이 바뀌었다.
* 눅 5: 11 -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베드로가 밤이 맞도록 수고했지만 한 마리의 고기를 잡지 못하고 실패자의 모습으로 새벽을 맞아 그물을 정리하고 있을 때 예수께서 오셔서 베드로의 배에서 예배를 드리신 다음 그에게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자, 베드로가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순종했더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그리고 주께서 베드로에게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고 하시니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베드로는 버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버리고 예수를 따랐다. 여기서 '따랐다'는 말은 '닮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예수를 '잘 믿는다 혹은 잘못 믿는다'고 할 때 표준을 어디에 두겠는가? 얼마나 '예수님을 닮았느냐'는 것이 신앙의 표준이다.
베드로가 위대해지고 훌륭해진 것은 예수님을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생이 예수님을 많이 닮을수록 훌륭한 사람이 된다. 주님은 사람을 써도 이런 사람을 쓰시는 것이고, 이런 사람이 또한 큰 일꾼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느낍니까? 우리가 정말로 예수님을 믿었다고 한다면 예수님만을 좇아가야 한다. 다시 세상을 향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좇아 우리의 삶의 방향을 옮겨야 한다.
4] 주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사람들 / 원 영대 목사
요즘에 소경이란 말을 쓰지 않는다. 시각 장애인이라 부른다. 앞을 보지 못하는 불편은 그 입장이 되어 보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안요한 목사님은 목사의 아들이었으나 하나님을 부인했던 분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교편 생활을 하던 중 시력이 약화되어 실명하게 되었고 그 사건을 계기로 회개하고 하나님의 종이 되어 시각 장애인들을 위해 특수 목회사역을 하시는 분이다.
그 분은 이미 60세가 넘으신 노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는 더벅머리 총각처럼 하고 다니신다. 그 모습이 못 마땅해서 어느 목사님이 안목사님에게 물었다.
-목사님은 왜 머리를 그렇게 기르고 다니십니까?
-제가 이마에 흉터가 많습니다. 하두 많이 부딪혀서 부어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셨습니다. “머리를 길러라.” 그 후로 머리를 기르니까 흉터가 보이지 않고 부딪쳐도 덜 아프고 젊게 보여서 참 좋습니다.
속사정을 모르면 이렇게 상대방을 오해하고 부정적으로 판단할 수가 있다. 일반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은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은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인 보호가 강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그러나 2000년 전 유대사회에서 소경은 죄인 취급을 당했다. 본인의 죄나 부모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설움을 안고 살 수 밖에 없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소경 두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유대 사회의 중심에 들어 올 수 없는 사람들이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이 두 사람은 마을 어귀에 사람들을 피하여 처량하게 앉아 있었다. 배가 고파서 이 집 저 집 다니며 구걸하다가 피곤해서 길 가에 나란히 앉아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때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것이었다. 그 소문을 듣는 순간 그 두 사람은 반사적으로 일어나서 소리를 질렀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두 소경이 이렇게 부르짖을 수 있었던 것은 이미 그들이 예수에 대하여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각을 잃은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발달하는 것이 청각과 촉각과 기억력이다. 상대방의 목소리를 듣기만 해도 그 사람의 성격과 얼굴 모습을 연상해 낼 정도로 예민하다. 그리고 점자로 책을 읽는 속도도 대단히 빠르다.
그들은 구걸하러 다니면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예수란 분이 많은 병자들을 고쳤다는 사실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선지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소문을 듣고 난 후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기대가 있었을 것이다.
이 날도 두 사람은 자포자기한 상태로 길 가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자기들이 앉아 있던 그 길 앞으로 지나가고 계셨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 싸면서 따라 가고 있었다.
얼마나 크게 소리를 질러 댔는지 가까이 있던 사람들이 꾸짖었다. “조용히 해, 이 거지들아. 소경 주제에 감히 예수님을 불러?!”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더욱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두 번만 외쳤을까요? 그들은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러댔을 것이다. 그 고함소리가 예수님의 귀에 들렸다.
예수님께서 가던 길을 멈춰 서셨다. 그리고 그 소경들을 부르셨다. “저들을 이리로 데려오라.”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두 소경이 예수님 앞에 와서 섰다. 온 회중이 조용히 그 광경을 목도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윽고 예수께서 두 사람을 바라보시며 물으셨다. “너희에게 무엇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그들은 지체없이 대답했다. “주여 우리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두 사람의 눈을 손으로 만지셨다. 그 순간 두 사람은 밝은 세상을 보게 되었다. 할렐루야! 그리고 그 두 사람도 많은 무리들 가운데 섞여 예수님을 따라 갔다. 이 두 사람이 광명한 세상을 보던 그 날은 일생 일대의 최고의 날, 잊을 수 없는 날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은 평생 예수님을 증거하는 충실한 제자들이 되었을 것으로 믿는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의 내용은 이 험난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에게 난관을 극복하는 지혜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두 가지 면에서 주목해야 할 것들이 있다.
첫째는 그들은 어떻게 보게 되었는가? - 두 소경의 행동에 주목
마20:29-31 저희가 여리고에서 떠나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좇더라. 소경 둘이 길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1)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었다. 단지 예수님에 대하여 소문으로 들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가? 자신들의 장애를 고쳐 주실 수 있는 분으로 믿었던 것이다. 믿은 정도가 아니라 확신하고 있었다.
만약 그들이 믿음이 없었다면 예수님이 여리고에 오셨다한들 접근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의 멸시와 조롱이 두려워 사람을 피하고 장님된 신세가 팔자거니 그렇게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난 후 그들의 생각이 달라졌다. 그 분을 만난다면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소망을 갖게 된 것이다.
보통 말하기를 모든 사람에게는 평생에 3번 정도 성공의 기회가 온다고 한다. 어디에 근거를 두고 한 말인지는 모르지만 부정하는 사람도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회는 기다리는 사람에게 찾아 온다.
이 두 소경은 그 기회를 찾고 있었다. 예수님을 만날 소망을 두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앞에는 여러 가지 장애물들이 놓여 있었지만 그들에게 찾아온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그들은 즉시 반응했다.
2) 간절한 부르짖음.
두 소경의 부르짖음은 기도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부르짖음에는 간절함이 약화되었음을 느낄 수 있다. 왜 그런가? 자신을 불쌍히 보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을 만큼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간절함이 없고 응답을 경험하지 못한다.
본문 29절에 보면 “큰 무리가 예수를 좇더라”고 되어 있다. 그 무리들 중에 예수님의 만져주심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어디까지나 따르는 무리에 불과했다. 어떤 사람은 마음의 소원은 있었으나 입 밖으로 내질 못했고, 어떤 사람은 소리를 쳤으나 군중들의 소음에 섞이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소경의 부르짖음은 한 맺힌 부르짖음이었다. 소리가 크다고 다 응답되는 것은 아니다. 간절함이 없는 부르짖음에는 응답이 없다. 왜냐하면 안들어 주셔도 나는 살아가는데 지장이 없다는 베짱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들어 주실려면 들어 주시고 말려면 말라는 식의 기도가 많다. 그러나 소경들의 부르짖음은 예수님의 귀를 파고 드는 부르짖음이었다. 효과 있는 기도에는 반드시 간절함이 있다.
3) 장애를 극복하는 용기있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시각 장애인들의 모습을 보면 항상 움츠린 자세이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생긴 습관이다. 그러나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세상에서 제일 겁 없는 사람들이 시각 장애인이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 두 소경이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서 겁 없이 행동한 것은 아니다. 자신들의 비참함을 알았고 예수님께 대한 기대가 강했기 때문에 나타난 모습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들이 간절하게 부르짖기를 시작했을 때 즉시 장애물이 나타났다.
31절,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러나 그냥 주저 앉지 않았다. 그들은 더욱 소리를 질러댔다. 욕 먹으리라. 얻어 맞으리라. 그런 각오로 부르짖었다. 그 소리를 예수님께서 들으셨고 가시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우리는 때때로 기도해야 할 필요를 느끼면서도 주변의 여러 가지 사사로운 장애물들로 인해 기도하는 일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사단은 성도들이 기도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일을 한다. 사단의 책략을 알고 환경을 극복하는 용기와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세력은 항상 크고 강했다. 그러나 다윗은 골리앗을 넘어뜨렸고, 초대교회는 로마제국의 박해를 무너뜨렸다.
4) 가장 중요한 것을 구했다.
마20:32-33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희를 불러 가라사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우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이 두 사람이 원하는 것은 떡도 아니요, 돈도 아니요, 집도 아니었다. 이 두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은 “보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고 그 필요한 것을 구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응답에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잘 모른다는 것이다.
약4:2-3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어떤 사람은 보다 더 나은 직장을 구하고, 배우자를 구하고, 더 좋은 집과 환경을 구하고, 더 많은 돈을 벌기를 구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탄식하고 불평하고 원망한다. 자신이 현재 소유하고 누리고 있는 것이 이 소경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나은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러나 만약 내가 지금 볼 수 없는 입장이라면 내게 많은 돈과 지위와 명예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내가 볼 수만 있다면 수 억의 재산을 들여서라도 얻고자 할 것이다. 진정 불행한 것은 보는 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진정 보아야 할 주님을 보지 못하는 것이 불행이요. 더욱 불행한 것은 주님을 보면서도 정말 구해야 할 것을 구하지 않고 썩어질 것을 구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마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정말 필요한 것, 정말 중요한 것, 정말 주께서 원하시는 것을 부르짖어 얻을 수 있는 성도가 되기 바란다.
두 번째 주목해야 할 것은 소경들의 부르짖음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다.
마20:32-34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희를 불러 가라사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우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저희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저희가 예수를 좇으니라.
이 구절을 잘 살펴 보면 다섯 개의 동사로 구성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1) 서서(stopped)
가던 길을 멈추셨다. 예수께서 서신 이유는 들으셨기 때문이다. 소란한 중에서도 양의 간절한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선한 목자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오늘날의 모습은 정반대다. 예수님이 부르셔도 바쁘다고 다 도망다닌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심으로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고 가던 길도 멈추시는 분이시다.
2) 부르셨다(called)
부르신 이유는 만나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경들은 예수님께 소리만 질렀지 나올 수 있는 입장은 아니었다. 눈이 성한 사람들이라면 달려와서 군중들 사이을 뚫고 예수님을 붙잡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과 만나시기 위해 가던 길을 멈추시고 그리고 그들을 부르셨다. 예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 만나시겠다고 부르시는 그 음성을 외면하지 말자.
3) 물으셨다(asked)
“너희에게 무엇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우리의 필요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는 뜻이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향하여 묻고 계신다. “내가 너에게 무엇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4) 민망히 여기심(had compassioned)
두 소경을 바라보시는 주님의 눈길은 사랑이셨다.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온 몸에 상처 투성이로 빌어 먹으며 살아온 두 사람의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아프셨다. 아무런 말씀은 없으셨지만 그의 눈빛은 깊은 애정과 긍휼이 담긴 것이었다.
5) 만져주심(touched)
부드럽고 따스한 사랑의 손길이 두 소경의 눈에 닿았다. 그 순간 어두움은 사라지고 광명한 세상을 보게 되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소경이 아니었다. 주님의 사랑이 손길이 닿은 곳에 치유의 역사가 있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그의 백성들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고 계신다. 우리가 부르짖을 때 가던 길을 멈추시고, 우리를 부르셔서 만나 주시고, 우리의 필요를 물으시며,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어루 만져주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분이시다.
계 3:15-18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참으로 곤고한 가운데 놓여 있음에도 자신의 처지를 알지 못하는 영적 소경의 모습은 아닌가? 더웁지도 않고 차지도 않은 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 같지는 않은가? 주님께서 토하여 내치시겠다고 경고하셨다. 영적 나태 태만의 결과가 무엇인가를 성경은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다.
렘 29:12-13,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적당한 기도생활이 아니라 장애물을 극복하고 부르짖는 두 소경의 열정적인 기도를 회복할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 바란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예수님은 섬기려고 오셨다.
예수께서는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않으셨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 오셨다.
그는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대속 사역을 이루셨다.
둘째, 예수님은 눈을 뜨게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두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심으로써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증거 하셨다.
그는 확실히 신적 구주이시다.
셋째, 예수님을 본 받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는 자신을 크게 여기지 말고 남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며 그의 교훈을 실천하는 것이다.
섬기는 자가 큰 자이다.
넷째, 쉬지 말고 기도하자.
우리는 우리의 어려운 소원을 긍휼과 능력의 주님께 구체적으로 아룀으로써 해결을 받을 수 있다.
기도는 성도의 특권이다.
우리의 소원의 목표와 방법이 바르다면, 우리의 간구는 응답받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