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세력의 후손들이 代를 이어, 국회의원을 한답시고, 역사가 바로 세워지지 못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이 안타깝다.
그런데, "*묻은늠이, 겨묻은 늠을 욕하면서, 나만 깨끗하다"기에,,,,,,,,,,,,,,,,,,,,,
정*영이 니 말대로, 곧 무대에서 퇴장 할 70대 영감탱이가, 고부접주 봉준이가 다시일어나는 心情으로
잠시 지난 시절을 되새겨 본다.
......빛고을 금남로에서 5.18묘역까지 3보1배하는 심정으로.........
1
중소지주의 장손인 정*영은 1953. 7. 27일, 전북 순창군 구림면 월북리에서 태어났다.
지주의 아들이자, 스물여섯의 나이로 순창군 "구림(구린???)면장"을 지내고, '애기면장'이라 불리던 정동영의 아버지, 정진철!
......늘 당당하고 호탕했던 아버지는 두주불사가 지나쳐 술병을 얻었다.
그런데도 술에 대한 사랑을 끊지 못하시더니 1969년 7월 20일 간경화로 돌아 가셨다.('개나리아저씨' 中에서/자작나무/정*영著)
정동영이 고교2학년이 되던 때(17살) 정진철 면장은 48세의 생을 마감한다(간경화...정동영이 건강 조심혀~)...
정진철 면장은 언제 태어났나? '1969-48=1921년' 경에 태어난 걸로 추정 된다...
1921년은 실제 출생일이고, 호적상은 1924년경으로 추정된다(1950년경, 26세에 구림면장/개나리 아저씨中에서/자작나무/정*영著...)
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정진철면장은 당시 순창근처에서 가장 좋은 명문 '남원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제국주의 조선착취 최일선 기관인 "금융조합 서기"를 무려 長長5년이상 황국신민으로써 충성을 다하여
소작농민의 피를 빨아먹으며,열심히 황국신민의 역할을 다 하다가 해방을 맞이한다.
'금융조합장'의 위치에 근접했었다고 볼 수 있다.
일본 제국주의 시대 "금융조합"이란 무엇인가?
식민지조선 수탈을 위한 조선총독부의 左동척(동양척식주식회사/ "부일장학회"를 설립한 "김지태"가 근무한곳....김지태는 동양척식회사로부터 20만평을 불하받아, 울산농장-조선 농민의 수탈 토지-을 개척하고, 이 농장을 바탕으로 부를 축적한다.. 노개구리는 "부일장학금"으로 부산상고 졸업했당ㅇㅇㅇㅇ황국신민의 피를 이어 받은 늠... ),
右식산(조선식산은행)! 조선반도 산업착취의 양대 중추기관 중 조선식산은행 산하 최일선 식민지 산업(농수산업) 착취기관이다......
정진철면장이 금융조합서기로 근무하던 시기는, 중일전쟁 발발 이후의 시기로 산업동원령이 내려진 상태로, 전 농민의 80%가 소작농으로 전락하였고, 조선반도에서 산출되는 산출미의 60%이상을 공출로 착취하여, 반도의 농민들은 일본제국주의의 가혹한 착취에 견디다 못해, '개나리(?)'봇짐을 메고 처자식 이끌고 일본제국주의가 전쟁동원을 위해 설치한 경의선, 경원선 철도를 타고 만주벌판 서간도, 북간도로, 그리고 징발, 징용에 이끌려 대한해협을 건너, 북해도(홋카이도)로, 인도지나 전선으로 끌려 가던 시절이었다......
금융조합 서기는 아무나 하나?
지금도 대한민국의 짠(?) 대기업중 하나인, 효성그룹 창업주 조홍제는 *쌍도 함안(정확히 하면..군북) 친일매국 '금융조합장' 출신이다. 금융조합장 출신답게 기업풍토를 짜(?)게 운영한다. 정진철면장도 '덴노 헤이까(천황폐하)께서, 美國의 맥카터에게 항복하지 않았다면, 대그룹 창업주가 되었을 수도 있다...비단장수 '구'서방(L모그룹), 정미소와 천석꾼 출신 (S그룹) 창업주에 뒤지는 바 없는 가문이었다.
일본제국주의의 산업수탈과 전쟁동원이 극에 달하던 1940년대 초에는 농민의 98%가 금융조합에 가입하게 되었고, 산업동원의 일선기관 노릇을 충실히 하게 되었고, 향토 지방의 토호들의 기득권을 강화해주었고(1937년 47%의 금융조합 조합원은 전원 지주로만 구성), 결국 금융조합은 지방 최고의 파워엘리트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당시에 금융조합서기는 금융조합이 있던 남원읍 근처를 통틀어 가장 잘나가던 1등 신랑감이었다. 소위 잘나가는 임실골(한국전쟁 당시, 딘인가 뭔가 하는 낙오한 아메리카 장군을 인민군에게 신고해서 단돈 4달러(3600원)에 받고 포로로 넘겨준 마을)의 '이형옥여사(정동영모친)'가 "금융조합서기"에게 시집오는 건, 빵빵(?)한 이 여사 집안에서도 기울지 않는 혼사였다.
2.
가족사의 시간여행을 조선시대로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볼짝시면....
정진철면장은 양반의 후손이다..... 조선이 망한 것은 기득권에 집착한 무식한 왕족과 양반 집권층 때문이다.......
조선백성과 범부('백범' 김구선생의 호가 '백정'과 '범부'에서 따온것이다.)들이 동학농민운동과 각종 민란이란 이름으로 무참히 쓸어져 갈때, 이 땅에 피를 뿌린 사람들 중에 양반이 과연 몇이나 있었던가?(양반중에..훌륭한 독립운동가도 일부 있었다...동래정씨 말구~..왕족은 백작, 권문세가는 남작과 자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이랍시고 갖은 이권을 행사하던 슬픈 이야기들......)
나라에 세금안내던 양반의 후손!
정진철의 원조(元祖)는 조선 중종때, 영의정을 지낸 정광필의 아우이자, 안산군수를 지낸 정광좌로서, 정진철은 정광좌의 15세손이다.
정광필이 누구냐고, 정광필의 5세손은 조선 500년 사에 유일무이하게 형제가 6조판서를 모두 지냈고, 형은 영의정, 아우는 좌의정을 지낸 정태화, 정치화 형제다. 소위 명문 벌열 동래정씨 가문이다. 명문 동래정씨는 조선 500년 동안 정승을 20명이나 낸 가문이다.
.......아버지! 정진철! 나는 아버지를 누구보다 존경했다. 아버지가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을 때, 사람들은 '순창의 울타리가 무너졌다.'고 했다.(개나리 아저씨中에서/자작나무/정*영著.....)
중일전쟁 이후 식민지 조선농민의 80%가 소작농을 이루던 시절에도 집안에 일꾼들 부리고 살던 잘나가던 집안이었다. 중일전쟁 이후, 정진철이 남원고보를 졸업하고, DJ선상님이 목표상고를 다니실 무렵, 식민지 조선땅에서 나는 쌀의 60% 이상을 공출의 이름으로 징발해 갔다. 만주벌판과 아메리카와 전쟁하기 위한 전쟁물자를 충당하기위하여~
소작농도 힘들어, 먹고 살기 힘든 백성들은 만주로, 북간도로, 북해도로, 남태평양 전쟁터로 끌려가고, 적당히(?) 잘~먹고 잘 ~살았던 정동영의 할아버지 덕분에, 일제 산업수탈의 앞잽이 금융조합 서기 출신인 정동영의 아버지 정진철은, 광복후 '대동청년단' 활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친일지주나 친일반민족 행위자들이 대부분 '반공'의 이름으로 '서청(서북청년단)'등과 같은 이름으로 친일행적을 감추고자 하였다. 친일을 감추기 위한 방법으로 '대동청년단'과 같은 극우단체에 가입하였던 것이다. 1948년 제주도 4.3사건때, 가장 먼저 습격을 당한 곳이 '대동청년단' 간부의 집이었다.
3.
친일 매국의 앞잽이가 극우단체인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여 '변신의 기회'를 잡고,
사회가 혼란한 틈(?)을 타서, 약관의 나이에 구림면 면장을 지내던 것이 '순창' 지방에서는 가능했다.
아쉽게도 '덴노'의 항복으로 "대지주"와 "재벌의 꿈"은 사라졌다.
인촌 김성수가 이룬 꿈을 동래정씨 정진철이 이루지 못할것도 없었는데, 단지 아메리카 맥카터에게 '덴노'가 항복하는 바람에...........
첫댓글 정확한 출처가 있고 사실이라면 대박입니다
그런데, "*묻은늠이, 겨묻은 늠을 욕하면서, 나만 깨끗하다"기에,,,,,,,,,,,,,,,,,,,,, ☜ 딱이 정답 아닙니까?
정말이래요? 아니 이런일이... 열우당노무쌔끼들 믿을놈이 하나도없네...에이 x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