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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사마르칸트 유적지
1.레기스탄 광장
사마르칸트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명소이다. 레기스탄은 '모래땅'이란 뜻으로 옛날에 모래로 뒤덮힌 사막이었다고 한다. 공공의 광장으로 왕의 알현식, 공공집회, 죄인의 처형 등이 행해졌다. 티무르 시대에는 대규모 노천시장이 있었으며, 그의 후손인 울루그벡 시대에 처음으로 메드레세가 세워졌으며 메드레세의 맞은편에 하나카가 있었다. 광장이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가진 것은 그 후 샤이바니 왕조의 야한그도슈 바하도르에 의해 다른 2개의 메드레세가 건립된 이후이다. 3개의 메드레세가 건립된 이후 레기스탄 광장은 이슬람 교육의 중심지로써 명성이 자자하였으며, 그 후 구소련 시절에는 이슬람 종교의 탄압으로 다시 거대한 노천시장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물론 지금은 이슬람 교육의 장소도 아니고, 노천시장도 아닌 관광지로써 제역할을 하고 있다. 광장은 왼쪽에 위치한 건물이 울루그벡 메드레세, 중간이 틸라카리 메드레세, 오른쪽이 쉬르도르 메드레세이다.
현재 광장은 명절이나 기념일 때 대규모의 콘서트나 행사가 열리기도 해서 무대와 좌석들이 설치되어 있다. 우즈벡의 50숨짜리 지폐를 보면 레기스탄 광장이 나온다.
왕궁 앞의 광장을 레기스탄이라고 하는 이른 중앙아시아에서 흔한 일이었습니다. 샤흐리삽스, 타슈켄트에 있었고 부하라에는 지금까지도 존재합니다.
레기스탄은 ‘모래로 된 땅’이라는 뜻입니다. 왕궁 주위를 흐르는 운하에 정기적으로 물이 높아지면 물이 넘쳐나며 모래가 많이 퇴적되어서 이같은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곳에 광장이 생겨나기 전에는 주위에 사람이 많이 살지는 않았지만 도공, 대장장이, 유리제조자 등의 공방들이 있었습니다.
칭기즈칸이 사마르칸트를 침략하여 파괴한 후 사람들이 이 곳 남쪽 외관으로 이사 왔습니다. 이 곳 이 도시 신시간 되었습니다. 시장이 새겼고 도시의 주요 사원이 생겼다고 합니다. 사마르칸트의 레기스탄 광장은 중앙아시아의 훌륭한 유적지 중의 하나입니다. 이 유적지에는 중세 사마르칸트의 모습이 반영되어 있으며 사마르칸트의 수세기에 역사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 곳은 아미르 티무르 때 이 광장은 행정, 상업의 중심지였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라는 격인처럼 사마르칸트에서는 모든 길이 레기스탄을 향합니다. 레기스탄은 세 개의 건축물 – 왼쪽의 울루그벡 메드레세, 오른쪽의 쉐르도르 메드레세 그리고 가운데의 틸라코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레기스탄
■ 사마르칸트의 중심지에 위치한 레기스탄 광장은 왕에 대한 알현식, 공공집회 등이 열리던 장소로, “모래광장”이라는 의미
■ 동 광장은 15 17세기 종교건축물인 울루그벡 메드레세(좌), 시르도르 메드레세(우), 틸라카리 메드레세(중앙)으로 구성되어
있음
- 울루그벡 메드레세(3개 건물중 가장 오래된 것이며 울루그벡에 의해 1420년 완공), 시르도르(“용맹한 사자”라는 뜻)
메드레세, 틸라카리(금색이라는 뜻) 메드레세
■ 과거 이슬람 교육의 중심지로서 명성이 자자하였으나 구소련 시절에는 이슬람 종교의
탄압으로 다시 거대한 노천시장으로 이용되었음
2.틸라카리 메드레세
광장에 정면으로 보이는 메드레세로 1647년 쉬르도르 메드레세를 세운 야한그도슈 바하도르에 의해 급히 세워진 메드레세이다. 쉬르도르 메드레세가 이슬람 교리에 어긋나는 문양으로 표현을 했기 때문에 수 많은 무슬림들의 불만을 샀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을 무마시키기 위해 전통적인 양식으로 더욱더 화려하게 이 메드레세를 건축하였다.
틸라카리는 '금박으로 된'이라는 뜻으로 메드레세 안으로 들어가 좌측편 푸른돔 아래의 예배당을 보면 그 이름이 어울림을 알 수 있다. 벽면과 천장을 모두 금빛으로 장식을 하여 화려하기 그지없다. 천장의 돔 모양을 보면 둥글게 보이나, 사실은 푸른색 부분부터는 세밀한 표현으로 둥글게 보일 뿐 사실은 평면이다. 현재 예배당 내부는 19~20세기의 레기스탄 광장을 비롯한 사마르칸트 유적지 모습을 기록한 사진과 그림을 전시하고 있으며, 기념품 상점도 있다.
3. 쉬르도르 메드레세
레기스탄 광장의 오른쪽에 위치한 메드레세로 현재 우즈베키스탄의 200숨짜리 지폐의 모델 문양이 그려져 있는 유명한 메드레세이다. 쉬르도르는 '사자가 그려졌다'라는 뜻으로 입구 아치에는 어린사슴을 쫓는 사자(사자보다는 호랑이에 훨씬 가깝다)의 모습이 그려져 있으며, 부하라의 나지르 지반베기 메드레세의 것과 같은 사람 얼굴 형상의 태양도 그려져 있다. 이 메드레세는 1636년 이 지역을 지배했던 야한그도슈 바하도르에 의해 지어졌고, 부하라의 것은 이보다 앞선 1622년 세워진 것이므로 쉬르도르 메드레세가 표절을 한 것 같다. 본래 이슬람교는 우상숭배를 금지하기 때문에 사람이나 동물의 모습을 표현하지 않지만, 간혹 그 시대의 왕이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일부러 금령을 깨고 표현하기도 했다.
한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쉬르도르 메드레세를 설계하고 감독한 건축가는 메드레세가 완성되자 무슬림으로서 이슬람 교리를 어긴 양심의 가책을 느껴 스스로 자살을 했다고 한다.
4. 루하밧 묘
아프라샵 호텔과 구르에미르 사이에 위치해 있는 티무르의 정신적인 스승인 세이흐 부르하네딘 사가르지의 묘이다. 이슬람교의 성인인 세이흐 부르하네딘 사가르지는 사마르칸트 외곽지역에서 태어났으며, 메카로 유학을 가서 이맘이 된 후 다시 사마르칸트로 선교의 임무를 띠고 돌아온다.
사마르칸트에서 이슬람을 크게 전파한 후 다시 중국으로 가서 선교를 계속하게 되며, 중국 황제의 큰 신임을 얻어 황제의 딸과 결혼도 한다. 중국 황제의 딸은 루하밧 묘에 남편과 함께 안장되어 있다. 맞은편의 구르에미르와 비교하면 너무 초라할 정도로 화려함이 없이 단순하다. 묘의 내부 또한 거의 관리가 되지 않아 허술하다. 하지만 어떤이들은 화려하지 않기 때문에 구르에미르보다 더 자연스럽고 정감이 간다는 사람들도 있다. '영혼을 가진 곳' 이라고 불리며, 무슬림들이 와서 기도를 드리고 가기도 한다.
5.샤히진다
아프라샵 언덕의 남쪽에 있는 사마르칸트 제일의 이슬람 성지이다. 이슬람 종교지도자, 순교자를 비롯하여 티무르 왕족 사람들의 영묘가 총길이 200미터, 폭 40미터의 규모의 일직선으로 길게 위치하고 있는 특별한 곳으로 지금도 순례를 위해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다. 각 영묘마다 그 장식의 다양함과 아름다움이 뛰어나서 방문객들의 눈길을 사로잡으며, 보는 방향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는 타일의 색채 또한 예술이다. 입구를 지나면 바로 '천국으로 가는 계단'이 보이며, 이 계단을 올라가면 영묘들이 줄지어 있다. '천국으로 가는 계단'은 오르내리면서 기도를 할 수 있도록 계단의 폭을 넓게 만들었다. 올라갈 때 세었던 계단의 수와 내려올 때 세었던 계단의 수가 같으면, 모든 죄가 용서되어 천국으로 갈 수 있다는 전설이 있으며, 만약 계단의 개수가 다르다면 그 숫자의 차이만큼 죄가 있다고 한다.
골목을 따라 맨 끝까지 들어가면 쿠샨 이븐 압바스의 영묘가 있다. 쿠샨 이븐 압바스의 묘는 4단으로 되어 있으며, 화려한 문양과 색채로 눈길을 사로 잡는다. 샤히진다는 '살아있는 왕'이라는 뜻으로 7세기 아랍의 침략 때 생겨난 전설이 근원이 되고 있다. 포교를 위해 사마르칸트를 찾은 예언자 무하마드의 사촌형인 쿠샨 이븐 압바스는 이곳에서 예배를 하던 중 조로아스터 교주에게 습격을 당해 목을 잘리고 만다. 그러나 그는 한치의 흔들림 없이 예배를 마치고는, 자신의 목을 깊은 우물에 넣어버리고는 사라졌다고 한다. 무슬림들은 그는 영원의 생명을 얻었으며, 이슬람이 위기에 처했을 때, 구원을 위해 그가 나타날 것이라고 굳게 믿고있다.
마지막 건물 앞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일반인들의 공동묘지로 갈 수 있다. 그 공동묘지 언덕에서 바라보는 샤히진다의 모습, 그리고 사마르칸트의 전경 또한 일품이다.
6.아프라샵 언덕
황량한 언덕에 간혹 마른 풀들만 듬성듬성 눈에 띈다. 현재는 전혀 쓸모없는 이곳이 13C 징기스칸의 정벌 전까지 사마르칸트의 마을은 원래 이 언덕 위에 있었다. 2800년 전 소그드인이 이 지역에 정착을 하여 성벽을 쌓고 건물을 건설하면서 도시가 탄생하였으며, 이후 알렉산더 대왕의 점령과 아랍 등의 지배에도 흔들림이 없이 중앙아시아의 중심 도시로써 성장을 하였으나, 징기스칸의 정벌로 도시전체가 폐허로 변해버렸다.
아프라샵은 1958년 한 목동이 우연히 이곳에서 땅을 파다 동전 및 옛 유물들이 발견되어 본격적으로 발굴을 시작하였다. 발굴 조사 결과에 따르면, 문화의 흔적이 11개 층으로 층층이 쌓여 있으며, 깊이는 20m, 면적은 219헥타르에 달한다고 한다.
당시의 많은 여행객과 학자가 남은 기록에 의하면 '마라칸다(사마르칸트의 옛 명칭)는 모든 도로가 포장이 되어져 있었고, 수도시설이 각 가정으로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실크로드의 오아시스로써 신비로운 물자와 상인들로 풍요로운 도시였던 것이다.
그러나 도시는 징기스칸의 침입으로 운명을 맞게 된다. 처음 징기스칸의 몽골군이 '마라칸다'를 침입하였을 때, 마라칸다는 요새처럼 튼튼한 성이 있어 징기스칸 군을 효율적으로 막을 수 있었다. 그런데 징기스칸은 금방 마라칸다의 약점을 알아내고 만다. 바로 외부에서 인위적으로 공급되는 급수 시스템을 파괴한 것이다. 생명에 필수적인 물이 끊기자 마라칸다는 더이상 저항을 못하고 성문을 열어주고 만다. 그 후 징기스칸은 마라칸다의 모든 관개시설을 파괴하고 주민들은 노예화시켜 도시를 완전히 황폐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 후 150년이 지나고 아미르 티무르가 이곳 남쪽 아래 지역을 제국의 수도로 삼고 대대적인 개발을 시작함으로써 현재의 사마르칸트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사마르칸트인들은 그동안 전설로 내려오던 위의 이야기가 아프라샵 언덕 발견 이후 사실로 확인되자 '징기스칸은 파괴자, 티무르는 창조자'라고 흔히 말한다. 언덕 북동쪽에는 성내의 터가 선명한 형태로 남아 있다. 유명한 '아프라샵 궁전의 벽화'도 이곳에서 발굴되었다. 아프라샵 언덕으로 가려면 하즈렛 히즈르 모스크 옆 또는 아프라샵 역사박물관 뒤쪽으로 오르면 갈 수가 있다.
아프로시압 박물관
■ 아프로시압 언덕에서 발굴된 출토품을 전시해 놓은 박물관으로, 알렉산더 대왕시대의 동전을 시작으로 조로아스터교의 제단과 우상 등 실크로드
중심지답게 다양한 문화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음
■ 전시물중 최대의 볼거리는 7세기 영주의 궁전에서 발견된 사절도로, 7C
바흐만왕의 즉위식에 사마르칸트를 방문한 외국 사절단이 모습을 그린 벽화
- 벽화에는 조우관(鳥羽冠)을 쓴 삼국시대 고구려 사신으로
추정되는 모습이 있어 삼국시대부터 우리나라와 우즈벡간 문화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음
7. 울루그벡 천문대의 터
아미르 티무르의 손자로 사마르칸트의 황금기를 지배했던 위대한 왕이자 학자였던 울루그벡의 천문대이다. 아프라샵 언덕에서 북동쪽으로 약 1km정도 가면 울루그벡의 동상이 보인다. 그 뒤 언덕에 천문대의 터와 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다. 현재는 천문대의 기초만 남아있는데, 이전에는 높이가 40m에 이르는 거대한 천문대였다고 한다.
1964년 지어진 박물관의 1층에는 울루그벡의 초상화와 그의 공적에 대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으며, 천정이 별자리 지도로 장식되어 있는 2층에는 천문학과 관련된 관측기구와 그때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사진과 미니어처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에서의 관측을 바탕으로 울루그벡은 항성시 1년간을 365일 6시간 10분 8초로 추측했다. 이는 오늘날의 정밀기기로 계산되어진 365일 6시간 9분 9.6초에서 오차는 1분도 채 되지 않는다. 망원경도 없는 당시의 기술로 어떻게 이렇게도 정확한 수치가 나올수 있었을까 놀랄 따름이다. 또 1,018개 별의 궤적을 기록했던 그의 천문표는 후에 콘스탄치노프에게 도망친 제자에 의해 출판되어 울루그벡의 이름을 널리 세계에 알려졌다. 그의 명성은 역사 속에서 전설로만 전해져오다가 1908년 러시아의 고고학자인 비아트킨 바실리에 의해 땅에 묻혀있던 천문대의 터가 발굴되면서 그 존재가 확실해졌다.
울루그벡이 지배했던 시대는 종교가 과학에 우선했다. 그래서 보수적인 이슬람 지도자들의 반발과 시기를 한몸에 받게 되었다. 그러던 중 그들은 울루그벡의 아들을 속여 자신의 아버지를 제거하도록 한다. 울루그벡은 자신의 아들이 보낸 자객에 의해 목이 잘리고 만다. 울루그벡이 죽자 바로 천문대도 파괴해버렸다. 그 후 이슬람은 과학과는 거리가 먼 소위 암흑통치를 하게 된다.
한편, 울루그벡의 천문표는 조선왕조 세종 때 회회력(이슬람 역법)으로 알려져 이순지, 장영실 등에 의해 '칠정산내외편' 등을 만드는 기초가 되어 조선의 역법을 발전시켰다.
1419-1429년. 울룩벡은 아미르 티무르 왕의 손자로 훌륭한 천문학자, 수학자, 철학자였습니다. 그는 레기스탄의 울룩벡 신학교와 천문대로만 유명한 것이 아니라 천문학교도 만들었습니다. 울룩벡이 세운 천문학교에서는 당대 유명한 학자들이 후학을 양성했습니다. 그 중에는 당시 사람들 플라톤에 버금간다고 칭송했던 울루그벡의 스승 가즈-자데 루데 루미(Qozi-Zoda Rumiy)와 유명한 수학자 지야시딘 잠쉬드 카쉬(Giyosiddin Jamshid Koshiy)를 비롯하여 울루그벡의 제자이며 프톨레마이오스라고 칭송받았던 알리-구스지(Ali-Kushchi)도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울르그백 천문대
■ 아미르 티무르 손자인 사마르칸트 왕조의 황금기를 지배했던 위대한 왕이자 학자였던 울르그벡의 천문대
※ 무하마드 울르그벡왕은
1394년에 출생, 40년간 통지한 군주이자 유명한 천문학자임. 시․역사․신학에 조예가 깊어 학문발전 번성기를 이룩했으나 과학발전에 반발하여
종교를 우선시하는 이슬람 자객에 의해 피살됨
■ 1428~1429년에 걸쳐 건설되었으며 당시에는 거대한 대리석으로 높이 40m의
관측 Dome이 있었으며 태양, 달, 행성의 고도를 정밀하게 측정하고 1,018개의 별의 궤적을 기록한 천문표가 작성됨
■
1908년 러시아 뱌트킨 고고학자에 의해 발견되었의며 현재 천문대는 기초와 6각형 천체관측기의 지하 부분만이 남아 있음
8.훗자 다니야르 묘
아프라샵 언덕 남쪽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훗자 다니야르의 무덤은 긴 터널형으로 되어있는 독특한 건축물로 20세기 재건출되었다. 훗자 다니야르는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무하마드의 사촌형인 쿠샨 이븐 압바스의 친구였으며, 중앙아시아 최초의 이슬람 교도였다는 전설과 코란 및 성경에 나오는 '다니엘'이었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결국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 등 3대 종교에서 언급이 되는 인물이다. 전설에 따르면, 훗자 다니야르의 시신 중 일부를 가지고 있으면 행복과 번영을 누릴수 있다고 믿고 있으며, 현재의 묘에는 아미르 티무르가 이란의 수즈라는 도시에서 가져온 팔과 다리뼈가 안장되어 있다고 한다. 또한 훗자 다니야르는 이슬람교의 위대한 성인이기 때문에 묘가 계속 길어지고 있다고 믿고 있으며, 현재 약 18미터에 이른다. 무슬림 순례객들은 묘의 가장자리를 짚으며 천천히 세바퀴 정도 돌면서 기도를 한다. 한편, 훗자 다니야르 무덤 아래에는 작은 샘터가 있으며, 사람들은 여기서 흐르는 샘물을 훗자 다니야르의 영혼이 깃든 소중한 성수로 여기며, 꼭 기도를 하며 한잔씩 한다.
한편, 영묘의 옆에는 100여년된 피스타치오 나무가 있는데, 원래는 오래 전 말라 죽었었는데, 1996년 러시아 정교회 대주교의 방문 이후 갑자기 살아나서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고 한다. 주민들은 다시 부활한 이 나무에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믿으며, 소원을 담은 리본을 나무에 매달곤 한다.
<아프로시압 궁전벽화> 3D영상실 개관 기념식 개최
4.1(수) 사마르칸트 아프로시압 박물관에서 <아프로시압 궁전벽화>의 3D영상 복원 및 영상실 개관 기념식이
개최되었습니다.
<아프로시압
궁전벽화>에는 7세기 중앙아시아 소그디아 왕국의 바르후만왕을 알현하는 각국 사절들이 묘사되어 있는데, 그중에 고구려 사신으로
보이는 두 명의 인물도 묘사되어 있어 한국과 우즈베키스탄에게는 양국의 오랜 교류를 증명하는 더욱 특별한 세계 문화
유산입니다.
이번 <아프로시압
궁전벽화>의 3D영상 복원과 영상실 개관은 우리 동북아역사재단의 지원으로 이루어졌으며, 영상은 5개 언어 (우즈벡어, 러시아어, 한국어,
영어, 프랑스어)로 지원됩니다.
아미르 티무르 왕의 손자 울루그벡이 만든 메드레세 (이슬람 신학교) 그 당시 가장 큰 교육시설 이었습니다. 종교 뿐만 아니라 수학, 천문학, 철학,화술 등의 과목을 개설하고 당시 가장 뒤어난 학자들이 교육을 담당하여 친란한 문화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울룩그벡 메드레세 건설 2세기 후에 쉐르도르 신학교와 틸라코리 사원이 건설되었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세 건물이 비슷해 보이지만 각각의 시대에 따른 겅축양식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17 세기에 들어 사마르칸트의 바하두르 영주는 울루그벡 메드레세 건너편에 쉐르 도르 메드레세를 건설합니다. 원래 이 자리에는 울룩벡이 만든 하나코가 있싰지만 지진으로 무너져버렸습니다. 영주는 쉐르도르를 중앙의 뜰은 2 층으로 된 방으로 둘러싸였고, 맞은편에 있는 울루그벡 메드레세의 모습을 본따 만들었습니다. 울루그벡 메드레세와 달리 사원은 없고 충 52 개의 방이 있습니다.
바하두르 영주는 과장의 북쪽에 시원 겸 신학교인 틸라코리 (금으로 꾸며진 곳)를 세웠습니다. 당시 도시에는 민바르 (종교지도자가 설교하는 높은 자리)가 있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예배를 드릴 수 있는 대사원이 없었습니다. (당시 비비-하늠은 붕괴되어 시원의 역할을 할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틸라코리는 신학교이면서예배를 드리는 사원의 역할도 맡았습니다. 이 건축물은 다른 건물의 모습을 모사하지 않고 독창적인 모습으로 만들어졌습니다.사원을 꾸민 기술은 군달 (금을 사용하여 벽에 부조기법으로 문양을 새기는 기술) 이라고 하는 데 벽면을 입체적으로 만들고 여러 색으로 칠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렇게 내부를 금으로 꾸몄기 때문에 틸라코리라고 합니다.
는 “왕의 무덤” 이라는 뜻으로 아미르 티무르가 그의 아들과 손자들이 안장되어 있는 영며입니다. 원래는 1403년 이란 원정에서 병사한 장소 무함마드 술탄(Muhammad Sultan)의 무덤을 만들라고 지시한 것이 더 나아가 일족의 묘가 되었습니다. 그 후 1405년 중국 원정 중에 오트라르 (O’trar: 현재 카착흐스탄에 있는 도시) 에서 급사한 티무르도 이 곳에 안장되었습니다.
은 가장 높은 귀부인이라는 뜻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비비하늠은 아미르 티무르가 가장 총애하던 사라이 물크하늠 부인이 왕을 위해 만들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1399년에서 1404년까지 아무르 티무르의 명령에 따라 만들어졌습니다. 비비하늠의 아름다움은 바로 중앙에 있는 모스크의 크고 푸른 돔입니다. 돔 지지대에는 알라에 대한 찬사의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뜰의 중앙에는 울루그벡이 세운 코란 경대가 나마있습니다. 비비하늠 사원의 건너편은 원래 사원과 함께 만들어지 신학교여습니다. 신학교의 뜰에는 비비하늠이 자신의 어머미 영묘를 만들었고 후에 자신도 그곳에 안장되었습니다.
바로 이 전설 때문에 그와 이 영묘는 ‘살아있는왕’이란 뜻의 샤흐진다가 되었습니다. 총길이 200미터, 폭 40미터의 규모를 자랑하는 샤흐진다는 ‘살아 있는 왕이라는 뜻입니다. 가장 처음 이곳에 만들어 진쿠삼이 븐아바즈의 영묘 (11세기) 때문에이런 이름을 갖게되었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쿠삼 이븐 아바즈는 메카의 시장이었으며 마흐메트의 사촌으로 이슬람의 선교사였습니다. 샤흐진다의 건물들은 112세기에서 20세기까지 만들어졌으며, 현재의 정문은 울루그벡이 1434-1435년에 만들고 자신의 2살 난아들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호자 다니에르(Khodja Daniyar)
아프로시욥 북쪽 외각에 시욥 (Siyob: 검은 물)강가에 위치합니다. 호자 다니에르로 들어간는 길은 시욥 강을 지나는 달리 바로 옆에 있습니다. 대문을 지나 옛날 모습이 남아있는 바위절벽과 강을 따라 돌아가면 언덕 위로 다니에르의 영묘가 보입니다. 다니엘은 성졍에도 나오는 인물로 유대교, 이슬람, 기독교의 세게 3 대 종교에서 존경받는 인물입니다. 다니엘은 기원진 603년 출생하였고 다비드 왕의 혈족관계 에 있는 귀족출신이라 합니다. 뛰어난 능력 덕분에 바빌론 왕이 지도자 세 명으로 임명했습니다. 노년에 수즈 (이란의 한 도시)로 이주하였고 기원전 532년에 숨을 거두어 왕의 무덤에 안장되었습니다. 다른 학설에 따르면 90세까지 살았다고도 합니다. 다니엘은 매우 날카로운 시선을 가진 심리학자이며 지혜로운 지도자이자 훌륭한 예언자였습니다. 그리스 알랙산더 대왕의 페르사아 제국의 침략, 예수의 출현 등 정확한에언 에언을 남겼기 때문에 전세게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구약에 그의 대한 언급이 있고, 유고, 유대교의 경전 등의 옛날 책에도 언급되었습니다.
뿡나무를 이용하여 전통적인 방식으로 중이를 만드는 것을 재현하는 공방. 종이를 만드는 기술은옛날 중국으로부터 실크로드를 통해 이 땅으로 전해졌습니다. 사마르칸트에서는 8세기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중이가 만들어졌습니다. 마 섬유와 뿡나무를 이용하여 만드는 사마르칸트의 종이는 내 구성이 높은데다가 비단처럼 부드럽고, 번집 없이 색을 선망하게 잘 흡수했습니다. 때문에 이곳에서 만든 종이는 일명 ‘비단 종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오랜 기간 동안 수출했는데 그 가치가 마치보석과도 같이 귀했습니다.
몇 년 전에 코니 길 (Koni Gil)라는 시골에서, 메로스 (meros:유산) 라는 수공업 단체의 회원들이옛날 전통을 그대로 살려 만든 종이를 세계에 선부였습니다. 이곳에서는 엿날 방식 그대로물레방아를 돌려 뿡나무로 종이를 만드는데, 한구의 제지방식과 놀랄 정도로 비슷합니다. 이 종이를 세밀화 화가들,엣날 책을 고치는 사람들이 사용합니다. 손님들이 이 공방을 방문해서 이 과정을 볼 수 있습을 뿐만 아니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가기 전에 미리 전화로 방문에 약을 하고 가는 것이 좋습니다. 시욥 바자르 앞 (샤히진다 방향)에서 ‘코니길’ (Koni Gil) 행 버스 118 번을 타고 종이 공장 (코고즈 자봇)에서 내려달라고 하면 거의 종점에 가까워졌을 때 세워줍니다. 버스를 타기 전에 꼭 코니길에 가는지 물어보고 타는 것이 좋습니다.
사마르칸트의 빵이 세상에서 아주 유명합니다. 사마르칸트의 빵은 아주 맛있었습니다. 사마르칸트 빵을 다른 시골에서 방문하는 손님들이 많이 사갑니다. 사마르칸트에 역사적인 아름다운 유적과 함께 빵도 있었습니다.
빵 만들기: 물, 소금, 밀가루로 만든 반족을 했습니다. 그 다음에 반족으로 뭔가 모양을 만듭니다. 그 다음에 40분 동안 요리합니다.
‘민족의 유산’ 이라는 뜻의 "엘 메로스"는 사마르칸트에서 가장 젊고 활력있는 극장입니다. 이 곳에서는 ‘유일한 영원의 순간’ 이라는 공연을 상연 합니다. 공연의 형식은 코스튬 – 퍼포먼스에 가깝습니다. 청동기 시대부터 현대 전통의상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의 특장을 반영한 찬란하고 화려한 의상들과 매력적인 음악, 할기찬 춤이 한데 어루러진 멋진 공연입니다. 모든 옷들은 확실한 고증을 통해 만들어졌습니다. 미리 예약해야 공연을 볼 수 있습니다. 관람료는 1인당 15달러지만 미리 예약한다면 좀 더 낮출 수 있습니다.
사마르칸트에 있는 대학교들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대학교는 사마르칸트 국립 외국어대학입니다. 그 대학교에서 많은 언어를 가르쳐 줍니다. 에를 들면 영어, 한국어, 독일어,불러, 아랍어 등 많은 언어를 공부할수 있습니다.
그 대학교는 3개의 건물로 되어있습니다.본관 건물 옆에는 다양한 지역에서 온 학생들을 위해 기숙사가 있습니다. 기숙사는 크고 너무 싸서 편합니다. 수업 시작하는 시간은 8시입니다. 수업은 3교시, 4교시에 끝납니다. 우리는 공부하고 있는 언어가 한국어입니다. 우리 대학교에는 많은 편의 시설이 있어서 공부하고 있는 언어가 한국어입니다. 우리 대학교에는 많은 편의 시설이 있어서 공부하기가 재미있습니다. 본관을 3층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본관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본관 2층으로 올라가면 코이카 사무실을 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많은 컴퓨터가 있슴니다.
거기에서 한국 드라마를 볼 수 있고, 사전에서 모르는 단어를 찿을 수 있고, 책을 빌릴 수도 있습니다.우리는 이 대학교에서 한국어 외에 영어도 배우고 있습니다. 이 대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이 너무 재미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