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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아스의 선행
룻 2:8-16
8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9 그들이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이 길어 온 것을 마실지니라 하는지라
10 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하니
11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
12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13 룻이 이르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하녀 중의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하니라
14 식사할 때에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 하므로 룻이 곡식 베는 자 곁에 앉으니 그가 볶은 곡식을 주매 룻이 배불리 먹고 남았더라
15 룻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날 때에 보아스가 자기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그에게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며
16 또 그를 위하여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에게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 하니라
룻 2:8-16 / 보아스가 룻에게 말하였다. `모압댁, 내 말 좀 들어 봐요.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아요. 여기서 다른 데로 가지 말고 우리 집 아낙네들을 따라 같이 다니시오. 9) 일꾼들이 일하는 이 밭을 한번 보구려. 저 일꾼들 뒤만 쫓아다니시오. 저 젊은 일꾼들에게는 모압댁에게 치근덕거리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두었소. 목이 마르거든 일꾼들이 항아리에 길어다 놓은 물이 있으니 목을 축이도록 하시오.' 10) 그러자 룻이 땅에 엎드려 절하며 말하였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저에게 잘 대해 주시나요. 이방 여자인 저에게 이토록 마음을 써주시다니!' 11) 보아스가 룻에게 말하였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에 모압댁이 시어머님을 어떻게 모셨는지 내가 다 들어서 알고 있소. 또 어떻게 해서 고향과 부모님 품을 떠나 낯선 백성이 사는 이 땅으로 오게 되었다는 말도 내가 자세히 들어서 알고 있소. 12) 여호와께서 모압댁이 지금까지 살아온 모습을 보시고 그대로 갚아 주시길 바라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안식처를 찾아 그 품안에 들어온 모압댁에게 넉넉하게 갚아 주시길 바라오.' 13) `어르신네, 부디 저를 잘 보아주셔요. 저는 어르신네의 몸종만도 못한 몸인데 이토록 위로해 주시고 다정스럽게 말씀해 주시니 그지없이 고마울뿐이에요' 하고 룻이 말하였다. 14) 끼니때가 되자 보아스가 룻에게 말하였다. `모압댁, 이리로 좀 와서 떡을 떼어 이 시큼한 장에 찍어 들어 봐요' 룻은 곡식 거두는 일꾼들 곁에 앉았다. 그들이 볶은 곡식을 주어 룻은 배불리 먹고도 남았다. 15) 룻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나자 보아스가 일꾼들에게 일러두었다. `저 여인이 곡식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더라도 싫은 소리 하지 말게. 16) 오히려 단에서 조금씩 이삭을 뽑아버리게. 그러면 저 여인이 이삭을 많이 주울 수 있겠지. 절대로 저 여인을 꾸짖지들 말게.'
보아스는 롯이 이삭을 줍도록 호의와 배려를 베풉니다(8-9). 룻은 자신에게 왜 이런 친절을 베풀어 주는지 겸손히 묻습니다(10). 보아스는 룻에게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고, 그가 선택한 행동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며 선하게 갚아 주실 것이라고 말하여 그녀에게 용기와 격려해줍니다(11-13). 보아스는 자비와 관대한 마음을 잘 드러내면서도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풍요를 궁핍한 사람과 나눌 줄 아는 경건한 사람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처럼 참된 경건은 환난 중에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덕목도 있습니다(약 1:27). 이에 좋은 모범이 되는 사람이 보아스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것입니다(8-13) 보아스는 친절하고 배려심이 깊고, 롯은 부지런하고 성실하며 겸손합니다. 보아스와 롯의 만남은 호의와 배려, 겸손과 성실이 넘치는 은혜가 넘치는 만남입니다. 모압 사람을 향한 유대인들의 인식은 좋지 않습니다(신 23:3-4). 하지만 롯은 모압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이스라엘의 율법을 알고 있는 듯 겸손한 자세를 유지합니다. 룻은 보아스가 베푼 은혜를 정확히 호의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은혜가 은혜인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은혜가 은혜인 줄 모르는 팍팍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 이처럼 큰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대단한 능력보다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또한 많은 정보와 지식보다 은혜가 은혜인 줄 아는 믿음이 절실한 때입니다.
믿음은 누군가에게 날개 그늘이 되어주는 것입니다(14-16) 보아스는 롯을 식사 자리에 초대하고 그에게 볶은 곡식을 나누어 줍니다(14). 또한 앞으로도 곡식을 주워 갈 수 있도록 특별한 명령까지 내립니다(15). 보아스의 넉넉한 마음과 관대한 마음은 예수님을 닮았습니다. 성도는 누군가에게 안전과 도움을 줄 수 있는 마음의 넉넉함을 가진 자들입니다.
적용: 오늘도 당신이 배워야 할 하나님의 성품(벧후 1:4-8)은 무엇입니까? 오늘 당신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친절과 호의, 위로와 용기를 줘야 할 이웃은 누구입니까?
농사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기다림과 꾸준함’입니다. 농사는 적어도 2~3년 동안은 결실이 없는 논을 갈고 매야 합니다. 그동안 소득은 없습니다. 농사를 통한 소득은 당장 얻는 것이 없고, 힘들기만 한 그런 노력이 있은 후에 얻어지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오늘 심고 내일 거둘 수 있도록 세상을 만드시지 않은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얻고자 함이 있다면 먼저 해야 하는 수고와 노력이 있어야 함을 깨우치게 하시려 함이 아니었을까요? 하나님은 심지 않은 곳에서 거두려하고 뿌리지 않은데서 모으려 하는 자를 책망하시는 분이십니다.
< 설 교 >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라
룻 2:8-10 / 이한규목사
< 하나님의 품에 있으라 >
보아스는 이미 룻에 대한 좋은 소문을 들은 상태에서 사환의 말까지 듣고 상당히 마음이 열린 상태였다(8절). 그래서 룻에게 호칭부터 “내 딸아!”라는 따뜻한 호칭을 쓰면서 자기 밭에서 이삭을 줍도록 배려했다. 또한 일꾼들을 주려고 길어 온 물까지 자유롭게 마시도록 했다(9절). 만약 룻이 다른 밭으로 간다면 보아스가 베푼 혜택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 그처럼 하나님의 품을 떠나면 결국 다 빼앗긴다.
하나님을 사모하며 바라보고 경배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내 몫의 십자가를 질 때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되고 나의 내면도 풍성해진다. 하나님의 품에 안기려면 똑똑해야 하거나 성공해야 할 필요도 없다. 또한 말씀을 지식적으로 많이 알거나 예배 형식이나 기독교 의식에 익숙해지는 것도 크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품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내 마음을 접속시키라. 하나님께 나를 매면 신기하게 세상으로부터 풀리고 더 나아가 ‘자아’라는 감옥에서도 풀려난다. 불평이 습관화된 입술은 하나님 밖에 있으면서 자아에 매인 표식임을 나타내는 증거다. 참된 안식의 원천은 하나님 밖의 화려한 불빛이 아니라 하나님 안의 진리의 빛이다. 믿음이란 한 마디로 하나님의 품 안에 있으려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 있기만 하면 내 앞에 플러스 인생이 펼쳐진다.
하나님 품 안에 있으라는 말은 힘든 현실에서 벗어나서 단순히 편하게 쉬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내 뜻으로 삼으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손이 되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고 하나님의 발이 되어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눈을 가지고 세상의 아픔과 상처를 안타깝게 여기고 세상을 치유하는 일에 나서라는 것이다. 세상의 불의와 맞서려면 하나님의 품 안에서 주어지는 능력이 필요하다.
<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라 >
보아스의 조치에 감격해서 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깊은 존경심을 표시했다(10절). 그때 보아스는 더욱 룻에게 은혜를 주고 싶었을 것이다. 누가 하나님의 은혜를 지속적으로 받는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감사하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 큰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에 비하면 저는 무익한 종으로서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한다. 그런 사람에게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게 된다.
자세히 보면 내 주변에는 온통 내가 신세를 진 사람으로 넘쳐 있다. 내가 남을 위해서 한 일은 참 적지만 남으로부터 신세를 진 것은 참 많다. 사실 내가 먹는 빵 하나에도 무수한 사람들의 손길이 있었다. 특히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신세를 지고 살았다. 그러므로 받은 은혜를 인해 하나님을 찬양하고 이웃에게도 감사하라. 받은 것은 많고 준 것은 적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은혜 안에 있는 사람이다.
내게 주어진 어떤 것도 당연하게 주어진 것으로 여기지 말라. 추수할 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지만 감사할 때 추수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또한 풍요롭게 될 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지만 감사할 때 풍요롭게 된다는 사실도 잊지 말라.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라.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면 하나님의 손길이 나의 삶 곳곳에 미치지 않은 곳이 없고 하나님은 나를 한 번도 실망시키지 않으셨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런 감사하는 믿음으로 살면 축복의 뿌리가 튼튼해진다.
어려울 때도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고 내가 지금 살아있고 지금도 내가 살아계신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이다. 나의 삶이나 나의 누림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라. 그 당연한 일은 우연히 펼쳐진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필연으로 허락된 일이다. 내가 이제까지 잘 성장하게 된 것은 부모의 주름살이 하나 더 늘고 머리칼이 하나 더 빠진 결과로 주어진 은혜다. 부모의 은혜도 당연하게 받기보다 감사하게 받아야 한다. 하물며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당연하게 받기보다 감사하게 받아야 한다. 그때 은혜도 넘치게 된다.
밝은 미래를 여는 하나님의 사람
룻 2:8-13 / 곽창대목사
요약
룻기에 나오는 보아스는 유력한 자입니다(2:1). 유력한 자란 일차적으로 부호라는 뜻이지만, 룻기 전체를 볼 때 존경 받는 지도자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룻기 저자가 보아스를 유력한 자로 소개하는 데는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보아스는 모든 부류의 사람들에게서 존경과 축복을 받았습니다. 제법 큰 밭을 소유했던 보아스는 추수 때가 되면 여러 명의 품꾼들을 고용했는데, 그 품꾼들에게 보아스는 축복을 받았습니다(2:4). 그리고 자기 밭에서 곡식을 줍고 있던 룻에게서도 축복을 받았습니다(10, 13절). 룻의 시어머니인 나오미에게도 축복을 받았습니다(2:20). 베들레헴 주민들과 장로들에게도 축복을 받았습니다(4:11~12).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늘 마주치는 이웃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습니까? 대개 유력한 사람들을 보면 바깥에서는 존경을 받지만 가까운 사람에게는 존경과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같이 지내다 보면 단점과 약점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사장이 직원들에게, 정치가가 백성들에게, 부자가 가난한 자들에게, 부모가 자녀들에게, 교사가 학생들에게, 목자가 목원들에게, 장로와 목사가 성도들에게 인정과 칭찬과 존경받는 것, 쉬운 일이 아니지만 성도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보아스처럼 주위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축복을 받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 보아스는 이웃 사랑이 몸에 베여있었습니다. 보아스는 힘없는 자들을 따듯하게 축복했습니다(2:4). 특히 가난하고 불쌍한 룻에게 최선을 다하여 선행을 베풀었습니다(8~9절). 그리고는 룻을 초대하여 편안하게 식사하도록 배려했습니다(2:14). 칭찬과 격려로 최고의 배려를 보여주었습니다(2:11~12). 룻이 갑작스레 청혼했을 때, 룻을 박절하게 대하지 않고 오히려 크게 격려했습니다(3:10~11). 한 걸음 더 나아가 율법에 명시된 수준을 넘어서는 선행을 실천했습니다(2:15~16). 참 경건은 이처럼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음식을 먹고 잠을 자는 일상생활 속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습니다. 소외된 자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어울려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심으로 참 경건을 보여주셨습니다. 율법의 요구에 순종하셨을 뿐 아니라 율법의 요구에 지나도록 행동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앞두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세상의 관례와 법을 뛰어넘어 섬기는 삶을 본으로 보이셨습니다. 특히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은 사람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보아스가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서 인정과 칭찬과 존경을 받았던 이유는, 예수님과 같이 남을 대접하고 섬겼기 때문입니다(마 7:12, 20:28, 23:11~12).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대접하고 섬긴 자들에게는 예수님께서 크게 칭찬하십니다(마 25:40). 이처럼 참된 행복은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데서 찾아옵니다. 보아스처럼 이웃 사랑이 몸에 베인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 보아스는 인간관계나 사회적 질서를 존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보아스는 룻과의 혼인을 앞두고 육신의 정욕이나 감정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절차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합법적인 허락을 받을 때까지 룻을 존귀하고 거룩하게 대했습니다. 이처럼 그의 신앙과 인격은 참으로 고결하고 성숙했습니다. 사회적 질서도 잘 지켰습니다. 나오미와 룻의 가계가 온전히 회복되려면 기업 무르는 법과 수혼법이 동시에 지켜져야 했습니다. 이것을 안 보아스는 이 두 가지 법을 준수하기 위해 성실하면서도 민첩하게 일을 처리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한 일에 대하여 아무도 흠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의 행위는 모든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기에 충분했습니다.
이런 자가 유력한 자요 참 지도자입니다. 이런 자가 가정은 물론 사회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 밝은 미래를 여는 지도자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보아스처럼 사회의 기강을 바로 잡는 좋은 지도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보아스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경천애인(敬天愛人)”의 사람이었습니다. 보아스가 한 말들을 보면 거기에 하나님 여호와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습니다(2:4, 11~12, 3:10~11, 13).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진실한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보아스는 실로 착한 지도자, 착한 주인, 착한 가장, 착한 남편, 착한 사위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칭찬하십니다(약 1:27).
보아스는 이처럼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은 보아스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는 열쇠는 성령님의 충만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닮도록 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심령에 내주해 계십니다. 보아스처럼 유력한 지도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다 성숙한 사람, 보아스 같이 유력한 사람이 되려면 성령님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성령님의 충만을 갈망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작은 것에서부터 순종하여 살면 점점 보아스 같은 사람,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유력한 자들이 되어서 가정과 교회와 사회의 밝은 미래를 활짝 여시기 바랍니다.
은혜, 그 역전극
이규현목사 / 룻기 2:8~13
우리 삶은 우리가 예상한 대로 정확하고 질서정연하게 진행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않은 일들이 불규칙적으로 다가옵니다. 나와는 상관없다고 여겼던 일을 경험하며 인생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합니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희비가 교차하고, 크고 작은 사건들이 우리의 계획을 변경시키기도 합니다. 사람마다 숱한 사연들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왜 이렇게 인생이 힘든가가 아니라, 내 삶이 하나님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 밖에서 겉돌고 있는가입니다. 우리 삶의 이야기가 하나님과 상관없이 흘러간다면 history(히스토리, 역사)이지만, 하나님과 관련되어지면 his story(히즈 스토리, 그의 이야기)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시고 이끄셔서 새로운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전개된 것이 <룻기>입니다. <룻기>는 사시기와 사무엘서 가운데에 있습니다. 사사기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던 시대로, 사사들이 치리하여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던 혼란의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암흑의 시기인 <사사기>에서 왕조의 <사무엘서>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한 개인의 스토리를 담은 룻기서가 들어간 것입니다. 모압이라는 이방 땅의 한 평범한 여인, 룻의 이야기가 사사기와 사무엘서의 한가운데 정경으로 배치된 것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평범한 개인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룻기>의 앞부분은 어둡고 안타깝습니다.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나오미는 고향 예루살렘에 흉년이 들어 먹고살기가 힘들어지자 남편과 함께 모압으로 갔지만, 또 그 땅에 흉년이 들고 말았습니다. 문제를 피해서 왔는데 또 다른 문제를 만난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고 더 엄청난 일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낯선 이방 땅에서 객사한 것입니다. 왜 죽었는지는 언급이 없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먹고살기 위해 이방의 땅으로 넘어온 것에서 무엇인가 암시하는 것이 있지만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삶이 얼마나 힘들고 피곤했을까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과부가 된다는 것은 오늘의 개념과는 전혀 다릅니다. 바닥난 인생의 표징입니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이 홀로 살아간다는 것은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의지할 곳 없고 생존이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고, 유일한 희망이었던 두 아들마저 연달아 죽습니다. 졸지에 이방 땅에서 세 남자를 잃었고, 한집안에 세 명의 여인이 졸지에 과부가 된 것입니다. 화불단행(나쁜 일은 몰려온다), 머피의 법칙(불운이 연속됨)입니다. 희망의 불빛이 완전히 꺼져 버렸습니다. 모든 크고 작은 희망의 끈이 사라진 것입니다. 이보다 더 불행한 것은 없고, 해답이 보이지 않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는 젊은 두 며느리의 인생을 위해 각자의 길을 가도록 권유했습니다. 남편들이 다 죽은 상황에 여인들이 모여 있다고 형편이 더 나아질 것도 없고 서로를 더 어렵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때 큰 며느리 오르바는 “어머님 그러지 마시지요.”라고 하면서도 떠나버립니다. 그러나 둘째 며느리 룻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16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룻 1:16~17)」라고 기가 막힌 말을 했습니다.
삶이 척박하면 사람이 강팍해져서 다른 사람을 배려하기보다 내가 먼저 살아야겠다는 이기심이 발동합니다. 첫째 며느리는 상식적으로 당연한 선택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도 욕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룻은 신앙고백과도 같은 단호하고 굳은 결의를 보입니다. 사실 지금 나오미에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룻의 선택은 의외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시어머니와 함께하겠다는 결연한 태도와 결단은 순간의 동정에서 나온 것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인생은 선택입니다. 최악의 순간에 어떤 선택을 하는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어려우면 대개 근시안이 되어, 어려움에서 빠져나가는 것에만 몰두합니다. 그래서 당장 쉬운 길을 찾습니다. 인생의 갈림길은 바로 이때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룻은 자신의 선택에 생명을 걸고 있습니다. ‘나는 죽어도 어머니를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에스더서>에서 에스더도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그 선택은 옳았고 민족의 운명을 바꿔 놓았습니다. <여호수아서>에서 여호수아도 다양한 신들 앞에서 우물쭈물 하고 있는 백성에게 너희가 섬길 신을 선택하라고 단호하게 외칩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수 24:15)」
인생의 갈림길에는 생명을 건 선택과 결단이 있습니다. 우리 삶의 중요한 변화는 생명을 건 선택이 있는 곳에서 일어납니다. 그런 의지적인 선택은 우리가 가는 길을 완전히 바꾸어 놓습니다. 그 선택은 하나님의 은혜 안으로 들어가는 행동이 됩니다.
룻이 나오미를 선택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순히 인간적인 애정일까요? 홀로 된 시어머니가 불쌍해서, 달리 갈 곳이 없어서일까요? 룻은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라고 말합니다. 그의 선택은 신앙적 동기에서 왔다는 것이 확실해집니다. 시어머니가 믿는 하나님을 나도 선택하고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큰 며느리 오르바가 나오미를 떠난 것은 그가 믿는 신에 돌아갔다는 의미입니다. 평소 룻은 나오미에게서 여호와를 보았고, 신앙적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시어머니에게는 기대할 것이 없지만, 그녀가 믿는 하나님을 보고 선택하였고, 나오미와의 결별이 하나님을 떠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룻이 붙들었던 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이것이 생명의 고리요, 하나님의 은혜를 끌어오는 결정적인 선택이었습니다. 그녀는 칠흑같이 어두운 인생의 순간에, 빛줄기가 있는 곳을 향하는 영적 탐지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선택이 중요합니다. 은혜가 있는 곳을 감지하는 능력이 인생을 축복되게 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귀하고, 그것이 가져오는 축복이 무엇인지를 룻기를 통해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위대한 인생의 전환은 위대한 선택에서 오는 것입니다.
드디어 나오미는 모든 것을 잃고 슬픔 가득한 모습으로 이방의 땅에서 얻은 며느리 룻을 데리고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옵니다. 나오미는 비탄에 잠겨 있었고, 그들의 옹색한 행색을 바라보는 고향 사람들의 시선도 싸늘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의 평범한 일상이 시작됩니다. 우선 먹고 살아야 하니, 룻이 이삭을 줍는 일을 시작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납니다. 룻이 이삭을 줍던 밭은 그 지방의 유력한 사람인 보아스의 땅이었고, 보아스에게 룻의 모습이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보아스의 가슴이 뛰기 시작합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의도적으로 다가가 은혜를 베풀기 시작합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의미 있는 말을 던집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주시기를 원하노라(룻 2:12)」 시어머니를 선택하고 따라온 룻에게 얼마나 어울리는 말입니까?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이 말은 밭에 나오기 전에 룻이 나오미에게 한 말과 같습니다.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룻 2:2)」 여기에서 ‘은혜’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또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룻 2:10)」 여기에서 은혜는 보아스와의 만남을 통해 나타납니다. 은혜는 만남을 통해서 일어날 때가 많습니다. 보아스는 그 땅의 유력한 남자이며, 도저히 만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룻에게 은혜가 임했고, 기이하고 놀라운 만남을 통해 룻의 인생이 빠르게 돌아갑니다.
인생의 역전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성경에서는 수없는 대역전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 3절을 주목해보면,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룻 2:3)」 여기에서 ‘우연히’ 라는 단어는 룻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4절에는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룻 2:4)」 여기에서 또 ‘마침’이라는 단어에 주목하게 됩니다. ‘우연히’, ‘마침’은 무엇인가 오묘한 일들이 신기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룻이 집을 떠나기 전에 한 말이 무엇입니까?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룻 2:2)」였습니다.
은혜란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우연을 섭리로 바꾸어놓는 것을 말합니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개입이 일어나면 갑자기 기가 막힌 반전이 일어납니다. 뜻밖의 장소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5장에서 어부 베드로가 밤새 물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허탈하게 그물을 씻고 있는 일상 속에 주님이 찾아오십니다. 이것을 운명적 만남, 섭리적 만남이라고 합니다. 모세가 갈대상자에 담겨 나일강으로 정처 없이 떠내려가고 있을 때 바로왕의 공주의 딸이 우연히 목욕하러 나왔다가 그 상자를 건집니다.
‘우연히’를 우리는 ‘섭리’라고 합니다. 그것은 은혜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운이 좋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어떤 평범한 여자가 길거리 캐스팅이 되고 졸지에 스타가 되었다는 식의 이야기는 세상에서도 가끔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에서 은혜라는 단어는 쓸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연관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 후에 축복이 될지 아무도 보장해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대박에서 쪽박이 된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단순히 운이 좋은 것과 안 좋은 것에 인생을 맡기는 것은 도박입니다.
그러나 은혜는 다릅니다. 은혜 안에는 ‘우연’이 없습니다. 우리 삶은 하나님의 철저한 의도와 정확하고 완벽한 개입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하는 순간의 결정은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룻기를 통해서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룻에게 ‘여호와의 날개 아래의 보호’는 보아스였습니다. 은혜는 축복된 만남으로 찾아옵니다. 우리 삶 가운데에도 만남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 바랍니다.
사실 룻은 밭에서 이삭을 줍는 비천한 여종의 신분입니다. 젊은 나이에 쓴 인생의 고통을 지나온 그 얼굴에서 광채는 없었을 것이고, 무엇인가를 뒤집어쓰고는 땡볕 아래에서 허리가 휘도록 이삭을 줍고 있는 여인의 모습에서 무슨 매력적인 것이 드러났겠습니까? 그러나 보아스는 룻에게 뿜어져 나오는 아름다움에 눈이 부셨습니다. 가슴이 뛰었습니다. 못생겨도 괜찮습니다. 은혜만 임하면 하나님이 하십니다. 비로소 룻은 그 땅의 부호요, 기업을 무를 자인 보아스와 결혼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들을 낳습니다.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룻 4:17)」 어찌 이런 놀라운 일이 있을까요. 이방 여인 룻이 다윗 왕의 증조모가 됩니다. 몰락한 가정이 최악의 밑바닥에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최정상의 자리로 치솟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가 보여주는 명 드라마요, 대역전극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마 1:5)」 보아스의 어머니가 바로 기생 라합입니다. 라합도 기구한 인생의 아픔이 있었지만, 하나님을 믿고 역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이방 여인 룻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가슴 뭉클합니다. 모든 희망이 사라져 버린 연약한 과부에게 거대한 구원의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고통 속에 살다가 끝날 운명에서 ‘은혜’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룻은 예수님의 족보에 오른 구원사의 스타가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주는 도전은 무엇입니까? 룻의 선택입니다. 「16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룻 1:16~17)」 그녀는 현실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붙들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선택에 생명을 걸었습니다. 조금의 주저함도 미련도 없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시련의 파도에서 정신을 잃어버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닥쳐올 어떤 어려움도 단호히 맞서겠다는 믿음의 선언입니다. 이것은 마치 제자도의 핵심과 같습니다. ‘어머니’ 대신 ‘예수님’을 넣어 읽어보십시오. 우리도 예수님에 대해서 이 정도의 신앙고백은 해야 합니다. 헌신을 해도 이 정도의 헌신을 해야 합니다. 이 선택과 결단, 하나님의 은혜를 나의 최악의 순간에도 놓치지 않겠다는 결단이 바로, 룻의 인생을 바닥에서 정상으로 치솟아 오르게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런 은혜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가난과 절망의 밑바닥에서 풍요의 한가운데로, 비천한 신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문 안으로 들어가는 상승, 비상하는 인생은 룻의 이야기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룻의 이야기는 어떤 사람이라도 하나님과 연관을 맺기만 하면, 예측할 수 없는 대역전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일상 속에서 나의 결단과 선택은 매우 중요합니다. 믿음의 선택들을 놓치지 마십시오. 우리가 매일 마주치는 삶은 녹록하지 않습니다. 예배에서 은혜를 받아도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우리를 집어삼킬 것 같은 현실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을 빼앗아 가려는 위기와 위협이 있지만, 타협하지 않고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우리 인생을 다루어주실 줄 믿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순간이 와도 너무 빨리 끝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인생의 결론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역사의 알파와 오메가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끝은 하나님이 쥐고 계십니다. 삶은 언제든지 역전될 수 있습니다.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함께 하실 것을 믿고 그 말씀을 따라 선택한다면, 하나님은 언제든지 반전을 일으키실 줄 믿습니다.
은혜보다 더 강력하고 완벽한 삶의 보장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그 역전극의 위대한 스토리에서 얼마든지 우리도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알 수 없는 우여곡절과 수없는 의문의 일들이 있지만, 전화위복의 하나님, 꼬인 것을 푸시는 하나님을 믿고, 일상에서 작은 믿음의 선택 속에 그 은혜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믿음의 삶을 삽시다!
룻 2:8-16 / 이삼규목사
하나님은 우리가 잘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복을 주십니다. 그런데 복을 주실 때, 우리에게서 보기 원하시는 모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로만의 믿음이 아니라 삶으로서의 믿음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삶’이라는 그릇에 복을 담아 주십니다.
믿음의 삶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
나오미가 모압을 떠나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두 며느리를 불러 친정으로 돌아가 새로운 남편을 만나 잘 살라고 말합니다. 물론 처음에 두 며느리는 울면서 함께 가겠다고 말합니다. 대를 이어 줄 후사가 없으니까 그냥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르바는 시어머니를 떠나 친정으로 돌아갔고 룻만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베들레헴 사람들은 나오미가 며느리 하나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화제거리를 삼았습니다. 나오미는 말합니다.
룻 1:20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룻 1: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나오미라는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나의 기쁨, 나의 기뻐하는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자신을 ‘나오미’라고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불러달라고 말합니다. ‘마라’는 ‘쓴, 괴로움’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바다를 건너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이 어디입니까? ‘마라’입니다. 물이 써서 마실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기쁨의 사람이 괴로움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런 그녀에게는 효성 깊은 며느리 룻이 있었습니다. 오르바처럼 룻도 시어머니를 떠나 버렸다면 그의 고향 행은 얼마나 쓸쓸했겠습니까? 조그마한 동네 베들레헴에는 나오미와 그의 며느리 룻의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게 되었습니다. 룻은 효성이 깊을 뿐만 아니라 부지런하고 근면 성실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시어머니의 명을 따라 보아스의 밭에 나아가 열심히 이삭줍기를 한 것입니다. 보아스 또한 자신의 밭을 찾은 룻에게 최대의 호의를 베풉니다. 자신의 밭에서 계속 이삭줍기를 하게하고 소년들이 길어온 물을 마시게 해 줍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이런 호의를 베풀어 준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 룻이 시어머니에게 행한 효성 때문이었습니다. 둘째, 룻이 하나님을 향해 보인 순수한 믿음 때문입니다. 보아스는 이런 점을 높이 평가한 것입니다.
룻 2:11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
보아스가 룻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도 룻의 믿음과 선한 행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믿음만 있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이제는 새 사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믿음은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을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습을 주의 깊게 살피십니다.
미국 필라델피아의 벽돌 공장에서 노동을 하며 간신히 생활을 해가던 13세의 존이란 소년이 있었습니다. 존은 비가 내리면 항상 진창길로 변했던 교회 입구를 보며 마음 아파했습니다. 어느 주일 존은 남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찾기로 결심했습니다. 자신의 임금이 7센트였는데 날마다 벽돌을 한 장씩 사서 깔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길고 넓은 길을 존 혼자서 완성하려면 2년이나 걸리겠지만 이미 존의 눈에는 벽돌로 포장된 길과 그쪽으로 들어가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아른거렸습니다.
하지만 기적은 1개월 만에 일어났습니다. 존의 헌신을 보고 반성한 교회 어른들이 길뿐만이 아니라 낡은 교회당을 헐고 신축하기로 결의한 것이었습니다. 이 기적을 이루어 낸 소년의 이름은 미국 백화점 왕이자 전 세계의 YMCA 건물을 수 없이 세운 존 워너메이커입니다.
기적은 기다리는 자에게 찾아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책임을 다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책임을 다하십니다. 산이 바다가 되어야 한다면 기도를 하고 한 삽씩 퍼서 나르는 믿음의 행동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기적이 필요하다면 기도하고 이제 우리가 우리의 책임을 다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의 작은 헌신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입니다.
보아스가 룻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도 룻의 믿음과 선한 행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룻을 보아스의 집으로 인도해 은혜를 입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의 삶을 면면히 다 보고 계십니다. 그것을 귀하게 여기시고 기뻐하십니다. 사람은 심는 대로 거둡니다. 자연에서 심겨진 대로 그 열매가 맺히듯이 사람들의 삶도 일정한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에게 덕을 심어야 하며, 하나님 앞에서 충성된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삶은 반드시 좋은 미래를 만들어 갑니다. 여러분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칭찬을 받고 계십니까?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선을 행하십니까? 우리의 믿음이 과연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인정 받는 믿음인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삶에 보답하시는 하나님
룻을 만난 보아스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룻 2:12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하나님께서 믿음의 삶을 보고 계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믿음에 상급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 모습을 보시고 보답하십니다.
물론 믿음으로 산다고 해서 세상 적으로 다 잘 사는 것은 아닙니다. 더 어렵고 힘들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견디는 바로 그 모습을 주님은 보고 싶어 하십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하는 그 믿음의 모습 말입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은 무엇입니까? 그가 존재하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히 11: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히 11: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히 11: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하나님은 믿음의 삶에 합당한 보상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이 채워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시작 때 동영상에 보았던 미국 수영선수처럼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할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인간의 힘만으로는 감당하기에 삶이 너무나 무거고 고달프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국가 대표 선수들입니다. 국가 대표 선수들이 그동안 태능 선수촌에서 열심히 운동하다 이제 진천 선수촌으로 옮겨 훈련을 시작합니다. 그들이 땀 흘린 만큼 메달의 색깔은 달라집니다. 상급이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룻이 믿음의 삶을 살아 다윗의 할아버지 오벳을 낳아 당당히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가는 영광을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믿음의 삶을 위로하시는 하나님
과부가 된 두 여인, 나오미와 룻은 힘들게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그러다 보아스를 만난 룻은 너무나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룻이 보아스에게 말합니다.
룻 2:13 룻이 이르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하녀 중의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하니라
룻은 정말 귀한 은혜를 입었습니다. 몸이 힘든 것도 딱한 일이지만, 그녀에게 더 필요한 것은 아마도 마음의 위로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아스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바라고 믿음의 삶을 살아 온 룻을 위로하셨습니다. 어떻게 위로 하였습니까?
보아스는 룻에게 친절한 태도만을 보인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녀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는 볶은 곡식을 주었습니다. 그것도 배불리 먹고 남을 정도로 많이 주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먹고 살기가 힘든 흉년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집에서는 좀 산다는 집에 가서 일을 해주고 먹을 것을 얻어왔습니다. 아빠나 엄마가 부잣집에 일하러 가면 자식들이 줄줄이 따라갑니다. 그래서 밥을 얻어먹었습니다. 그 중에도 숙기가 없어서 못 따라오는 자식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엄마가 먹을 몫을 조금 남겨 집에 있는 애들에게 가져다줍니다. 옛날에는 밥그릇도 컸고 더구나 큰 밥그릇에 수북하게 쌓아 밥을 풉니다. 고봉밥이지요. 요즘은 그것이 한 세 공기정도는 될 것입니다. 그러니 조금 먹어도 남길 수 있지요. 인심 좋은 집에서는 밥을 넉넉하게 해서 배불리 먹고 나서 따로 한 그릇 싸주기도 합니다.
룻이 볶은 곡식을 먹으면서 누가 생각났을까요? 집에 계시는 시어머니가 생각났을 것입니다.
룻 2:14 식사할 때에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 하므로 룻이 곡식 베는 자 곁에 앉으니 그가 볶은 곡식을 주매 룻이 배불리 먹고 남았더라
시어머니께 드릴 볶은 곡식이 넉넉하기에 걱정 없이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보아스는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는 데 인색하지 않았습니다. 또 그는 룻 모르게 소년들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곡식 다발에서 곡식을 일부러 조금씩 흘리게 하여 룻이 이삭을 줍도록 한 것입니다(16절).
하나님은 믿음으로 사는 성도들에게 몸과 마음, 전 인격적인 은혜를 주십니다. 지친 영혼을 위로하시고, 새 힘을 주시며, 기쁨을 주십니다. 주님의 위로는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영국 출신 선교사 부부가 아프리카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30여 년간을 마치고 정년을 맞아 고향을 가는 길에 뉴욕 가는 여객선을 타고 항구에 도착하니 많은 환영객들이 나와 꽃다발을 들고 “린다! 린다! 만세! 린다 성공!” 하면서 환호성을 지르고 야단이었다.
선교사가 왜 그런가 하고 알고 보니 그 배에 공군 대위가 한 사람 탔는데 바로 태평양 비행 횡단에서 성공을 했기 때문에 많은 환영 인파가 몰려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때 선교사 부부는 30년 세월을 미개지역에 문명 발전과 영혼을 구원했고 많이 수고를 하고 오는데도 한 사람도 환영하는 사람이 없으니 얼마나 섭섭했던지, 초라한 모습으로 짐 보따리를 가지고 호텔에 들어가 짐을 던지고는 엎드려 울면서 기도하기를 "하나님! 공군 대위는 비행 횡단에 일시적인 성공에 많은 환영객이 나와 환호를 지르며 반갑게 맞는데 주님! 나는 무엇입니까? 30년을 수고하고 왔는데도 위로하는 사람이 없으니." 이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나의 사랑하는 자야! 린다의 환영이 부럽느냐? 그는 고향에 왔으니 환영을 받지만, 너는 아버지 집 고향에는 아직 오지 않 했지 않느냐? 네가 얼마 안 있어 고향에 올 때는 천군 천사 모두 환영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야 할 중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믿음의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보고 계시며, 믿음의 삶을 사는 자들에게 보답하시고, 믿음의 삶을 사는 자에게 참된 위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룻과 같이 믿음의 삶을 살아 이런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받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보아스의 시선
룻 2:8-14 / 윤창용목사
저는 지난 주간 아주 재미있는 제목의 Article을 하나 읽었습니다. 제목은 「힐러리에게 암소를」이라는 제목이고, 부제로는 '세계화 경제를 넘어 자급의 삶으로'라는 것이 붙어 있는 글이었습니다. 저자는 독일의 생태여성주의 사상가인 마리아 미즈라는 분이 쓴 것으로 모든 것이 세계화로 치닫는 작금의 세계의 경제, 정치 형태에서 정말 이 세계에 필요한 것은 세계화가 아니라 제 3세계의 풀뿌리 국민들의 삶의 방식이 우리들에게 필요한 삶의 방식이라고 주장하는 책입니다.
그 책에서는 1995년 4월 북경에서 '유엔 세계 여성회의'가 열리기 몇 달 전 미국의 퍼스트 레이디인 힐러리 클린턴이 방글라데시를 방문해서 일어난 일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힐러리는 방글라데시에서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의 최소한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소액의 사업자금을 빌려주는 그라민 은행(Grameen Bank) 운영상황을 돌아보기 방문을 했습니다. 방글라데시를 방문한 힐러리는 소액대출을 통해서 방글라데시 여성들의 생활이 향상되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마이샤하티라는 마을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곳 여성들과 회견을 가졌습니다. 세계 최대의 나라 미국의 대통령 영부인인 힐러리가 방글라데시 여성들에게 어떻게 살고 있느냐고 묻자, 힐러리 앞에서 방글라데시 여성들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네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수입이 있습니다. 암소, 소, 닭등 얼마간의 자산도 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도 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방글라데시의 여인들이 힐러리에게 자신있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에서 끝나지 않고 방글라데시 여성들이 이제는 역으로 힐러리에게 물었습니다.
"자매님은 암소가 있습니까? " 힐러리 대답이 "저는 암소가 없는데요."
"그러면 자기 소득이 있나요?" 말하자면 힐러리 당신이 혼자서 벌어먹고 살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힐러리는 대답을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은 전에는 변호사로 돈을 벌었는데 지금은 남편이 대통령이 되어서 백악관으로 옮긴 다음부터는 제가 돈을 버는 일을 그만 두었습니다."
"그러면 아이는 몇 있나요?"
"딸 하나예요."
"아이를 더 갖고 싶진 않나요?"
"네. 하나나 둘쯤 더 갖고 싶긴 해요, 하지만 우리는 우리 딸 첼시와 함께 행복하게 지내고 있어요"
마이샤하티 마을 부인들은 이 대화가 끝난 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습니다. "참 안됐네! 힐러리 부인은 암소도 없고, 자기 소득도 없고, 자식도 딸아이 하나뿐이라는군!" 그러면서 혀를 끌끌 차는 것입니다. 이 방글라데시 농촌 여성들의 눈에는 이미 힐러리는 결코 힘이 있는 여성이 아닙니다. 다만 동정의 대상일 뿐입니다. 방글라데시 여성들은 암소 한 마리와 닭 몇 마리와 아이들이 있으면 스스로 힘이 있다고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에피소드에서 방글라데시 여성들이 순박하고 착하고 무지하다고 이야기하면 끝나는 것입니까?
이 여성들은 미국의 대통령 부인이 부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이렇게 다르게 생각을 하게 한 것입니까? 바로 관점의 차이입니다. 방글라데시 여성들은 '밑으로부터의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무엇이 좋은 삶을 만들어내는지에 대해서 암소 한 마리와 닭 몇 마리, 공부하고 있는 아이들이 있으면 자신들의 삶이 좋은, 그리고 윤택한 삶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힐러리와 같이, 어쩌면 우리와 같이 '위로부터의 관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밑으로부터의 관점'을 지니고 있는 분들입니다. 우리들은 가능하면 많은 돈을 가지고, 가능하면 많은 가구를, 좋은 차를, 좋은 집을 가지고, 좋은 옷을 입어야 하는 부유한 사람이고, 그래야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방글라데시 여인들은 전혀 우리들과, 또 힐러리와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디를 보느냐 이것이 관점의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보아스도 시선을 밑으로부터 두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먼저 보아스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살펴 보도록 합니다. 그는 베들레헴 성읍에서 넓은 밭을 가지고 있는 부유한 주지입니다. 나오미의 죽은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이고 나손의 손자였고 여리고의 기생 라합의 아들 살몬의 아들입니다. 그러니까 기생 라합의 손자뻘 되는 사람이 보아스입니다. 시리아 역에 의하면 그는 율법을 정통한 유력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당대의 베들레헴 근교에 가장 유력한 분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어떤 분들은 성경에 나오는 유력한 사람들에 대해서 정말 그 이야기가 근거있는 이야기냐? 라고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보아스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은 '그랬다더라'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가 유력한 사람이라더라,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이라더라, 그런데 그 소문이 진짜냐? 아니면 과장된 소문이냐? 이 소문에 대한 평가는 룻의 사건으로 일목요연하게 드러납니다.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사람들을 보면 종종 실제 소문과는 다른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다분히 어떤 한 사람의 평가에 의해서 소문이 나는 경우입니다. 객관적으로 검증되지 않으면 다분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헛소문으로 비화될 소지가 있습니다. 미팅을 나가기 전에는 "애 그 남자 너무 잘 생겼다고 하더라" "어머, 그래 얼마나 잘 생겼는데?", "응! 완전히 배용준 빼닮았어. 그냥 배용준이라고 생각하면 돼!" 그래서 미팅을 했는데 만나고 보니 배용준이 아니라 배삼룡이 앉아 있습니다.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야, 그 아가씨 정말 천사야 천사. 그렇게 순진하고 마음씨가 착한 여자는 처음 봤어." 소문이 그렇게 나면 모두들 궁금해하고 만나보고 싶겠지요? 그런데 정작 만나보고 와서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야, 그게 천사냐? 푼수지."
그런데 이 보아스라는 사람, 룻의 사건을 보면 그의 소문이 헛소문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집니다. 그런 그가 보리 추수때가 되어서 자기 밭에 추수가 잘 진행되고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밭을 찾아 나왔습니다. 그러면 보통 주지와 같은 부유한 분들은 하늘을 먼저 봅니다. 오늘 추수하는데 비는 오지 않겠나? 비가 오면 보리가 썩을텐데..라는 생각이나 일꾼들이 보리를 얼마나 베었나? 올해 수확량은 얼마나 되겠나? 이런 것들을 알아보기 위해 하늘을, 그리고 쌓아둔 보리 타작들을 바라 볼 것입니다.
사람마다 직업이나 환경에 따라 쳐다보는 곳이 다릅니다. 저와 같은 목사들은 길을 다니다가도 교회가 있으면 교회만 바라보지 다른 곳은 잘 보지 않습니다. 사람이 처음 만나면 제일 먼저 눈을 본다고 하지 않습니까? 구두를 판매하시는 분들은 지나가는 분들의 구두를 보고, 옷을 파시는 분들은 지나는 분들의 옷을 봅니다. 또 배가 고프면 음식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보아스는 시선을 위로 보지 않고, 시선을 앞으로 해서 보리를 베어서 쌓아둔 것을 보지 않고 시선을 밑으로 해서 일꾼들을 보았습니다. 일꾼들과 인사를 나누다가 자기 밭에서 이삭을 줍는 젊은 여인을 발견하고 호의를 베푸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 제목을 보아스의 시선이라고 했는데 보아스의 시선은 이와같이 '밑을 보는 시선'입니다. 불쌍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불행한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고 그들을 보살피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석책 가운데에는 오늘 본문을 풀이하면서 보아스가 이성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룻에 대해 호의를 베풀었다고 말하는 주석도 있습니다. 룻이 미인이고, 정숙해 보이는 여인이었고, 게다가 이방여인이었기 때문에 더 관심을 가졌을 것이라고 말입니다.물론 틀린 이야기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룻기 10절을 보면 보아스가 룻이 자기 침상 발치에 왔을 때 하는 말이 나옵니다.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빈부를 물론하고 연소한 자를 좇지 아니하였으니 너의 베푼 인애가 처음 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이 말을 미루어 짐작컨대 보아스는 나이가 많은 노년의 신사입니다. 젊은 이성에 대해 충동적으로 호기심을 일으킬 나이가 아닙니다. 게다가 보아스의 인품으로 보아도 그렇지 않을 사람입니다. 룻기 2장 20절에서는 나오미가 보아스에 대한 평가를 했는데 "그가 살아 있는 사람이나 죽은 사람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죽은 사람에게까지 은혜를 베푸는 사람, 그런 사람이 보아스입니다. 그러니까 보아스가 이성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호의를 베풀었다고만 보기 어렵습니다.
만약 보아스가 평범한 유대인의 지주요, 부자였다고 하면 '처음보는 이방여인이 왜 내 밭에 들어와 이삭을 줍느냐'고 호통을 치며 이방여인을 쫓아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그 이방여인이 이방 모압에서 남편을 잃고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모시고 시어머니의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2장 12절에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이렇게 시선을 아래로 둔 보아스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1. 그는 사랑과 인정이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보아스는 룻이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서 남의 밭에 와서 이삭을 줍는 것이 불쌍해서 온정을 베풉니다. 이렇게 시선을 밑으로 해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푼 보아스의 핏줄에서 예수님이 탄생하게 됩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정말 시선을 밑으로 두신 분이셨습니다. 하늘나라에 시선을 두시지 않으시고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낮고 천한 이 밑의 땅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시선을 밑으로 두셨기 때문에 이 땅에 사는 신음하는 당신의 백성들을 보신 것입니다. 상한 영의 탄식소리!, 특히 죄 짐을 벗지 못하고 멸망의 길로 가는 사람들을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천 여 년 전에 그의 조상 보아스가 시선을 밑으로 해서 이방의 젊은 여인에게 사랑을 베푼 그 장소, 바로 그곳 베들레헴으로, 그보다 더 낮은 장소 마굿간 구유에 오신 것입니다.
모세도 시선을 아래로 둔 사람입니다. 그는 애굽의 왕자였습니다. 애굽의 파라오의 아들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하루는 이집트 궁에서 어떤 애굽 사람이 자기 동족인 유대인을 치는 것을 보고 분을 못 이겨 그 애굽인을 쳐 죽이고 모래에 감춥니다. 그런데 도리어 유대인들에게 동족을 구하기 위해 한 행동이 의심을 사는 결과가 되고 맙니다. 그 두려움 때문에 그는 미디안 광야로 왕자의 신분을 버리고 도망을 합니다. 애굽의 왕자로 사람을 한 명 죽인 것 정도는 그 당시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양심이 살아 있었던 사람입니다. 자신의 행동이 감정에 치우쳐 우발적으로 일으킨 것이기 때문에 죄책감에 미디안 광야로 줄행랑을 치고 말았습니다. 그 광야생활 속에서 그는 양을 치면서 낮은 곳에 시선을 두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미국에서 군의관들을 교육시킬 때, 중상을 입은 부상병들을 치료할 때 먼저 눈을 보도록 훈련을 시킨다고 합니다. 눈을 보면 그 부상병이 어느 정도 부상을 입었는지 알 수 있고 무엇보다도 그 눈에 담겨 있는 '나 좀 살려 주세요!'하는 호소를 읽으면 정성을 다해 치료를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눈을 먼저 보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순절 기간 동안 우리는 이렇게 예수님의 시선과 같이, 보아스의 시선과 같이 낮은 데를 보며 불쌍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불행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사랑과 인정이 넘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2. 마지막으로 보아스는 법도를 알고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룻기 3장 12절 "참으로 나는 네 기업을 무를 자나 무를 자가 나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으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 뜻은 "나보다 룻을 더 가까이에서 보호해 줄 친족이 있으니 그에게 먼저 가서 도움을 청하라, 그러나 그가 도울 수 없거던, 혹 보아스인 내가 너를 도울 수도 있을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사람을 도울 때 무작정 돕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은 아닙니다. 도울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을 생각하고 그것을 먼저 시행하는 것이 옳습니다. 여기서 "기업 무를 자(Kinsman Redeemer)"라는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고엘"입니다. 이 말은 되찾다, 혹은 무르다, 구속하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제도를 '고엘제도'라고 합니다. 이 제도는 하나님께로부터 할당받은 기업을 영구히 보전하고 혈족을 유지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부당한 피해를 당했을 경우 이를 보상할 제도적 장치가 바로 '고엘'제도입니다. 이렇게 기업을 무를 고엘이 된 친척은 가난한 친척의 땅을 돈을 주고 다시 사 주어서 회복시켜 주어야 하고 피해를 입은 친척을 위해 대신 복수를 하거나, 죄 값을 대신받기도 하고 심지어는 어려운 친척을 위해 그가 여자라면 결혼까지 해서라도 대를 잇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 고엘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혈연관계가 먼저 있어야 하고, 자원해야 하고 무엇보다 재산이나 지위 등 능력이 있어야만 가능했습니다.
남편을 잃고 시아주버니를 잃고, 시아버지를 잃고 돌아온 룻에게 보호자인 '고엘'이 없는 줄 알았지만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 나오미와 룻에게 베들레헴에서 가장 부자요, 가장 믿음의 넉넉한 '보아스'를 기업 무를 자 곧 고엘로 세우셔서 룻의 가정을 보호해 주신 것입니다. 보아스는 그 법도를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먼저 룻에게 고엘을 할 만한 가까운 친척이 있으니 그에게 가는 것도 괜챦다는 말입니다. 괜히 돈있는 척하면서 젊은 이성을 유혹하거나 자신의 허세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법과 질서가 있습니다. 믿는 성도들도 하늘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 합당한 하늘의 도리와 법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법도를 알고 또 지키면서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시선을 아래에 두는 사람입니다. 법을 지키려면 線을 지켜야 합니다. 선을 지키려면 선을 보아야 하는데 하늘에 선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선은 아래, 이 땅위에 그려져 있습니다. 보아스는 세상의 법도, 하늘의 법도를 잘 아는 사람으로 시선을 아래 둔 경건한 인품의 소유자였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남정네가 혼자 자고 있는 이부자리에 외간 여인네가 끼어드는 것이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룻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 있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밤중에 아무도 모르게 진행된 일이기에 보아스가 룻을 범한 후에 그 일을 모른다고 딱 시치미를 뗄 수도 있는 일입니다. 결국 그러면 룻은 몸만 망치게 됩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요, 땅에 시선을 둔 사람인지라 그는 경건하게 처신했습니다.
저는 이 사순절 기간동안 우리 동광의 성도들은 시선을 아래로 두고 사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낮은 곳에 임하신 주님을 생각하며 우리도 낮은 곳에 시선을 두고 사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보아스와 같이 예수님과 같이 시선을 낮은 곳에 두며, 자기가 도와야 할 이라고 하면,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하면 지체없이 도움의 자리에 나섰던 보아스와 같은 인물들이 우리 동광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
룻 2:8-9, 행 1:1~5 / 이성희목사
말년에 윈스턴 처칠이 자신의 모교에 연설을 하러 갔습니다. 교장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말했습니다.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윈스턴 처칠은 가장 훌륭한 연설가입니다. 그의 연설을 모두 받아 적도록 하세요. 잊을 수 없는 연설이 될 것입니다”. 연설을 하기 위해 연단에 오른 처칠은 안경 너머로 학생들을 바라보며 연설을 시작했습니다. “절대! 절대! 절대! 절대 포기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그가 그 날에 한 연설의 전부였습니다.
최근에 나온 책 가운데 ‘열세살 키라’라는 자그마한 책이 있습니다. 30분만 하면 읽을 책이지만 평생을 실천해야 하는 책입니다. 이 책의 한 부분에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도움꾼과 방해꾼이라는 두 가지 존재가 살고 있단다. 방해꾼은 늘 우리에게 ‘포기해, 의미 없는 일이야’라고 말하고 도움꾼은 언제나 포기하지 말라고 우리를 격려하지” 이제 한 해가 거의 다 지나갔습니다. 그러면 이제 다 지났다고 포기하겠습니까? 아직도 기다릴 가치가 있는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윌리암 말스톤이라는 심리학자가 삼천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사는 목적 94%는 결국 기다리는데 있었습니다. 그 많은 시간, 또 그 많은 마음과 생각을 전부 기다리는 일에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기다림 없이 이루어지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산모는 뱃속에 아기를 잉태하고 기다립니다. 아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급하게 태어나게 하면 건강하게 자라지 못합니다. 미숙아가 됩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고 기다리며 가꿉니다. 기다리며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둡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고 금방 이루어지는 것도 있지만 기다려야 할 때가 더 많습니다. 기다려야 응답이 됩니다. 기다려야 문제가 해결됩니다. 기다려야 신앙이 성숙하게 됩니다.
무엇을 기다린다는 것은 소망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기다림이 없어질 때 그것을 절망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한 해의 끝에서 떠나지 않고 기다릴 가치가 있는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올해는 초유의 대통령탄핵 사건이 있던 해입니다. 행정수도이전이 헌법재판소에서 위헌판결을 받았습니다. 경제가 침체되어 온통 잘되는 것이 하나도 없답니다. 온 국민의 편가르기로 나라가 두 쪽이 났습니다. 교수들이 정한 올해의 사자성어는 당동벌이(黨同伐異)라고 합니다. 같은 무리와 당을 만들고 다른 자를 공격한다는 뜻입니다. 참 잘 지적했는데 왠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작금 우리나라는 진보든 보수든 모두 당동벌이하고 있습니다. 누구의 잘잘못이 아니라 모두가 서로를 공격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절망적인 굵직한 뉴스들 가운데서도 무엇인가 아직도 기다림이 있으면 소망입니다. 그러나 기다림이 없을 때 절망입니다. 현재 우리에게는 내년을 기대할 수 없고 기다림이 없다는 절망이 더 큰 문제입니다.
올해 일본의 최고 히트상품은 한류랍니다. ‘겨울연가’를 비롯한 한국 관련 상품이라고 합니다. ‘욘사마’ 열풍이 일본 열도를 뜨겁게 달구었습니다. 우리나라 2004년 올해의 인물 1위도 배용준이었습니다. 올해에 가장 희망을 안겨 준 인물입니다. 일본의 NHK에서는 ‘겨울연가’가 4번째로 방영중입니다. 그런데 일본 아줌마들이 젊은이들보다 더 좋아한답니다. 욘사마 때문에 이혼도 하고, 한국에 와 보고 싶어 한답니다. 며칠 전에 일본에 다녀온 어느 고관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일본인들이 ‘겨울연가’를 시청하기 전에 목욕을 하고 시청을 한답니다. 왜냐하면 욘사마를 보는데 더러운 몸을 가지고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종교화했다는 말까지 나옵니다. 욘사마교랍니다. 우리 이웃은 우리 것 가지고 이렇게 야단인데 우리는 정작 재미 있는 것이 없으니 어떻게 합니까? 그래도 떠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있습니다. 기다림의 이유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 애써 양육해놓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우리가 떠나지 말고 기다려야 할 확신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첫째, 거룩한 성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예루살렘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리던 모리아산이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는 솔로몬의 성전이 우뚝 서 있던 자리입니다. 이곳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바로 그 자리입니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는 번제를 통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미리 보여 주신 곳입니다. 예루살렘은 구속사적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장소입니다. 진리의 중심입니다. 신약의 터전입니다. 이런 거룩한 곳을 떠나지 말라고 하십니다.
거룩한 곳을 사모하고, 거룩한 곳에 늘 마음이 집중되는 것이 신앙적 삶에 중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의 늘 거룩한 곳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늘 거룩한 곳을 사모하고 떠나지 않는 마음은 이미 복된 마음입니다. 마음이 늘 세속적인데, 더러운데 있다면 그 마음이 이미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그 마음에서 어떻게 맑은 샘이 솟겠습니까?
광야에서의 삶은 성막이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성막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성막중심의 삶이란 영광중심의 삶입니다. 예루살렘의 삶은 성전 중심의 삶이었습니다. 성전에는 영광이 가득했습니다. 성전 중심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 중심의 삶입니다. 성막 중심의 삶, 성전 중심의 삶, 교회 중심의 삶이란 늘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룩하게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심리학에서는 ‘자이가르니크 효과’라 불리는 현상이 있습니다. 러시아의 임상심리학자 자이가르니크가 발견한 현상입니다. 중단된 작업 내용은 기억에 잘 남는다는 것입니다. TV 연속극을 보면 다음에 어떻게 될까 궁금한 장면에서 한 회가 끝납니다. 완결 직전에 중단된 내용은 훨씬 더 기억에 남습니다. 연속극은 끝났지만 생각에서 떠나지 못하고 남아 있게 됩니다.
우리의 예배나 신앙적 삶이 항상 거룩한 곳을 떠나지 않고 남아 있어야 합니다. 거룩한 곳이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거룩한 삶이 됩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는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를 만났다고 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이 비유를 설명하면서 거룩한 성 예루사렘을 떠나 세속도시인 여리고로 가니 강도를 만나지 않았겠냐고 하십니다. 그러나 비유의 의미는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거룩함을 떠나지 말고 세속에 물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룩함을 떠나면 세속에 물들게 되어 있습니다. 맥스 루케이도가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당신은 거룩하지 않다”.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거룩합니다.
누가복음에의 예수님의 탄생의 기사에는 안나라는 여선지자가 등장합니다. 2:37에는 “과부가 되고 팔십사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라고 합니다. 안나는 외로움을 거룩함으로 달랬습니다.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기다리므로 은혜를 입었습니다. 거룩한 곳을 떠나지 않고 기다리는 사람에게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미국 정신의학자 인셀은 “기다리게 하는 것은 종속의 효과가 있다”고 했습니다. 기다리게 하는 사람의 시간은 기다리는 사람의 시간보다 가치가 높다고 간주하게 됩니다. 기다리게 하는 사람은 기다리는 사람의 시간을 좌우하는 권한을 갖는 우위의 입장에 있다고 보여집니다.
기다리게 하는 사람은 늘 자신의 우위를 확인하려는 심리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늘 지각하는 사람은 어쩌다 자신이 기다리게 되면 몹시 불쾌해 합니다. 약속에 매번 늦는 사람은 지나치게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오락을 즐기고 인터넷을 하는 것이 유익하기도 합니다. 특히 정신의 재생산에 크게 기여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마음을 빼앗기면 안됩니다. 거룩한 곳에 마음을 둬야 합니다. 늘 거룩한 곳에 마음을 두고 사세요. 거룩한 곳을 떠나지 마세요. 외로울 때 거룩한 곳에 마음을 두세요. 바쁠 때에 거룩한 곳에 마음을 두세요. 우리의 마음이 절대로 거룩하지 않은데 빼앗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둘째, 약속은 이루어지기 때문에 기다려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합니다. 아버지께서 무엇을 약속하셨습니까? 요한복음 14장에서 16장까지를 ‘다락방 강화’라고 합니다. 이 설교에서 예수님은 “또 다른 보혜사”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이미 요엘을 통하여 주셨습니다. 요엘 2:28에는 “그 후에 내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라고 합니다. 또 2:29에는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줄 것이며”라고 합니다. 이미 오래 전에 약속된 것이 이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는 이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므로 떠나지 말고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왜요? 하나님는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변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변치 않으신 분이기 때문에 약속을 지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약속을 지키려고 하지만 지키지 못할 여건이 생깁니다. 환경의 변화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지키지 못할 사정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어디까지 얼마나 걸려요?” “차 안밀리면 20분이요” 이 말은 하나마나입니다. 왜냐하면 차가 밀리기 때문입니다. 약속을 못지키고도 차가 밀려서 늦었다고 하면 어지간하면 양해가 됩니다. 어떤이는 약속을 지키려고 오다가 도저히 차가 움직이지 않아서 그냥 돌아갑니다. 약속을 지키고 싶어도 지키지 못할 경우가 생깁니다. 이것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하늘의 별과 같이 땅의 모래와 같이 아들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아브라함이 99세에 이삭을 낳았습니다. 사라가 이미 늙어서 아기를 낳을 수 없는 나이가 되었지만 낳았습니다. 로마서 9:9에는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종종 다소 어리석게 보이고 심지어는 완전히 믿을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그 약속들은 언제나 믿음을 요구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과 선하심을 계속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약속을 믿게 합니다. 믿음은 약속을 이루어지게 합니다. 고린도후서 1:20에는 바울이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이암아 우리가 아멘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 합니다. 믿음으로 약속은 “예”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의미 있게 묵상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자비하심과 선하심을 묵상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 믿어야 합니다.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알고 성경을 보아야 내 말씀이 되고 은혜가 됩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복을 주겠다고 하시면 주십니다. 구하면 주겠다고 하시면 구하면 얻습니다. 다시 오겠다고 하시면 반드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성령을 보내겠다고 하시면 성령이 오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어길 줄 모르는 분입니다.
셋째, 떠나지 않고 기다리면 성령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합니다. 왜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십니까?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세례만 받아도 하나님의 은혜인데 하물며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면 이 보다 더 큰 은혜, 더 큰 선물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의 구약 성경 본문의 룻을 보세요. 룻은 영적으로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왜입니까? 떠나지 않은 신앙을 가졌습니다. 모압 여인이었던 룻은 남편이 죽고 시어머니를 따라 벧엘로 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는 모압에 머물라고 했지만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습니다. 시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시어머니가 죽는 곳에서 자기도 죽겠다고 했습니다. 룻이 착하다고 하지만 내가 룻처럼 착해지기는 힘들지요? 이런 떠나지 않는 신앙이 보아스를 만나게 했습니다. 오늘 성경본문에도 보아스가 룻에게 자신을 떠나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보아스의 아내가 되었고 예수님의 조상이 되는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받을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기다리지요. 아파트 딱지 하나 얻으려고 몸싸움 하는 복부인들 겁나게 기다립니다. 자녀 학원 번호표 하나 받으려는 극성 어머니들 끈질기게 기다립니다. 세상에서 조금 유익하고 필요한 것을 얻으려고 기다리는데는 극성인데 영혼을 위한 기다림에는 쉽게 지치지 않습니까? 잘 참지 못하고 기다리지 못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공통의 약점입니다.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상대일 때가 있습니다. 데이트할 때 보세요. 가치 없는 상대라면 기다리지 않고 가버립니다. 가치 있는 상대라면 한 시간이라도 기다립니다. 맛있다고 소문난 식당에는 낮시간에 설렁탕 한 그릇 먹으려고 30분도 기다립니다. 30분을 기다리다가 10분 만에 먹고 가지 않습니까? 기다림은 그 자체가 가치를 동반합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으면 성령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그 시간에 잠깐 자리를 비워 받지 못한다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열왕기하 2장에는 엘리야와 엘리사의 지도력이 교체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따라 길갈에서 벧엘로 여리고로 요단으로 갑니다. 그 때마다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너는 여기 머물라”고 합니다. 엘리사는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고 하면서 끝까지 좇아갑니다. 떠나지 않았던 엘리사가 마침내 엘리야의 겉옷을 취하고, 영감을 갑절이나 받았습니다. 떠나지 않고 기다리는 자가 참 제자가 될 자격이 있습니다. 갑절의 영감을 받습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습니다. 그 후에 엘리사는 놀라운 능력을 받고 스승보다 더 훌륭한 제자가 되었습니다. 끝까지 떠나지 않고 기다리므로 성령을 갑절이나 받았습니다.
신약에도 떠나지 않고 끝까지 따른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입니다. 디모데후서 4:10-11에는 바울이 처절한 마음으로 디모데에게 편지를 씁니다. 데마도, 그레스게도, 디도도 다 바울 곁에서 함께 교회를 섬기다가 다 세상으로 떠나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고 합니다. 세상으로 향한 사람과 고난 가운데서 끝까지 떠나지 않고 함께 있었던 누가 가운데 어떤 사람이 더 복된 사람입니까? 말할 것도 없이 누가입니다. 떠나지 않는 사람은 은혜를 받습니다. 복을 누립니다.
결 론
바둑을 매우 좋아하시는 목사님이 한분 계셨습니다. 일주일 내내 그 주간의 여유시간에는 바둑에 열중했습니다. 주일날 강단 위에 서서 보니 성도들 머리가 모두 바둑알로 보이기 시작하더랍니다. 바둑에서 아다리치는 것이 이쪽 저쪽으로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흰머리, 검은 머리가 흰 바둑 알 검은 바둑 알로 보였던 것 같습니다. 목사님은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눈을 다시 한번 비비고 목소리를 가다듬어 기도했습니다. 기도의 마지막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까지는 잘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나온 말이 “아멘”이 아니라 “아다리”였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다리!!”. 잘 하다가 끝이 완전히 잘못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마무리 제대로 잘 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마무리가 가장 중요합니다. 괴테는 “서두르지 않는다. 그러나 쉬지도 않는다”고 했습니다. 오늘 주보에 제가 “인저리 타임”이란 목회서신을 썼습니다. 축구에서의 “인저리 타임”은 3분 정도의 짧은 시간이지만 이 시간에도 얼마든지 경기를 뒤집을 수 있습니다. 인저리 타임은 끝난 시간이 아닙니다. 아직도 진행되는 시간입니다. 이제 2004년의 인저리 타임을 살고 있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남은 며칠 동안 경기를 뒤집으세요. 다 진 경기가 아니라 이기는 경기로 만드세요. 서두름이 없이, 쉼이 없이 하루를 천년같이 천년을 하루같이 사십시오. 남은 며칠 사이에 위대한 일을 하십시오.
매일의 삶이 떠나지 않고 기다리므로 약속을 성취하는 축복의 나날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은혜입기를 열망하십시오
룻 2장 10~13절 / 문기태목사
세상에서 가장 무너뜨리기 어려운 장벽이 있다면 자기 마음의 장벽입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에 장벽을 쌓고는 그 안에 갇혀 살아가고 잇습니다. 마음속에서 패배한 사람은 현실에서도 여지없이 패배합니다. 마음으로 믿지 않으면 꿈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장벽은 마음에 있습니다. 가장 무서운 적은 마음에 있는 셈입니다.
우리가 패배라는 감옥에 갇혀 잇는 것은 그릇된 생각때문입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부정적인 말을 던지기도 합니다.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우리의 자신감을 꺽을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부모님이 자녀에게 좌절감을 안겨주는 말을 많이 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속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랴? 하는 믿음으로 담대하게 새로운 땅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장벽을 부수는 순간 우리 삶이 변하고 나아가 우리 후대의 삶도 밝아집니다.
룻은 오랫동안 불행한 삶을 살았습니다. 꿈같은 결혼생활을 기대했는데 그의 집은 흉년의 연속으로 가난하고 궁핍한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게다가 시아버지와 시숙 그리고 남편까지 죽고 맙니다. 젊은 나이에 외롭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가정을 책임질 남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무시와 가난, 외로움속에서 철저하게 불행한 삶이 연속되었습니다. 이제는 행복해질 아무 소망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불행하게 끝날 것 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그런 룻의 가정에 하나님은 행복한 미래를 예비해 놓고 기다리셨습니다.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행복한 삶이 룻을 위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룻이 보인 아름다운 믿음으로부터 출발되었습니다. 도무지 어떤 소망도 기대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동서 오르바처럼 좌절감에 포기하고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믿고 시어머니를 모시고 남편의 고향 하나님을 경외하는 곳으로 새 출발을 했습니다. 과거의 모압에서의 불행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새출발을 했습니다.
우리가 과거의 장벽을 깨지 못하면 다람쥐 챗바퀴 도는 신세로 전락하고 맙니다. 히브리백성들은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해방되어 약속의 땅, 자유의 땅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11일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를 그들은 40년을 걸려 겨우 도달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왜 몇 번씩이나 똑같은 산 주위를 맴돌면서 광야를 헤멜 수 밖에 없었을까요?
하나님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너무나 오랫동안 노에로 살았습니다. 평생 이용당하고 억눌려 살던 히브리 백성은 하나님이 행하시려는 새로운 일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고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복을 기대하고 앞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연약하고 소극적인 마음에 머물렀습니다. 항상 문제를 바라보고 불평하며 자신들과 목표사이에 있는 장애물에 막혀 안절부절했습니다.
그때 노예근성에서 빠져 나오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너희가 이 산에 거한지 오래니(신1:6)" 하나님은 오랫동안 한 자리에 머물고 있는 우리에게도 같은 말슴을 하십니다. "이제는 과거의 상처나 고통, 실패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떠날때다. 더 큰 복을 믿고 나아갈 때다." 그렇습니다. 굴레에 매여 제자리만 맴돌고 같은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다면 놀라운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새로운 비전의 성취를 위해서는 먼저 과거의 장벽을 부수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과거에 어떤 일을 겪었는지 얼마나 많은 실패를 경험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과거에 어떤 장애물에 가로막혀 좌절되엇어도 상관없습니다. 과거야 어떻든 오늘은 새로운 날입니다. 금년은 새로운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를 통해 새로운 일을 행하시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큰 계획을 세우고 인도하시려고 하니 과거의 잣대로 판단하지 말기 바랍니다.
과거에 누군가에게 학대를 받았습니까? 과거에 누군가에게 버림받았습니까? 누군가에게 크게 당한 적이 있습니까? 어떤 경우든 과거에 상처에 연연하지 마십시오. 지금 하나님의 놀라운 미래가 여러분앞에 펼쳐지고 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받은 고통과 상처, 학대와 슬픔을 빠짐없이 기억하셨다가 때가 되면 두 배나 큰 기쁨과 평안, 행복으로 갚아 주십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복을 받을 그릇을 준비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마음의 나침판을 올바른 방향에 맞추어야 합니다. 패배자의 마음을 갖고는 승리자의 축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차서 인생이 풀리지 않는다고 투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때가 되면 알아서 복을 주시겠죠. 크신 하나님께 감히 이러쿵 저러쿵 조를 수 있겠습니까? 그저 하나님이 주시는대로 받고 살래요." 그러나 하나님은 믿음에 따라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먼저 믿음의 큰 그릇을 준비하고 기다리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과거의 산에 오랫동안 머물고 과거의 그늘에 오랫동안 갇혀 있었습니다. 이제는 길을 떠나야 합니다. 가만히 앉아 그저 그런 삶에 만족하는 소극적인 사람으로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패배감에 젖은 태도를 다음 세대에까지 물려주지 마십시오.
텍사스 지역에 있는 감옥에 수감된 죄수를 조사해보니 85%가 부모나 가까운 친척이 수감된 적이 있다는 데이타가 나왔습니다. 학대당한 아이들은 대개 부모가 되어 자기 자녀를 학대한다는 조사보고도 있습니다. 부모가 이혼한 가정의 아이들이 자라 결혼생활에 실패할 확률이 높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실패는 실패를 낳습니다. 생각속에 장벽이 설치되어 불행으로 몰고가기 때문입니다. 생각의 장벽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어떻게 무너뜨립니까? 하나님을 믿고 저주의 사슬을 끊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우리의 생각을 바꾸는 작업을 먼저 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속삭이십시오. '우리 가문이 과거에 어떤 패배를 겪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과거에 어떤 시련을 겪엇는지도 상관없어. 내 안에 게시는 분은 누구보다도 강하고 크시니가. 이제 더이상 패배는 없어. 더이상 저주는 없어.' 라고 말해보세요.
룻은 보아스를 만나 말했습니다. "나는 이방 여인이어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아보시나이까?(룻 2:10)" 그러자 보아스가 대답합니다.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모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들렸느니라."(룻 2:11) 룻의 믿음이 소문이 난 것입니다. 룻이 하나님의 백성에게로 돌아온 믿음이 인정받은 것입니다. 그러자 은헤가 임하기 시작했습니다. 보아스는 그런 룻을 향해 축복을 합니다.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룻 2:12)
하나님이 룻을 특별하게 대우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것을 깨달은 룻은 감히 간청합니다.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룻 2:13) 그러자 상황은 180도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외롭던 여인이 사랑받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굶어 죽기 일보직전이던 가난한 여인이 부요하게 되었습니다. 이방여인이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의 중앙에 서는 존귀한 여인이 되었습니다. 누구보다도 특별한 복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족보에 이름이 올라간 몇 안되는 여인중에 하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은헤를 선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헤가 임하면 과거의 불행과 상관없이 새로운 축복이 넘칩니다. 불리하던 상황이 역전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보낸 천사의 도움이 우리가 하는 모든 영역에서 나타납니다. 아주 평범한 삶의 일상에서도 은헤를 풍성하게 맛보며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제목들이 술술 풀려가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일마다 형통하는 축복이 나타납니다. 온갖 신비한 영적 체험을 경험하고 그를 통해 하나님이 크고 놀라운 사랑을 확신하게 됩니다.
우리가 은혜를 입은 사람이 되면 다른 사람들이 자기 일을 제쳐 두고 우리를 돕는 신기한 일들이 많아집니다.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특별대우를 받게 됩니다. 그것은 세상의 지위가 높아서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잇는 증거입니다.
은헤는 시련속에서도 찾아옵니다. 요셉은 애굽으로 팔려가 고난받고 이용당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를 미워하고 함정으로 몰아넣어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니 가는 곳마다 복을 누리게 됩니다. 심지어 감옥에 가서도 사랑을 받고 형통하게 됩니다. 바로앞에 서도 한눈에 인정받고 신뢰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위기에 내 몰려도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헤를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헤를 선포하고 기대하면 은헤의 꽃은 활짝 피어날 것입니다.
과거에 여러분이 얼마나 많이 실패했는냐/ 얼마나 심하게 불행한 삶을 살았느냐?는 결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준비하고 초청하십니다. 마음에 있는 불행의 장벽을 무너뜨리십시오. 그리고 믿음의 눈을 크게 떠서 하나님이 이제부터 안겨주실 은혜를 바라보십시오. 은혜가 여러분의 삶을 새롭게 변화시켜 줄 것을 의심없이 기대하십시오. 그리고 은혜입기를 소망하며 기도하십시오. 나아가 담대하게 선포하십시오. 금년은 은혜가 충만한 한 해가 될 것이다.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날 것이다. 주님이 보낸 천사와 사람들이 다 나를 도와 줄 것이다. 룻의 생애와 같이 여러분의 생애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넘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룻기 2장 11-13절 / 이한규목사
<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
하나님에 대해 지식적으로 아는 것보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하나님을 잘 알면 믿음도 바르고 견고해진다. 본문에서 보아스가 룻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를 유추할 수 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1. 사정을 아시는 하나님
처음 만나 친절을 베푸는 보아스에게 감격해 룻은 땅에 엎드려 절하며 말했다. “당신은 왜 내게 은혜를 베푸시고 나를 돌보십니까?” 보아스가 대답했다.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11절).” 룻은 계산적인 마음으로 시어머니를 봉양한 것이 아니라 며느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지만 그녀에 효심과 믿음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소문은 이미 베들레헴 전체에 다 알려진 상태였고 보아스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누가 그 소문을 냈겠는가? 시어머니 나오미가 만나는 사람마다 며느리를 칭찬했을 것이다. “제가 불행한 일을 많이 당했지만 며느리 하나만은 잘 두었습니다.” 롯이 자신의 선행을 억지로 과시하지 않아도 다 알려졌듯이 나의 선행도 억지로 알리려고 애쓰지 말라. 누가 보든지 보지 않든지 상관없이 최선을 다해 선을 행하라. 사람은 혹시 나의 수고를 몰라주어도 하나님은 다 아신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족하게 여기라. 하나님이 나의 사정을 아실뿐만 아니라 나를 적극적으로 이끄신다는 사실을 알면 회색빛 절망은 보랏빛 희망으로 변한다.
2. 보상해 주시는 하나님
보아스는 젊은 모압 여인이 개종하고 시어머니를 봉양하려고 이삭을 줍는 모습에 깊은 연민을 가지고 말했다.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12절).” 여호와의 보답하심과 상 주심을 언급한 보아스의 말에 말을 듣고 모압 여자로써 낯선 땅에 온 룻은 큰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나의 사정을 알아주실 뿐만 아니라 나의 수고도 아시고 행한 대로 보상하신다. 다만 은혜를 내세워 공짜의식을 가지지 말라.
너무 지름길만 찾지 말라. 때로는 지름길이 가장 먼 길이 된다. 거둘 생각보다 뿌릴 생각을 많이 하라. 행운을 너무 기대하지 말라. 땀을 흘려 씨를 뿌릴 때 진짜 행운이 찾아온다. 영성도 땀이 없는 영성은 의미가 없다. 성령 충만도 씨를 뿌리는 삶을 경시하면 주어지지 않는다. 성령 충만은 맡은 일을 책임감 있게 행하는 것과 맡은 자리를 잘 지키는 것과 관련이 깊다. 내 위치로 돌아가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삶이 은혜 받은 삶이고 성령 충만한 삶이다. 수고의 씨를 힘써 뿌리면 어디선가 반드시 열매 맺는 역사가 나타난다.
3.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
룻은 하는 말마다 예쁘게 하면서 자신을 하녀처럼 낮추고 보아스의 은혜를 구했다(13절). 그 모습에 보아스도 크게 반했을 것이다. 나중에 보아스는 룻과 결혼하지만 이미 처음 대면할 때부터 그는 룻으로부터 아름다운 삶의 향기를 느꼈을 것이다. 룻은 보아스의 무조건적인 호의를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감사하며 더 큰 은혜를 구했는데 보아스는 그녀가 염치없이 은혜를 구한다고 여기기보다 더 기쁘게 여겼다. 이미 룻의 아름다운 마음에 반했기 때문이다. 결국 보아스는 룻에게 더 큰 은혜를 베풀어 주었다.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정의로운 하나님이면서 힘써 심으면 심은 것 이상을 보너스로 주시는 은혜로운 하나님이다. 심은 대로 보상을 주시는 하나님을 생각만 해도 인생행로에 큰 힘을 얻는데 심은 것 이상으로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 더욱 큰 힘을 얻는다. 성도는 염려도 없어야 하지만 때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역설적인 의미에서 염치도 없어야 한다. 하나님은 겸손한 믿음으로 은혜를 구할 때 은혜의 문을 활짝 열어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룻 2장 12~23절 / 박기완목사
룻기서는 은혜의 책입니다.
그런데 룻기서를 처음 읽어보면 슬픔으로 가득합니다. 가난.... 장래식... 슬픔.... 이런 내용이 가득해요....
그런데 마지막에는 찬송과 축복으로 끝났습니다. 그 과정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니까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절망이 변하여 소망이 되고, 내려간 것 같으나... 결국은 올라가고 복을 받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여정이었습니다.
룻이라는 여인은 이방인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모계를 이루고 메시야의 계통을 잇는 복을 받았습니다. 도저히 그럴 수 없는데 그렇게 된 것은... 바로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은혜가 있어야할 줄 믿습니다. 인생의 비극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몰라서 못 구하고, 알아도 구하지 않기 때문에... 인생이 그토록 절망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나 같은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을까?..." 그럽니다. 내가 나를 아는데.... 양심상.. 아니면 자존심 때문에... 혹은 자격이 없어서 은혜를 받을 수 없다고....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마귀의 장난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고 자비가 많으신 분이세요...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다 덮을 수 있으니... 주님의 품으로 나아오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은혜가 임하면 어떤 문제든지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은혜란 무엇입니까? 은혜가 뭐예요?.. 은혜의 뜻을 먼저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룻기서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이해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만나면... 흔히 그러죠... "하나님 이번 문제만 해결해 주시면... 열심히 충성하겠습니다!" 그럽니다.
고치지 못할 병에 걸린다거나... 사업이 망해서 회복이 어려운 상태가 되거나... 어떤 절망적인 상황을 만날 때... "하나님... 이 문제만 해결해 주세요... 그러면... 충성된 종이 되겠나이다!" 그럽니다.
그런데... 문제를 만날 때마다... 그 문제를 해결해 주고... 막힌 것을 뚫어 주고... 얽힌 것을 풀어주는... 그런 것이 은혜가 아닙니다.
우리가 그림을 그리다가 마음에 안 들면... 몇 개 고쳐서 되는게 아니고 처음부터 다시 그리고 싶을 때가 있죠...
장기나 바둑을 두는데... 엉뚱한 방향으로 나갑니다... 한 수 물러서 되는게 아니고 처음부터 다시 두고 싶을 때가 있어요...
하나님은 한 수만 물러 주시는게 아니고... 첨부터 아예 다시 두도록 해 주세요... 이게 은혜입니다.
잠깐 잠깐 도와 주시는게 아니고 아예 기업을 이어 주세요... 돈 몇푼 주시는게 아니고, 아예 내 재산을 다 갖아라... 그런 말이예요....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시고 나는 그 분의 자녀가 되어서... 아예 기업을 잇게 하십니다. 그 분의 재산이 다 내 것이 되도록 상속자가 되는 거예요... 보통 일이 아니죠... 그래서 은혜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는 '기업'이라는 말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기업'이라는 말씀들이 많이 나옵니다.
히브리서 1:4∼5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저가 천사보다 얼마큼 뛰어남은 저희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뇨" 아멘...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는 천사보다 더 귀하다는 겁니다. 천사 중 누구에게 아들이라고 했느냐?... 그런데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자들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우리는 그분의 아들이요 딸이 되어서.. 우리는 그 분의 상속자... 기업을 물려받는 자녀가 되었다는 겁니다. 할렐루야!
베드로전서 1:4절 말씀에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그랬습니다.
사도행전 26:18절 말씀에서도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에베소서 1:11절 말씀에도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그랬습니다. 기업을 우리에게 주셨어요...
'기업'이라는 말은 구약에서... '후사'나 '유업'.. 혹은 '분깃'이란 뜻으로도 쓰여졌는데, 주로 재산의 통제권이나 장자권을 계승해 주는 것으로 쓰여졌습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더 많은 기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 기업은 예상하신 바 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마가복음 12:1∼11절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상속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히브리서 1:2절에서 확증되고 있는데... 로마서 8:17절에 보면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이렇게 말씀하시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가 되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업이란 모든 축복이 보장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마25:34, 고전6:9, 갈5:21). 그 나라가 이미 임했다는 점에서 그것의 향유는 이 세상에서 시작되지만 완전한 소유는 미래에 있음이 틀림없습니다(롬8:17∼23, 고전15:50, 히11:13, 벧전1:3∼4).
이해가 되시려나 모르겠습니다. 너무 어려운 말들을 써서 죄송합니다만... 지나가는 말로써 이해가 좀 어려울 때는... 나중에 인쇄한 설교를 보고 더 확실히 이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좌우간 쉽게 정리하자면... 예수를 믿는 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기업을 물려받게 되는 상속자요, 후사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아예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으면..." 하는 때가 있어요.
사업이 안 풀리고 잘 안되는 분은... 업종을 바꿔서라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을 겁니다.
가정에 문제가 많고 너무 힘들면... "내가 왜 이런 인간하고 결혼했나?" 그래서 아예 옛날로 돌아가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은 분이 있을 겁니다.
건강이 좋지 못하여... 아예 다시 태어났으면.... 하는 분이 계십니까?..
그런데 이런 모든 것들을 역전시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작은 문제 하나 하나를 해결해 주시는게 아니고 아예 첨부터 다시 시작하도록 하십니다. 그게 은혜라는 거예요... 은혜가 임하면 다시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말하는 복과 성경이 말씀하시는 복은 다릅니다.
세상에서는 물질이 많은게 복이요, 출세하고 성공하면 그걸 복 받았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런 것도 중요하죠.. 그러나 그런 것은 부수적인 겁니다. 작은 거예요...
하나님 자신이 복입니다. 가난하고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자가... 진정 복받는 자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기업을 이어 받는 상속자가 될 때... 그것이 진정한 복입니다.
구약시대에 3가지의 경우에 다시 회복시켜주는 법이 있었는데, 첫째는 땅이요, 둘째는 노예, 세 번째는 과부입니다.
희년이 되면 다시 원 상태로 돌려주었어요... 과부의 경우에는 가까운 친족 중에서 유력한 자를 택하여 다시 결혼하게 해서 기업을 이어가게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나 기업을 물려주지 않아요...
구약시대에 기업을 이을 자의 자격은 3가지를 만족해야 하는데.... 먼저는 가장 가까운 친족에게 물려줄 수 있습니다(민27:11). 그리고 그 중에서도 유력자(세력이 있는 사람)에게 물려주고(룻2:1), 그가 자원해야 합니다. 억지로 할 수는 없는 거죠...
혹시 여러분 중에... 가족이나 가까운 친족 중에서 한 1000억이나 되는 빚을 말없이 갚아줄 수 있는 분 있습니까? 100억이면 갚아줄 분....? 아마 거부라면 혹시 몰라도... 힘들죠...
우리로서는 희망이 전혀 보이질 않습니다. 그런데... 나와는 상관없던 예수님이 나의 친척이 되어 주셨습니다.
히브리서 2:14절에 보면 혈육에 속한 자가 되었다고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혈육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15∼17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롬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롬8: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롬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아멘....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자녀이면 후사라고 했는데, 후사는 기업이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우리가 종이 되지 아니하고 아들이 되었다고 그랬는데... 왜 꼭 아들이 되어야만 하는가하면 구원과 모든 기업을 물려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순간... 벌써 승리는 임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1. 은혜가 임하면 받는 복
그러면 은혜가 임하면 어떤 복을 받습니까?...
첫째는,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룻기서 2:8∼10절 말씀을 보세요...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그들의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의 길어 온 것을 마실지니라 룻이 땅에 엎드려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어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무슨 말입니까?.... "다른데 가지말고... 여기 있으라... 하인들에게 명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그들이 길어온 물을 마시며 여기서 마음 푹 놓고 이삭을 주워라" 그랬습니다.
시편 23편의 말씀과 같아요...
(시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23: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시23: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시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23: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23:6)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실 때 먼저 보호해 주십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걱정할 게 없습니다. 지팡이와 막대기로 보호해 주십니다.
두 번째로, 은혜가 임하면 받게 되는 복은 '위로의 복'입니다.
룻기서 2:11∼13절 말씀을 보세요....
(룻2:11)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모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들렸느니라
(룻2:12)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룻2:13) 룻이 가로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시녀의 하나와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시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기업이란 것은 엄청난 것입니다.
돈이 없는 사람에게 돈 몇 푼 주고... 문제가 있는 사람 그 문제 좀 해결해 주고... 그런 게 아니예요..
어느 대 거부가 3명의 아들에게 유산으로 물려 줄터이니 한 가지씩 소원을 말해 보라고 했습니다.
첫째 아들은 말하기를 "아버지가 가지고 계신 재산 중에 저 산 넘어 서쪽에 펼쳐진 대 평원을 하나 주시면 좋겠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둘째 아들은 "저는 남쪽에 있는 농장과 그 위쪽으로 높이 솟은 산을 주시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셋째 아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저는 아무것도 원치 않습니다. 다만 아버지와 함께 살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아버지만 제 곁에 계시면 그것이 제일 행복합니다!" 그러더래요.
여러분, 과연 어떤 아들이 지혜로운 아들일까요?... 아버지와 함께 살면 아버지 것이 다 내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시면 문제는 해결되는 거예요...
하나님 자체가 기업이요 축복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땅을 분배할 때에 레위인들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기업으로 주셨어요.
민수기 18:20절 말씀에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의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나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
하나님을 모신 것이 축복이요 은혜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은혜가 임하면 받는 복은 '교제의 복'입니다.
룻기서 2:14절에 "식사할 때에 보아스가 롯에게 이르되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 룻이 곡식 베는 자 곁에 앉으니 그가 볶은 곡식을 주매 룻이 배불리 먹고 남았더라" 그랬습니다.
보아스는 룻을 같은 식탁으로 초대하여 함께 식사를 하도록 했습니다.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은혜입니다.
같은 식탁에서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예요...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해요...
요한계시록 3:20절 말씀에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그랬습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주님과의 교제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십니다. 하나님과 교제한다는 것은 주님과 동행하는 것을 말하고... 기업이 물려지는 것을 말하는 거예요
이런 은혜가 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네 번째는, '만족'이 있게 됩니다.
룻기서 2:16∼17절 말씀을 보세요.
(룻2:16) 또 그를 위하여 줌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로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 하니라
(룻2:17) 룻이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떠니 보리가 한 에바쯤 되는지라
룻은 보아스의 밭에서 하루종일 보리를 주었는데, 한 에바를 거두었다고 했습니다.
한 에바는 4인 가족이 한달동안 먹을 분량이예요.
언제까지 주웠는가 하면 룻기서 2:23절에 보면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치기까지 이삭을 주웠다고 했으니까 60일 정도를 주운 겁니다. 이는 5년 동안 먹을 분량입니다. 엄청난 거예요...
하나님의 은혜는 하루만 일해도 한 달 동안 걱정이 없어요... 주의 일을 하는데 60일 동안만 작정하고 충성 헌신해서... 하나님 마음에 쏙 들면... 5년 동안은 보장해 주실 거예요.. 할렐루야!
2. 은혜를 받으려면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은혜를 받을 수 있을까?
첫째는,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룻기서 2:2절 말씀에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나로 밭에 가게 하소서 내가 뉘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갈지어다 하매"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결단이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야 겠다는 결심이 있어야 되는 겁니다.
"차라리 나를 품꾼의 하나로 써 달라고 하자... 일군이 되는 한이 있어도 여기서 굶어 죽는거 보단 낫겠지... 돌아가야겠다!" 이런 견단이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뭔지도 모르고... 귀한지도 모르고... 알면서도 구하지도 않고... "주실려면 주시고 말면 말고..." 그러면 안돼요...
결단이 있어야 돼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리라!"
굳은 결단과 다짐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주님 앞으로 나와야 됩니다.
히브리서 4:16절 말씀에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달려나올 때 받는 겁니다. 은혜의 보좌 앞에 나왔으니...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르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 할렐루야!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 가능하고... 주님의 보좌 앞으로 나갈 때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이해해야 될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는 달라요..,
하나님의 사랑은 내가 어디를 가든지 함께 하시는 걸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내가 하나님께 가야만 임하게 되는 거예요...
탕자의 비유를 보세요... 이 아들이 어디를 가든지 아버지의 마음은 그를 향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어디를 가든지 항상 함께 하십니다.
설령 죄의 자리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세요...
그런데, 그 아들이 돌아와야만 아버지의 모든 기업을 물려받을 수 있어요... 여전히 아버지는 탕자를 사랑하지만.... 돌아오지 않으면 은혜를 받을 수 없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회개하고 돌아와야만 됩니다. 하나님께로 나아가야만 은혜를 받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가 없어요....
속상하다고 친구들 만나서 술이나 마시면 해결이 안돼요...
황금 연휴 만났으니 어디론가 멀리 놀러가서 스트레스 푼다고 해결되는게 아니예요...
문제를 만나면 만날수록...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왔으니 구하시기 바랍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마7:7∼8)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요... 구해도 받지 못함은 정욕을 위하여 잘못 구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약4:2∼3, 요16:24) 할렐루야!
세 번째는, 은혜를 말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은혜를 입에 달고 다녀야 돼요...
나오미의 가족이 왜 모압 땅에 가서 망하게 되었습니까?...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어서 그랬지만 나오미의 가정에 흉년이 든 건 아니었어요...
흉년이 들고 환란의 바람이 불어도.. 하나님은 믿는 자들을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만 잘 섬기면 경제가 어렵고 실직자는 늘어가도 염려할 게 없어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룻기서 1:21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하니라"
나오미의 가족은 흉년이 들어서 모압 땅을 간 게 아니라...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어서 자기들도 어렵게 될까봐 간 거예요...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그랬습니다. 없어서 간 게 아니고 풍족했어요...
그런데 사람은 안되면 자기 잘못은 모르고 꼭 하나님을 원망하거든요... 나오미가 뭐라고 그랬습니까?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하나님이 괴롭게 하시는 분입니까?.... 나오미는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었어요... 하나님을 오해하지 마세요...
잘되고 형통할 때는 자기 탓으로 돌리고... 안되면 하나님을 원망해요... 이게 문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하다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어요... 원망하다가 망한 거예요...
그런데... 원망하고 불평하던 입술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입술,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는 입술이 되면... 문제는 해결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입술만 열면 은혜를 말해야 돼요...
룻기서 2:2절, 10절, 13절 말씀에 보면 룻이라는 여인은 그 입에서 얼마나 많은 은혜를 말하는지 몰라요...
"내가 뉘게 은혜를 입으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중에는 나오미의 입에서도 은혜를 말해요.
룻기서 2:20절 말씀에 "나오미가 자부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복이 그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그가 생존한 자와 사망한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하나님이 괴롭게 하시는 분으로... 원망하고 불평했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니까 나오미의 입에서도 은혜를 말하게 된 겁니다.
은혜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주여! 은혜가 필요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주시옵소서!" 하고 간구해야 합니다.
소경거지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은혜를 주실 때까지 부르짖으며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사람들이 조용하라고 야단을 치니까 더욱 심히 소리를 질렀다고 했습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기회가 없어요... 그래서 주님이 돌아보실 때까지... 주님이 은혜를 주실 때까지 더욱 소리를 지르며 주님을 불렀습니다.
그럴 때 "네 소원이 무엇이냐?" "보기를 원합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문제를 해결받았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도 이런 은혜가 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주님의 보호하심이 있습니다. 주님의 위로하심이 있어요... 주님과 교제하게 되고, 참된 만족이 임하게 되는 겁니다.
어떻게 해야만 됩니까?... 먼저는 나아가고자 하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와야 돼요... 그리고 은혜를 말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주님의 은혜가 충만하고... 더욱 복되고 형통하며... 승리로운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준비된 룻
룻기 2:17-23 / 염두철목사
룻은 하나님의 은혜로 보아스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보아스를 통해서 인도하심의 은혜, 보호하심의 은혜, 위로하심의 은혜 그리고 풍성하게 채워주심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룻을 위하여 더 큰 은혜와 복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룻에게 베푸시는 은혜는 우리에게도 공평하게 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고, 영생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더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구원을 얻은 것만으로 만족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서 준비하시고 주시기 원하는 더 큰 은혜와 복을 누리면서 살 수 있을까요? 룻에게서 그 답이 보입니다. 룻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복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가 그것을 받을 수 있는 그릇을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룻이 하나님 앞에서 준비된 그릇이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면서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룻은 성실한 여인이었습니다.
룻은 세상적인 외적 기준으로 볼 때 내세울만한 것이 없는 여인입니다. 그런데 룻에게는 아름다운 성품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실성입니다.
룻기 2장 7절과 오늘 본문 17절을 보겠습니다. “그의 말이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하였고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룻이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떠니 보리 한 에바가 되는지라.”
성경은 룻이 ‘저녁까지’ 이삭을 줍는다는 말을 강조하며 표현함은 그녀의 성실함을 증거 하기 위함입니다.
진정한 성실은 환경이나 조건이 더 좋아졌다고 해서 지금까지의 자신의 태도가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성공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부러워하지만 성실한 사람에 대해서는 신뢰하고, 존경하고, 사랑하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또한 성실이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일에 대하여 작은 일이라고 해도 귀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룻은 작은 일에도 충성을 다했습니다. 룻은 이삭을 줍는 일을 소중히 여겼으며, 그 일에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충성은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줍니다. 그래서 보아스의 사환은 작은 일에 충성하는 룻을 보고서 보아스에게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라고 칭찬을 담아 보고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는 그 사람을 칭찬하셨습니다(마25:21). 작은 일이라고 해도 맡겨진 일에 대하여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성실한 사람입니다.
둘째로, 룻은 어른을 공경할 줄 아는 여인이었습니다.
부모 공경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과 일맥상통한 것입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엡 6:1-3). 룻이 하나님께 큰 복을 받은 것은 시어머니를 잘 공경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룻에게서 어른을 공경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본문 18절을 보겠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성읍에 들어가서 시어머니에게 그 주운 것을 보이고 그가 배불리 먹고 남긴 것을 내어 시어머니에게 드리매.” 룻은 보아스에게서 받은 은혜를 시어머니와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주운 것’은 하루 종일 아르바이트를 하고 받은 사례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룻은 그것을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전부 갖다 드렸습니다.
룻은 그날 얻은 소득을 가지고 가서 기쁨으로 보여주며 시어머니와 삶의 보람을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보람은 독점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눌 때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처럼 고부간의 화목은 아주 단순하고 작은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룻을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룻이 은혜를 나누자 나오미가 묻습니다. 본문 19절 상반절입니다. “시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 너를 돌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 하니….”
우리는 어려울 때 과정은 무시하고 결과만 보기가 쉽습니다. 배고플 때 빵 한 조각이 눈앞에 있다는 자체가 중요하지, 그것이 어떻게 있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많은 양의 양식을 어떻게 마련했는지가 궁금했던 것입니다. 룻의 사람됨으로 볼 때 무슨 좋은 사연이 있지 않았는지 궁금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오미는 룻에게 은혜를 베푼 자를 축복했습니다. 은혜는 나눌수록 풍성해지고 충만해 지는 것입니다.
어른들은 자녀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 합니다. 언제 나이 드신 부모님들이 자식에게 섭섭해 할까요? 한 집에 살면서도 자식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을 때, 그리고 소외될 때입니다.
사회생활을 하다가 밀려나 집에서 소일하게 된 노인들에게는 간단한 말 한 마디, 작은 관심 하나가 위안이 되고, 따라서 부모님과의 대화는 더없이 좋은 공경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룻은 어른을 공경할 줄 아는 여인이었습니다.
룻은 자신이 받은 은혜를 나누며 나오미를 공경했을 뿐 아니라 본문 19-21절을 보면 밖에서 있었던 일을 소상하게 나눔으로써 나오미를 공경했습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루 종일 일하고 집에 들어오면 육체적으로 피곤해서 말하기가 싫어집니다. 룻이라고 해서 달랐겠습니까? 하지만 룻은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하루동안 일어난 일들을 나오미에게 자세히 들려주었던 것입니다.
본문 21절입니다. “모압 여인 룻이 이르되 그가 내게 도 이르기를 내 추수를 다 마치기까지 너는 내 소년들에게 가까이 있으라 하더이다 하니.”
룻은 보아스가 자기에게 “내 추수를 다 마치기까지 너는 내 소년들에게 가까이 있으라”고 했던 말을 시어머니에게 그대로 다 들려주었습니다. 룻은 새로운 남자 보아스를 만나고 온 사실까지 낱낱이 나오미에게 들려주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는 우리 자신을 그대로 솔직하게 드러낼 수 없습니다. 비밀이 알려지면 당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절대적으로 투명한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필요에 따라 적절히 비밀은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비밀이 많다는 것은 문제입니다.
폴 투루니에는 『비밀』에서 “마음속에 있는 진실을 다른 사람과 나누지 않으면 정신적 고독이라는 감옥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는 대상을 만난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룻에게는 비밀이 없었습니다. 이 한 가지만으로도 룻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룻은 겸손을 아는 여인이었습니다.
앞서 13절에서 룻은 보아스가 은혜를 베풀 때에 이스라엘의 관습대로 엎드려 절하면서 말하기를 “나는 당신의 하녀 중의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라고 겸손하게 처신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룻은 저녁때에 집으로 돌아와서 시어머니에게 밭에서 주은 것을 보이고, 남긴 떡을 내어 드리면서 보아스가 베푼 친절을 상세히 알려 주었으나 보아스가 자신을 칭찬한 일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칭찬이란 2장 11절의 내용을 말합니다.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
겸손한 마음은 자기 자신을 칭찬하지 않고, 자신을 높이고, 드러내지 않습니다. 영국의 간호사였던 나이팅게일은 1853년에 크리미아 전쟁이 발발하자 자원하여 전쟁터로 나갔습니다. 그녀는 부상병을 간호하고, 1만 3천 명의 호열자 환자를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녀는 군인들로부터 싸움터의 천사, 백의 천사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영국 국민들은 그녀에게 ‘광명부인’이라는 이름을 주었습니다. 그녀는 당시에 전 세계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크리미아 전쟁은 영국과 터키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전쟁의 종식으로 나이팅게일은 영국으로 귀국하려 했습니다. 그녀의 귀국 소식이 알려지자, 영국 국민들은 그녀를 전쟁의 영웅들보다 더 존귀하게 맞이하기 위하여 대대적인 환영준비를 했습니다.
그러나 명예스런 훈장이나 영광 받기를 즐겨하지 않은 나이팅게일은 영국으로 귀국하려던 예정을 바꾸었습니다. 그녀는 항공사를 찾아가서 영국 행 비행기 표를 프랑스 행 비행기 표로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아무도 모르게 프랑스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영국 국민들은 크게 실망했습니다. 그런데 나이팅게일이 프랑스로 가게 된 배경에는 환영행사를 피하려 함에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영국인들은 “역시 아름다운 천사야!”라며 다시 그녀를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겸손한 태도는 사람들의 가슴에 깊은 감동을 안겨주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지식, 권력, 명예, 재물로써가 아니라 겸손한 마음과 겸손한 생활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알고 보면 나오미도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나오미는 그동안 룻에게 유력한 친족이 있음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보아스가 룻에게 은혜를 베풀자 비로소 그에 대해서 입을 열었습니다.
본문 19절 하반절, 20절입니다. “룻이 누구에게서 일했는지를 시어머니에게 알게 하여 이르되 오늘 일하게 한 사람의 이름은 보아스이니이다 하는지라 나오미가 자기 며느리에게 이르되 그가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하고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와 가까우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이니라 하니라.”
세상에는 비록 자신들은 실패하고 못살지라도 유력하고 훌륭한 친척을 가진 것을 뽐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나오미는 유력하고 훌륭한 친족이 있다고 말하지도 않았고, 뽐내지도 않았고, 기대하지도 않았고, 부담을 끼치지도 않았습니다. 부유한 친척을 뽐내거나 의지하는 일은 자신을 높이려는 마음이며 크게 어리석은 것입니다.
오늘 밭에서 무슨 좋은 일이 있었을 것이라는 나오미의 예감이 적중했습니다. 룻에게 은혜를 베푼 보아스는 엘리멜렉의 근친(近親)이었습니다. 이제 그가 ‘기업을 무를 자’로 등장합니다. ‘기업을 무를 자’는 친척이 재산을 잃었을 경우 소유권을 회복시켜 주기도 하고, 친족이 흘린 부당한 피를 복수하며, 미망인을 아내로 삼아 대를 잇게 하기도 했습니다.
나오미가 기대한 대로 나중에 보아스는 남편과 자식을 잃고 혼자 남게 된 친척을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보살펴 줌으로써 근친으로서의 의무를 잘 수행합니다. 미리 말하자면 보아스는 룻과 결혼해서 다윗 가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오르는 영광을 얻게 됩니다.
나오미는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기대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룻에게 보아스가 우리의 친족이며 우리 기업을 이을 자라는 사실을 넌지시 일러 주었습니다. 이 말은 보아스가 어쩌면 룻의 남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보아스는 구속자가 되고 기업 무를 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선물보다 선물을 주시는 분이 더욱 중요한 것과 같이 은혜보다도 은혜를 주시는 분이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영적으로 우리의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든 것이 감추어져 있음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넷째로, 룻은 어른의 말에 순종할 줄 아는 여인이었습니다.
나오미는 자신의 며느리인 룻이 잘 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어머니는 룻과의 대화를 통해서 알게 된 것을 다시 룻에게 ‘다른 밭에 가지 말고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주으라’고 부탁합니다.
본문 22절을 보겠습니다. “나오미가 며느리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너는 그의 소년들과 함께 나가고 다른 밭에서 사람들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 하는지라.”
나오미는 영적으로 깨어 있었습니다. 유대 땅에 생전 처음 발을 디딘 모압 며느리가 밖에 나간 첫날에 그 보아스를 만나 이렇게 큰 호의를 입은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알아차렸습니다.
생각해보면 룻이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줍게 된 것도 하나님이 인도하지 않으셨으면 가능하지 못한 일이고, 보아스가 룻에게 특별한 관심과 호의를 베풀어 준 것도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기대를 가지고 룻에게 “내 딸아 너는 그의 소년들과 함께 나가고 다른 밭에서 사람들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고 했던 것입니다.
룻은 앞서 보아스의 부탁의 말에도 순종하였고, 시어머니 나오미의 부탁의 말에도 순종하였습니다. 룻은 어른들의 말에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결과 룻은 복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복은 화목한 가정위에 임하고, 어른을 공경할 줄 아는 자녀들 위에 임하는 것입니다. 룻은 어른을 공경하는 믿음으로 어른들의 말에 순종하고 그대로 행하였기에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크게 받았습니다.
룻과 나오미의 대화는 다정하고 아기자기하게 느껴집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나오미가 며느리를 향하여 사랑스런 목소리로 ‘내 딸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요즘에는 시집살이하는 며느리 못지않게 ‘며느리살이’를 하는 시어머니도 많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 역시 며느리를 딸처럼 생각하지 않는데서 오는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며느리는 며느리이고 결코 딸은 될 수는 없지만 딸처럼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의 지시대로 행했습니다. 본문 23절입니다. 이에 룻이 보아스의 소녀들에게 가까이 있어서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치기까지 이삭을 주우며 그의 시어머니와 함께 거주하니라.”
나오미의 말대로 룻은 기업을 무를 자인 보아스의 밭을 떠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 그리스도는 죄의 종이었던 우리를 회복시키시기 위해 속전을 지불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지 않을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풍성한 은혜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추수가 끝날 때까지 룻은 보아스의 식구들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읽으면서 뭔가 룻에게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오미의 기대도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팔레스틴에서는 2-3개월 동안 추수가 진행됩니다. 계속되는 보리 추수와 함께 보아스와 룻의 조용한 사랑이 붉은 사과처럼 영글어 가고 있었습니다. 나오미는 내심 자신과 룻에게 밝은 미래가 다가올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자기 민족과 신을 버리고 온 모압 여인 룻이었습니다. 또한 평생 어머니를 모시며 살겠다고 따라온 착한 며느리 룻이었습니다. 이 룻에게 나오미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룻이 재혼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일이었습니다.
기회를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면, 그 기회를 붙잡는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기회는 깨닫는 자의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종종 기회가 다가옵니다. 나오미와 같이 영적으로 깨어 있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깨닫고 주어지는 기회를 붙잡아 은혜와 복을 누릴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룻에게 다가오신 하나님
김승규목사 / 룻 2:14-19
룻기의 시대적 배경은 사사시대입니다. 사사시대의 특징이 말씀이 희귀한 시대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런 시대에 하나님은 이방 여인 룻에게 다가가셔서 자신을 나타내시고 알게 하십니다. 룻은 우리로 말하면 초신자입니다. 시어머니를 통해 어렴풋이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신앙의 첫발을 내 디뎠습니다. 이런 그녀의 삶속에 하나님은 보아스를 보내어 주시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위로와 회복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오늘 이시간 룻을 찾아오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알고 이 하나님이 오늘 우리를 찾아와 만나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1. 만나 주시는 하나님
룻은 먹을 것을 구하러 이삭을 줍기 위해 발걸음이 닿는대로 밭에 나갔는데 그 밭은 보아스의 밭이었습니다. 룻은 점심시간이 되어도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어쩌면 아침도 제대로 챙겨먹지 못하고 나왔는지 모릅니다. 그녀는 지금 시어머니와 시어머니의 하나님을 따르겠다는 선택으로 인해 유다땅 베들레헴에서 가장 가난하고 비참한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밭에 나와서 추수하던 일꾼들을 격려하던 보아스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보아스는 그녀의 결단과 선택을 축복해 주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주시기를 원하노라”(2:12) 그리고 룻을 식탁의 자리로 초대합니다. 일꾼과 함께 앉지도 못하는 그녀에게 보아스는 차별이 없는 평등의 자리로 초대합니다.
“식사할 때에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 하므로 룻이 곡식 베는 자 곁에 앉으니 그가 볶은 곡식을 주매 룻이 배불리 먹고 남았더라”(14) 보아스는 한가족처럼 룻을 대하고 있습니다. 함께 먹자는 말은 한가족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하는 초청의 표현입니다. 룻은 이방인이요, 여인이요, 과부였기에 어떠한 불이익도 감내하기로 마음 먹었는데, 보아스에게 예상치 못한 환대를 받습니다. 보아스의 식탁으로 초청을 받습니다. 룻은 환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신앙의 결단을 알아주는 이가 있다는 것을 통해 하나님이 자신에게 찾아와 주시고 만나주시고 상주시고 계심을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든 이웃처럼, 다정한 친구처럼, 따뜻한 가족처럼 룻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이방여인이 아니라 가족으로 그녀를 환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날마다 룻처럼 소외되고 차별받는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의 공동체 안으로 초대하십니다. 그곳이 주님의 몸된 교회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통해 한 몸 한 지체가 되고,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12:4-5) 세상으로부터 이끌어 내어 사랑이 넘치는 곳, 위로와 안식이 있는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하십니다.
♬ 사랑하는 주님 앞에 형제자매 한자리에 크신 은혜 생각하며 즐거운 찬송 부르네 네 주 예수 본을 받아 모든 사람 내 몸 같이 환난근심 위로하고 진심으로 사랑하세 (찬220)
2. 인격적인 사랑의 하나님
보아스는 일꾼들에게 명령하여 룻이 곡식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허용합니다.(15) 심지어 곡식 다발에서 의도적으로 곡식을 조금씩 뽑아내 룻이 이삭을 줍도록 배려합니다.(16) 보아스의 배려는 가난한 자를 위한 것입니다. 상대방의 인격과 감정을 깊이 고려한 배려입니다. 단순히 불쌍하게만 여겼다면 그냥 한 다발을 따로 두었다가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룻을 비참하게 만드는 행위입니다. 이는 돕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주는 일일 수 있습니다. 보아스는 룻이 알지 못하게 조금씩 뽑아 버리도록 해서 룻이 수고해서 이삭을 얻도록 했습니다. 이같은 보아스의 배려 덕분에 룻은 부담 없이, 상처 없이 이삭을 주울 수 있었습니다. 만약 보아스가 룻을 비인격적으로 대했다면 룻은 유다 땅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깊은 상처부터 받았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이후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아무리 주어졌어도 룻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힘들어 했을 것입니다.
룻은 보아스의 인격적인 배려를 통해 인격적이신 하나님께 점점 다가가고 있습니다. 정확하게는 하나님이 룻에게 인격적으로 나가오고 계신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대우를 받은 사람은 남을 인격적으로 대우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 총회 밖에 있는 이방 여인을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배려하고 있습니다. 처음 신앙을 가지는 분들은 먼저 믿은 성도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배워 나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나를 통하여 지금 옆에 있는 분들에게 다가가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통하여 교회에 나오는 성도들이 인격적이신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는 복된 교회가 될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3. 풍성하신 하나님
보아스는 룻의 배고픔을 충족시켜 주었습니다. 점심 한 끼였지만 차고 넘치도록 공급 받았습니다. 1장에는 흉년, 죽음, 징벌, 빈손 등의 단어가 계속 나옵니다. 그런데 오늘 보아스를 만났을 때 <배불리 먹고 남았더라> 라는 풍족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남은 것을 싸가지고 가서 시어머니에게 저녁을 풍성히 대접하여 드릴 수 있었습니다.(18) 이렇듯 룻은 첫날 상상하지도 못할 풍성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룻이 하루 동안 밭에서 이삭을 주워 모은 양이 한 에바였습니다. 한 에바는 쉽게 약 20kg 짜리 쌀 한 포대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룻은 처음으로 보리 이삭을 줍기 때문에 그 양의 많고 적음을 잘 가늠하지 못하지만 시어머니 나오미는 그 양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고 놀라게 됩니다.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 너를 돌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 이렇게 말하는 나오미의 모습을 상상해 보면 상당히 놀라 흥분되어 있는 모습입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도움을 주지 않는 한 이렇게 많은 양의 이삭을 주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 에바는 두 식구가 한 달 이상은 먹을 수 있는 양입니다. 나오미는 도움의 손길을 감지하고 그를 축복합니다. 정확히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 손길이 너무 고맙고 그동안 고생한 것이 순간 보상 받는 것 같아 너무 감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풍성하게 채워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필요보다 더 많은 것으로 차고 넘치게 주시는 분이십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32) 룻은 보아스의 밭에서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풍성함으로 돌아왔습니다. 베들레헴의 풍성함을 비로소 그녀는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의 풍성함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현재도 동일하게 우리의 필요에 풍성하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풍성함으로 우릴 인도하시고 채워주십니다. 이 풍성한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4. 능력의 하나님
룻은 놀라며 묻는 시어머니에게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의 이름이 보아스라고 알려 줍니다.(19) 성경에 등장하는 보아스라는 이름은 하나님과 관련된 이름입니다. 열왕기상 7:21절에 보면 솔로몬 성전 앞에 두 개의 놋 기둥이 섰는데, 각 기둥의 높이가 36규빗으로 16미터정도 됩니다. 그 당시로서는 16미터의 놋 기둥이란 아침마다 해가 뜨면 기둥에 반사된 반짝이는 빛으로 성전의 위치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 개의 기둥에는 각기 이름이 붙었는데, 오른쪽에 선 것은 야긴이고, 왼쪽에 선 것은 보아스였습니다. <야긴>의 뜻은 <저가 세우리라> 이고 <보아스>라는 뜻은 <그에게 능력이 있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일 아침마다 두 기둥을 통해 반사되는 빛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전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가지고 하루를 시작 하였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우리의 가정도, 우리의 사업도, 우리 교회도 하나님이 세우신다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바로 능력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야긴과 보아스의 신앙고백입니다.
룻기에서 나오미의 친척으로 보아스가 등장하지만, 보아스라는 이름을 통해서 그리고 실제 그 명칭이 지니는 의미를 통해서 우리는 룻기의 사건이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시 나오미의 가정을 세워 가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보아스를 통해 드러나 룻의 삶을 바꾸고 나아가 이스라엘 역사를 새롭게 쓰는 능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도의 인생은 하나님의 능력 아래 세워지고 인도되는 삶입니다. 룻이라는 연약한 여자가 보아스라는 능력 있는 남자를 통해 보호 받고 채워지고 풍성함을 누리듯이,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능력 아래서 그 인생이 보호받고 채워지고 풍성함을 누리게 됩니다. 연약한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 우리를 인격적으로 사랑하시고 풍성히 베푸시는 하나님, 우리를 세우시는 전능한 하나님의 은혜가 오늘을 살아가는 여러분들에게 함께 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