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르도뉴 여행 첫째 날 저희는 일 년 중 제일 바쁜 때가 사람들이 휴가를 떠나는 7월과 8월입니다. 그래서 우리 집 휴가 여행은 차일피일 미루다가 없거나 결심에 결심을 거듭한 끝에 때늦게 떠나기로 결정은 하지만 작은 일이라도 생길라치면 그것 때문에 결심을 변경 할 수도 있어서 떠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그런 중에도 친구와 약속을 하면은 꼭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 여행도 파리에서 사귄 홍은표 박사님과 무슨 얘기 끝에 여행 한번 같이하시죠. 하는 언약이 빌미가 되어서 계획 하게 되었지만 어쩌면 저질렀다는 표현이 더 가까울 것입니다. 약 한달 전 토요일 홍박사님 댁에 초대받아 방문한 그 자리에서 제의 하였고 그분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기 때문에 돌아오는 뚜쌍바캉스때 떠나자 했던 거지요. 프랑스 학교들은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겨울방학이 없는 대신에 2달 만에 한 번씩 일 주일 이나 이 주일을 바캉스 스콜래흐 또는 적은 방학이라 해서 쉽니다. 저로써는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얻은 것입니다. 어렵게 결심한 것을 번복할 위험도 제거했고 아들만 둘인 저희에겐 딸 있는 집이 그렇게 부러운데 이번 여행에 딸 둘과 동행 할 수 있으니 너무 행복 할 밖에요. 걍 내 딸이다 생각해버리면 더 예뻐 보이더라고요.ㅎㅎ 아침 일찍 출발하기로 약속하고 5시30분에 일어나서 준비하여 7시 전에 도착하여서 7시에는 출발하기로 하였지만 파리 외곽 순환도로에서 사고가 있는 바람에 30분 정도 늦게 도착하였고 어느 차로 출발 할 것인가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짐을 많이 실을 수 있는 제차로 정하고 거의 9시가 다되어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고속도로까지 빠져 나오는 길이 막혀서 약간은 짜증이 나기도 하련마는 이야기꽃을 피우다 보니 어느새 고속도로까지 나왔는데 약간 쌀쌀한 날씨에 구름이 해를 가려주어 운전 하는 데에 눈도 부시지 않아 좋았고 차는 막힘없이 달릴 수 있었습니다. 이야기꽃이 짜증을 제거해주는 효과도 있었지만 길을 잘못 들게도 하더군요. 오를레앙을 지날 때쯤에서 길을 바꾸어 타야 되는데 갈림길에서 미쳐 판단이 안서서 오던 길을 쭈욱 달렸고 아차 싶어 도로 중간에서 차를 되돌릴까 하였지만 여의치 않아서 조금은 멀지만 그냥 돌아서 가는 길을 따라 가기로 합의하여 프와티에 까지는 고속도로를 타고 이후 리무즈 까지는 국도를 이용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프랑스 고속도로 주변이나 국도변에는 차로 여행하는 사람들을 위해 넓은 잔디밭에 간단한 식탁과 화장실을 준비해두고 여행객들이 싸온 도시락을 까먹을 수 있도록 배려를 해놓았습니다. 꺅티에 흡뽀 Quactier Repot 라 하지요. 프와티에에서 리무즈를 잇는 국도 상의 이러한 곳에서 점심을 먹기로 하였습니다. 우리는 날씨도 춥고 해서 라면을 끓여먹었는데 어느 일류식당에서 먹는 것보다 더 맛있으며 분위기 또한 일류식당이 따라올 수 없는 풍미가 있었습니다. 우리 딸들에게 확인을 한 사항이니 이의는 안 받겠습니다. 프랑스 고속도로는 주변보다 지대가 낮아서 풍경을 바라보기가 힘들지만 국도나 지방도는 간간히 마주치는 시골 마을들과 함께 고속도로에 버금 갈 정도로 잘 닦여져 있을 뿐 아니라 한국에서는 어색하게만 느껴지던 서양 풍경화를 실제로 보여주는데 넓은 밭과 그사이에 박힌 숲이 한 폭의 그림이 되어 여행객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고 더해서 마음까지도 푸근하게 해줍니다. 제가 도르도뉴 지방을 자주 찾는 이유는 그곳에 한 지인이 사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희세씨 인데 아시는 분은 아실만 한 분으로 유럽에서 오랫동안 민주화 운동을 해오셨고 지금도 조국의 앞날을 위해 애쓰시는 분입니다. 5시경에 도착하여 잠깐 쉬었다가 저녁을 마당에서 숯불 바비큐로 했습니다. 열심히 숯불을 피우고 고기 구울 준비를 하는데 전화 오더라고요. 그런데 전화를 받으신 분이 “먼저 전화라도 하고 출발할 일이지…………몬티니악 호텔에 와 있다잖아” 밑도 끝도 없이 그러시는 것입니다. 사연인즉슨 몇 년 전에 부인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고 외롭게 사시는 할아버지를 안타깝게 지켜보던 손녀가 할아버지를 위해 인터넷에서 만남을 주선하는 사이트에 할아버지를 소개하는 글을 올려서 만나게 된 분으로 그 동안은 이 메일로만 교제를 해 오셨는데 연락도 없이 들이닥쳤다는 것입니다. 하여간에 저녁을 맛있게 먹고 그 다음날이 금요일로 금요일 아침에 싱싱한 생선이 뻬르고르에 온다고 내일 점심을 생선회로하자고 하셔서 우리 일행도 동의를 했더니 전화를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그 사람도 생선회는 먹어보지 않았지만 괜찮데………… 김밥은 먹어보았대………… 함께 해도 괜찮겠지?” 하시는데 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다음날 아침에 생선을 사고 그분을 모셔다가 점심을 함께하기로 하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둘째 날 어제저녁 계획 하였던 대로 아침에 시장엘 들려서 생선을 사고 손님을 모셔 왔습니다. 독일 분으로 첫인상이 참 좋아 보였습니다. 식사 중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두 분이 잘 통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자리를 피해드렸죠. 그리고 구경을 함께 하기로 하였는데 홍박사님께서 한 차로 움직이자고 하셔서 그렇게 하기로 하고 두 분을 뒷자리에 나란히 앉게 해서 많은 대화를 나누시도록 배려를 했습니다. 즉 두 분의 좋은 만남을 위해 봉사하기로 우리일행이 묵언 중에 합의 한 거지요. 그렇게 라스코 동굴로 향하였습니다. 파리로부터 남쪽으로 약500Km 떨어진 도르도뉴 지방은 약25000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흔적을 도처에 남겨 놓았는데 특히 약15000년 전쯤으로 추정되는 라스코의 한 동굴은 원시인들이 야생동물을 묘사한 훌륭한 미술품을 오늘날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유산으로 남겨 주었습니다. 야생 동물들을 묘사한 솜씨가 너무나 뛰어난데 왜 이러한 그림을 남겼는가에 대한 전문가들의 여러 가지 추정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지금도 생각나는 이론은 아마 주술적인 이유로 그들이 사냥을 떠나기 전에 동물을 잡는 과정에서 위험한 요소를 먼저 제거하고자 한 또는 용기를 얻고자 한 시도가 아니었을까? 하는 것인데 여기서 그 원시인들의 마음속에는 현실의 동물과 자신들이 그린 그림을 동일시하는 감정이입이 있어서 그림 속의 동물에게 창을 던져서 그 동물을 죽이면 현실에서 자신의 사냥감인 동물은 이미 자기가 잡은 것으로 여겨지므로 용기백배하여 사냥을 떠날 수 있었으리라는 이론으로 저는 여러 이론 중에 제일 그럴듯하게 여기며 지금까지 기억 하고 있습니다. 동굴에는 많은 동물들이 그려져 있으며 심지어는 겹쳐져서 그려진 것들도 발견되는데 한번 죽은 동물에게 또다시 창을 던지는 행위가 무의미하듯이 그림 속 동물도 똑같이 생각을 해서 사냥을 떠날 때마다 새로운 그림이 필요 했던 것이라 추정 하고 또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은 사제의 대접을 받았는데 그는 사냥을 나가는 수고가 면제되는 대신에 거주지에 남아서 그림을 그리는 업무가 주어졌기에 그려지는 동물이 더욱 사실적이며 심지어 혼까지도 표현하고 싶지 않았을까 할 정도로 정교하여 살아 움직일 것 같은 생생한 모습이 현대의 화가들을 능가할 정도인데 이에 비추어 볼 때 원시부터 오늘날까지 인류의 역사가 발전돼왔다고만 말 할 수 없다던 어느 책의 한 구절도 생각납니다. 감정이입은 현대인들에게도 흔히 있는 일로 미운 사람의 사진을 찢는 것으로 복수의 감정을 표하는 행위가 원시인들이 그림에 창을 던지는 행위와 동일하다고 봅니다. 이 동굴은 1940년에 발견되어 많은 사람들의 방문을 받다 보니 그림의 훼손이 심하여 프랑스 정부에서는 1963년에 폐쇄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동굴 소유주로써는 억울하지만 할 수 없지요. 중요한 인류문화 유산인데요. 주인으로써는 가만히 앉아서 주머니를 채워 주던 입장 수입을 억울 해하며 손을 놓고만 있을 수 없었던지 그 옆에 똑 같은 복제품을 만들기로 계획 할 때 화가였었던 이희세씨께서 그 작업에 동참함으로 도르도뉴 지방과 연을 맺었답니다. 밑그림을 그리고 동굴에서 그림이 시작되는데 그 첫 번째 그림을 완성했지만 주인이 복제품을 만들기로 하며 얻은 은행 돈을 다른 곳에 유용하므로 어수선해진 상황이 가족을 거느린 그분을 힘들게 하여 파리로 올라와 서점과 식당을 운영하시다가 은퇴하시고 당시에 사두었던 집에 정착하신 겁니다. 또한 동굴은 도에서 주관하여 그분이 예상한대로 10년에 걸쳐 완성되었는데 오늘날 많은 여행객들을 맞이하는 그곳입니다. 사람의 일이란 것을 모른다고 하는데 제 경우도 그렇습니다. 파리에 그림공부를 하러 왔다가 우연히 식당을 차리고 그 식당 앞을 지나가시던 분께서 식당 일에 대해 훈수를 해주시겠다고 들어오셔서 맺은 인연이 이희세씨 같은 훌륭한 분과 친하게 지내며 오늘날 이렇게 저를 도르도뉴 지방을 단골로 드나들게 하였습니다. 묘한 것이 인연이라고 우연히 만난 사람이 누구의 친구고 친척이고 하는 것을 이미 많은 분들이 경험 했을 것이기 때문에 저는 여기서 길게 논하지 않으렵니다. 여행하는 사람들을 많이 대할 때 또는 이렇게 내 자신이 여행을 할 때 마다 느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번 맺은 인연을 소중하게 간직하는 것도 큰 재산일 것 같습니다. 특히 저같이 누구와 친하고자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더욱 소중합니다. 동굴을 나와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11세기에 지어진 조그만 교회를 들렸습니다. 이 교회는 특이하게 미사를 드리기도 하지만 방어용 성곽으로 사용이 되었다는데 두꺼운 벽의 로마네스크 양식과 보조 기둥을 세우고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한 창문이 있는 고딕양식이 어우러진 모습이 초기 고딕양식이 아닐까 생각하게도 하였습니다. 교회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견고한 성곽이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는 사실을 웅변하고 있었습니다.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생각할 때마다 룩베송 감독의 잔다르크라는 영화를 생각나게 하는데 별로 잘 만든 것 같지 않은 영화에서 잔다르크의 기도와 영국교회의 기도 사이에서 당황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에서 룩베송 감독의 진가를 볼 수 있었습니다. 궁극적으로 종교는 국가를 초월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열심히 해외 선교를 하자던 사람들이 국가의 이익 앞에서 갑자기 애국자가 되고 더해서 가난한 나라 사람들을 무시하는 행위는 커다란 모순이 있는 거지요. 이러한 종교적 문제들은 오늘날만의 문제가 아니고 오래 된 사실임을 이 교회는 말하여 주고 있습니다. 독일에서 오신 손님은 호텔에 모셔다 드려서 쉬었다가 저녁식사를 같이 하기로 하였습니다. 두 분의 관계는 제가 더 이상 중계하지 않아도 여러분 스스로 상상이 가능 하리라 여깁니다.
셋째 날 아침을 9시에 먹고 잠시 마당에서 시간을 보낸 후 10시에 호텔에 들러서 독일에서 오신 여자 분을 모시고 사할라로 향했습니다. 천 년 전쯤에 형성 된 이 도시는 그때의 모습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어서 옛 정취에 흠뻑 젖을 수 있어서 좋습니다. 옛날 도시라 길들이 좁고 구획 정리가 안된 탓에 커다란 건물들이 자태를 뽐냅니다. 건물과 건물들이 이루어내는 하모니는 어느 화가도 흉내 낼 수 없을 자연스런 조형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와대신 얇고 널찍한 돌을 지붕에 인 그 모습이 신기합니다. 마을 한가운데 위치한 교회 건물 뒤쪽으로 가면 옛날 묘지가 그대로 남아 있는데 거기서 음악회 등을 한다더군요. 또한 이 도시는 8세기경에는 프랑스와 영국의 국경이 있었던 곳으로 100년 전쟁의 무대이기도 합니다. 사할라로부터 12Km 떨어진 해발250m 산성 도시 돔으로 향하였습니다. 이 도시는 영국과의 100년 전쟁으로 인하여 어수선하던 13세기에 세워지는데 높은 산 위에 자리잡고 있는 이유가 그 옛날에는 적군으로부터 방어의 목적이 있었겠지만 오늘날 그곳을 찾는 사람들은 높은 곳에서 주위를 조망하고자 찾아갑니다. 그만큼 주위 산세가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가 그곳을 찾은 때는 짙은 안개가 심하게 끼여서 안개 바다만을 보고 서둘러 내려와서 그곳에 갈 때마다 들르는 식당으로 갔습니다. 1헥타에 이를 정도로 넓은 대지를 가진 이 식당은 마당에 오리와 닭 등 가축을 키워 직접 요리를 한 음식이라서 더 맛있고 양까지 풍부하며 더해서 밖에 보이는 너른 마당이 잔디로 잘 가꾸어져서 입맛을 한층 돋우어줍니다. 그런가 하면 멀리 보이는 산들은 단풍으로 단장하고 우리의 식사를 도왔습니다. 그러니 식사시간이 3시간이 넘어가도 전혀 지루한 줄 모르고 지나갑니다. 식사 후에는 벌꿀을 파는 집에 들러서 벌꿀도 사고 꿀벌들에서 어떻게 벌꿀을 채취 하는지를 보여주기도 하므로 애들에게 보여 줄만하다 싶어 갔지만 비수기라서 그런지 문을 닫았더군요. 잠시 쉬었다가 6시경에 캄파니악을 향해 출발하였습니다. 그곳에는 프랑스 남자와 국제 결혼한 아내의 친구 시댁이 있는 곳으로 지금은 유산으로 받은 집이 있는 자그마한 마을입니다. 약 3시간 걸릴 길을 밤길에 안개 끼인 곳들이 있어서 약 30분을 초과 하여 도착을 했는데 밤이라 집 찾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교회 앞까지 가면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지나는 분에게 교회 가는 길을 물었더니 ““아 부와이에씨 집을 찾아 왔군요?’ 하면서 길을 알려 주더군요. 시골인심은 어느 나라든지 따뜻한 것 같습니다. 친구가 관리인을 시켜서 집에 난방을 따뜻하게 해놓았더군요. 시아버지께서 생전에 자식들을 위해 마련해 놓은 집으로 여행객들에게 빌려주기도 하고 자신들의 바캉스 때에 쉬러 오기도 합니다. 물론 저와 같이 친근한 사람에게는 언제든지 얼른 열쇠를 건네 주기도 합니다. 이 집을 시아버지께서 얼마나 잘 가꾸어 놓았는지…………벽이 두꺼운 돌집에 불란서 고가구로 장식을 해놓은 것이 지나가는 여행객들에게 빌려 주기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사실 우리가 예정했던 날보다 하루 일찍 움직였거든요. 왜 그랬을는지는 굳이 설명을 안 해도 될 것 같아 안 하겠습니다.
네째 날 Bonjour 좋은 아침이었습니다. 높은 고원지대에 위치한 한 때문인지 아침 안개가 자욱해서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리며 동네 산책을 하였습니다. 친구 시부모님 생전에 심심풀이로 가꾸시던 밭에 호두나무가 있어서 호두가 많이 떨어졌을 거라고 해서 호도를 주우러 갔었지만 호도 철이 많이 지난 탓인지 호도는 그렇게 많이 남아있지 않았지만 오랜만에 대하는 시골 풍경이 좋았습니다. 안개가 많이 걷히기에 계획 하였던 대로 약90Km 떨어진 미요교를 찾아갔습니다. 따른느 계곡을 잇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다리인데 343m로 에펠탑 보다 약20m가 더 높지요. 2 460 m길이의 이 다리를 7개의 교각이 지탱을 하는데 제일 높은 교각은 무려 588m에 달합니다. 이 다리의 넓이가 32m인데 교각들이 한가운데 자리를 하고 좌우로 상 하행 차선이 있습니다. 그리고 교각과 상판을 잇는 철선이 여러 개의 삼각형을 이루며 장관을 연출합니다. 여기에서 최고의 기술은 예술과 통하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미요교를 찾아갈 때도 75번 고속도로를 타고 가는 쉬운 길을 버리고 미요시까지가서 어렵게 전망대를 찾아갔는데 돌아 올 때도 어려운길을 찾아 나서는 바람에 어딘지도 모르는 마을을 방문 하게 되었습니다. 커다란 돌산절벽에 붙여서 건축을 한 모양이 신기하여 차를 세우고 그 높다란 곳에 자리 잡은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았습니다. 우리처럼 지나가던 여행객들이 꽤있는지 여행객들을 위한 시설로 화장실 또는 식당 기념품가게가 눈에 띄기도 하였습니다. 특별히 눈에 띄는 기념물은 없었지만 그곳에 흔한 돌들을 이용해 지은 그 마을 집들이 신기해서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하다 보니 2시간이 지났더라고요.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프고~~~ 우여곡절 끝에 점심은 높다란 주차장 한 귀퉁이에 있는 잔디밭에 자리를 잡았는데 우아한 실내는커녕 식탁도 의자도 없는, 그저 잔디밭 귀퉁이에 털썩 주저앉았지만 눈앞에 펼쳐진 파노라마는 오히려 일류식당의 필수품처럼 여겨지는 그러한 것들이 귀잖게 느껴질 만큼 아름다웠습니다. 미요교의 7개 교각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으로 각을 잡아 자리 잡고 하는 식사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이글을 읽는 여러분이 상상할 수 있을 것이므로 사족은 줄입니다. 식사시간이 꽤나 길어지는 바람에 파리로 올라가는 길이 만만치 안을 것 같아 네비게이션을 작동시키면서 파리로 돌아 왔습니다.
PS. 평소에 여행다운 여행은 무얼까? 하는 의문을 품고 살아오는데 좀처럼 풀 수 없을 것 같은 난제 이었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약간은 의문을 해결 했다는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좋은 여행이었다는 생각이 되는 여행이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내경험을 나누든지 또는 동행 해 줄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