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0:21-24
맹인으로 살다가 시력을 회복한 남자가 가장 먼저 본 것은 아내 얼굴이었습니다.
그 후, 아내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또 만져보지 않고, 순수한 시력으로만 아내와 다른 여자를 구별해 낼 수 있을까요?
아내 얼굴을 다른 사람과 구별해 내는 데는 통상 넉 달의 훈련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보통 사람으로는 납득이 가지 않는 일입니다.
맹인들이 시력을 회복하면 어떻게 될까요? 어둠 속에서 상상으로 존재했던 세계에 대하여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마리우스 폰 센덴(Marius von Senden)은 “공간과 시력”이라는 책에서 시력을 회복한 맹인들이 경험한 놀라운 일들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가장 먼저 보인 반응은 엄청난 당혹감입니다. 충분히 짐작이 가는 반응입니다.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빛의 세계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인데 어찌 당혹스럽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의 반응은 일반인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한 소녀에게 엄마의 크기가 얼마만한가 물었을 때 두 뼘 정도 된다고 하였습니다. 거리를 두고 있는 엄마의 크기가 그 정도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공간과 형태, 움직임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높은 곳에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아도 얼마나 높은 것인지 전혀 실감하지 못했고, 그래서 실제로 뛰어내려 죽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멀리 보이는 높은 산도 그저 손바닥 위에 올려놓을 정도의 작은 것으로, 태양도 그저 동전 크기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이 인식할 수 있는 높이는 그저 3미터 정도라서, 높은 빌딩의 꼭대기조차도 작은 막대기로 얼마든지 닿을 수 있다고 인식하였습니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저 촉감만 의지하여 인식하기 때문에 나온 말입니다.
그래서 같은 크기의 사과와 오렌지와 배를 만져보기 전에는 전혀 구별해 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21일 동안 갈색 고양이와 함께 생활 했던 한 소녀는 정원에서 갈색 닭을 보자 흥분한 목소리로 “내 고양이!”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래도 이 소녀는 색에 대하여 알게 된 것입니다.
실제로 계단을 만나면 눈을 감아버리고 이전의 감각만을 의지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사물을 총체적으로, 그 크기와 거리 색과 명암 등 종합하여 이해하는 능력이 전혀 부족하였다는 것입니다.
눈을 뜨고 난 다음 피나는 훈련이 필요했습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어 했습니다.
그동안 세상을 인식하던 통로가 폐쇄되고, 전혀 새로운 차원의 길을 가야했기 때문입니다.
훈련 기간 중 혼란에 빠진 한 여성은 이렇게 절규하였습니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예전으로 돌아가면 더 행복하겠어요.”
눈으로 보면서 사는 것이 편하겠습니까? 볼 수 없는 것이 편하겠습니까?
아무리 다른 감각이 뛰어나게 발달하였다고 하더라도 보면서 사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훨씬 편합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려면 아무리 훈련이 어렵더라도 이겨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그 세계는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영안으로 볼 수 있는 세계입니다.
영안으로 본다는 것은 무슨 기이한 다른 세상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아닙니다.
시각 장애인이나 시력이 있는 사람이나 모두 같은 세상을 삽니다. 그런데 시각장애인은 보지 못하고 제한적으로 살아갑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눈을 뜬 사람이나 육안으로 보는 사람이나 모두 같은 세상을 삽니다.
그런데 육안으로만 보는 사람은 그저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 너머의 세계를 보지 못하므로 훨씬 더 제한적으로 살아갑니다.
마치 5만원 권 새 지폐를 박스에 가득 담아 주었습니다. 원하는 것을 마음껏 할 수 있습니다.
새집도 사고 세상 곳곳을 여행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뭔지 모르고 고작 종이접기나 하고 있다면 이보다 더 우둔한 것을 없을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이 세상과 몸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그저 줄이고 늘리고 당기고 푸념하며 울고 싸우며 살아갑니다.
영적으로 눈을 떠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성령으로 기뻐하사”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기뻐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돈이 생기면 사람들이 기뻐합니다. 돈은 원하는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돈으로도 못사는 것이 있습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은 아무리 많은 돈을 주어도 사지 못합니다.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은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영입니다.
돈은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돈이 가장 좋다면 아직 영적으로 눈을 뜬 사람이 아닙니다.
요즈음 성령이 엄청나게 왜곡되어 있습니다. 성령을 받는 것을 능력을 받는 것으로만 강조되고 있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투시의 능력이 생겨 미래를 볼 수 있게 되고, 병 고치는 능력이 생기고, 하다 못해 방언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모두 다 눈에 보이는 세상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남보다 능력을 더 받아서 소원성취 이루고 건강하게 멋들어지게 살아보겠다는 것입니다.
사업이 부진합니다. 가게를 옮기고 집을 팔아야 합니다. 문제가 산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기도원을 가서 목청껏 기도합니다. 방언이 터집니다. 성령을 받았다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고 좋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라며 새로운 사업을 시작합니다. 햄버거 집에서 통닭집으로 업종을 변경합니다.
동쪽에 있는 대학 대신 서쪽에 있는 대학을 지원합니다. 잘 됩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그런데 잘 되지 않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렇게 해서 잘 된다면 기독교인들은 모두 다 부자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성령을 받았는가 받지 못했는가 알아보는 아주 쉬운 방법이 있습니다.
돈 1,000억이 있습니다. 이 돈과 예수님 중 하나만 택하라 하면 무엇을 택하겠습니까?
돈을 택하면 이제는 예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어집니다. 각자 생각해 보십시오.
누구든지 돈을 택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를 부인하면 살려준다고 해도 기꺼이 죽음을 택한 사람들은 모든 시대와 상황에서 반드시 있었습니다.
몽골의 이용규 선교사의 책 “내려놓음”은 입신출세보다 예수님을 택한 사람에 대한 간증입니다.
서울대와 하버드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용규 선교사는 창창한 미래를 뒤로 한 채 열악한 몽골로 떠납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는 그것도 모자라 “더 내려놓음”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왜 자꾸 쌓아올리지 않고 더 내려놓는 것일까요?
예수님을 택했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을 택한 것일까요?
성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영안이 열리고 예수님께서 보라하시는 새로운 세계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성령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은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눅 10:21)
어떤 사람이 성령을 받았습니다. 은사가 생깁니다. 방언하고 예언하고 치유하고....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았다.” 기독교의 특권층이 됩니다.
종교 엘리트로서 스스로 높이고 사람들이 추종합니다. 온갖 특권을 누립니다. 너무나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정반대로 가고 있습니다. 12년 벽면참선하여 득도한 고승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눈으로 보는 세상에서 눈에 더 띄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눈으로 보는 세상에서 남보다 더 높고 크고 강해지고 싶기 때문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신 이유가 그것일까요?
성령은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셨다고 하셨습니다.
어린아이에게는 나타내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것이 옳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이라고 하셨습니다.
선물을 받았습니다. 어린아이들은 그저 좋아할 뿐입니다.
그 선물로 뽐내고 으스대기 시작하면 이미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친구들이 꼴 보기 싫어합니다.
성령은 특권이 아니라 선물입니다. 선물이 선물되기 위해서는 선물을 받고 좋아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무슨 특권인양 자랑하고 군림하기 시작하면 이미 선물이 아닙니다. 더 이상 은혜가 아닙니다.
그 일들이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싫어하고 외면해 버립니다.
설사 성령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보는 것은 눈에 보이는 세상입니다.
여전히 집착하는 것은 입신출세 부귀영화입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겠다고 소리 높여 부르짖어도 성령 하나님은 탄식하시고 마침내 소멸하고 맙니다.
사도 바울이 당부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살전 5:18-19)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 전혀 새로운 세계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세상을 새로운 시각으로 영적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세상은 여전하지만 고난과 어려움도 여전 하지만, 성령을 받자 이 세상과 고난을 전혀 다르게 보기 시작합니다.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였습니다. 그런데 이란성 쌍둥이라서 형 에서는 튼튼하고 유능한 사냥꾼이었습니다.
게다가 맏아들로서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습니다. 반면 야곱은 유약하였고, 게다가 사기성까지 농후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공이 보장된 형 에서는 인생에서도 실패하고 하나님의 눈 밖에 나버립니다.
그러나 동생 야곱은 모든 약점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조상이 되고 천국에 이릅니다.
그들의 운명을 가른 것은 그들이 본 것입니다.
창세기 28:8 이하의 말씀입니다.
“에서가 본즉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그 아비 이삭을 기쁘게 못하는지라.
이에 에서가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 본처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인인 마할랏을 아내로 취하였더라."
에서는 아버지의 명을 거역하고 이방인 여자와 이미 결혼하였습니다. 그런데 에서가 ‘보니까’, 아버지가 이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머리를 써서 이스마엘의 딸을 또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그가 본 것은 그저 겉으로 드러난 현상입니다.
그 결과, 더더욱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며, 상황은 더욱 복잡해집니다. 애는 애대로 쓰면서 가는 곳은 더 깊은 수렁입니다.
반면 야곱은 무엇을 보았을까요? 창세기 28:12 말씀입니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 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고 ”
야곱이 본 것은 하나님의 꿈과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야곱은 어떤 상황에서도 그 꿈과 약속을 놓지 않았습니다.
에서와 야곱.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인간적으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에서가 낫습니다.
야곱은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장자권을 갈취한 야비한 인간입니다.
그럼에도 마침내 야곱에 의해 하나님 나라 이스라엘이 세워진 것은 야곱은 영안으로 하나님의 꿈을 보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았고, 그 꿈과 약속으로 모든 유혹과 환란과 역경을 이겼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윌리암 왕자는 아프칸 최전선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다른 병사들과 똑같이 살아갑니다.
화려한 궁전도, 리무진도, 깨끗한 잠자리도 없습니다. 전선에서 겪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감당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왕자로서 당당하게 살아갑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시나니.”
영안이 열린 사람들은 아버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당하게 살아갑니다.
고난은 나를 강화하고 크게 만드는 훈련입니다. 그러므로 기꺼이 그 고난의 훈련을 감수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온갖 것 질병과 고난과 가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들에게 쩔쩔 매지 않고 당당하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고전 2:10)
성령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깊은 곳까지 통달케 하시는 영입니다.
성령으로 기뻐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압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압니다. 고난과 역경이 와도 그 일을 묵묵히 행합니다.
성령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하시는 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입니다. 그래서 그는 살아납니다. 비록 땅을 딛고 사나 이미 하늘을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