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에서 일본의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의 그것과 역사 흐름의 순서가 너무도 유사하다는 것에 가끔씩 놀래곤 합니다.
일단 다음의 문헌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
백제(百濟)로부터 4세기 말에는 한자와 유교가, 6세기에는 불교가 전래되어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는데, 쇼토쿠태자[聖德太子(성덕태자)]는 불교를 바탕으로 한 정치를 하고 각지에 많은 사찰을 건립하였다. 7세기에 지배계급은 당(唐)나라의 제도를 모방한 율령제도를 지배의 기본체제로 하는 정치개혁을 통하여 왕실을 중심으로 집결하고자 하였고, 국민을 공민(公民;양민)과 노비(천민)로 나누었다. 반전수수법(班田收授法)에 따라 일정한 토지를 부여받은 공민은 조(租)·용(庸)·조(調) 외에 병역·잡역(강제노동)을 부담하였다. 1) 8세기 말부터 9세기에 걸쳐서 율령국가의 기반이었던 반전제가 무너지고 귀족·사찰의 사적(私的) 토지소유인 장원이 발달하였다.
10세기 이후에는 장원·공령(公領)의 경작을 도급받은 농민상층(農民上層)이 차츰 토지경작권을 가지게 되어 자립적으로 경영하게 되었다. 2) 그리고 경작과 경영을 유지하기 위하여 무장한 지주농민과 관리 가운데 무사(武士;사무라이)가 생겨났다. 그들은 이웃에 있는 무사, 중앙귀족, 사찰세력과의 대립 항쟁을 통하여 세력을 신장하였다. 무사들은 정치적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는데, 3) 12세기 중반 이래 다이라[平(평)]·미나모토[源(원)]의 두 무가(武家)가 각축하다가 미나모토 요리모토[源賴朝(원뢰조)]가 가마쿠라바쿠후[鎌倉幕府(겸창막부)]를 열어 이른바 무가정치가 시작되었다. 794년의 교토[京都(경도)] 천도 이후 가마쿠라바쿠후 성립까지의 기간을 헤이안시대[平安時代(평안시대)]라고 한다.
1192년 가마쿠라바쿠후가 성립된 뒤에도 중앙귀족과 사찰세력이 여전히 세력을 유지하여 장원영주·무사영주의 2원지배체제가 지속되었다. 1274년과 1281년의 2회에 걸친 몽골의 침입 때는 태풍에 힘입어 이를 물리쳤으나, 막대한 군비지출 등으로 지배체제가 점차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이 틈을 타서
4) 1333년 반(反)바쿠후세력을 결집한 고다이고왕이 독재에 의한 관료국가의 수립을 시도하였으나 오히려 지방세력의 불만을 고조시켜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를 초래하였다. 남북조시대는
5) 1336년 아시카와 다카우지[足利尊氏(족리존씨)]가 무로마치[室町(실정)]에 바쿠후를 세운 뒤에도 약 60년간 지속되다가 1392년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족리의만)]가 무력세력의 통합을 주창하면서 남조를 소멸시킴으로써 막을 내렸다.
한편 무로마치바쿠후는 처음부터 그 기반이 취약하여 1467년 이후에는 전국시대(戰國時代)라는 혼란기에 접어 들었다. 6) 바쿠후에서 임명한 슈고[守護(수호)]가 다이묘[大名(대명);領主(영주)], 즉 슈고다이묘가 되고 그들이 완전히 독립하여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성장, 센코쿠다이묘[戰國大名(전국대명)]라고 불리게 되었다. 하극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그들은 독자적인 법을 가지고 강대한 군사집단(家臣團)을 편성하고, 영내(領內)의 모든 사람들을 지배하는 다이묘료고쿠[大名領國(대명령국)]를 형성하였다. 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직전신장)]는 다이묘 가운데 주도권을 잡기 위하여 중앙에 진출하였다. 그의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풍신수길)]가 1590년 전국을 통일하였고 1592~1593년, 1597~1598년의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을 침략하여 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문화적·경제적 약탈을 자행하였다. 결국 전쟁은 실패로 끝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덕천가강)]가 경쟁자를 물리치고 1603년 에도[江戶(강호);지금의 東京(동경)]에 새 바쿠후를 개설하였다.
~
<출처: 야후백과>
----------------------------------------------------------------------------------------------------------
1) 8-9세기에 일본의 역사에서는 귀족 및 사찰의 사적 소유권이 강화되어 중앙의 힘이 약화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와 함께, 율령국가의 기반이 무너졌다라고 표현을 합니다.
2) 10세기 이후 농민상층이 토지경작권을 가지게 되어 무장한 지주농민과 '사무라이'의 성장이 눈에 보입니다. 이 사무라이들은 중앙정부와 귀족들간의 갈등의 틈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3) 12세기 중반에는 이들이 무사집단들 중에 '다이라(평)'라는 무가세력과 '미나모토(원)'이라는 무가세력의 각축속에서 '미나모토(원)'이라는 무가세력이 실권을 장악하는 것 같습니다. 이로서 일본역사에서는 '무가정치'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4) 이들 무가세력들의 기세가 꺽이는 것은 1333년 고다이고왕이라는 독재군주가 나타나면서 일본이 남북이 분열되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남북조'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들 무사들의 세력은 주로 남쪽으로 위치하였던 것 같습니다.
5) '족리존씨'라는 인물이 1336년 무로마치 막부를 세운후에도 남북의 갈등은 60여년간 지속되다가 1392년 '족리의만'이라는 인물이 남조를 소멸하여 다시 통합되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여기서 족리의만이라는 인물은 족리존씨의 아들로 추측됩니다. 같은 성 '족리'가 아닐까요?... 일본의 성도 한국처럼 이름 앞에 오는 것인지?...
6) 1467년 이후 일본의 전국시대 사무라이(무사)가 없어지고 '다이묘'라는 지배계급이 성장하여 '전국대명'이라고 불리게 되었답니다. 이후는 우리가 알고 있는 임진왜란의 시작이 됩니다.
----------------------------------------------------------------------------------------
여기서 이 역사적 사건들의 흐름을 한국의 역사에 대입을 시켜보면, 8-9세기 신라 지방정권의 성장과 호족의 성장으로 왕권이 약화되는 것을 알 수 있으며, 10세기 이후 고려의 성립과 함께, 11세기 이후 무신정권의 시대로 접어드는 부분과 역시 유사합니다. 한국의 역사에서는 '무신정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면, 일본의 역사에서는 '무가정치'라는 용어를 사용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 무가의 이름이 '평' 또는 '원'이 됩니다. 그 중의 승리자는 '원'이 됩니다. 비록 한문이 다르더라도, 당시의 실세인 징기스칸의 '원나라'의 음과도 유사한 점이 나타납니다. 이후, 1300년대 이후 몽고와의 전쟁이후 이들 무가들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남쪽으로 밀려나는 것을 알 수 있고, 당시의 한국의 역사는 공민왕(고다이고왕?)의 개혁정치의 상황과 유사하며, 남쪽으로 밀려난 삼별초의 항쟁이 연상됩니다. 이 남북의 갈등을 해결한 인물이 '족리존씨' '족리의만' 부자인 것 같은데... 이성계와 이방원의 조선의 성립과 유사하며 인물의 역사적 흐름의 분포가 너무도 유사합니다. 서구의 기록에서 티무르의 한쪽 다리가 문제가 있다라는 기록을 본적이 있습니다. 이와 유사하게 이 인물도 이름에 다리를 상징하는 '족'자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또한, 1392년이면 조선이 개국한 해와 일본의 남북조의 통일시기가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사실입니다. 더욱이, 이후의 정치는 무가 정치가 아니라 '다이묘'의 정치인데, 해당시기 한국의 역사는 '대명률'을 따르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전체적으로 서로다른 2개의 국가에서 이렇게 유사한 역사적 흐름을 보일 수 가 있는 것일까요?
다시말하면, 일본의 중세-근세 역사는 고려와 조선의 역사를 그대로 기술했다고 밖에는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또한 일본의 근본이 되는 세력들은 남쪽으로 밀린 사무라이 계급이며, 이들은 '고려 무신정권의 후예들인 삼별초의 후예'들일 수 있다는 강한 확신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 만큼 황제가 중심이 되는 세상에서 농상민층의 성장으로 독자적인 세력을 갖출 수 있었다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이 '황제'와 '무신독자세력'간의 갈등을 해소한 인물이 바로 이성계(족리존씨)가 될 수 있으며, 조선이라는 또 다른 왕조가 생겨난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분석합니다.
첫댓글 홍진영선생님과 일본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concept으로 생각했었습니다. 야후백과에 따르면 <금속제의 장도는 야요이[彌生(미생)]시대부터 있었으나, 보통 일본도는 헤이안[平安(평안)]시대 후기부터 제작된, 등이 휘고 날의 양 옆에 능선이 있는 도를 가리킨다>.. 즉, 일본도라는 것은 평안시대 이후, 중세사회이후, 한국의 역사로 따지면 무신정권의 몰락기에 해당되는 시기입니다. 이 시기에 나타난 도의 양식을 주로 말한다는 것이죠... 일본도를 통해 접근해 보아도 일본이라는 나라의 문화는 고려의 무신정권의 문화와 또 다시 연결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만큼 일본도에는 고려의 무신정권과 그들을 지지했던 백성들의 문화와 정서가 스며든 것이 아닐런지? 다시말해, 부엌칼을 들고 민가에서 뛰쳐나왔던 그들의 한을 나름대로 예술적, 기능적으로 승화시킨 그들의 정서가 '일본도'가 아닌지?.. 단순함의 예술적 승화라고나 할까요... 홍진영님의 칼과 도에대한 의견은, 여러가지를 느끼고, 생각하게 해주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혜안 입니다 조선이 졍주영 이라면 일본은 이익치 쯤 되는거 아니겠습니까 / 사찰세력 이것이 바로 한반도에 누가 있었나? 를 푸는 단서 입니다 지나에서 이조와 일본이 애증의 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 한반도에는 제석사만이 살았고 사무라이들이 그들을 섬겼다고 나는 연구하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고려와 일본은 상당히 가까운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일본도'로부터 얽힌 내용을 찾아보면서 발견하였습니다.
개인적인 의견입니다만, 한반도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한반도의 중심의 위치가 어디인가를 일단 확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대륙의 중심이 '시안'이라면 한반도의 중심의 위치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반드시 현재의 서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의미입니다....
어떻게 보면, 한반도는 종교적, 또는 상징적으로 중요한 지리적 위치가 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가야와 신라의 자취를 찾아보면, 중앙아시아로부터 북방의 길을 통해 현재의 한반도까지 이어져 있다는 연구가 많습니다. 그만큼 해당위치에서 주요한 인물들이 최후로 정착하는 위치가 한반도이지 않은지, 그러한 생각을 저도 많이 하셨습니다..
또 하나의 한반도의 주요 용도는, 조선과 고려의 정치범들이 귀양오는 귀양의 장소일 수 있다는 가정입니다... 그 만큼 오지이고, 성지일 수 있다는 생각도 함께 하여왔습니다... 그러므로, 전혀 의미가 없는 곳이 아니라는 얘기가 됩니다만... 구체적 근거는 많이 찾지는 못했습니다. 언제 한번 함께 이야기 할 수 있는 기회가 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