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당나라 건국 황제 이연(李淵, 566년∼635년)
중국 당나라(唐)의 건국자이자, 초대 황제. 휘는 연(淵). (조상은) 농서 성기(成紀) 출신으로, 농서 적도나 거록군 출신이라고도 한다. 자는 숙덕(叔德).
당나라 황실의 계보를 따지면 농서 이씨인 당황실의 시조는 춘추전국시대 유명한 사상가 노자이며 이후 전국시대 이신, 한나라의 명장 이광, 이릉 등을 조상으로 두고 있다. 이후 당황실은 오호십육국시대 서량의 태조 흥성제의 8세손이 당고조 이연이 된다고 자처했다. 다만 자신이 직접 나서 역사왜곡을 즐겨했던 당태종 이세민의 행적이나 신당서 등에 붙은 후세의 가탁을 따져보면 농서 이씨 족보의 모든 것이 다 맞는다고는 할 수 없다. 당나라 황실의 생물학적 혈통에 대해선 여러 주장이 있는데 선비화한족설, 한화선비족설, 호한혼혈설 등이 있다. 설들의 출처는 진인각(陳寅恪), 장경(張競), 요미원(姚薇元) 등이다.
그런데 수당의 황실이 본디 소속되어 있던 무천진 군벌, 소위 관롱집단(關隴集團)이라 불렸던 세력은 북위 효문제의 적극적인 한화정책 이래 선비족이길 포기하고, 100년간 한족의 말과 풍습을 쓰며 한족과 혼인하고 살았던 집단이다. 그리고 당황실에서 고조, 태종, 고종의 어머니가 선비족인 것은 확실하나 부계는 의문이다. 집안 스스로가 옛 한족 귀족의 후예를 자처했고, 다른 순수 선비족 가문들과 다르게 한족이 확실했던 사람들과도 연관이 깊었다. 이런 식이라 이들은 사실상 자타공인 중국인 귀족이었으므로 생물학적 혈통 같은 건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당나라 황실의 공식 입장은 자신들이 한족 왕조의 후예라는 것이었고, 한족 문벌귀족들도 거기에 별다른 반감을 보이지 않았다. 예를 들면 당태종 시기 법림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황제가 말하기를 '짐의 근본은 노자에서 나왔으니 주나라의 은혜를 입고 후손을 이어서 농서에서 일어났노라.'라고 하셨다. 나 법림이 듣기에 탁발씨가 존귀해지니 이씨를 자칭했다. 폐하가 이씨인데 이는 곧 탁발씨의 핏줄이며, 농서의 핏줄이 아니다."라고 한 바 있는데, 당태종에게 죽을 뻔했다(...). 오늘날 당나라 황실의 혈통이 선비족이라는 점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데는 대개 수당의 황실이 한족이 아니므로 원나라, 청나라와 유사한 이민족 왕조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중국 혹은 한족을 깎아내리려는 의도가 있다.
어쨌거나 자신들은 한족의 귀족 출신이라고 자부했으니 그 위세나 자부심이 대단했다. 무덕 3년, 고조는 일찍이 상서우복야 배적에게 이르길,
우리 이씨는 예전에 농서지방에서 귀갑과 보옥을 상당수 소유할 정도로 부유했다. 할아버지 대에 이르러 제왕과 인척이 되었고, 내가 의병을 일으키자 사방에서 구름처럼 모여들어 수개월 지나지 않아 천자에 올랐다. 이전 시대의 황제로 말하자면 대다수는 미천한 출신들로 군대를 지휘하고 진형을 포진시키느라 고생하면서 결코 안심하고 살지 못했다. 공은 대대로 녹을 받는 명가로 회복했고, 지위가 매우 높고 중요한 직무를 담당하는 관직을 지냈는데 어찌 고작 문서 담당 관리 출신인 소하, 조참과 같을 수 있겠는가? 오직 나와 공만이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선현들에게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개국군주씩이나 되는 당고조 이연과, 그 절친인 배적이 서로 모여 옛날 황제들은 가문이 구렸던 인간들뿐이고, 그런 사람들을 도왔던 소하나 조참 같은 사람들은 다들 신분도 천한 잡것에 불과하니 자기들 정도는 되어야 후세에 이름이 남을 거라고 자화자찬하는 황당한 장면이다. 황제부터가 이러는 판이니, 다른 신하들은 말할 것도 없다.
창업한 군주와 신하 모두 귀족으로 하, 은, 주 3대 이후 모든 왕조는 우리 당나라에 미치지 못한다. 고조는 팔주국 당공의 손자이며, 북주의 명의와 수나라의 원진 두 황후의 외척으로 북주 태사 두의의 딸과 결혼하여 북주 태조의 사위가 되었다. 재상 소우, 진숙달은 양나라와 진나라 제왕의 아들이었고, 배구, 우문사급은 북주 태사와 수나라의 부마도위였으며, 양공인, 보덕이, 두항은 이전 왕조 사보의 후손이었다. 배적, 당검, 장손순덕, 굴돌통, 유정회, 두궤, 두종, 시소, 은개산, 이정 등은 모두 귀족의 후예였다. 한고조 유방, 소하, 조참, 한신, 팽월의 가문들에 비하면 어찌 가문의 등급으로 말할 수 있겠는가!
소면(蘇冕)
거의 전설적 존재인 삼황오제로부터 정통성이 이어지는 하나라와 상나라, 주나라에 이르는 3대 왕조만이 그나마 자기들 당나라 황실에 비빌 만하고, 춘추전국시대, 진나라, 한나라, 위, 촉, 오, 위진남북조시대, 수나라 등은 감히 언급할 필요도 없다는 모습이다. 그러면서 황실뿐만 아니라 조정에서 중책을 맡았던 개국공신들의 가문 역시 대단한 귀족의 가문이었다고 추켜세우면서, 뜬금없이 가만히 있던 유방을 비롯하여 소하, 조참, 한신, 팽월 등은 여기에 감히 댈 수도 없는 천한 것들이라고 언급한다.
관롱집단은 측천무후나 당현종 때 타격을 받아 위세가 위축되기도 하나, 귀족정치라는 큰 틀은 당나라가 이어지는 동안 큰 변화가 없었다. 막연히 생각하기에 자유롭고 호방하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이미지가 당나라에 있긴 하지만, 실제로 당나라는 귀족 중심의 나라였다.
가령 당나라의 국자학은 3품관 이상의 자제, 태학은 5품관 이상, 사문학은 7품관 이상의 자제가 배우도록 규정되어, 부모의 관직에 따라 교육의 기회도 달랐다. 당나라 중후반기가 되자 귀족 출신과 과거로 합격한 진사 출신의 관료들이 맞붙은 우이당쟁(牛李黨爭)이 발생했지만 “금수저에 발끈하고 나선 명문이 아닌 집안들”이라는 것도 사실 일반 대중의 입장에서 보면 금수저이기는 매한가지였다. 이런 귀족 출신의 당나라 황실은 아이러니하게도 후일 일개 머슴 출신이었던 주전충에 의해 씨도 안 남기고 멸족 당하게 된다.
8세에 북주의 안주총관(安州總管)이었던 아버지 이병이 죽자, 당국공(唐國公)의 자리를 계승했다. 수문제의 아내인 독고 황후가 작은 이모로, 수양제 양광이 이종사촌이었다. 양제 때는 태원유수(太原留守)로 있었고, 이에 따라 훗날 태원은 왕조의 개창지로서 당나라가 존속하는 동안 북도(北都)로 불리게 된다.
아버지 이병은 이후에 당 세조로 추존되었다. 태조가 흔히 건국자들에게 주어지는 묘호인데도 불구하고 남북조시대 서위의 재상이었던 이병의 아버지이자 이연 본인의 할아버지인 이호가 당 태조로 추존되었다. 초대 당국공이었기 때문.
617년, 수양제의 폭정이 극에 달하면서 반란이 중국 대륙 각지에서 터졌고, 이에 이연 역시 반란에 가담했다. 장안으로 쳐들어간 이연은 양제를 폐위하고, 수나라 최후의 황제인 황태손 양유(수공제)를 옹립하여 가월(假鉞)의 칭호 및 구석(九錫)을 하사받은 후 사지절(使持節) 겸 대도독내외제군사(大都督內外諸軍事) 및 대승상(大丞相), 당왕(唐王)에 봉해져 모든 권한을 손에 쥐었다.
이후 618년 3월 양제가 우문화급에게 시해되고 5월에 그 소식이 장안에 이르자 6월 선양을 받아 당나라를 건국하고, 연호를 무덕(武德)이라 했다.
후에 당태종이 되는 진왕(秦王) 이세민은 사방에 퍼진 반란군을 백전백승으로 토벌했고, 이에 천책상장이란 별호를 하사받았다. 하지만 황태자는 맏이 이건성(李建成)이었다. 이세민이 당나라에 있어 차지하는 위상으로 봤을 때 이는 분명 문제가 있었다. 이세민의 황제 등극 후 본인의 공을 과장했다고는 하지만 개국공신으로서 이세민의 공은 분명히 높았으며, 아무리 이건성이 황태자였고 이연의 근거지인 태원을 사수함으로써 당의 통일에 이바지했긴 하지만 눈에 보이는 화려한 전공에 묻힐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이건성이 유교적 장자로 황태자가 되었음에도 이세민이 그정도 위세를 떨친 건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건성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줄 생각이었다면 어느 정도 교통정리를 했어야 했는데 고조는 정작 이세민을 멀리하면서도 확실하게 쳐내지 못했고 결국 626년 현무문의 변이 일어나면서 4남인 제왕(齊王) 이원길(李元吉)과 태자가 살해당하자 3일 후 황태자에 이세민을 봉하고, 2개월 뒤 양위하여 태상황이 되었다. 주색을 좋아했고, 그 때문에 술친구인 배적(裴寂)을 우대했으며, 개국공신 유문정을 처형한 것을 들어 창업자의 재질이 아니었다는 말도 있으나 당태종의 왜곡이란 말도 있다. 기록에 따르면 제위에 있을 때 이세민을 의심했고, 특히 후궁 장첩여와 윤덕비의 참소에 넘어가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고 한다.
635년 태상황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0세.
묘호는 고조(高祖), 시호는 신요대성대광효황제(神堯大聖大光孝皇帝)로 줄여서 성황제(聖皇帝)라고도 부르며, 능호는 헌릉(憲陵)이다.
슬하에 22남 19녀를 두었다. 특히 3녀 평양공주(平陽公主) 이수녕(李秀寧, 596년∼623년)은 정비인 태목황후(太穆皇后) 두씨(竇氏)의 유일한 딸이었다. 어머니도 여장부로 이름이 높았다. 수문제의 독고 황후, 훗날의 측천무후 등을 보면 수당 왕조는 대대로 쥐어사는 남편들이었던 듯하다. 평양공주가 시소(柴紹)와 혼인한 후 아버지의 반란에 가담하였다. 평양공주는 갑옷을 입고 낭자군(娘子軍)이라 불린 군대 3만을 이끌고 직접 싸웠으며, 호현과 함곡관에서 수나라 군을 크게 격파했다. 후에도 낭자군은 이세민의 북벌에서 활약했다. 평양공주는 아들 시영무(柴令武)를 두었고, 다른 아들을 낳다가 27살에 죽었다. 고조는 3살 때 죽은 위나라 명제 조예의 장녀 평원공주 조숙(曹淑)에게 의(義)라는 시호를 붙인 이래(그래서 ‘평원의공주’라고 부름) 2번째로 평양공주에게 소(昭)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래서 사서에서는 평양공주를 가리켜 봉호와 시호를 합쳐 ‘평양소공주(平陽昭公主)’라 부른다. 그리고 개국공신의 예로 군대를 동원하여 장사를 치렀다. 여동생 동안공주(同安公主)의 손녀 왕씨는 훗날 당고종의 황후가 되었으나, 측천무후에 밀려나 폐위되었다.