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시 유명사찰 암자를 순례하고 왔습니다
경남 양산시 통도사
한국의 사찰은 각기 나름대로의 고유한 성격과 특징 및 가람배치를 통하여 이 땅에 불법을 전파하고 있다. 특히 삼보사찰의 경우 이러한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 즉 통도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가사를 봉안한 불보(佛寶)사찰로, 해인사는 부처님의 말씀(法)인 팔만대장경을 간직하고 있는 법보(法寶)사찰로, 송광사는 보조국사 이래 열여섯 명의 국사를 배출한 승보(僧寶)사찰로 이름나 있다. 이것은 불교의 요체인 불, 법, 승 삼보가 각 사찰에 따라서 어느 한 부분의 특별히 강조되어 표현된 것이다.
통도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금란가사(金欄袈裟-금실로 수놓은 가사)를 모시고 있기 때문에 삼보 가운데 가장 으뜸인 불보사찰의 위치를 갖게 되었다. 통도사를 한국불교의 으뜸인 불지종찰(佛之宗刹)이요, 국지대찰(國之大刹)이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히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사리탑이 있는 제1적멸보궁이기에 대웅전에는 불상이 없는 사찰로 유명하다. 통도사 대웅전은 실제로 부처님이 살아 숨 쉬고 계시는 공간이기 때문에 다른 사찰의 대웅전과는 다른 종교적 상징성을 갖게 된다. 따라서 정자형(丁字形) 법당 사면에는 각각 다른 이름의 편액(扁額)이 걸려 있는데, 동쪽은 대웅전(大雄殿), 서쪽은 대방광전(大方廣殿), 남쪽은 금강계단(金剛戒壇), 북쪽은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 쓰여 있다.
경남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583 극락암
통도사에서 서북쪽으로 1.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극락암은 근현대의 고승인 경봉(鏡峰) 스님이 주석하셨던 곳으로 유명하다. 1344년(고려 충혜왕 복위 5)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며 창건주는 알 수 없다.
그 뒤 1758년(영조 34) 지홍대사(智弘大師)가 중건하였으며 1968년 이후 가람 전체를 경봉스님이 중건ㆍ중수하였다. 선방인 호국선원(護國禪院) 앞에는 영월루(暎月樓)가 있고 연수당(延壽堂)ㆍ수세전(壽世殿)ㆍ독성각(獨聖閣)과 함께 33조사(祖師)의 영정을 봉안한 조사당(祖師堂)이 있다.
경봉스님의 거처였던 아담한 삼소굴(三笑窟)과 함께 암자로서는 매우 큰 규모이다. 그리고 암자 입구에 있는 ‘극락영지(極樂影池)’는 영취산의 봉우리가 비치는 연못으로 유명하며, 연못을 가로질러 놓여있는 홍교(虹橋)와의 조화가 아름답다.
경남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583 서운암
서운암은 수도암에서 들판을 내려와서 남쪽으로 약 400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암자이다. 1346년(고려 충목왕 2) 충현대사(沖絢大師)가 창건하였으며, 1859년(철종 10) 남봉대사(南逢大師)가 중건하였다. 근래에는 성파(性坡) 스님이 다시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장암
자장암은 통도사의 창건주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수도하던 곳이다. 창건연대는 미상이나 회봉대사(檜峰大師)에 의하여 중창되었다고 하며, 1963년 용복화상(龍福和尙)이 중수하였다. 법당은 암벽을 의지하여 서향하였고 그 옆에는 1896년에 조각된 약 4m의 거대한 마애불(磨崖佛)이 있다.
법당 뒤쪽 암벽에는 석간수(石間水)가 나오는데 자장율사가 손가락으로 바위에 구멍을 뚫어 금개구리를 살게 하였다는 소위 금와공(金蛙孔)이 있어 유명하다. 이능화(李能和)의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 하권(下卷) ‘승유어급변화금와(僧遺魚及變化金蛙)’ 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축서산 통도사의 자장암 곁의 커다란 암벽에 손가락 하나가 들어갈 만한 구멍이 있는데 그 속에 작은 개구리가 있다.
몸은 청색이고 입은 금색인데 어떤 때는 벌이되기도 하여 그 변화하는 것을 헤아릴 수 없다. 여름철에 바위가 과열되면 뜨겁기가 솥과 같으나 그 위를 자유로이 뛰어다닌다. 사승(寺僧)이 이를 일러 금개구리라 하더라. 그런데 이 금개구리는 도무지 산문(山門) 밖을 나가지 아니한다고 하므로 한때 어떤 관리가 그 말을 믿지 아니하고 그 개구리를 잡아 함 속에 넣어 단단히 닫고서 손으로 움켜쥐고 돌아가다가 도중에 열어보니 없어졌다. 세간에 전하기를 그 개구리는 자장율사의 신통(神通)으로 자라게 한 것이라 말한다.”
경남 양산시 하북면 용연리 291 내원사
내원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통도사의 말사
창건설화는 송고승전(宋高僧傳)에 전하여 지는데 당시 동래 척판암에 주석하시던 원효성사께서 당나라 산서성 태화사에 수도하던 천명대중이 뒷산이 무너져 위급한 사고를 당할것을 미리 아시고 "해동원효 척판구중(海東元曉 拓板救衆)"이라고 판자에 써서 태화사 상공에 날아다니게 했다. 대중이 공중에 뜬 판을 보고 놀라 일주문 밖으로 나온 순간에 산사태가 나서 절은 무너져 버리고 대중은 모두 위기를 모면했다고 한다.
그 후, 구출된 천명의 대중은 도를 구하여 성사를 찾아왔으므로 성사는 그들을 데리고 머물곳을 찾아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중방리(지금의 용연리)를 지날적에 원적산(圓寂山) 산신령이 마중 나와 "이 산에 천명이 득도할 곳이니 청컨데 이 곳으로 들어와 머무소서" 하니 성사는 산신령이 인도하는 바를 따라 지금의 산령각 입구 까지 온 즉 원적산 산신령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 산령각을 짓게되어서 유독 내원사 산령각은 큰절에서 5리 밖에 떨어져 있게 되었다.
성사께서 왼쪽 계곡을 따라 들어와서 대둔사(大屯寺)를 창건하고 상, 중, 하 내원암과 아울러 89개의 암자를 창건하시어 천명의 대중을 머물러 수도케 하였다.
그리고 대중을 산 상봉에 모이게 하여 "화엄경"을 강설하였으므로 지금도 그곳을 화엄벌이라 하며,988명이 이 산에서 득도하였고 나머지 12인중 8명은 팔공산(八公山)에서, 4명은 사불산(四佛山)으로 가서 도를 깨달았다하여 이후로 원적산을 천성산(千聖山)이라 부르게 되었다. 창건 후 고려시대의 사적은 전하는 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